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3)화 (273/340)

(273)

랑소와 공화국군의 회군은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직선거리 20km 이동했습니다.”

“사흘 뒤면 텐즈 강에 도착합니다.”

“보고! 4사단이 이물과의 전장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후방 부대는 밀려오는 이물들을 막느라 국경을 제대로 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미 국경을 넘어온 부대도 총사령관 브노아가 이끌던 1사단을 제외하면, 대부분 랑소와 쪽에 더 가까웠다.

다니엘과 에릭은 각 장군, 의원들과 연락할 때마다 공화국 수호라는 목적을 강조했다.

“본진이 털릴 판에 남의 땅을 빼앗아서 뭣 합니까?”

“언젠가 반드시 제국의 농노들을 해방시킬 겁니다. 전 그러기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피를 흘려도 해방시킬 수 없다면 피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이물을 보냈습니다. 이를 방어하는 것 역시 전쟁의 일부입니다.”

이는 다니엘이 브노아를 밀어내고 군권을 잡은 일을 정당화시키는 한편, 에릭의 진정한 목적을 숨기는 방패였다.

‘공화국 안에 침식자가 우글거리는 상황이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낭패를 봐.’

에릭은 선인이었지만, 호인은 아니었다.

그는 뭐든지 시키는 대로 착착 해내며 윗사람들에게 착하다고 귀여움받는 의원이 아니었다.

“지금 여러분의 가족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정교육 잘못 받은 금배지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는 대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강경해 ‘보이고’ 싶고, 공화국 체제를 수호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진 듯 ‘보이고’ 싶은 개자식들의 지지율을 위해서입니다!”

“이 개죽음의 굴레를 끊어야만 합니다! 지금 끊지 않으면, 다음에는 나와 내 가족이 그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겁니다.”

그는 수백 년을 이어온 도로이센과의 전쟁이 아무 의미도 없고, 그 본질은 의원들이 지지율을 위해 국민을 소모하는 선동이며, 그건 공화국의 정치인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라고 광장에서 고래고래 외쳤던 이단아였다.

관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선지자였고, 국민의, 국민을 위해, 국민에 의해 싸우겠다고 맹세한 싸움꾼이었다.

만약 그가 광명신의 축복을 먼저 받지 않았다면, 아몬신의 축복을 받았을 것이었다.

에릭은 말로 만들어진 송곳니를 갈며 기다렸다.

자료를 정리하고, 남몰래 브노아 장군의 유족을 만나고, 거물급 의원을 만나 공화국의 미래를 논의했다.

모든 사단이 공화국 안으로 회군하고, 모든 이물이 그렇게 되어 마땅한 꼴을 당하며, 일련의 사태를 정리하기 위해 의원들이 모일 때까지.

“안녕하십니까. 외교 위원회 소속 에릭 의원입니다. 금해 제국을 상대로 치렀던 원정에 전시 외교를 위해 동행했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하려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에릭의 목소리는 수려한 외견과 어울리지 않게 서늘했다.

몇몇 의원은 내심 환호성을 내질렀고, 몇몇 의원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근엄하게 호통쳤다.

“에릭 의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보고서에 따르면 제국의 망나니, 황형 발렌시아누스와 몇 번이나 밀회했다더군.”

“이것이 이적 행위, 나아가 매국 행위임을 모르는 건가?”

“아예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잖는가?”

“에릭 의원이 반전파인 건 알았지만, 의회에서 결정된 사안은 성실히 따라야겠지.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만민 평등이고, 그게 우리의 공화국이며, 저 사악한 솔레타라스와 다른 점 아닌가? 의원이 반대한 전쟁이라 해서 대의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닐 텐데?”

에릭은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대의?

대의만큼 조심해야 하는 게 없었다.

솔레타라스 제국은 취지라는 게 없어서 문제지만, 랑소와 공화국에는 취지만 좋으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아서 문제였다.

“10만 대군을 동원했는데, 제국의 농노들을 단 한 명도 해방시키지 못했군. 왜 군대의 발목만을 잡았지?”

“에릭 의원! 대답하시오!”

“지금 본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거요?”

‘어떠한 취지를 위해 어떠한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 정책으로 취지를 이행할 수 없다면, 그건 정책이 잘못된 거거든.’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만나 더더욱 확고해진 생각이었다.

입에 발린 말을 위해 돈을 쓸 수는 있었다.

인간은 빵만 먹고 살 수 없었다.

가치나 이념 역시 사회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입에 발린 말을 위해 피를 흘린다면, 대영주들의 자존심 때문에 기나긴 전쟁을 일으키는 솔레타라스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에릭은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의원님들. 별도 첨부된 서류를 읽어 주십시오.”

“지금 장난하는-.”

“잠깐, 이거 보게!”

“…….”

몇몇 의원들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건 랑소와의 장군이자 뛰어난 군인이었던 브노아가, 어떻게 침식자 세력과 영합하게 되었는지 적힌 보고서입니다. 출처는 하단에 표기하였으나, 대부분 본인의 자필 일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교회 사제가 들어와 성물 법전을 들이밀었다.

에릭은 그 법전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는 광명신과 공화국 앞에서 지금부터 말할 내용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선서합니다.”

은은한 신성력이 피어오르고, 에릭의 머리 위에서 고리처럼 모여들었다.

지금부터 거짓을 말하면 신을 농락한 죄로 불타 죽게 된다는 뜻이었다.

랑소와 의원들이 어떻게든 피하려 하는 서약이었다.

여기저기서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화국에 숨어든 침식자 세력은 어떠한 의식을 위해 막대한 죽음을 원했고, 이를 위해 의회를 충동질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브노아 장군은 가족을 인질로 잡힌 상태였고, 전쟁 보고서에서 보았듯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면전을 고수했습니다. 제국 농노들의 피가 아니라면 공화국 병사들의 피라도 흘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의원들은 저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아챘다.

“막아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린 다 끝이에요!”

“젠장!”

침식자 세력이 숨어든 것도 숨어든 것이지만, 이 논리대로라면 주전파는 모두 침식자 아니면 침식자에게 속아 넘어간 바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부르짖은 대의는 웃음거리가 되고, 대의를 주춧돌 삼은 권위 역시 웃음거리가 된다.

그리고 국민은 똑똑한 악당을 뽑아줄지언정 멍청한 바보를 뽑아주지는 않는다.

“의원 지금…… 크윽!”

그러나 에릭은 신 앞에 맹세했다.

교권이 무척 강력한 랑소와에서, 경전에 서약한 의원의 발언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건 해방 전쟁이 아니라, 농락 전쟁입니다!”

랑소와의 의원들은 타국 귀족들과 달리 이종족 혼혈의 초인이 아니었다.

그들을 의원으로 만들어 준 건 사람들의 지지에서 나오는 권위였다.

그 권위가 지금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 순간 그들은 의원으로서의 생명을 박탈당했다.

“에릭 의워어어어언!”

“이제라도 올바르게 고쳐 갑시다!”

본래라면 아무리 침식자가 있다 한들, 의원들 전체를 상대로 싸움이라도 걸듯 폭탄을 터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 역시 발렌시아누스와 뒷거래를 했고, 만민 평등의 가치를 위해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의원 중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었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쳐서는 안 된다.’

‘침식자와 영합해서는 안 된다.’

그날.

무수한 의원이 비명을 지르고, 교회 병사들과 전투 사제들이 의회로 달려오고, 미리 말을 맞췄던 의원들만이 흐뭇하게 웃던 그날.

‘제국과의 우호를 위한 성직자 파견 및 성물 공유 연구 협약 제안’이 남몰래 통과되었다.

* * *

비공정 니벨룽겐이 상공 2km를 부유했다.

함교 유리창 밖으로 구름과 태양이 올려다보이고, 저 아래 크고 작은 마을들이 내려다보였다.

이 높이에서도 겨울철 높은 구름은 까마득하게 보였다.

내가 약간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마커스가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더 올라가면 난기류가 심해서 비행이 힘듭니다. 아주 높이 올라가면 난기류 자체는 잦아든다고 하지만, 그 높이에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제대로 날 수가 없더군요.”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도 섬광 비행으로 높게 올라가시면 이상하게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잖니. 그쪽에 공기가 부족한 게 아닐까 싶단다.”

“따로 짊어지고 올라갈 수도 없고. 곤란하게 되었군.”

“공기를 짊어진다, 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마커스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진짜로 뭔가 만들 듯해서 약간 무서웠다.

“아. 이제 슬슬 중부에 들어섰군.”

이 높이에서 봐도 끝도 없는 밀밭이 펼쳐졌다.

자잘한 마을은 순식간에 뒤로 사라지고, 중간중간 섬처럼 솟은 울창한 숲도 빠르게 사라졌다.

“어쩐지 대단한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텐티아 경이 어딘가 있을 그녀의 고향을 찾으려는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니 웃었다.

“다음에는 폐하랑 같이 타 봐야겠군. 마커스. 이것 참 마음에 드는군. 미친 듯한 유지비만 아니면 더 마음에 들 것 같은데.”

그러자 예상치도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정비 쪽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운용 자체의 효율을 올릴 방법은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다만…….”

“다만?”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전폭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마커스가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난 어쩐지 불길해지는 감각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때 세레라지에가 음산하게 웃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치리리링!

돌로 된 사슬이 내 발목을 휘감았고, 난 일어서려던 기세 그대로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아즈의 파편이 필요하잖니.”

“약간만, 아주 약간만 채취해 가겠습니다.”

로브를 걸친 세레라지에의 제자들과 백의를 입은 마커스의 조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하.”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 * *

“이런 괘씸한 자들을 보았나? 제국의 대공이자 짐의 친지를 그렇게 대할 줄이야.”

“주기적으로 뽑아주는 게 좋다고는 하지만, 몹시 따끔거렸사옵니다. 그래도 연구가 잘 진행되어 더 쉽게 날 수 있게 되면, 폐하와 함께 날고 싶사옵니다.”

제이릴리스는 날 본궁 응접실로 불러들여 보고받았다.

집무실이 아닌 만큼, 정식 보고보다는 잡담을 나누는 자리에 가까웠고, 그렇다고 술이 나오는 자리는 아니었다.

검푸른 바닥과 천장, 남색 커튼으로 마감한 방은 밤하늘 같았고, 별빛 같은 샹들리에는 별 같았다.

그러니 그 별들 아래, 백발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나의 황제는, 누가 뭐래도 이 세상의 중심인 태양이겠지.

내 말을 들은 제이릴리스가 낭랑하게 웃었다.

“그대는 정말 듣는 황제 기분 좋게 해주는 법을 알고 있어. 그래. 짐도 듣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몇 가지 이야기해주겠노라.”

“즐겁게 듣겠사옵니다. 폐하.”

그녀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유감스럽게도 그리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니라.”

“예?”

“으음. 그대가 서부에 가 있던 동안 북동부 백작령 하나가 붕괴할 뻔했다. 마경 셋이 폭주했고, 15만 명이 죽었으며, 수십만의 유민이 발생했지.”

난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타국인 10만 명 때문에 시간을 쓰고 있던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당장 와이번핏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제이릴리스가 큭, 하고 웃었다.

“다행히 카리오사 공작이 원군을 보냈고, 성자 마테오스가 친정해 마경을 닫았다. 그러나 유민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지.”

“아.”

이미 끝난 일이었구나.

아니, 끝난 일이 아니다.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제이릴리스와 내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긴장감을 다잡자니, 제이릴리스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씩 웃었다.

“따라서 만조백관과 논의해본 결과, 솔레타라온을 중축하기로 했노라. 모든 방향으로 확장할 생각이니, 상아탑 자치구도 더 큰 방벽 안으로 들어오게 되겠지.”

본래 도시라는 게 그렇게 커지는 법이니, 딱히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는 길에 보니 성 바깥쪽에도 횃불이 켜져 있던 것이로군요. 몰랐사옵니다.”

“중구난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니라. 도시 계획을 체계적으로 세우기 위해 유의하고 있나니.”

“건설 길드들이 축배를 들고 있겠사옵니다.”

“원한다면 옆구리 좀 찔러도 좋으니라.”

“예?”

황제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나지막한 한숨이 내쉬는 숨에 걸렸다.

“첨언이 쓸데없이 길었구나. 괜히 긴장하게 해 미안하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 그랬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어려 있었다.

“짐과 함께 날고 싶다, 라. 아주 반가운 말이다. 그래. 언제나 아등바등하는 듯해 가련했건만, 약간은 여유를 찾은 듯하기도 하구나.”

“…….”

“그대 혼자만 분투하고 있는 게 아니니, 그래도 된다. 그래. 그 웃음이 보기 좋다고 말하고 싶었노라.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웃어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제야 마음 편하게 미소 지었다.

“그,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앞의 말은 분위기를 조절해 주시옵소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사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거울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웃음이 보기 좋았다는 건지 확인하려던 찰나, 제이릴리스가 시녀를 불렀다.

“발렌 대공에게 줄 선물을 가져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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