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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4)화 (274/340)

(274)

“예. 폐하. 지금 집무실에서 가져오겠사옵니다.”

“아, 짐이 그곳에 가져다 놓으라 했었군. 그럼 되었다. 짐이 가겠노라.”

우리는 응접실에서 제이릴리스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낮에는 온갖 관료들로 북적이던 집무실도 이 시간에는 조용했다.

오늘이 정확히 며칠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말이나 새해일 테니 다들 일찍 퇴근한 듯했다.

고급 초와 마도구 수정구가 은은한 불빛을 자아내고,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수도의 전경이 내려다보았다.

환한 불빛들이 대로를 따라 늘어서 있었고, 잘 차려입은 남녀가 눈을 맞으며 손에 손을 잡은 채로 거리를 나다녔다.

이 거리라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환한 불빛이 늘어선 광경을 무척 신기해하는 듯했다.

인파가 저렇게 몰렸으면 치안감들은 소매치기를 잡기 위해 바싹 긴장하고 있겠지.

아, 저 멋진 광경을 보며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끔찍한 직업병이다.

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어 잡념을 떨치고 물었다.

“저건…… 가로등이옵니까?”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째 좀 볼 만 하느냐? 낮에 빛을 모았다 밤에 뿜는 방식이니라. 약간이지만 침식의 기운을 내쫓는 힘도 있지.”

나른하고도 흡족한 목소리였다.

“이제 밤의 어둠도 짐의 신민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지 못할 것이니라.”

나는 환하게 웃으며 감탄했다.

“저런 걸 해낼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폐하뿐일 것이옵니다.”

“하하. 그래. 물론 그럴 것이야.”

제이릴리스가 유쾌하니 답하며, 집무실 책상 아래에서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를 꺼냈다.

그 순간 직전의 호탕함이 연기처럼 사라졌고, 그녀의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떨림이 어렸다.

“미리 말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짐이 만든 건 아니니라. 짐도 이런 마법은 처음이었지. 상아탑 생조 학파와 황궁 마도 공방 마법사, 세레라지에 대공이 쓴 논문의 내용도 빌렸노라.”

“그들 모두가 폐하의 신민들이니, 그들을 부려 만든 모든 게 폐하의 업적이옵니다.”

난 평소처럼 답했고, 제이릴리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

나는 지난 40년간 통했던 대답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질겁했고, 방금 그녀가 한 말을 다시 한번 분석했다.

그제야 내가 어떤 부분을 놓쳤는지 알아챘다.

“또한, 폐하께서 저를 위해 마음을 써 주셨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할 뿐이옵니다.”

내심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했다.

혹시 이게 아니라면, 자의식 과잉이라며 뺨을 얻어맞고 목이 돌아갈 수도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회귀 전 제이릴리스의 측근임을 자처하던 자들 몇몇이 실제로 그렇게 죽었다.

두근두근.

나는 심장 박동을 억누르며 제이릴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검은색 드레스 자락이 빙그르르 바람을 일으켰다.

“하.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니라. 싸우고 올 때마다 값비싼 제복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게 아까웠을 뿐이니, 다른 생각은 말도록.”

황금빛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났고, 목소리는 낭랑하고도 서늘했다.

누가 들으면 선전포고라도 하는 줄 알았겠지.

하지만 난 그녀의 귓불이 약간 달아올랐다가, 혈마법의 발현에 혈류가 가라앉는 걸 보았다.

나는 절대, 절대, 절대로 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나무 상자를 열었다.

* * *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세상에…….”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건 하얀 제복이었다.

제복 자체는 지금 입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화려한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에 부여된 마법은 지금의 나로서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제이릴리스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갑옷을 내려준 바 있으나, 사실 진짜로 큰 전쟁이 벌어질 때는 짐이 친정하면 그만이야. 그대는 언제나 그 전에 나서 몸을 불태워 가며 전화를 억눌렀지.”

방어 마법이나 강화 마법은 기사 갑옷의 것보다는 떨어졌다.

“매일같이 그리 격식을 차려 가며 입고 다니는 걸 보면, 그대가 나설 땐 권위가 필요하다는 뜻일 테고.”

하지만 이 제복에서 느껴지는 핵심 마법은 강화가 아니라 복원이었다.

“하여 짐이 손 좀 써 보았노라.”

츠츠츠츠.

제복에 천천히 손을 대자, 마치 살아 있는 듯 실이 풀리며 내 몸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마치 지금 끼고 있는 장갑, ‘보이지 않는 손’을 옷으로 만든 듯했다.

“화염 저항만큼은 확실히 보장하니, 그대가 아무리 불길을 일으켜도 알몸이 될 일은 없을 테고, 찢어지고 망가져도 알아서 달라붙으리라. 그대의 몸도 함께.”

“예?”

“설령 목이 잘려 나간다 해도 그 순간 옷이 달라붙으며 실을 내어 살과 혈관을 꿰매어 줄 것이야.”

동방 대륙의 신물 중 비슷한 마도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었다.

하지만 그건 문자 그대로 신물, 즉 광명신이나 옛것이 직접 만들어 내려준 물건이었다.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가 낭랑하니 선언했다.

“짐은 그대가 짐이 모르는 곳에서 죽게 놔두지 않을…….”

그러나 그 선언은 중간에 끊어졌고, 그녀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니. 되었노라. 짐은 돌려 말할 필요가 없는 존재니라. ……짐은 그대가 살아서 돌아와 주기 바라니라. 망가지고 찢어지고 누덕누덕해져도 어떻게든 살려 줄 것이고, 육체를 떠나려는 영혼도 붙잡아 줄 것이니, 살아서만 돌아와 주기를 바라니라.”

집무실 양초는 그리 밝지 않았지만, 유리창에는 제이릴리스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다.

그녀는, 그녀의 도시 솔레타라온을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섬세한 유리 공예품처럼 내려다보았다.

나는 눈동자를 세로로 바꾸며 용언의 기운을 일으켰고, 아즈의 힘도 적당히 끌어 올렸다.

“그대여?”

제이릴리스가 날 돌아보았고, 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똑똑히 마주치며 말했다.

“폐하. 오래 기다리시지 않게 하겠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가볍게 숨을 삼켰다.

그 예리하고 요요한 눈빛이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하기는 뭣하지만, 왕공 귀족의 자리는 계속 빚을 짊어지는 자리 같기도 합니다.”

날 위해 밤을 새워 연구하는 세레라지에에 대한 빚, 날 위해 무예를 익힌 루디에 대한 빚, 날 위해 목숨을 거는 텐티아 경에 대한 빚.

“그런데 이 빚은 눈물이 아니라 승리로만 갚을 수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날 네게 진 빚.

“폐하. 전 더 강해지겠습니다.”

아즈의 파편을 이용해 불꽃의 위력을 크게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몇 번 연습하다 보면 빠르게 다룰 수 있겠지.

언젠가는 네 옆에 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꿈도 꿔.

제이릴리스가 다시 웃었다.

“그래. 오래 기다리지 않겠노라.”

붉은 입술이 오만한 호선을 그리는, 아주아주 나른한 웃음이었다.

“아, 한 가지 할 말이 남았노라.”

가벼운 턱짓 한 번에 백발이 흔들리고, 유리창 뒤에서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지는 가운데, 제이릴리스가 역광 받아 음영 진 얼굴에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예?”

난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반응했고, 그 순간 저 멀리 대성당에서 종이 울렸다.

종소리가 너무 커서, 그녀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된 걸 축하해, 오빠.”

그러니 그 말은 분명 내 환청이었겠지.

* * *

막 새해 미사가 끝났다.

제이릴리스는 먼저 황궁으로 돌아갔고, 난 교회에 남아 몇 가지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사랑합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대에게 주의 축복이 깃들기를!”

이건 내게 뇌물 주고 공사를 따낸 건설 길드장이나, 내게 뇌물 주고 황실의 운송사업을 받은 궁정 귀족이나, 내게 뇌물 주고 취직한 법복귀족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한쪽은 한때 날 화형 시키려 했던 교황이었고, 한쪽은 한때 날 잡아 가두려 성기사들을 보냈던 성자였다.

“하하. 위대한 주의 대리인들께서 이 미천한 종을 이리도 높여 주시니 황공할 뿐이옵니다.”

교황 아르고스가 지혜 가득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대공. 그게 무슨 겸손한 말씀이십니까? 대공 덕에 도로이센과 그 너머 서방의 군소 왕국에도 주의 은총이 더 환하게 비출 수 있었습니다.”

저 말을 해석해 보면, 내가 도로이센을 반쯤 죽여 놓은 덕에, 사실상 독립 상태였던 서방 일대의 교회와 교구들을, 죄다 휘어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신실하기로 이름 높은 랑소와 공화국과도 협정을 맺었지요. 그곳의 형제자매들과 기도와 성물을 나눌 수 있어 웃음이 넘치는 나날입니다.”

저 말을 해석해 보면, 내가 랑소와를 쳐부순 덕에, 제멋대로 놀던 랑소와 주교들의 목줄을 잡고, 발전한 기도와 성물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성물까지 받아오셨고, 그 성물을 이렇게 교회에 기부해 주셨으니, 어찌 대공의 신실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학부의 학생들이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아르고스가 한쪽에 놓인 날개 달린 창과 랑소와 식 경전, 그 외 몇몇 양산형 성물들을 가리켰다.

저렇게 깐깐한 인상의 노인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저 말을 해석해 보면, 내가 랑소와에서 성물을 약탈해 온 덕에, 아카데미를 통해 시행 중이던 신성력 공유 연구와 정화병 전력 강화 계획이 크게 진보했다는 뜻이었다.

“하하. 성하의 칭찬에 이 발렌시아누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건 이만하면 되었다는 듯, 마테오스가 슬쩍 입을 열었다.

“대공. 자체적으로 진행 중이던 성물 연구가 어느 정도 성과를 냈습니다. 첫 번째는 역장 방식인데 이는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두 번째 방식은 바로 시행할 수 있습니다.”

“오오. 무엇입니까?”

“광명의 시선에 어린 신성력을 포집해 주변으로 방사하는 방식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제이릴리스의 가로등이 떠올랐다.

“폐하께서 최근 수도에 설치 중이신 가로등과 함께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듯합니다. 그 빛이 있다면 야음을 틈탄 악의 무리는 크게 세가 죽을 것입니다!”

침식은 보통 사람들이 조금씩 진행되기에 더더욱 무서운 것이다.

사방에 신성력을 뿌려대서 보통 사람들이 침식자가 되지 않게 막는다면, 침식 교단에 새로 들어가는 자들도 적어질 테고, 놈들은 천천히 고사하겠지.

마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윽한 눈빛에 약간의 난처함이 어렸고, 나는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이런 발견을 교회에서 해냈으니, 속세의 일은 황실이 처리해야겠지요. 양산이니 공방이니 아카데미와의 산학 협력이니 하는 건 모두 황실에 맡기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자와 교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대공.”

성물로 장사를 하려다가 신성력이 거두어진 사제는 역사 속에 많았다.

침식자와 싸운다는 대의를 위해서라고 해도, 신이 내린 은총을 분석하고 양산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불경한 것이었다.

당장 대성당에서도 마테오스가 신성력을 잃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상당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내가 맡아서 욕과 혹시 모를 천벌을 받아내 줘야겠지.

부탁할 것도 있고.

“성자님. 실은 제 누이가 최근 진귀한 물건을 두 개나 얻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최근 등장한 거악과 관련되었는지라 많은 사제에게 주시받을 듯한데, 조금 융통성 있는 분별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테오스가 얼굴을 굳혔다.

“으음…….”

난 꽤 강력한 황족이었고, 그런 내 불길을 견뎌낸 대주교 침식자의 존재는 교회에서도 매우 심각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팔을 빼앗아 정화했다가는 세레라지에가 울거나, 대성당에 벼락을 떨구거나, 울면서 벼락을 떨굴 게 분명했다.

그는 잠시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품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둘에게 내밀었다.

“제 누이가 교회에 보이는 성의입니다.”

교황 아르고스가 액수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군요.”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향기롭고 비싼 차를 마셨다.

그래.

이렇게 대화하며 타협하다 보면 어떤 문제라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대화가 안 통하는 놈들은 구워버려야지.

* * *

“대주교 전하!”

“오! 합일이시여!”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이렇게 강해졌단 말입니까?”

“불경한 말이나, 어쩌면 합일께서도…….”

대주교가 온몸에서 검은 연기와 검은 가루를 뿜으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비틀 걸었다.

용의 혀처럼 붉은 불길이 그 주인의 의지를 따라, 몸속으로 지독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거구의 사제들이 대주교를 부축하다 똑같이 손에서 연기를 뿜었다.

대주교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솔레타라스가 너무 강해졌다.”

“하면.”

“언제나 그랬듯, 솔레타라스는 솔레타라스로 잡아야겠지.”

사제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유스티아누스와의 만남을 주선하겠습니다. 전하.”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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