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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라지에 같은 몇몇 특별한 천재들을 제외한다면, 사람은 노는 곳과 일하는 곳이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텐티아 경 역시 아카데미 시절 훈련이나 교우 관계만큼이나 기숙사 생활 자체가 힘들었다고 했고, 별궁 옆 관사에서 머무는 루디 역시 신입 시녀 시절 일터와 잠자리가 같은 곳이라 피로했다고 한다.
이는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진짜! 못 해 먹겠네.”
별궁에서는 도저히 제대로 수련할 수가 없었다.
불길을 일으키다 보면 기껏 내가 사들이고 루디가 가꿔둔 정원수들이 비실비실해졌고, 검을 휘두르다 보면 어느새 연무장 밖으로 몸이 튕겨 나갔다.
따라서 난 이참에 종합공방을 조금 더 증축하기로 했다.
“누나. 나 앞으로는 이쪽에서 수련하게.”
“돈줄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연구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겠니?”
“걱정하지 마. 아주 가깝지는 않을 거거든.”
종합공방이 있는 황궁 동쪽은 배움의 거리와 가깝고, 대형 마도 공방도 여럿 있어 땅값이 만만찮았지만, 최근 제이릴리스의 솔레타라온 확장 선언 이후로 가격이 폭락하는 중이었다.
“이 값이라도 쳐 줄 때 파는 게 어떤가?”
“전하. 하지만 이건 제가 사들일 때와 비교해서 4분의 1도 안 되는 값입니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 폐하를 알현했을 때 들은 말이, 솔레타라온이 확장되면 동쪽에 공방 지구를 만든다고 하시더군. 입주하면 세금도 한동안 깎아 주고, 시약도 황실 상단에서 안정적으로 공급해 준다네. 이게 발표되면 고작 이만큼의 가격만 떨어질까?”
근처 땅과 건물을 죄다 값 후려쳐 사들이고, 큰 돌로 높게 쌓은 담을 길게 두르고,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지도록 잎 짙은 상록수들을 가장자리에 심었다.
“망나니 대공이 또 이상한 짓을 벌인다는군.”
“이거 조금 위험하지 않나? 황궁 바로 앞에서 무기도 만들고, 기사도 키우고, 마법도 연구하다니.”
“대공이 땅을 사들일 때, 끝까지 팔지 않고 버티던 사람 몇몇이 실종되었다는군. 지하수로에서 옷 조각을 찾았다는데.”
흉흉한 소문이 일대에 맴돌았지만, 이제 그 정도 원성 따위야 귀엽게 들어 줄 수 있었다.
“한때는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었는데.”
그렇게 난 종합공방의 분리를 마쳤다.
나와 텐티아 경, 기계 기사와 마총 사수들의 수련지구.
니벨룽겐의 착륙장이 있는 마커스의 마도 공학 지구.
세레라지에의 연구실과 탑이 있는 연구개발지구.
마커스는 제 공방에서 내 돈을 쪽쪽 빨아먹으며 신무기와 신제품을 개발했다.
“양산형 의안 연구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눈은 어지간한 신성력으로도 고치기 힘드니, 생산 원가를 낮춘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듯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필요하다는 거지?”
“금화 1천 2백 닢입니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다시 채워 넣는 게, 역시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놈이었다.
“전하. 지난번에 투자해 주신 금화 1천 2백 닢의 절반을 상환 완료했습니다. 다음 달부터는 순수입과 같이 배분해 드릴 예정입니다. 현재 회로를 개량한 ‘라이터’를 수도의 각 공방에 위탁 생산, 판매하고 있으며, 의수와 의족 공방도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 * *
세레라지에는 한동안 탑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연구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건 알아내야만 하잖니.”
대주교의 팔과 전이 마도구가 워낙 매력적이었나 보다.
대주교의 팔은 잘 모르겠지만, 전이 마도구는 내가 봐도 눈이 돌아갈 만도 했다.
공간과 관련된 마법은 과거 이종족이 세계를 지배할 때도 거의 연구되지 않았던 학문이었다.
양산은 바라지도 않으니 어떻게든 재구성만 해낼 수 있다면 황실에 큰 보물이 되겠지.
혹시 그녀의 정신이 오염되거나 침식될까 두려워, 옛것 연구를 감시하는 사제들에게 넌지시 말하기도 했다.
“세레라지에 대공이 연구하는 팔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예. 대공 전하.”
“난 그녀가 멀리 날아가 버리는 걸 바라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위험해 보인다고 막아설 필요는 없지만, 식사하러 나올 때마다 신성력으로 잘 비춰 주게.”
“예. 전하. 하지만…….”
“하지만?”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가 끼니를 거르신 게 열흘째입니다. 가끔 커피와 활력의 물약만 한 잔씩 드시고-.”
나는 그대로 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세레라지에를 업고 구내식당으로 내달렸다.
남색 머리카락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가운데, 로브 자락 너머로 갈비뼈가 느껴졌다.
“누나! 아사하고 싶어서 환장했어?”
“놓으려무나! 지금 저 위대한 신비 앞에서 빵이 넘어갈 거 같니?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잖니!”
“그거 이럴 때 쓰는 말 아니야! 그리고 빵만으로 못 사는 거지, 빵 없어도 못 살아!”
“상아탑에서는 1달 내내 깨어있던 적도 있잖니.”
“진짜 누나는 솔레타라스로 태어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해. 보통 사람이 누나처럼 일했으면 진작 광명신 만나러 갔다고.”
나는 제일 부드러운 빵과 뜨거운 물에 가까울 정도로 맑은 채소 수프를 주문했고, 세레라지에가 그걸 다 먹는 걸 지켜본 다음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깨에 단단히 견착! 견착하세요!”
루디가 마총 사수들 사이에 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견착하란 말이야!”
시녀복 차림에 상냥한 인상의 20대 여인이 구리색 갑옷으로 온몸을 두른 정예병들을 윽박지르는 건 보기 드문 광경이었지만, 나로서는 썩 익숙했다.
“일단 자세만 단단히 굳어지면, 어떤 상황 어떤 각도에서도 사격이 가능하단 말이에요.”
타아앙!
“이렇게 앉아서 쏠 수도 있고, 이렇게 눕거나 엎드려서 쏠 수도 있죠.”
타아앙!
“이렇게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서 쏠 수도 있고, 이렇게 공중제비를 돌면서 쏠 수도 있어요.”
타아앙!
“마, 마지막 두 개는 콘세크라투스 백작 각하만 가능할 듯합니다.”
“으음…… 연습하면 다 돼요.”
루디는 소심한 항의를 더더욱 소심하게 묵살해버리고, 내게 조르르 달려왔다.
“발렌 님!”
“그래. 힘들지는 않아?”
“하루에 잠깐씩 봐주는 정도라서 힘들지는 않아요. 제가 모든 사격 훈련에 다 끼는 것도 아니고, 진형 붕괴 상황에서 각개 전투해야 하는 상황만 보거든요.”
레이스 달린 하얀 머리띠를 쓰고 각개 전투라고 말하는 모습이, 썩 자연스러웠다.
새로 뽑은 하인 하녀들의 손놀림을 이야기할 때와 똑같은 어조였다.
루디가 약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마총 사수를 조금 늘려야 할 거 같기도 해요.”
* * *
사병 증가는 예민한 문제였고, 그게 황형의 사병 증가라면 더더욱 예민한 문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기계 기사님들이랑 수가 안 맞아요.”
“수가 안 맞아?”
“지금 발렌 님 밑에 있는 기계 기사가 25명이에요. 어마어마한 전력이죠.”
황제 제이릴리스가 거느린 네 기사단의 기사가 총 200명이고, 중부의 대영주 그레이스가 거느린 황금기사단이 80여 명이었다.
제국 백작이 평균적으로 거느리는 기사의 수가 12명이고, 제국의 백작이 타국의 왕과 비견된다는 걸 고려할 때, 내가 거느린 기사의 수는 이미 어지간한 군소왕국을 뛰어넘고 있었다.
“마총 사수가 기계 기사를 보조해야 하는데, 기계 기사 25명을 보조하기에 100명은 너무 적어요.”
“그렇네.”
루디 말이 맞았다.
기사 25명이 출동할 만한 일에 고작 마총 사수 100명을 보조라고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사 한 명에 적어도 열 명, 많으면 스무 명. 150명에서 400명은 증원하시는 게 좋을 듯해요.”
루디가 저녁에 생선 요리와 고기 요리 중 뭘 먹는 게 좋을지 말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 물론 전부 제 생각일 뿐이에요. 절대 제가 주제넘게-.”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며 손사래 쳤다.
“…….”
감히 말하는데, 제이릴리스가 날 보고 했던 생각을 조금은 이해할 듯했다.
과한 공손함이 원치 않는 거리감을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근엄하게 답했다.
“루디 콘세크라투스 백작. 진솔한 의견 잘 들었다. 시행을 염두에 두고 고려해보지.”
루디가 성과 작위 명을 듣고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루디. 이제 너 백작 각하야. 가문을 연 시조는 한 단계 위 작위로 봐준다는 걸 고려하면 후작급이라고. 이 대륙에서 어딜 가도 고개 빳빳하게 들고 다닐 수 있다니까? 편하게 말해. 편하게.”
“네.”
“나도 증원 생각해 본 적 있어. 벌어서 뭐 하겠냐? 잘 써야지. 시그나인이 준 금화를 여기에 써야겠다. 진을 통해서 아카데미 학생들을 데려오면 고급 인력 수급도 문제없고. 아주 싹 끌어와야겠네. 네가 말해 주니까 시작할 마음이 확 들어.”
루디가 헤헤, 하며 사점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녹색 눈을 보석처럼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발렌 님.”
* * *
치이이익!
기계 기사들의 연무장에서는 오늘도 쇳소리와 체인 소리, 증기 소리가 요란했다.
거인들의 싸움 같은 훈련이 옆에서 벌어지는 가운데,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 역시 오늘의 단련에 힘썼다.
“기계 갑옷이 더 강하기는 하지만, 역시 전 이 정도가 딱 맞는 듯합니다.”
타악!
텐티아가 백금 갑옷을 입고 발렌시아누스에게 짓쳐 들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뒤로 젖혀지고, 핏빛 안광이 번뜩였다.
최근 그녀의 눈높이가 그보다 작아진 적이 없었기에, 발렌시아누스는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확실히 더 날래졌군. 하지만 한번 강해졌던 감각을 포기할 수 있겠나?”
탁, 타앗!
그는 용언의 불길을 끌어 올리며 연속으로 뒤로 몸을 날렸다.
회르르륵!
그의 등 뒤로 불덩이 열두 개가 떠올라 원을 그리고, 불덩이가 불의 창으로 변했으며, 불의 창이 연달아 쏘아져 나갔다.
쐐애액! 쐐애액! 쐐애액!
“강함이 꼭 거대한 육체와 육중한 팔다리를 말하는 건, 아니지요!”
텐티아는 화한을 빙그르르 휘둘러 불의 창을 베어냈다.
손목과 어깨를 움직여 정확히 불꽃을 반으로 가르는 모습이 섬세하면서도 장엄했다.
마치 불의 창이 알아서 맞고 갈라지는 듯했다.
츠카아악!
불타는 얼음이 핏빛 반원을 그리고, 초승달 모양의 마나 블레스트가 쏘아져 나갔다.
여전히 허공에 떠 있던 발렌시아누스를 정확히 노리는 궤적이었다.
“흐하하하!”
발렌시아누스는 왼손 안쪽을 아즈의 결정으로 변환시키는 동시에, 불꽃을 결정에 공명시켰다.
우우우웅!
막대한 화기가 피어오르고, 손이 달군 쇠처럼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그가 마나 블레스트를 피하지 않자, 텐티아는 움찔했고.
“전하!”
발렌시아누스는 그대로 왼손 손바닥을 힘껏 내질렀다.
쾅!
쌓일 만큼 쌓였던 압력과 열기가 화산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갔다.
화르르륵!
붉은 충격파가 넓게 퍼지는 가운데, 소용돌이치는 불길이 용의 화염 같았다.
핏빛 파도처럼 덮쳐들던 마나 블레스트가 불길과 부딪쳤고, 불길이 폭발하며 검은 연기와 불똥을 날렸다.
후욱!
그 반동으로 발렌시아누스의 몸이 크게 밀려났다.
그는 폭발음 속에서 착지의 발소리를 숨겼다.
강력한 기술도 화려한 기예도 싸움이라는 큰 틀 안에서는 하나의 체스 말에 불과했다.
망나니 대공은 보검 흑루를 뽑고, 용언의 불길과 마나를 흘려 넣었다.
흑루의 칼날이 오렌지색으로 달아오르는 가운데, 그는 텐티아의 좌측면을 노리고 땅을 박찼다.
타앗!
검은 연기와 불똥이 거짓말처럼 갈라지고, 하얀 제복을 입은 황족이 노란 안광을 번뜩이며 튀어나왔다.
사아아악-!
“경! 이번 판은 내가 가져가겠네!”
완벽하게 허를 찌른 공격이었다.
적기사가 붉은 눈을 부릅뜨며 당황했다.
그녀 역시 검을 오른손에 쥐고 있는 만큼, 몸을 돌리며 대응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 승리의 기쁨이 떠올랐다.
그러나 텐티아는 그대로 한 판을 내주는 대신, 왼발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파앙!
흙먼지 피어오르는 연무장에, 태양을 향해 치솟는 적기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발렌시아누스는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며 돌려차기를 내지르는 텐티아를 황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경은 천재였지.’
퍽!
텐티아의 군화발이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 작렬했다.
‘이번 삶에도 찬란해서 다행이군.’
발렌시아누스가 그대로 주저앉았고, 텐티아가 경악했다,
“전하!”
* * *
눈을 부릅뜨고 세레라지에를 응시하던 사제도 꾸벅꾸벅 조는 깊은 밤이었다.
창백한 달빛이 유리창 안으로 내리쬐는 가운데, 창가 책상에 앉은 세레라지에의 얼굴에 깊은 음영이 드리웠다.
그녀는 확대 렌즈 아래에 망가진 전이 마도구를 가져다 놓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전이 마도구는 마치 연꽃 가운데에 아즈의 파편을 꽂아놓은 듯 생겼고, 연꽃잎 앞뒤로 주술 회로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회로를 그린 합금은 90년 전에 개발되었잖니. 그렇게 오래된 마도구도 아니구나.’
‘그리고…… 상아탑에서 만든 마도구도 아니잖니. 양식이 다르잖니. 사전에 회로를 짠 다음에 새긴 게 아니라, 부여 주문을 이용해서 마법 자체로 담았단다.’
‘이거 해석하기 피곤하겠구나.’
세레라지에는 같은 마법을 주문으로도 쓸 수 있었고, 수인으로도 쓸 수 있었고, 시동어로도 쓸 수 있었고, 무영창으로도 쓸 수 있었다.
기초 화염 마법인 ‘흔들리며 피어나는 불꽃’의 전체 주문 길이는 네 줄이었고, 그걸 수식으로 바꾸면 두 페이지가 나왔다.
마법사들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긴 주문을 무의식적으로 처리했다.
즉, 원래 주문이 얼마나 긴지 모르는 상태에서 마도구에 남은 흔적만 보고 그걸 복원하는 건, 한 글자짜리 답을 보고 전체 문제가 뭐였는지 알아내는 일이었다.
‘물론 전이 마도구라는 건 알고 있잖니. 하지만 이걸 다 살리려면, 시안을 하나하나 만들면서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겠잖니.’
세레라지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일단 오늘 내가 회로 탁본을 뜨고, 내일부터 제자들에게 시안을 만들어오라 시키면 되겠잖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연꽃 꽃잎을 벌리며 안쪽에 새겨진 회로를 확인했다.
순간 세레라지에는 그녀의 눈을 의심했다.
‘이건…… 인간은 안 쓰는 양식이잖니.’
숨이 턱 막혀 왔다.
특별함의 상징이었던 파란 눈과 노란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뜨며,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단계가 되자, 세레라지에는 살짝 고개를 돌려 사제가 졸고 있는지 확인했다.
‘엘프족이 90년 전에 만든 마도구가 왜 침식자 손에 들려 있던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