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6)화 (276/340)

(276)

솔레타라스도 랑소와도 도로이센도 없던 시절, 세상은 이종족의 것이었다.

용, 수인, 인어, 엘프, 흡혈귀, 드워프.

용의 날개 아래에서 모두가 침묵했고, 리자드맨, 캐트시, 늑대인간 등 수인의 강인함 앞에서는 어떠한 무기도 무용했다.

바다는 인어만이 오갈 수 있는 세상이었으며, 고요한 숲은 엘프 사냥꾼들의 전유물이었다.

어두운 밤에 가슴을 펼 수 있는 건 흡혈귀뿐이었고, 깊은 동굴 속 철과 금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건 드워프뿐이었다.

인간은 뛰어난 번식력 덕에 확률적으로 몇몇 특출한 개체를 낳기는 했지만, 끝내 타고난 나약함과 짧은 수명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빠진 이빨도 다시 안 나는 종족 따위.’

그게 이종족이 인간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수인과 드워프는 무예와 기술을 숭상했고, 1년 내내 검과 철, 불에만 몰두했으며, 농사, 청소, 요리, 빨래를 비롯한 생활 전반은 천한 인간 노예에게 맡겼다.

이는 흡혈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간이란 잘 키워 두고두고 잡아먹어야 할 가축에 불과했다.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그들 역시 인간을 필요로 했다.

솔레타라스 황실에 의해 발간이 금지된 논문에 따르면, 흡혈귀 귀족 아래서 일하던 농노들의 삶은, 현 농노들의 삶보다 훨씬 윤택했다고 한다.

그 시대 흡혈귀 귀족의 농노에게 요구되는 세금은, 인구 1천당 매년 한 명의 젊은이를 바치는 정도였다.

오크 호드(Horde)가 지평선을 휩쓸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범하고 죽이던 시대에, 한 가족이 적어도 4명, 많으면 10명 이상의 아이를 가지던 시대에, 젊은이 하나로 흡혈귀 귀족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건 꽤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게다가 흡혈귀 귀족 역시 공물로 올라온 젊은이의 모든 피를 빨아 죽이는 게 아니었다.

수년 안에 돌아오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운이 좋으면 성에 고용되거나, 정말로 운이 좋으면 종복이나 반려로 선택받을 수도 있었다.

이는 드워프, 수인 귀족 치하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몇몇 행운아의 이야기를 가지고 시대를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피정복국 공주와 정복국 황제의 연애를 다룬 소설에서 병사들의 죽음은 묘사되지 않지만, 그들이 흘린 눈물을 모두 모으면 너른 대지에 비를 내릴 테니까.

대부분 인간이 평생을 일했고, 더 이상 일하지 못하면 죽음을 맞았다.

동시에 대부분의 이종족은 윤택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필요로 했다.

그 과정에서 개개인의 처우는 나락이었을지언정 종의 생존 자체는 용납받았다.

엘프만이 인간을 다르게 대했다.

* * *

“숲을 파괴하는 벌레들 같으니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을 다 죽이는 게 맞는 듯합니다.”

“우리는 숲에서 살아야 하고, 저들은 숲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없어져야 한다면, 당연히 저들일 겁니다.”

화전을 하는 인간과 수렵채집을 하는 엘프는 도무지 공존할 수가 없었다.

이는 문화의 차이가 아니라, 경제 구조와 사회 체계의 차이였다.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무수한 인간이 죽어 나갔다.

엘프는 날랜 몸을 타고나 검, 창, 궁, 기에 두루 능했고, 마나 친화력이 높아 하나같이 빼어난 마법사들이었으며, 정령을 수족처럼 부렸다.

엘프 전사 두 셋이서 숲 근처에 자리 잡은 인간 도시 하나를 불바다로 만드는 일이 잦았다.

“다, 죽여라!”

“항복은 필요 없다.”

“숨 쉬는 공기가 아까운 놈들!”

그러나 시간은 인간의 편이었다.

그들은 숲을 불태워 엘프의 영역을 축소 시켰고, 피와 씨를 훔쳤으며, 마침내 귀족이라고 불릴 만한 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인류와 이종족의 싸움이 일방적인 도살에서 나름 팽팽한 전쟁이 되었을 때.

침식과 마경이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례적인 재앙에서 본격적인 위협이 되었을 때.

엘프는 가장 처참하게 몰락했다.

엘프는 수가 적었고, 마법 친화력이 높은 만큼 침식에 나약했으며, 인간은 끝없이 진화했다.

“마침내, 우리가 돌아왔다.”

엘프의 마나 친화력, 오거의 힘, 드워프의 야금술, 수인의 광기로 벼려진 인간은 죽어간 동족을 위해 피로 복수했다.

“항복은 없다. 그렇지? 너희도 그랬잖아?”

그들은 엘프의 짙은 마나도, 쇠하지 않는 미모도 탐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엘프가 자신의 선조들을 죽였듯 엘프들을 죽여 나갔다.

솔레타라스의 황제만이 예외였다.

“짐은 모든 종족의 지배자가 될 것이니라.”

그는 엘프의 항복을 받아주고, 깊은 숲을 그들의 정착지로 내어주었다.

솔레타라스는 그로 인해 당시 인간 군주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어찌 그 악마들을 살려줄 수 있소이까!”

“우리를 다 죽이려 했던 자들이오!”

“후환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이에 그는 엘프 혼혈의 강력한 마법사들을 대거 동원, 불과 물로 비난자들을 쓸어버렸다.

‘난 내 힘이 어디서 왔는지 잊지 않는다.’

‘이종족이 우리에게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되지만, 다 죽이면 우리도 더 강해질 길이 없어져.’

‘인간? 이종족? 의미 없다. 어차피 혼혈이 가능한 이상, 누구로서 지배하느냐가 중요할 뿐이지.’

그렇게 솔레타라스의 황제는 다섯 종족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종족은 제국 어딘가에서 연명을 허락받았으며, 황제의 가신과 봉신들은 악명 높은 혼혈 귀족이 되었다.

그들은 이종족 피가 섞였음을 자랑스러워했고, 동시에 인간과 동질감을 느꼈으며, 적극적인 통혼을 통해 혈통을 완성해 나갔다.

“저 공자는 흡혈귀의 아들이라는구나.”

“저 영애는 나가 혼혈이래요.”

“저 기사님을 잘 봐 두거라. 인어의 피가 흐르는 분이시니.”

전 세계와 광명교회가 이종족을 증오했지만, 솔레타라스 귀족 사회에서 이종족은 기묘한 애증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인간을 핍박하고 잡아먹고 도륙해온 괴물들이자, 그들을 귀족으로 만들어준 힘의 원천이었으니까.

그게 세레라지에가 엘프 마도구가 세상에 나왔다는 걸 알자마자 발렌시아누스에게 달려간 이유였다.

* * *

“이 시간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복 누나가 꼭두새벽에 별궁에 쳐들어왔다.

난 파자마 차림이었고, 머리도 물로 간신히 올렸다.

세레라지에가 다급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전이 마도구가 엘프가 만든 거라고?”

“그렇잖니! 심지어 몇백 년, 몇천 년 된 고대 유물도 아니란다. 고작 90년 전에 만들어진 거잖니! 엘프가 다시 세상에 기어 나오려고 한다는 게 아니겠니? 놈들이 인간을 멸망시키고자 침식자와 손을 잡았을 수도 있잖니. 아니! 분명히 그럴 거란다.”

별궁에 달려온 세레라지에가 이례적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고깔모자도 쓰지 않았고, 지팡이도 짚지 않았다.

숨이 찬 걸 보면, 사실을 알아내자마자 미친 듯 달려온 게 분명했다.

……날아오면 되는데 왜 달려왔데?

“어서 폐하께 알려야 한단다! 내가 워낙 일 키우는 걸 싫어하고, 내 연구 물품 빼앗기는 걸 싫어하지만, 이건 좀 심하잖니. 꼭 황실과 대영주들이 함께 대책을 찾아야 한단다.”

“알았어. 폐하께 잘 보고해 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덤덤하게 답했다.

사실 이 꼴로 세레라지에를 보고 있는 게 썩 부끄러웠다.

악명 높은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줄무늬 파자마 입고 자다 깬 상태로 거실에 앉아 있다니.

다행히 세레라지에는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어? 하는 표정만 지었다.

“괜찮은…… 거니?”

“응.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않다.

다른 데 가서 말하지 않고, 나한테 먼저 달려와 줘서 너무너무 고마웠다.

난 회귀한 자고, 당연히 이종족 문제도 생각해둔 해결책이 있었다.

일단은 인어, 그다음이 엘프다.

그리고 세레라지에는 지금 이종족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나와 제국을 위해 열심히 연구를 이어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사안에 대해 호들갑 떨지 않고, 별일 아닌 듯 돌려보내야 했다.

그녀는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니,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굴면 안심할 거다.

난 미지근한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걔들 마법 실력이야 워낙 유명했으니까. 그 근처 어떤 대영주가 몰래 사람을 보내서 만들게 했겠지. 성기사랑 이단 심문관을 보내서 싹 엎으면 돼.”

“아니. 침식자들 손에 들어가 있었잖니.”

“그 영주가 침식자였겠지. 엘프가 아니라.”

세레라지에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잖니.”

“엘프도 침식 때문에 망한 종족인데, 아무리 제국이 미워도 침식자들이랑 손을 잡지는 않겠지.”

회귀 전에도 그랬다.

이종족은 반란을 일으킬지언정, 침식자와 손을 잡지는 않았다.

세레라지에가 안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 그럼 안심하고 연구 마저 하겠잖니. 새벽에 깨워서 미안하단다.”

“그래. 잠도 좀 자 가면서 하고.”

나는 끝까지 웃는 낯으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하.”

2층으로 돌아가 다시 침대로 몸을 던지니, 회귀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반역 황족 유스티아누스가 수십 년 전에 했던 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의 원한은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미친 황제 아래에서 신음하는 동지들입니다. 폭군 제이릴리스는 인간과 이종족을 가리지 않고 죽일 겁니다!’

‘이종족을 용서할 수 없다면, 공동의 적을 둔 뛰어난 전사라고만 생각해 주십시오!’

연설 하나는 대단했던 놈이었다.

처음으로 진짜 엘프하고 싸웠을 때는 미치는 줄 알았다.

나 말고도 그 정도 실력의 마법 검사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그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인간은 이종족을 믿지 않았고, 이종족도 인간을 경계하고 무시했으며, 유스티아누스의 후원자인 대귀족들은 새로운 귀족의 탄생 가능성을 경계했다.

무엇보다 대귀족들의 반란을 토벌하며 경험까지 쌓인 제이릴리스가 미친 듯 강했다.

내 손에 세계수가 불탔고, 인어 왕은 어물전에 걸렸으며, 드워프 지하 궁전은 수몰되었고, 제이릴리스는 수인 왕족들을 쇠사슬에 묶어 황궁 안에서 질질 끌고 다녔다.

“……이종족이라.”

나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해결을 하기는 해야 하는 문제였다.

제이릴리스는 인간만의 황제가 아니었으니까.

도로이센도 랑소와도 한동안은 조용하겠지.

빌어먹을 남방대륙의 아미르들이 문제다.

몇 년 뒤에 큰 의식이 하나 열리는데, 아무래도 마테오스가 그 전에 성전을 시작할 거 같다.

계속 정화병을 증강하고 성기사 늘리는 게 누가 봐도 전쟁 준비다.

이종족 문제는 그다음에야 손댈 수 있겠지.

일단은 잊고 있자.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니까.

* * *

“……교회가 정화 성물을 폐하의 마법 가로등에 부착하여, 침식의 기운을 몰아낼 방안을 제시하였사옵니다. 황실이 생산과 유통을 모두 맡는다고 가정할 때 금화 약 6천 닢이 초기 투자될 예정이옵니다.”

나는 얼마 전 마테오스와 이야기했던 내용과 마테오스가 준 서류를 정리해 보고했다.

제이릴리스는 흡족하니 웃었고, 곧바로 재무대신과 황립 마도 공방 마법사들을 불러 생산을 논의하게 했다.

그녀가 책상을 툭툭 두드리다 말했다.

“그대는 짐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안겨 줄 때가 많구나.”

“과찬이십니다.”

“아니. 사실이 그래. 짐의 구상은 본래 행정망과 유통망에 집중되어 있었어. 대영주들이 함께 침식자 세력을 몰아붙이고, 국지적으로 터지는 마경은 기사나 성기사 등 핵심 전력을 빠르게 집결시켜 닫으며, 규격 외의 문제는 짐이 친정할 계획이었지.”

“그렇게 하시는 게 맞사옵니다. 이리 말씀드리기는 황송하오나, 폐하는 가진 걸 잘 이용하시는 게 더 중요한 분이옵니다. 모든 문제를 임기응변과 혁신으로 해결할 수는 없사옵니다.”

제이릴리스는 강력한 마검사로서 이름을 날렸고, 제국의 황제라는 작위조차 그녀의 대단함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일을 하기에는 강력한 마검사의 명성보다도 황제의 권위가 더더욱 필요했다.

“하지만 혁신으로 해결하는 게 더 낫지.”

제이릴리스가 나른하게 웃었다.

“그래. 그대여. 이제 그놈들을 압박할 수단이 하나 더 생기겠구나. 인구 밀집 지역에 먼저 설치해야겠다. 알게 모르게 물드는 신민들을 지킬 기회야.”

침식자 하나하나는 개개인에게 재앙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숫자다.

시골 영지는 인구 밀도가 낮은 만큼 침식도 빨리 번지지는 않는다.

완전히 넘어간다 해도, 막말로 마을을 불태우고 재건하면 그만이었다.

반면 도시는 인구 밀도가 높아 침식이 빠르게 번졌지만, 그렇다고 불태워버릴 수 없었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을 주시해야 했고, 이는 매우 피곤하고 비싼 일이었으며,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만하면 정리된 듯하옵니다.”

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은혜를 베푸는 건 망나니 황형 발렌시아누스가 아니라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여야 하니까.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애인이나 만나고 오거라.”

“예?”

순간 난 귀를 의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