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7)화 (277/340)

(277)

제이릴리스가 서랍 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내밀었다.

“며칠 전 동부의 기사가 와이번을 타고 날아와 짐에게 바쳤노라.”

나는 조심스럽게 그 편지를 펼쳤다.

[……해전에서 최고의 전력이 되는 강력한 화염 마법사, 주권을 인정해줄 제국의 용혈 황족, 빼어난 전략가가 모두 필요한 시점입니다……]

‘제국의 태양께’로 시작하는 그 편지는, 말을 빙빙 돌리고 배배 꼬기는 했지만, 결국 나 한 사람을 노린 내용이었다.

“화염 술사, 용혈 황족, 전략가. 그녀가 그대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로군.”

제이릴리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묘하게 차분했고, 역광이 드리워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심 긴장하며 말을 골랐다.

“폐하께서 마경 안으로 당당히 들어가 악의 무리에게 받아 마땅한 대접을 해주신 동안, 그녀는 제국의 대영주로서 군대를 풀어 치안을 유지하고 침식자를 잡아들이는 걸 도와주었사옵니다. 당시 주제넘게 섭정 노릇을 하고 있던 저와 여러모로 손발을 맞출 일이 많았고…….”

제이릴리스가 낮게 조소했다.

“되었다. 안 봐도 알겠노라. 탐욕스러운 백상아리는 짐이 없어지자마자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어 그대를 잘근잘근 씹어댔고, 치안을 유지할 병력이 필요했던 그대는 고결한 희생정신을 발휘했겠지.”

정확하시옵니다, 하고 말하며 비위를 맞춰 주려 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수한 감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카리오사를 마음에 담았다는 사실을 제이릴리스가 싫어할까 두려웠고, 그날 내가 진짜로 카리오사를 마음에 담았던 게 맞는지 의심했고, 그걸 의심하고 있는 내 모습이 추레한 동시에, 그 추레함을 제이릴리스가 알아채고 경멸할까 두려웠다.

역시 난 생각이 너무 많고, 양심은 애매하게 남았다.

확실한 게 있다면, 그 진짜 이유가 선망이었든 정욕이었든, 적어도 희생정신 따위는 아니었던 듯했다.

“고결한 희생정신만은…… 아니었사옵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이릴리스의 눈치만 살폈다.

제이릴리스가 제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었다.

“그럴 줄 알았노라.”

“예?”

“카리오사 대공은 그 거침없는 태도로 그대의 마음속에 깊이도 쳐들어왔겠지. 그대는 언제나 욕망에 솔직하지 못했으니, 선망과 동경과 정욕과 피로 물려받은 열기가 뒤섞여 정신을 놓아버렸을 것이야.”

“…….”

“사과하지 않은 걸 칭찬해 주겠노라. 머릿속에만 담아두면 무엇이든 괜찮아. 여하간, 동부에 다녀와도 좋으니라. 아니. 다녀와라. 해적들의 저항도 저항이거니와, 그 너머 동방 대륙 왕들도 견제해야 하니까. 이참에 아세노르타 가문의 시찰도 겸하는 게 좋겠구나.”

나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오사는 회귀 전 동방 대륙과 제이릴리스와의 양면 전쟁을 치렀을 정도로 강력한 대영주였다.

그러나 지금 세 군도에 있을 해적들은 그녀가 상대하던 일반 해적과는 다를 거다.

제이릴리스가 마경 속으로 사라졌던 당시, 동방 대륙 놈들은 세 군도에 이주 사업을 시작했다.

축성과 식민으로 땅을 완전히 얻어내고, 그곳을 중간 거점 삼아 제국으로 밀고 들어올 생각이었겠지.

즉, 그곳의 해적들은 사실상 사략 허가를 받은 정규 해군이나 다름없고, 심지어 그 섬에 가족들까지 두고 있는 자들이다.

저항이 훨씬 거셀 수밖에 없겠지.

방금 제이릴리스의 명령은, 그 섬을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 섬에 지금 들어가 있는 사람들과 해적들은 다 쫓아내거나 죽여야 한다.

그래야 카리오사가 동방 대륙 왕들이 이쪽으로 눈독 들이지 못하게 막아줄 수 있고, 우리는 그동안 남부 아미르 토후국과 침식자 교단을 안정적으로 박살 낼 수 있을 테니까.

“알겠사옵니다. 폐하.”

나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고, 제이릴리스는 내 얕은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웃었다.

절대적인 강자의 여유가 어린 나른한 웃음이었다.

“발렌시아누스.”

“예. 폐하.”

“짐은 그대를 꽤 믿노라. 돌아올 걸 알아. 그대는 결코 짐 옆을 떠나지 못하겠지. 짐이 떠나게 내버려 둘 사람도 아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에 박히고 조였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회귀 전 제이릴리스는 폭군답게 배신자를 경멸했고, 폭군답게 잔정이 많았다.

배신자를 잡아들여 반쯤 죽여 놓은 다음, 혈마법으로 치료해주고 다시 자기를 섬길 기회를 준 적도 많았다.

“사병도, 열애도, 우정도, 외교도. 하나하나 짐이 어찌 생각할까 고민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거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짐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짐이 직설적으로 말할 것이야. 그리고 짐은 그때 그대가 짐의 말을 들을 걸 믿지. 또한 그대가 만에 하나 짐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짐이 강제로 듣게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노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광오한 말이었으나, 난 내 쌍둥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유쾌하니 웃으며 머리 숙였다.

한결 맑아진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사그라들었다.

“예. 폐하! 동쪽 섬의 해적 놈들을 완전히 갈아버리고 오겠사옵니다! 또한-.”

“또한?”

“쓸만한 사략선 선장이 있으면 회유하겠사옵니다. 카리오사 대공을 믿으나, 황실 직속의 해군을 증강해 나쁠 건 없지 않겠사옵니까?”

인어와 엘프 모두 물길로 갈 수 있는 곳에 사니, 강력한 해군은 잊고 있으려 했던 이종족 문제를 해결할 때도 도움이 될 터였다.

쓸만한 선장이 있으면 카리오사 눈을 피해 빼 오자.

그런 생각을 잃었는지, 제이릴리스가 피식 웃었다.

“이제야 그대답구나.”

* * *

나는 별궁에서 텐티아 경, 세레라지에, 마커스, 루디를 불러 놓고 말했다.

“그렇게 됐네. 한동안 동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대공 전하는 밖으로 도시는 게 더 나을 듯하다는 생각했습니다. 여기 있으면 폐하의 눈엣가시지만, 밖에 있으면 대리자니까요.”

텐티아 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커스 후작. 말을 삼가시오. 두 분은 그런 관계가 아니시오.”

마커스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경. 성향과 관계없이, 비슷한 기능의 톱니 두 개를 붙여 놓으면 문제가 생기는 법입니다.”

“감히 두 분을 톱니에 비유해……!”

“경. 진정하게. 마커스 후작. 차 좀 마시게. 아주 향기롭군.”

나는 텐티아 경을 말리고, 마커스에게 김이 펄펄 끓어오르는 차를 도자기 맥주잔이 넘치도록 따라 주었다.

“…….”

다행히 마커스는 닥치라는 뜻의 은어를 잘 알아들어 주었다.

“텐티아 경.”

“예. 전하.”

텐티아 경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마커스에게 승리의 미소를 보낸 듯했다.

“경은 나와 함께 동부를 갈 것이오.”

“백상아리의 이빨과 해적놈들의 더러운 손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나는 믿음직스러운 기사가 한때의 반역자에게 그 정도 텃세를 부리는 건 용납해주었고, 세레라지에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는 묘하게 초췌한 몰골이었는데, 아마 한 일주일 정도는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한숨도 자지 않은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잖니.”

그녀가 날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

“한 세 시간 자고 빵도 두 조각이나 먹었잖니. 제자들도 2교대로 쉬게 해주고 있단다.”

마커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교대? 세상 참 좋아졌군요.”

“그러게 말이잖니. 애들이 풀썩풀썩 쓰러져서 어쩔 수가 없었단다.”

“…….”

이는 분명 제국법에 어긋나는 과다 노동이었지만, 난 눈을 감기로 했다.

왜냐하면 저 둘이 만들거나 연구하고 있는 모든 마도구가 내 의뢰였기 때문이다.

“누나랑 마커스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종합공방을 잘 부탁해. 돈 안 아껴도 되니까 빨리 전이 마도구를 연구해줘.”

세레라지에가 눈을 가볍게 흘겼다.

“네가 그런 말 안 해도 그럴 거잖니.”

나는 양손을 연극적으로 들었다.

“그래. 내가 말을 잘못했네. 제발 몸 좀 사리면서 연구해줘.”

“그 회로를 보고 잠이 오는 놈들은 전부 마법사 실격이잖니!”

“마커스 후작. 명령일세. 세레라지에 누님을 사흘에 한 번은 재우도록.”

“사흘이라니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짧지 않습니까. 닷새에 한 번으로 하지요.”

……이 미친 마법사들을 이해하려 한 내가 잘못이지.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루디에게 고개를 돌렸다.

녹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루디. 너도 맡아줄 일이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수정구 깨지듯 빛이 사라졌다.

“아, 전 수도에 남는 건가요?”

난 죄짓는 기분을 이겨내며 임무를 설명했다.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야. 콘세크라투스 백작.”

작위 명을 말하자 루디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귀족들과 관련된 일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식자 대주교도 우리가 자기네 교단을 쫓는 걸 알았겠지. 더 지하로 숨어 주면 좋겠지만, 그럴 만한 놈들이 아니야. 반격을 꿈꿀 거고, 온갖 방법으로 수도에 기어들어 올 거라고.”

루디의 눈빛에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색출해야 하겠네요. 빈민가부터 무도회장까지.”

목소리 역시 망나니 대공의 결투광 시녀답게 서늘해졌다.

“아래쪽은 문제없어. 내가 괜히 적가면이랑 코넬이랑 진을 키워준 게 아니야. 빈민, 홍등가, 배움의 거리는 걔들이 처리해줄 거야. 하지만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은 문제지. 사업 운의 부적이니, 출처와 원리 모르는 수상한 마도구니, 지긋지긋해.”

난 믿음을 담아 말했다.

지금 이걸 할 수 있는 건 루디뿐이었다.

“네가 나 없는 동안 별궁의 주인이야. 무도회도 나가고, 만찬회도 열고 하면서 귀족와 부르주아들을 감시하고 압박해 줘. 그 과정에서 인맥도 만들고. 백작 각하다운 사람들을 만나야지.”

“그것도 그렇네요.”

“분위기 봐서 내가 그런 수상한 마도구나 책에 관심이 있는 듯 말해. 그들의 환심을 사거나, 아니면 대놓고 압박을 해버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네 몸조심이고.”

루디가 긴장하며 물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나는 유쾌하니 웃으며 답했다.

“잘해야지. 내가 도와줄게.”

예상과 약간 다른 대답이었는지, 루디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 웃지 않으려 노력하며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루디 백작. 일단 옷부터 맞추러 갈까?”

* * *

‘시녀 사수’ ‘결투광’ 루디 콘세크라투스 백작은 ‘망나니’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최측근으로 여겨졌지만, 그녀의 입지는 귀족 사회에서 의외로 낮았다.

이는 벼락출세한 시녀를 질투하는 목소리 탓이 아니라, 루디 본인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녀는 작위를 받았지만 어떤 무도회나 만찬회에도 나가지 않았고 저택 역시 비워둔 채로 별궁 옆 관사에 기거했으며 모든 만남 요청이나 뇌물도 거절했다.

“사실 작위를 받았다고 하는 일이 바꾸지는 않죠. 휴식 시간이야 원래도 많았지만, 그때는 훈련하니까요.”

이 태도는 성향보다는 일정에서 기인했으니, 일정이 바뀐다면 태도도 바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베스 웨스티스 의상실입니다~ 성함과 가문 명, 작위를 말씀해줄 수 있으신가요?”

베스 웨스티스는 보석과 레이스, 우아한 드레스를 다루는 데에는 수도 최고로 꼽는 의상실로 대귀족들이 수도로 올라오면 상아탑 다음으로 들리는 관광 명소기도 했다.

젊은 직원은 장인다운 자부심이 어린 목소리로 두 손님에게 인사했다.

직원은 지금껏 온갖 존귀하신 분들을 보아 왔고, 혼혈 귀족 특유의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에도 익숙했다.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스. 대공일세.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레이디는 루디 콘세크라투스. 백작이지.

‘미쳤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귀족과 황족의 혈통 차이에 대해 깨달았다.

소문의 망나니 발렌시아누스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화려한 하얀 제복 안에 단단한 몸이 꽉 차 있었고, 떡 벌어진 어깨와 조각처럼 각진 턱은 고압적인 태도로 감탄을 강요했으며, 그윽한 눈매와 초췌한 뺨, 촛불 같은 눈빛은 우수 어린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려고 왔네. 이것저것 입어볼 수 있겠나? 마음에 드는 건 모두 사지.”

직원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루디에게 고개를 돌렸다.

‘역시 백작 각하시구나.’

한때는 시녀 하나가 운이 좋아 출세했다는 이야기를 간식거리처럼 씹으며 떠들기도 했다.

그러나 평범한 시녀복을 집은 채로도, 루디가 평범한 시녀가 아니라시는 게 느껴졌다.

철사 태 안경 너머 큰 녹색 눈동자는 최고급 에메랄드보다도 아름다웠고, 피부는 뼛가루 넣어 구운 도자기보다 매끄러웠으며, 상냥하게 웃는 인상에 쉽게 대할 수 없는 위엄이 어려 있었다.

“일단은 편한 것부터 입고 싶어요. 대공님이 계절별, 장소별, 분위기별로 서른 벌 정도는 맞추라 하셨거든요.”

수량을 들은 직원은 점장과 디자이너와 모델들을 죄다 불렀고, 곧이어 한 명을 위한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소문만 무성하던 시녀 사수의 사교계 데뷔도 기정사실이 되었고.

“그 말을 들었어요?”

“며칠 전에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그럼 그 루디라는 시녀는…….”

수도 사교계에 신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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