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8)화 (278/340)

(278)

베스 웨스티스 의상실은 어느 수도의 유명 의상실이 그렇듯, 많은 모델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들 빨리 모여!”

“왜? 누구 귀한 손님 오셨데?”

“루디! 루디 콘세크라투스 각하!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랑 같이 왔네.”

“미친.”

“오늘 첫 끼였는데!”

VIP 손님이 납시자 대기실에는 기쁨의 비명이 울렸다.

“준비! 준비!”

“의상 다 가져와!”

“10분 뒤에 들어간다!”

모델들은 빠르게 갈색 머리카락 가발을 썼고, 루디와 비슷한 톤으로 화장했으며, 코디에 따라 각자 다른 드레스, 부채, 목걸이, 귀걸이, 팔찌로 치장했다.

“편하게 보시다 마음에 드는 코디를 골라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단 두 사람을 위한 런웨이가 시작되었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귀부인처럼 차려입은 모델들이 고아하면서도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와아.”

루디는 그 화려함과 기세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고, 발렌시아누스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루디. 3번 어때?”

루디는 3번 모델의 옷차림을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뒤쪽에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자, 곧바로 다른 직원이 3번 모델과 같은 드레스, 장신구, 구두를 들고 달려왔다.

“입어보시겠습니까?”

루디는 설레는 심장을 안고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었다.

“발렌 님. 어떠세요?”

상아색 드레스는 약간 속이 비치는 얇은 재질이었고, 깊은 주름이 아래로 길게 떨어졌다.

푸른 숄과 풍성한 레이스 한 줄로 포인트를 주었고, 얇은 금팔찌와 금귀걸이, 노란 부채로 화사함을 더했다.

“발렌 님?”

발렌시아누스가 잠시 굳어 있다 넋 나간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진작 올 거 그랬네.”

“네?”

“아니야. 잘 어울린다고.”

루디가 다음으로 입어본 건 빳빳한 녹색 천과 진홍색 꽃무늬가 어우러진 드레스였다.

“이건…… 너무 화려하지 않을까요?”

“괜찮을 거 같은데?”

보색을 쓴 만큼 레이스는 화려하고 강렬했으며, 색감을 주의 깊게 신경 써 무척 품격있어 보였다.

드레스 자체가 화려한 만큼 부채는 약간 얇은 것이었고, 큰 리본이 달린 모자와 구두까지 한 세트였다.

루디는 거울 속 귀부인을 보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진짜 잘 어울리세요.”

“소화하기 힘든 옷인데, 대단하시다.”

“네가 주최할 때 입으면 좋겠네.”

직원들과 모델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발렌시아누스 역시 환한 표정을 지었다.

루디는 헤헤 웃었고, 다음 옷은 직접 가리켰다.

“16번 모델님 옷 좋아 보여요. 어떠세요?”

녹색 바탕에 황록색으로 포인트를 준 드레스였다.

밑단이 아주 화려하고 풍성했으며, 어깨와 등이 깊게 파여 있었고, 알 굵은 에메랄드와 금으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 갈색 구두가 한 세트였다.

첫 번째가 고아하고, 두 번째가 무게감 있었다면, 세 번째는 우아하면서도 고혹적이었다.

발렌시아누스가 한동안 답이 없자, 루디는 잠시 잘 안 어울리나 걱정했다.

‘너무 화려한 건가요?’

발렌시아누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디.”

“네.”

“그건 내 앞에서만 입어. 아니다. 못 들은 걸로 해. 그 모습을 꽁꽁 숨겨 놓는 건 무거운 죄인 듯하다.”

그 뒤로도 수많은 드레스가 백작 각하의 선택을 받았다.

신부를 떠올리게 하는 풍성한 하얀 드레스, 네 가지 색이 섞여 기묘하고도 우아한 무늬의 매끈한 드레스, 꽃에 파묻힌 듯한 화사한 드레스, 어쩐지 누군가에게 복수해야 할 거 같은 적갈색 드레스.

목과 어깨, 등이 파인 드레스를 입을 때 어울리는 알 굵고 화려한 목걸이, 단정하면서도 고혹적인 분위기에 어울리는 가죽과 은으로 만든 목걸이, 정숙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진주 목걸이, 신비한 분위기를 내는 오팔 목걸이.

그 외 각종 반지, 팔찌, 귀걸이, 부채, 가방, 색색의 손수건과 나비넥타이, 머리핀, 크고 작은 각양각색의 비녀, 장식에 가까운 작은 모자와 깃털과 보석으로 만든 새 장식을 올린 큰 모자, 보관까지.

발렌시아누스는 돈을 물 쓰듯 썼고, 베스 웨스티스 의상실의 직원들은 탄성을 내질렀으며, 루디는 거울 속 자신이 이렇게 아름다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꿈 같네요.”

“즐겨. 악몽이 찾아오기 전에. 갈아입을 때마다 아콰테그 먹이는 거 잊지 말고.”

“네. 발렌 님.”

* * *

루디는 10대 초반부터 시녀 일을 시작했고, 그녀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그녀가 계승 서열 수백 번대 황족을 모시는 그저 그런 시녀였을 때 생겼다.

붉은 달무리 궁에서도 여러 시녀 시종을 만났지만, 매일같이 모시는 황족이 죽어 나가는 궁은 우정을 이어 나가기 썩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발렌시아누스가 망나니 행보를 시작하고, 한때 친구라 믿었던 자가 누명을 씌우고, 루디가 마총을 쥐고 텐티아와 어울리기 시작한 뒤에는 옛 인연도 대부분 끊어졌다.

하지만 루디의 옛 지인들은 여전히 황궁 안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들은 모일 때마다 동기와 선후배를 통틀어 제일 출세한 시녀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당사자 없는 곳에서 하는 당사자 이야기가 그렇듯, 이는 대부분 뒷담화로 이어졌다.

“걔 은근히 실수도 잦지 않았어?”

“그때 발렌 전하가 아무것도 아닌 분이라서 그랬지, 지금 그러면 잘릴걸?”

“내가 모시던 분은 지금 뼈까지 불탔는데, 걔는 좋겠다~ 애첩 노릇도 하고.”

“주인 잘 만나서 출세한 거지. 백작 각하라니. 이제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실 거야.”

“생각해보면 걔 진짜 영악하지 않냐? 애초에 발렌 전하가 제이릴리스 폐하랑 떨어지고 한참 슬퍼하던 시절에 그분 밑으로 들어간 거잖아. 딱 골라서.”

물론 시녀 시종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

그때 아무도 발렌시아누스를 섬기지 않으려 했고, 시녀 시종들은 제일 어렸던 루디에게 절대 출세하지 못할 듯하던 어린 황족을 떠맡겼다.

그 이름뿐인 황족이 지금 계승 서열 1위의 황형이 되고, 인스트루멘툼 알짜배기 땅의 백작이 되었으며, 신성 황제에게 ‘더 좋은 생각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력자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네. 그때부터 속에 뱀이 가득했구만.”

“하. 진짜 사람 오래 볼 일이다. 몇 년을 기다렸네.”

그들은 황성 맨 서쪽 궁에서 본궁으로 향하는 중이었고, 필연적으로 별궁을 지나게 되었다.

“진짜 아는 척 하나도 안 해주네.”

“야야. 목소리.”

“그래. 거의 다 왔네.”

그때만큼은 루디의 오만불손함과 발렌 대공을 몸으로 유혹했다는 문란함, 옛 친구와 선후배들을 잊어버린 배은망덕함을 성토하는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건 루디를 총애한다는 망나니 대공에 대한 두려움이었지, 루디를 향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어?”

“발렌 전하다.”

그때 발렌시아누스가 별궁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언제나처럼 백발을 깔끔하게 넘기고 위엄찬 제복을 두르고서, 멋들어지게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 길을, 푸르른 잔디 위로 놓인 판석 징검다리를 유유히 건넜다.

보기만 해도 입이 다물어지는 외모와 분위기를 두른 용혈 황족 앞에서, 수확기 참새 같은 시녀 시종들도 침묵을 지켰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한 여인을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카락을 품위 있게 늘어트렸고, 어깨와 등, 목이 깊게 파여 고혹적인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는 보는 순간 고개를 숙이게 할 만큼 화려했고, 소매에 붙은 커프스단추로 단정함까지 더하니, 더 이상 더하고 뺄 게 없어 보였다.

“우와.”

“누, 누구지?”

그녀는 두 개의 목걸이를 했는데, 하나는 깔끔한 녹색 초커에 피처럼 붉은 루비를 딱 하나 단 것이었고, 두 번째는 마디마디 굵고 화려한 금목걸이에 에메랄드를 박은 것이었다.

“세상에…….”

“설마 약혼녀?”

손에는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기묘하게도 그 장갑 안에 알이 굵은 반지들이 언 듯 언 듯 엿보였다.

“갈까?”

“네. 전하.”

시녀 시종들은 거대한 검은 사두마차를 보며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저걸 같이 탈 정도면…… 무조건이다.’

‘그래. 루디 네가 아무리 출세해 봐야. 저분은 다른 여식이랑 만난다니까. 넌 그냥 첩이라고!’

‘아무렴 신분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달라질 거 같아?’

‘지금이라도 나랑 만나자고 하면 바로 받아줄 텐데.’

그때 한 시종이 낙엽을 밟아 바스락 소리를 냈고, 암살자로 단련된 시녀 사수는 고개를 획 돌렸다.

“!”

그때 시녀 시종들은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그 맑디맑은 녹색 눈동자와 상냥하기 그지없는 눈매를.

그리고 왕공 귀족들에게 느꼈던 강자의 기운을.

“아…….”

시녀와 시종들은 사두마차가 출발하고도 그 자리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가 뭘 본 거지?”

숨 막히게 하는 저 고귀한 귀부인이, 방금까지 그들이 씹어대던 루디라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본궁 쪽에서 제이릴리스의 시녀이자 본궁의 관리인인 비네아가 내려왔다.

“다들 왜 여기 서 있는 거지요? 일 그만하고 싶은가?”

제이릴리스를 직접 만나는 그녀는 궁정 귀족 서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아주 화가 나 보였다.

시녀 시종들은 와들와들 떨며 그녀를 따라갔다.

‘우린 다 죽었다.’

* * *

“루디. 무슨 생각해?”

발렌시아누스가 물어 왔다.

루디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눈동자가 약간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발렌 님.”

“응.”

“‘나비가 애벌레 시절 모른다’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발렌시아누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몰라야 하는 게 맞고.”

“네?”

루디는 고개를 갸웃했고, 소년 대공은 어른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비는 하늘을 날며 꽃꿀을 먹고, 애벌레는 바닥을 기며 풀잎을 먹지.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더 많은 걸 보게 되고, 하는 일도 달라지지. 당연히 생각하는 관점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어?”

“음.”

“너도 직접 내 수발을 들다가, 이제 하인 하녀들을 부리는 사람이 되었잖아. 예전에는 손이 맵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손이 맵고 입이 무거운 사람을 뽑는 사람이 되었고. 둘 중에 누가 더 우월하냐를 따지는 게 아니야. 그냥…… 필요한 덕목이 달라진 거지.”

“그렇네요.”

루디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발렌시아누스는 약간은 짓궂게 웃었다.

“아까 걔들 말 들었구나. 하긴, 이제 못 듣는 게 더 이상하지.”

루디는 발렌시아누스가 그들을 죄다 구워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고, 그녀 역시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워했다.

어보미네이션을 쏴 죽이고, 수도 함락 사태 당시 활약했으며, 침식자 대주교에게 마탄을 박아 넣은 그녀다.

이미 그녀는 훨씬 높은 곳에 서 있었다.

루디는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네. 귀가 좀 좋아졌어야죠.”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손가락 하나를 들어 루디가 손에 낀 마도구 반지 위를 두 번 두드렸다.

“루디 콘세크라투스 백작.”

“네. 전하.”

“제 에스코트를 받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루디는 대공의 에스코트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복마전이라 불리는 궁정 귀족의 사교계에서 태풍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녀는 마차 문에 걸린 거울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금과 에메랄드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 최고급 비단과 레이스로 짠 드레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마법 단검과 마총 아가테.

‘이거야말로 날 이루는 모든 것.’

거울 속 귀부인은 언제나 그랬던 듯 아름다웠다.

레이스 문양 속에서 나비를 발견하고 실없이 미소 짓기를 잠시, 루디는 결의에 차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발렌 님.”

한 저택 앞에서 마차가 멈춰 섰고, 발렌시아누스가 먼저 문을 열고 나서서 손을 내밀었다.

착 달라붙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은 크고 따듯했다.

루디는 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록수 심어진 거대한 정원에 마도구 가로등이 두 줄로 길처럼 뻗어 있었고, 대문 앞으로 시시각각 마차들이 도착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 아니에요. 누구 초대인데 당연히 와야지요.”

“어서 들어갈까요? 빨리 마리에타 후작 각하를 뵙고 싶네요.”

검은 정장을 입은 시종들과 지체 높은 귀족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오랜만일세!”

“여기서도 보는군.”

“작전은 성공했나?”

화려한 옷과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며 빨리 누군가의 시중을 들어야만 할 듯했다.

‘직업병이네요.’

루디는 잠시 자조했고,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지금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사내의 파트너였다.

“갈까?”

“네.”

둘은 정원을 가로질러 거대한 홀 앞에 섰다.

입장 순서가 왔고, 저택의 집사가 외쳤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와 루디 백작 각하 납시오!”

일순 홀 안에 있던 모든 궁정 귀족들의 시선이 루디에게 향했다.

고등재판소에서 각종 송사를 다루며 황실에 귄위를 부여하는 법복귀족, 상단과 길드들을 거느린 재화 귀족, 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행정 귀족, 대대로 네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을 배출하는 군사 귀족, 황립 마도 공방을 떠받치는 마도 귀족, 의회에 출석하는 배지 귀족…….

“루디 백작?”

“그 콘세크라투스?”

“화려한 소문의 주인공이 이제야 납시는군.”

그들이 전설 속 악마처럼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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