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9)화 (279/340)

(279)

궁정 귀족 가문의 소년 소녀들은 황궁에서 열리는 새해 첫 무도회에서 16세에 데뷔탕트를 치른다.

“안녕하십니까. 펠트리아 가문의 에인젤입니다. 성 소피아 아카데미의 마법 학부 입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에 입학해 저택을 떠나기 전, 어른들에게 진로를 밝히고, 미리 같은 신분의 또래들과 교류하며, 서로를 지켜줄 사람의 벽을 쌓는 것이다.

‘성 소피아 아카데미 마법 학부? 잘됐구나. 지금 내 조카가 거기 학생회 임원인데, 잘 챙겨놓으라 말해 주겠다.’

‘너도 성 소피아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난 검술 학부야. 임무 평가 받으면 같이 가자.’

‘저 오빠가 성 소피아 마법 학부 올해 수석인데, 황립 마도 공방 붙었데. 가서 인사해 봐. 운 좋으면 과제 족보를 받을 수 있을걸?’

데뷔탕트는 단순히 무도회에서 춤 한 번 추는 게 아니라,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리고, 귀족으로서 사회 활동을 시작한다는 선언이었다.

궁정 귀족이라면,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피의 존귀함을 증명하고, 법관, 행정관, 기사, 마법사, 의회 등 통치 기관에 들어가며, 황실을 섬기고 가문의 이름을 빛내야 한다.

오랜 세월 피와 맹세로 이어져 온 집단에 소속된다는 건, 집단에서 요구받은 수많은 조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이행한다는 뜻이다.

나 역시 앞으로 그리할 것이라고, 먼저 간 어른들과 선배들 앞에서 맹세하는 자리가 데뷔탕트였다.

즉,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다는 건, 사회 밖 사람이라는 뜻이었고, 어떤 인맥도 없이 수많은 인맥을 가진 자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17, 18살에 데뷔탕트를 치렀다는 건, 이후 모든 인생 일정이 미뤄진다는 말이었다.

귀족 사회도 같은 실력이면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을 뽑았기에, 데뷔탕트가 미뤄진 사람은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아카데미를 월반하는 수준의 재능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오늘도 하급 귀족들은 제 자식이 제대로 된 귀족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며, 아이의 데뷔에 가산을 탕진한다.

그러나 바닥 아래에는 지하실이 있는 법이다.

루디는 이름만 남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무도회와 데뷔탕트는 완전히 남의 이야기였다.

‘그때 황궁 시녀가 못 되었다면 굶어 죽었겠지요.’

홀은 황궁 못지않게 넓었고, 바닥은 하얀 대리석이었으며, 노란 샹들리에 빛이 비쳐 은은하게 빛났다.

스물이 넘었는데도 이런 자리에 서는 게 처음이라는 사실이 은근히 부끄럽기도 했다.

‘차라리 아예 안 왔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만, 왔으니까요.’

루디는 시녀 사수로 기른 감각으로 주변의 시선을 감지했다.

“저 사람이 콘세크라투스 백작이군요.”

“소문대로 눈동자가 정말 아름다워요.”

“이종족 특색은 없는 듯하네요.”

“그래도 우습게 봐서는 안 될 듯해요. 걸음걸이를 보세요.”

“……어설픈 혈통으로 으스댔다가는 장갑에 뺨을 맞겠네요.”

화려한 부채와 제복으로 치장한 귀족들이 예리한 시선을 보내왔다.

루디는 발렌시아누스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으면서도, 그들과 가볍게 눈을 마주쳤다.

‘저분은 전대 백금기사단 부단장이시네요. 제가 전하를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시선이 좋지만은 않으세요.’

‘저분은 현직 대법관이시네요. 의의로 연애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걸 들어본 적은 있는데, 대놓고 제게 웃어주실 줄은 몰랐어요.’

‘저분은 뵌 적 있어요. 의회서 발렌 님과 만났던 배지 귀족! 후작께 인사드린 다음에 저분께 인사드리는 게 좋겠네요.’

‘이것도 사회생활, 아니. 일이에요. 여기 순수한 마음으로 놀러 온 사람 없어요. 정신 차리자!’

상냥한 인상에 해맑은 웃음이 어리고, 말랑한 볼살이 흔들렸으며, 경계심 어렸던 시선 몇 개가 부드러워졌다.

‘견제 따위는 같잖다는 건가? 하긴, 저 여자도 수도 함락 당시 활약한 참전 용사지.’

‘내가 오해했던 건가? 천박한 유혹 따위를 할 사람은 아닌 듯한데. 사과해야겠군.’

‘그래도 우리 가문 시종 시녀들을 죄다 두들겨 팬 이유는 묻고야 말겠다. 이 결투광아.’

평생처럼 느껴지던 열댓 걸음이 지나고, 루디는 마리에타 후작 앞에 섰다.

* * *

“루디 콘세크라투스입니다. 후작 각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창백한 피부에 드센 인상이었고, 마도 귀족 출신의 배지 귀족이었다.

“반가워요. 루디. 다들 루디를 궁금해했어요. 누가 소문 무성한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선택을 받았을까? 하고 말이죠. 오늘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배지 귀족답게 깐깐한 목소리였지만, 눈웃음에는 호의가 어려 있었다.

발렌시아누스가 가볍게 너스레를 떨었다.

“너무 들볶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마리에타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살려는 드리지요.”

루디는 어쩐지 등골에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무도회는 춤추며 일도 하는 곳이 아니라, 일하다 죽을 거 같을 때마다 잠깐씩 춤추는 곳이지만, 그래도 들어왔으면 한 곡은 춰야 했다.

처연하고 아름다운 왈츠 곡이 흘러나오고, 루디와 발렌시아누스는 발맞춰 가며 홀을 돌았다.

루디는 샛노란 눈동자를 너무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잘생기기는 진짜 잘생기셨다니까요.’

발렌시아누스는 시원하면서도 강인하고, 약간은 능글맞은 미남이었다.

머리를 올리면 위험한 분위기도 함께 두르게 되서,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심장이 기분 좋게 조여들었다.

루디는 왜 연애 소설의 주인공들이 공포를 사랑으로, 사랑을 공포로 오해할 때가 많은지 이해했다.

‘진짜 비슷하기는 하네요.’

발렌시아누스를 보고 있자면 마총을 겨눌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막 두근거려요.’

심장은 빨리 뛰는데, 시간은 한없이 느려지고, 바깥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며, 손가락 한 번만 까닥하면…….

“루디.”

“네, 네?”

“내 손가락 접히겠다.”

“앗. 죄송해요.”

루디는 질겁했고, 발렌시아누스와 깍지를 끼고 있던 오른손에 힘을 뺐다.

그녀는 마도구 반지로 발렌시아누스의 손가락을 마구 짓뭉개고 있었다.

얇디얇은 하얀 장갑은 반지의 압력을 이겨내는 완충재가 되어주지 못했다.

발렌시아누스가 나지막이 웃으며 손을 놓았다.

붉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하얀 송곳니가 언 듯 보였다.

“자. 콘세크라투스 백작. 지금만은 이 고용주를 잊고,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발렌시아누스가 선언하듯 말하고 한 걸음 물러섰고.

“루디 백작!”

“콘세크라투스!”

“내 시녀들의 원수를 갚겠다!”

궁정 귀족들이 토끼를 노리는 매처럼 성큼 다가왔다.

‘시작이네요.’

그러나 루디는 칼을 숨긴 토끼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 * *

“콘세크라투스 백작. 그 마총이라는 무구는 누구에게 받은 거요. 혹시 나도 하나 구해 줄 수 있겠소?”

“레이디 루디. 혹시 솔레타라온 확장 공사 조감도에 대해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께 들은 게 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앞으로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쌓아 나가고 싶습니다. 한 곡 추실까요?”

“걸음걸이를 보니 시카리우스를 만났군요. 저도 군사 귀족 출신인데, 이 자리만 아니었다면 대련을 부탁드렸을 겁니다.”

“대체 마도구를 몇 개나 끼고 온 건가요?”

“혼인 생각이나 애인 생각이 있으시다면 제가 좋은 가문의 공자들을 소개…….”

“발렌시아누스 전하께 이 서류 좀 전달해 주십시오. 극비입니다.”

“혹시 의회 쪽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저 친구가 최근 제이릴리스 폐하의 시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좋은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그래서 왜 우리 가문 시녀 시종들을 반 죽여놓았던 건가!”

“정말 아름다우세요!”

질문, 부탁, 청탁, 명함, 소개, 칭찬, 시비가 쏟아졌다.

“네, 네?”

루디는 조각배 하나 타고 폭풍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어부가 되어 인간의 파도에 쓸려 다녔다.

‘그래요. 전 이제 데뷔탕트도 못 치른 몰락 귀족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녀는 키를 잡고 돛을 펼치며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콘세크라투스 가문의 첫 가주가 그녀였다.

가주라니, 루디는 자신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춤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제이릴리스 님은 시녀들이 개성 넘치게 꾸미고 조용히 있는 걸 좋아하세요. 고급 커피를 즐기시니까 향수는 옅은 걸 쓰도록 하시고요.”

“대체! 사용인 교육을! 어떻게 했으면 밖에서 황족 험담을 다 하고 다닙니까!”

“마총은 상아탑에서 받았어요. 이걸 받았다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종합공방에 투자하실래요? 제 것보다는 투박하지만 몇 자루 받으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직 연애보다는 일이 좋네요. 그래도 친구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휴가를 받았을 때 연락할게요.”

“반지…… 알아보셨어요? 실은 제 취미가 마도구 수집인데요. 혹시…… 아. 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광명이시여! 황제 폐하의 앞날을 비추소서! 건배예요! 빼면 벌주입니다!”

아직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저물었다.

루디는 해가 저물 때부터 자정이 올 때까지 궁정귀족들과 수다를 떨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청탁과 덕담을 주고받았다.

‘더워.’

얼굴이 상기되고, 코르셋이 답답하게 느껴질 무렵, 한 사내가 그녀의 손을 정중히 잡고 홀 바깥쪽으로 안내했다.

“어땠어?”

찬 바람이 온몸을 쓸고 지나가자, 루디는 한결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꼈다.

“발렌 님.”

그녀의 옆에 서서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건 발렌시아누스였다.

제복 소매 안에 꽉 찬 팔이 단단했다.

“그래.”

“와주셨네요.”

“계속 보고 있었지. 혹시 이상한 놈들이 꼬일까 봐.”

루디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그럴 줄 알았다. 감이 좀 좋아져야지.”

“저 성공한 거 같아요.”

“성공?”

“상아탑 외 마도구만 다루는 마도 귀족 겸 재화 귀족이랑 친해졌어요. 이세아스 백작이랑 마를리나 공녀예요. 초대장 받았으니까, 다음에는 거기 갈게요. 경매 같은 것도 있다고 하니까 그때 침식 마도구 있나 확인하고요.”

들떠 풀려 있던 녹색 눈에 예리한 붉은 안광이 번뜩이고 가라앉았다.

루디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거 재미있네요. 대단한 사람이 된 기분이에요.”

“그렇지. 좋아할 거 같았어.”

발렌시아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래 소년처럼 맑은 표정이었다.

루디는 내용이 아니라 표정에 놀라며 물었다.

“정말요?”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재미있지. 나도 세레라지에 누나도 텐티아 경도 보통 사람은 아니고, 옛 인연은 다 떨어져 나갔으니까. 너도 조금은 외로울 거 같았어.”

“헤헤. 그래도 전 발렌 님이 제일 좋아요.”

찬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아.”

발렌시아누스가 훌쩍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말했다.

노란 눈이, 붉은 입술이, 자신만만한 미소가 너무 가까웠다.

“고마워.”

루디는 순간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마총을 꺼내 어딘가에 쏴야 할 거 같았다.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하얀 이빨을 반짝 빛나는 소년 대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수려한 소년의 순수함과 악명 높은 망나니의 위험함을 한 몸에 담고 있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데뷔탕트 축하해. 루디.”

* * *

나는 텐티아 경과 검은 사두마차를 타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루디의 데뷔는 성공리에 끝났다.

이제 그녀는 단순히 망나니의 결투광 시녀가 아니라, 궁정 귀족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거물 결투광이 되겠지.

귀족들을 움직여야 할 때도 내가 직접 발로 뛸 필요는 없어질 거다.

일을 늘려준 걸까?

신뢰를 준 걸까?

약간 웃음이 나왔다 가라앉았다.

이제 조금은 더러운 일을 할 때다.

“마테오스.”

여전히 기계 기사들은 나보다 마커스를 따른다.

텐티아 경이 나와 함께 동부로 가게 되니, 그나마 친한 알베토스 경과도 떨어지게 된다.

만약 마커스가 다른 마음을 먹고 세레라지에를 대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러니 감시가 필요했다.

내가 막으려 해도 종합공방에 드나들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감시자가 필요했다.

“종합공방에 성기사 좀 보내 주십시오.”

“아니. 지금 교회를 뭘로 아는 겁니까? 요즘 사방에 파병하느라 성기사가 얼마나 부족한지 아십니까? 요즘 대공이 신실한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결국 교회를 황실의 시녀로 보는군요.”

“…….”

“말 나온 김에 시녀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모두가 힘든 이 시기에 결혼도 안 한 시녀를 애첩 삼아 끼고 다니며 음탕한 놀이와 사치를 일삼는-.”

돈주머니를 꺼냈다.

“보속 헌금은 이 정도면 됩니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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