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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81)화 (281/340)

(281)

본래 제국에서 백작 이상의 귀족은 영지 외곽에 와이번 착륙장을 만들고 운영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2주간 영주 성 옆을 제외하면 와이번 착륙장 같은 건 보지도 못했다.

오늘도 와이번을 타다 잡은 멧돼지 한 마리를 손질해서 챙겨 온 소금과 후추로 굽고 있는 판이었다.

사실 백작의 성에서 하룻밤을 묶는 게 편하기로는 제일 편한 방법이었다.

가서 덕담 한두 마디 해주고 따듯한 잠자리와 풍족한 고기까지 얻어먹을 수 있으니, 아주 남는 장사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럼 황족과 백금 기사에게 줄을 대고 싶어 하는 백작 일가를 상대해줘야 하고, 식사도 대접받았으니 우리가 방문한 백작과 사이가 좋지 않은 옆 영지 백작에게 으름장도 한 번 놔 줘야 한다.

그러다 밤에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다음 날 일찍 출발하기는 그르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는 그렇게 영지 하나에서 며칠씩 보내며 유람하듯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빨리 동부로 가야 했다.

그날 갈 수 있는 만큼 가야 했고, 그러다 와이번이 지치면 아무 곳에서나 쉬어야 했다.

그러니 계승서열 1위인 황형과 백금 기사가 아무 숲속 공터에서 사실상 노숙에 가까운, 아니. 노숙하는 그림이 나온 것이다.

“텐티아 경. 이제 슬슬 그만하고 와서 먹게. 그만하면 다들 정신 차렸을 거야.”

나는 텐티아 경을 불러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익힌 멧돼지 앞다리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도적 무리 중 두목과 패거리 행동대장들은 모두 음…… 무찔렀고, 젊은 아랫것들은 정신이 번쩍 들도록 흠씬 두들겨 패 주었다.

이 세상에서 상대를 몰라본 건 죽을죄였다.

드래곤 괴담의 주인공이 된 젊은 도적들이 벌벌 떨며 네발로 기어 도망치고, 텐티아 경은 실소하며 멧돼지 다리를 뜯어 먹었다.

“전하. 요리도 잘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손바닥 위에서 불길을 피워 올리며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불 조절은 자신 있네. 뭐, 맛은 루디가 챙겨 준 향신료 덕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와이번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을 거 그랬습니다. 그럼 저 무뢰한들도 감히 찾아올 엄두를 못 냈을 테니까요.”

“그럼 우리는 와이번이 먹은 짐승의 피와 내장 냄새를 맡으며 잠들게 되겠지. 그건 싫네. 난 섬세하거든.”

“도적 두목을 재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린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모르는 소리. 그래서 재도 남기지 않고 태운 걸세. 탄 냄새가 피 냄새보다는 낫지 않나?”

“그도 그렇군요.”

텐티아 경이 화제를 바꾸었다.

“제국이 워낙 넓다 보니 지방까지 행정력이 안 미치는 건 알고 있습니다.”

“황실 총독령을 인근 귀족에게 영지로 넘겨줄 정도면 말 다 했지.”

“하지만 도적이 이렇게 많은 건 이상합니다. 이곳도 결국 어떤 기사나 남작의 영지일 테고, 기사나 남작은 소드 엑스퍼트나 마법사일 텐데, 도적 따위를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잖습니까?”

텐티아 경의 말이 맞았다.

중앙 권력은 솔레타라온, 황실이 소유한 교역 도시 및 항구도시 등 총독령, 중부 일대의 직할령에만 통했다.

그러나 그게 그 외의 영토가 주인 없는 무법지대라는 뜻은 아니었다.

영주가 자기 영지를 잘 돌보지 못하면 봉신이나 다른 영주, 교회나 황실이 간섭할 명분이 된다.

따라서 영주들은 들개와 늑대, 그린스킨과 언데드, 도적과 노상강도 등 영민들을 괴롭히는 괴물과 괴물만도 못한 인간들을 잡아 죽이고, 침식을 불러오는 수상한 삼류 마법사와 주술사를 불태우며, 교회에 기부금을 내 사제와 성기사를 육성했다.

물론 기사가 개척촌이나 자잘한 마을이 약탈당하는 것까지 하나하나 지켜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텐티아 경의 아버지 제스터 경은 인구 5천의 도시와 수십 개의 마을을 거느렸다.

말이 좋아 기사지, 타국 기준으로는 세가 조금 약한 백작급의 영주다.

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간섭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건 건축 길드 길드장이 벽돌 등짐을 나르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켜주지 못한다 해도, 복수해줄 수는 있었다.

“그래.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지. 그런데도 이런 꼴이 되었다는 건 무슨 뜻이겠는가?”

텐티아 경이 왜 또 어려운 걸 묻냐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전쟁이 있겠군요. 패잔병과 월급 못 받은 용병들이 죄다 도적으로 돌변한 겁니다.”

“나쁘지 않은 발상이군. 다른 건 없나?”

“잘…… 모르겠습니다.”

“동부 내륙은 너무 평화로웠네. 사람이 너무 늘어나서 땅이 부족해진 거야.”

텐티아 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놀란 눈이 가볍게 떨렸다.

“얼마 전에도 대규모 침식 사태로 몇만 명이 죽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도시는 인구밀도가 높지만 깔고 앉은 땅은 상대적으로 적지. 농토 부족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일세.”

“오는 길에 산과 숲도 군데군데 많이 보았잖습니까?”

“개간이 너무 힘든 바위산이나, 산림 자원을 보호하려 일부러 남겨둔 곳이겠지. 동부 내륙은 다 이렇다네.”

나는 빙긋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동부 해안은 물론 다르지. 그곳 사람들은 모두 굳센 뱃사람들이네. 목숨 걸고 나가 고기를 잡고, 어인족과 해적에 맞서 싸우지. 그렇게 되지 못한 자는 모두 죽어 자식을 남기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일세. 하지만 그들에게 보호받는 이 내륙은…….”

텐티아 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름드리나무에 등을 기댔다.

“이곳 영주도 카리오사 공작의 봉신이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거의 반 이상 왔으니.”

“왜 카리오사 공작이 이들을 무릎 꿇리려 했는지 알 듯하기도 합니다. 자기는 영민들 목숨 버려 가며 싸우고 있는데, 뒤에서는 사람이 너무 늘어서 문제라 하면, 저라도 짜증 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원정이 그녀에게 중요한 거야.”

“섬 간척이라면…… 식민사업이군요.”

“동부 내륙에 넘쳐나는 농노들을 죄다 섬으로 옮기겠다는 거지. 새 봉신들 길도 들이고, 힘도 빼놓고, 인구 문제도 해결하고, 자기 영토도 확장하고. 얼마나 매혹적인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겠지.”

텐티아 경이 기대된다는 듯 웃었다.

“대공 전하를 비싼 값 치르고 빌려 온 이유가 있군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올 때는 막대한 재물과 그 이상 가는 무언가를 챙겨 올 수 있을 거네.”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영지 상태가 안정되어 갔다.

하늘에서 보면 한눈에 보였다.

숲과 경작지, 목초지의 비율에 균형이 잡혔고, 와이번핏에 관리인이 나와서 양과 천막을 가져왔으며, 때로는 영주나 그 대리인이 우리를 기다리다 인사를 올리기도 했다.

당연히 도적 떼나 노상강도, 그린스킨이나 옛것 괴물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카리오사 공작님이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서구보다 빠르게 날아가도록 하지.”

그렇게 솔레타라온 출발 후 약 한 달.

바람에 바다 향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 * *

그날은 하늘이 유난히도 맑은 날이었다.

습기와 약간의 소금기, 물가 특유의 온난한 기운을 가진 바람이 불어왔다.

“전하!”

“그래. 거의 다 왔군.”

저 멀리 파란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다와 번성한 대도시가 보였다.

백상아리를 닮은 바다 괴물 서머린이 찾아와 육상의 사내와 사랑에 빠졌다는 항구도시, 케투시온이었다.

“동부 최대의 항구라더니. 어마어마하군.”

“좌우 길이는 솔레타라온보다 훨씬 넓은 듯하기도 합니다.”

케투시온은 거대한 만을 세 개나 끼고 있는 반달 모양의 도시였다.

하늘에서 내려보니, 바다 괴물이 반달 안쪽을 한 입씩 세 번 깨물어 버린 듯 보였다.

모든 건물은 4층 이상의 석조건물이었고,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탑들도 여럿 보였다.

바닷바람에 맞서기 위함인지 세련되기보다는 투박해 보였고, 건물의 넓이 역시 솔레타라온보다 훨씬 넓었다.

역대 아세노르타들의 취향인지, 모든 건물 벽은 백사장 같은 하얀색이었고, 건물 지붕은 바다 같은 파란색이었다.

저 앞에 파랑이 가득한데, 굳이 건물까지 파랗게 칠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도시 중앙에는 거대한 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기수역이 있었는데, 그 강을 이용해 도시 전체에 바둑판처럼 수로를 팠다.

바닷가에서 짐을 내려서 짐마차에 실을 것 없이, 도시 깊은 곳까지 상선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한 것이다.

“저 강을 통해서 동부 전체로 무역하는군요.”

“동부뿐이겠는가? 최근에 폐하가 운하 하나를 더 개통하셨으니, 이제 중부와 북부로도 갈 태네.”

세 개의 만에 설치된 세 개의 항구 중, 강을 끼고 있는 중앙 항구는 누가 봐도 무역항이었다.

거대한 돛, 60여 m의 선체와 1천 톤에 달하는 배수량을 자랑하는 거대한 범선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범선들은 온갖 가문의 깃발을 달고 있었는데, 심지어 동방 대륙의 깃발이나 저 아래 남방 대륙 아미르 토후국의 깃발을 단 범선도 있었다.

“저건…… 범죄 아닙니까?”

“으음. 일단 여기서 와이번으로 2주 거리까지는 모든 사법권이 아세노르타 가문에 있네.”

물론 그 항구에서 제일 좋은 선착장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세노르타 가문의 상선들이었다.

백상아리 깃발을 단 함선 앞에서 다른 배들은 호랑이 앞의 늑대, 상어 앞 돌돔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가장 작은 세 번째 항구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가장 작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중앙 항구에 비해서 작다는 말이지, 동부의 다른 항구도시 중에서도 손꼽는 규모였다.

그곳의 배들은 놀랍게도 모두 크고 작은 어선들이었다.

“이런 거대 항구에 어업을 남겨둘 줄은 몰랐습니다.”

텐티아 경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중얼거렸다.

“카리오사는 전사지. 금화를 먹고 싸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거야.”

실제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역항’에서 느껴지는 자유의 분위기와 달리, 케투시온은 잘 무장된 도시였다.

도시 중간중간 20m도 넘어 보이는 성벽이 세워져 구역을 철저히 나누고 있었고, 거대한 탑마다 초대형 쇠뇌 발리스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혈관 같은 수로도 창살을 내리고 수문을 닫아 완전히 막아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사의 분위기는 왼쪽 항구에서 정점에 달했다.

“저곳이 군항이군요.”

“그래. 일곱 개 함대를 부린다지.”

그곳의 범선들도 겉보기에 상선들과 아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와 텐티아 경은 그 범선들에 걸려 있을 수많은 주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건 견고함, 가속, 경량화…… 같습니다.”

“당연히 화염 내성도 있겠지.”

“생각보다는 작군요. 전 전함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군항의 범선 중 제일 큰 것도 상선과 비교해서 10m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군선은 50m 정도여서, 되려 작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경. 저 배들은 모두 수송선과 호위선, 상륙선, 위력정찰용 쾌속선일세. 뚱뚱한 게 수송선, 단단해 보이는 게 호위선, 납작한 게 상륙선, 그리고 홀쭉한 게 쾌속선이야.”

“예?”

“거대수로 만든 진짜 전함은 너무 커서 항구에 못 들어오네. 조립도 바다에서 하고, 모든 물자도 수송선으로 받지. 전함은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 거야.”

텐티아 경이 허, 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건, 꽤 멋있군요.”

순간 역풍이 불었고, 두 와이번이 다급하게 날개를 활짝 펴며 바람을 잡았으며, 텐티아 경의 붉은 머리카락이 멋들어지게 흩날렸다.

그 순간 난 그녀가 입 모양으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지 간신히 알아보았다.

“전장에서 태어나, 전장에서 죽는다.”

진짜, 뼛속까지 기사라니까.

도시를 빙 둘러본 우리는 군항 근처에 있는 와이번핏을 향해 내려갔다.

카리오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거짓은 아닌지, 와이번핏 근처에는 이미 상당한 인파가 모여 있었다.

돔 안으로 착륙하는 순간, 난 도시 왼쪽 끝 바위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거성을 올려다보았다.

휘오오오-.

수백 년간 해풍을 맞아온 거성은 황궁보다는 요새에 가까워 보였다.

와이번에서 내려 카리오사에게 줄 선물을 챙기고, 오랜 비행으로 굳은 몸을 한 번 풀어 주고, 와이번핏 개인 휴게실에 들어가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마지막으로 가다듬었다.

그때 내가 보고 있던 거울 뒤로 그립던 얼굴이 하나 나타났다.

“발렌 대공.”

물색 머리카락, 비늘처럼 빛나는 피부, 상어 같은 이빨.

뒤돌아 인사할 틈도 없이, 그녀가 내 목덜미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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