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82)화 (282/340)

(282)

카리오사는 전사된 귀족답게 가오리 가죽옷과 최고급 철편 갑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두 자루 마법검을 차고 있었다.

손가락 긴 두 손이 발렌시아누스의 넓은 어깨에 빨려 들어가듯 내려앉았고, 부드럽지만 단단히 붙들었다.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카리오사?”

거울에 비친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고, 그 새빨간 입술이 벌어졌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망나니 대공의 얼굴에 파문이 이는 건, 썩 볼만한 모습이었다.

“아. 못 참겠다.”

카리오사는 까치발을 들며 발렌시아누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서늘한 물색의 긴 머리카락은 부드럽고 촉촉하게 늘어졌고, 얼굴과 손등의 피부는 진주를 갈아서 뿌린 듯 반짝였다.

이윽고 그녀의 턱이 쩍 벌어지고, 상어 같은 이빨이 바다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듯, 발렌시아누스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독하게 발효한 포도주에 레몬, 계피, 꿀을 타 데운 듯,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입천장을 맴돌다 코를 타고 머릿속으로 올라갔다.

“하.”

그녀의 우묵한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속눈썹 길고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으며, 회색 눈동자 속 검은 세로 동공도 느긋하게 부풀어 올랐다.

탁.

그로 인해 손아귀 힘이 약간 풀린 순간, 발렌시아누스는 한쪽 발을 지지대 삼아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못 보던 사이에 더 거리낌이 없어졌어.”

“어?”

카리오사는 발렌시아누스를 뒤에서 껴안다시피 하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발렌시아누스가 뒤도니, 몸이 붙은 채로 마주 보는 상황이 되었다.

황금빛 눈동자와 회색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깜빡였다.

속눈썹이 맞닿을 듯한 거리였다.

“대영주라면 때와 장소를 가릴 줄도 알아야지.”

엄하면서도 매혹적인 꾸짖음에, 카리오사는 씩 웃으며 달뜬 숨을 내뱉었다.

“끝까지 싫다고는 안 하네?”

발렌시아누스는 다른 의미로 목덜미가 당겨오는 걸 느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럼, 싫겠어?”

욕망에 솔직한 그 모습을, 평생 부러워했다.

카리오사는 발렌시아누스의 몸이 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기운 역시 한결 안정된 걸 느꼈다.

어쩐지 키도 더 큰 거 같았고, 느껴지는 향기도 조금 더 짙어졌다.

그녀는 씩 웃으며 발렌시아누스의 귀를 가볍게 깨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역시…… 난 솔직한 사람이 좋아.”

열기 띤 간지러움이 망나니 대공의 온몸을 떨게 했고, 그가 카리오사의 갑옷이 몇 겹이나 되는지 고민할 무렵,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쿵! 쿵! 쿵!

“전하!”

“저어어언하!”

그들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좋다 말았네.”

카리오사의 입에서 아쉬움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동공이 다시 좁아졌고, 발렌시아누스는 흐트러진 목깃을 접어 올렸다.

“그사이에 이걸 또 풀어헤친 거야?”

카리오사가 경박, 경솔, 경망스럽게 웃었다.

“내가 또 문제 하나는 단숨에 잘 풀어헤치잖아?”

깊은 눈에 가벼운 웃음은 썩 어울리지 않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웃지라도 않으면 미쳐버릴 듯한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단칼에, 말이지.”

그가 위험하면서도 주변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되찾았고, 카리오사는 무표정한 눈매와 핼쑥한 뺨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 단칼에.”

덜컥.

발렌시아누스는 와이번핏 휴게실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기사 둘이 서 있었다.

“발렌 전하. 무사하십니까?”

“전하! 문제없으십니까?”

한 명은 당연히 텐티아였고, 다른 한 명은 철편 갑옷을 입은 동부 기사였다.

텐티아는 하얀 판금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며, 머리는 쇼트커트였다.

동부 기사는 흑회색 철편 갑옷을 입고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며, 머리는 짧은 꽁지머리였다.

둘은 복식부터 대비를 보이고 있었는데, 문 앞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썩 서로가 반가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니. 무사하고 안 무사할 게 뭐 있나? 지금 내가 적진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날 끌어들인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지느러미, 아니 발로 들어왔는데 무슨 문제가 생길 거 같았나?”

발렌시아누스와 카리오사가 동시에 서로를 변명했다.

텐티아와 동부 장교기사 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먼저 입을 연 건 동부 기사 쥴이었다.

“경에게 내 주군을 소개하도록 하지. 카리오사 서머린 아세노르타 공작 전하. 폭풍의 딸. 케투시온의 지배자이자 동부 제일의 대영주이시며, 일곱 함대의 주인이자 닻 군도의 국왕이시고, 47개 항구와 열세 대영주의 보호자이시며, 해적과 어인족의 파멸이시다.”

푸른 눈동자에 경쟁심이 파도처럼 차올랐다.

이에 텐티아 경이 턱을 쳐들며 답했다.

“잘 들었네. 이제 경에게 내 주군을 소개하도록 하지.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대공 전하. 황형이시자 제국의 치안감이시고, 기계 기사들의 지휘관이자 옛 인스트루멘툼 땅의 주인이시며, 침식 검성 엔시스의 살해자이시자 침식자 대주교의 적대자이시다. 또한-.”

나와 카리오사는 서로 얼굴을 붉혔다.

대충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듯했다.

“으음.”

“발렌 대공. 실례하게 되었군.”

가문과 주군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기사 둘이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생길 만한 일이었다.

나는 텐티아 경을 조심스럽게 말렸다.

“경. 그만하게. 이 싸움은 내가 질 수밖에 없어. 카리오사는 13살에 어인족 목을 쳤다네.”

“전하!”

텐티아 경이 죽더라도 물러서지는 않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말다툼 따위에서 그럴 필요 없네.”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래. 전하께서는 수도 함락 사태를 이겨낸 수호자이시고, 아카데미의 보호자이시자, 성자를 두 번이나 납치한 성자 납치자-.”

“경! 마지막 건 칭호가 아니라 악명일세.”

“그게 진짜였다고?”

카리오사가 놀란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고, 동부 장교기사 쥴이 승리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거 보시오. 텐티아 경. 이제 누가 더 대단한 주군을 섬기고 있는지 명백해진 거 같지 않소?”

텐티아 경의 붉은 눈동자가 잠시 떨렸다.

그녀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싸우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텐티아 경이 환하게 웃더니,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엿이나 드시오. 쥴 경. 그 나이 먹고 부모님 자랑하듯 주군의 명성에 빗대어 자신의 이름값을 올리려 하다니. 대단한 주군을 섬긴다고 누구나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오.”

나는 카리오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공작. 내가 방금 고개를 젓지 않았던가?”

“발렌시아누스 대공. 원래 기사는 싸움 앞에서 눈이 돌아가는 인종들이란 걸 알고 있을 테지. 눈이 돌아갔으니 당연히 반대로 보일 거고.”

“그럼 방금 고개를 끄덕였다면?”

“그때만은 똑바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으음. 참으로 편리하군. 나도 다음 생에는 기사로 살고 싶어졌어.”

쥴 경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며 카리오사를 바라보았다.

“전하! 제게 전하와 제 명예를 지킬 기회를 주소서! 망나니 대공과 적기사의 콧대를 꺾어 놓겠습니다!”

텐티아 경도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며 날 바라보았다.

“전하. 제게 승리를 바칠 기회를 주소서. 반드시 전하의 명예를 드높이겠습니다. 소신은 지고는 못 살겠습니다.”

나는 회귀한 자다운 연륜으로 텐티아 경을 다독였다.

“경. 방금 경 입으로 ‘부모님 자랑하듯 주군의 명성에 기댈’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경은 이름 높은 적기사일세.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경은 내 위세 따위를 빌리지 않아도 이미 멋진 기사야. 그러니 일관성 있는 언행을…….”

“제가 하면 사랑, 남이 하면 불륜. 반드시 전하께 명성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눈이 돌아간 텐티아 경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쥴 경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키는 나보다 살짝 작은 정도의 장신이었고, 긴 직도를 차고 있었으며, 다리는 판금 갑옷을, 상체는 큼지막한 비늘 같은 철편을 꿰매 만든 철편 갑옷을 입었다.

왼팔에는 마도구가 분명한 거대한 건틀릿을 끼고 있었는데, 위 팔과 어깨 갑옷까지 한 세트인 듯했다.

카리오사가 데리고 다니는 만큼 천재 소리를 들어 온 뛰어난 동부 기사겠지만.

“그럼, 기대하겠네.”

텐티아 경만큼 강하지는 않은 듯했다.

* * *

와이번핏 안에도 모래가 깔린 연무장 같은 넓은 공간이 여럿 있었다.

원래는 새끼들을 키우는 방 중 하나라 했는데, 지금은 잠깐 비워놓았다고 했다.

모래 역시 교체해서, 파충류 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카리오사가 내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망나니 대공이라는 표현은 내가 대신 사과하겠어.”

“됐어. 기사가 다 그렇지. 게다가 텐티아 경도 한 달 내내 날기만 해서 몸이 굳어 있으니, 풀 기회도 필요할 거고.”

막 두 기사가 투구 면갑을 내리고 검을 뽑았다.

스르르릉!

텐티아 경의 보검 ‘화한’이 거울 같은 검 면을 뽐냈고, 쥴 경의 보도가 물결 같은 검면을 자랑했다.

카리오사가 모양 좋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 기사가 지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 건가.”

난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져? 텐티아 경이?”

그 순간 두 기사가 준비를 마치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사아아아-.

투기가 퍼져 공간을 얼어붙게 했고, 두 기사에게서 생물로서의 위압감이 흘러 넘쳤다.

거대한 맹수나 마수, 거인을 보는 듯했다.

“읏!”

“흐읍!”

둘 역시 서로의 투기를 느꼈는지, 가볍게 몸을 떨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타악!

먼저 땅을 박찬 건 쥴 경이었다.

“파도의 검이여!”

모래가 요란하게 튀고, 두꺼운 가죽옷과 철편 갑옷, 판금 갑옷을 겹겹이 겹친 거구가 바람처럼 날아올랐다.

머리가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의 높이였다.

콰아아아!

그의 검에서 푸른색 마나 블레이드가 줄기줄기 일어났고, 파도가 무너지는 듯한 기세로 텐티아 경을 덮쳤다.

사아악-!

베어 내리는 동시에 앞으로 찌르는 기묘한 궤적을 가진 공격이었다.

해적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갑옷을 입을 테니, 갑옷을 부수고 유효타를 넣기 위해 계속 두드릴 필요가 없었다.

한 번에 한 명씩 확실히 죽이기 위한 기술인 듯했다.

사앗-!

이에 텐티아 경은 제자리에서 뒤쪽으로 한 바퀴 돌며 쥴 경의 검을 흘려내는 동시에, 화한에 피바다 같은 색채의 마나 블레이드를 끌어 올렸다.

“폐하의 가르침이다!”

그녀가 양손으로 쥔 화한을 베어 올렸다.

츠카카칵!

그림 같은 올려 베기가 사선으로 치솟아 올랐다.

타앗!

붉은색 대각선이 허공에 길게 이어졌고, 쥴 경은 그 대각선보다도 높게 뛰어오르며 피했다.

“배와 배를 건너뛰며 싸우는 게 우리 바다 사나이들이다!”

“흐, 하!”

“너희 뭍 놈들은, 너무 느려!”

쥴 경의 직도가 허공에서 세 번 휘둘러졌다.

사아악!

사악!

삭!

텐티아 경이 찰나 간 망설일 정도로 예리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망설임도 잠시, 그녀는 그대로 어깨부터 들이밀며 화한을 휘둘렀다.

쾅!

따다당!

피 같은 색채를 뒤집어쓴 장검이 반원을 그렸다.

붉은색 반원은 세 번의 공격을 모두 걷어내고, 쥴 경까지 밀어냈다.

타다닥.

그는 세 걸음이나 물러서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텐티아 경이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 놈들이 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네놈은 너무 약해.”

“감히 주군 앞에서 날 모욕해!”

“경의 주군을 모욕하고 있는 건 경이다.”

허공에서 투구 속 시선이 부딪히고, 두 기사가 다시 한번 돌진했다.

우우우웅!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쥴 경의 왼팔 건틀릿에서 파괴술 특유의 보라색 기운이 물씬 피어올랐다.

충격파 계통의 마법인 듯했다.

카리오사가 혀를 차고, 텐티아 경은 그 자리에 서서 쥴 경을 기다렸다.

쥴 경은 왼팔을 앞으로 겨누고 직도를 쳐들었다.

베기 공격 후 건틀릿으로 정권을 날릴 생각인 듯했다.

“이것도 받아 봐라! 적기사!”

“기다리다 지치겠구나!”

그걸 모를 텐티아 경이 아니었다.

그녀가 화한을 휘둘러 직도의 베기를 막아냈다.

쾅!

폭음이 일고, 그녀의 다리가 발목 위까지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치직, 치지직!

청과 적의 마나 블레이드가 부딪치며 불꽃이 일고, 파괴술 주문 준비된 건틀릿이 어퍼컷 자세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텐티아 경은 오른쪽 허리춤에서 보검 만하를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쥴 경이 늦었어, 하고 말하는 걸 들은 듯했다.

카리오사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텐티아 경은 만하가 칼집에서 다 나오기도 전부터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다.

용골 특유의 어마어마한 마나 수용성 덕분에 손을 대자마자 수족처럼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스카아악-!

그녀는 위로 베어 올리는 발검으로 건틀릿을 한 차례 막아냈고.

우우우웅!

그대로 밀어내며 마나 블레스트를 펼쳤다.

만하에서 붉은색 초승달이 뿜어져 나갔다.

쾅!

쥴 경이 철퇴에 얻어맞은 듯한 기세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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