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83)화 (283/340)

(283)

기사의 3가지 덕목은 잘 먹고 마시고, 가는 곳마다 애인을 만들고, 싸움에서 승리해 명성을 떨치는 것이다.

혹자는 신실, 충성, 약자에 대한 헌신이라 하겠지만, 그건 덕목보다는 이상에 가깝고.

또, 기사는 기사를 함부로 모욕하거나 죽이지 않는다.

전사 계급의 정점에 선 그들은, 귀족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안하게 되었소. 텐티아 경. 내가 아직 수련이 부족하여 먼 길 온 손님에게 폐를 끼쳤군. 게다가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를 이리 기다리게 했으니, 백번 죽어 마땅하오.”

“아니요. 쥴 경. 모두 내 잘못이오. 손님으로 와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웠고, 주군의 명성에 기대지 말라 말했으면서, 나 역시 주군의 명성을 의식했소. 그대의 주군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려 애쓰는 내 주군의 얼굴에 먹칠했으니, 이 무례를 어찌 갚을 수 있겠소이까.”

피 터지게 싸운 둘이 얼싸안고 엉엉 울며 내 잘못이오, 를 외치는 건, 기사를 거느리다 보면 꽤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슬슬 정리된 듯하군. 이제 나가는 게 어떤가?”

카리오사가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아까 위에서 봤는데 인파가 적잖이도 몰려 있더군.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줘야겠어.”

“한 번?”

카리오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때 난 그 웃음의 의미를 몰랐다.

기껏해야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갈 생각인 듯하다고 짐작했다.

사실 귀족들이 천것들 앞에 얼굴을 비추는 일 자체가 흔치 않았다.

순수한 인간에 가까운 도시민들이 보기에 귀족은 너무 아름답고 신비롭게 생겼고, 혼혈 대귀족이 보기에 평범한 사람들은 세금 내는 들고양이와 다르지 않았다.

귀엽고 기껍지만, 쓰다듬어 주기에는 찝찝하고 거북하다는 뜻이다.

물론 그건 그들이 천해서가 아니라 미용과 위생에 귀족들만큼 신경 쓸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고, 타국에 비하면 제국 도시의 시민들은 아주 깔끔한 편이었다.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향유와 향수를 사용했고, 도시민들은 공중목욕탕을 벗 삼아 매일같이 몸을 닦았으며, 시골 농노들도 주일 예배 전에는 개울에서 머리라도 감고 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갈고 닦아도, 귀족은 엘프 혈통과 짙은 마나로 인해 살과 체액에서 과일 향기가 났기에, 상대적으로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베릭 같은 선량한 왕공 귀족도 신민들과 거리를 두었고, 그 따듯한 마음은 각종 복지 정책과 축제, 감세를 통해 발현되었으며, 간접적으로 그들을 보살폈다.

카리오사도 그럴 줄 알았다.

“공작 전하 만세!”

“아세노르타의 깃발 아래 무한한 영광이 있을지어다!”

“해적 놈들을 죄다 도륙해 주십시오!”

와이번핏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울타리 밖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1만은 넘어 보이는 도시민들이 와이번핏을 둘러싸고 환호하고 있었다.

“세상에.”

지나친 열광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텐티아 경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전하. 마차도 말도 없습니다.”

나는 저 멀리 솟은 거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걸어갈 생각인가? 이, 이 부담스러운 환호를 계속 받으면서?”

카리오사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환호 소리가 두 배로 커졌다.

“와아아아!”

“영주님!”

“우리 영주님!”

그녀가 날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뭐 하는가? 발렌시아누스 대공? 어서 따라오지 않고.”

나는 최대한 위엄을 차리려 노력했다.

고개를 쳐들고, 가슴을 펴고 어깨를 눌렀으며,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카리오사 옆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

“……! ……!”

순간 환호가 극에 달하고, 그녀의 세로 동공이 커졌다.

카리오사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항만 쪽으로 걸었다.

영주님께서 거리를 친히 활보하시는 이 그림이 꽤 익숙한지, 시민들은 계속 달라붙지 않았다.

수도였으면 제이릴리스의 그림자라도 한번 보려 몰려온 사람들 때문에 난리가 났을 텐데.

“영주님이시다!”

“아세노르타 만세!”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거나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그녀가 지나갈 때까지 머리를 조아렸고, 카리오사는 가볍게 손을 들어 답했다.

그녀는 수백만, 아니 이제 수천만에 달하는 영민을 거느린 대영주답지 않게, 지주 기사도 하지 않을 소박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얼마인가?”

거리에서 과일을 사 나와 텐티아 경에게 건네주고.

“요즘 진상은 없겠지?”

커피하우스에 들어가 커피를 들고나왔으며.

“혹시 어인족 지느러미나 해적 깃발 따위가 눈에 띄면 바로 말하게. 내 곧바로 바람을 몰고 가 죄다 도륙해 버릴 테니.”

출항을 앞둔 선장들에게 장담을 늘어놓았다.

멋들어지게 포장된 항만 앞길.

파도 소리가 들리고 범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가운데.

나는 그녀가 내가 알던 카리오사가 맞는지 고민했다.

* * *

대낮의 군항은 한산했다.

하기야 배가 부두에 있는 이상 병사들은 소집 해제된 상태일 거고, 일반인들이 이쪽에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의외로군.”

나와 카리오사는 나란히 항구 옆길을 따라 저 앞에 보이는 성을 향해 걸었다.

쏴아아아.

성 위로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가운데, 파도 소리가 울렸다.

슬쩍 눈을 돌리자, 카리오사가 어깨를 으쓱하는 게 보였다.

“의외라니?”

“좀 더 권위 어린 모습을 보여줄 줄 알았다. 완전무장 한 기사들, 해마의 피가 섞인 기이한 말, 비늘무늬 새겨진 거대한 마차, 고래고래 소리치며 신민들을 몰아내는 포고꾼, 위압적으로 펄럭이는 백상아리 깃발…… 그런 것 말이다.”

카리오사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수도에 왔을 때처럼?”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처럼.”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뱃사람들은 의외로 평등하고 순종적이거든. 그들이 내게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내 말에 철저히 복종하는 이상, 나도 그들을 위협할 필요가 없지.”

“음.”

“또, 난 내 영지에 도둑놈이나 깡패들이 설치게 두지 않아. 나 말고 두려워해야 할 자들이 없으니, 다들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지.”

저 멀리 성 근처에 긴 장대가 열댓 개 솟아 있었고, 장대마다 반쯤 해골이 된 시체가 주렁주렁 걸려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시체를 매달았고, 그 시체가 언데드가 되었는데도 그대로 묶어둔 듯했다.

텐티아 경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항은 거대했지만, 무역항 쪽에서 안 보일 거리는 아니었다.

즉, 모든 시민이 영주 성 앞에 걸린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카리오사가 회색 눈동자에 은은한 열기를 품었다.

“해적 선장들이야. 배신자들도 몇 명 섞여 있지.”

복수심 어린 미소가 그 입가에 어렸다.

“언제나 본보기는 확실하게 보이고 있지. 동부는 언제나 전쟁 중이고,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두려워하는 사람을 배신할 때 망설이거든.”

휘오오오.

그 순간 바람 방향이 바다 쪽으로 바뀌었다.

콱.

카리오사가 훅 다가와 내 양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회색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빛나고, 상아 이빨 가득한 입이 날 삼켜버리고 싶다는 듯 슬쩍 벌어졌으며, 비늘처럼 빛나는 얼굴에 홍조가 일어났다.

물건을 납품하러 온 상인들과 바다에서 제일 위험한 선원들이 대낮부터 군항에서 달라붙은 우리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달려왔지만, 그들의 주인 되는 여인의 물색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카리오사는 그들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날 올려다보았다.

분명 내 시선이 위인데도, 한없이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컸어?”

난 그제야 그녀가 이 동부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 알 듯했다.

정적들은 단호히 처형하고, 아랫것들에게는 승자의 여유를 보여주며,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발렌시아누스.”

“그래.”

“이 땅과 바다는 모두 내 어장이야. 먹이를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렇군.”

“내가 뭘 해도 아무도 막지 못해.”

나는 뭐라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자신감에 내심 경탄을 표하며, 혈마법으로 입술 안쪽에서 피를 냈다.

카리오사가 내 입안에 손가락을 우악스럽게 집어넣었고, 진주 같은 손톱에 피를 찍었다.

텐티아 경이 저런 미친 자를 보았나, 하고 중얼거리는 게 얼핏 들렸다.

카리오사가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말했다.

“둘이서 올 줄은 몰랐어. 넌 너무 무방비해.”

회색 눈에 달뜬 열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답했다.

제복이 살짝 흐트러져서, 빠르게 정리했다.

“셋에서 와도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 공작이 말했듯, 여기는 공작의 어장이니까.”

카리오사가 피 묻어난 손가락에 입 맞춰 묻어난 핏기를 가볍게 훔쳤다.

내가 아까 잡고 번쩍 들었던 손이었다.

“……너무 심한 도발이었어. 눈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고. 내가 황실의 권위를 원하는 걸 안다는 뜻이었잖아? 그렇지?”

그녀는 황족이 와서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주는 그림을 원했고, 나는 곧바로 그걸 주었다.

저 타고난 포식자가 지독히도 들뜰 수밖에 없도록.

더 바라지는 않도록.

그리고 내 일탈을 용납해주도록.

난 자신만만히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러라고 한 일인데.”

카리오사가 혀를 내둘렀고, 텐티아 경이 맙소사, 죄다 똑같았군, 하고 중얼거리는 게 얼핏 들려왔다.

* * *

우리는 그대로 항만을 가로질러 바위 언덕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하나하나가 넓고 높아 우르르 달려오기 힘들었고, 중간중간 옆에 무너트리기 쉬운 돌기둥을 새워 놔 만약의 경우 방어선으로 쓸 수 있게 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는 궁전이 아니라 요새인 듯해.”

“내가 13살에 이 항구로 어인족이 상륙했지. 여기도 대공 생각만큼 안전한 곳이 아니야. 오는 길에 못 봤나? 하얀 벽마다 붉은 자국이 남아있는 거?”

“최대의 항구인 만큼 공격하기도 쉽다는 건가?”

“강을 따라 내륙 깊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으니까. 어인족 놈들이랑 해적 놈들에게는 최고의 거점이지.”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이 길과 앞길까지 단 두 개였고, 그나마도 이 위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높게 솟은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이중벽이 하나 더 있었고, 복도마다 강철 차단벽이 숨겨져 있었으며, 장전된 발리스타도 곳곳에 보였다.

“여기서 싸움이 벌어질 정도면 이미 틀린 게 아닌가?”

“내 진정한 거점은 이 도시가 아니라 바닷길로 이어진 수십 개의 항구야. 최소한의 방비는 당연히 해놔야 한다고.”

동부 제일의 대영주답게, 그녀의 성 역시 화려했다.

거대한 산호와 진주로 장식한 중앙홀 샹들리에는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웠고, 천장과 벽, 바닥까지 호박으로 치장한 복도는 온갖 사치를 즐겨본 나로서도 입이 쩍 벌어졌으며, 응접실 벽을 장식한 긴 태피스트리에는 아세노르타 가문의 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서머린과의 사랑으로 시작된 가문, 거대한 바다 이물과의 싸움, 무시무시한 어인족, 끝없이 밀려오는 해적, 그리고 그 모든 걸 이겨낸 승리의 역사.

“저건 공작인가?”

마지막 태피스트리에는 어린 소녀가 항구에서 싸우는 모습이 수놓아져 있었다.

후광 찬란한 소녀의 모습과 도륙되는 어인족을 보고 있자면, 10여 년 전의 모습이 아니라 무슨 창세신화를 보는 듯했다.

카리오사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야. 열세 살이었지. 파도가 미친 듯 몰아치고 그때마다 바닷속에서 괴물이 튀어나왔어. 그리고 난 그 괴물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후작이 될 자격을 증명했지.”

그녀의 입가에 스스로 선 자의 자부심이 어렸다.

“이제는 왕이 될 자격을 증명하려 하는군.”

“맞아. 닻 군도에 있는 해적 놈들을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다음에 새로 얻은 봉신들의 농노를 대상으로 식민사업을 펼쳐야지.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키면 안 되니까. 힘 좀 빼놔야지.”

“반란이라.”

난 쓰게 웃었고, 카리오사는 어깨를 연극적으로 으쓱했다.

“반란이고말고. 불만 있으면 날 이겼어야지.”

“그 태도. 내 마음에 쏙 들었어.”

“그럴 줄 알았어. 그다음에는 광산을 개발하고, 농토를 개간하고, 요새를 쌓을 거야. 빌어먹을 해적 놈들의 씨를 말려버려야지.”

“해적 두목들의 목을 죄다 베어야겠군. 제일 위험한 놈이 누구지?”

카리오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해적왕 아퀼라. 닻 군도에 요새를 쌓았지.”

“강한가?”

“강한지는 모르겠고, 맛있게 생겼어.”

피에서 마나 향기가 느껴진다는 뜻이었다.

“강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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