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85)화 (285/340)

(285)

“돛을 펴라!”

“우리는 닻 군도를 완전히 포위할 것이다!”

“창고를 가득히 채워라. 한동안 육지에 발을 딛지 못할 것이니.”

동쪽 바다는 수심이 깊고 파도가 거셌지만, 전장 150m에 달하는 불침전함(不沈戰艦) 앞에서는 그 파도조차도 작은 물결처럼 보였다.

12척의 전함이 짙은 남청색 바다 위에 3열로 늘어서 공간을 모두 장악한 듯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그 행렬의 선두에 푸른 바탕에 백상아리를 그려 넣은 깃발과 소용돌이치는 폭풍 깃발을 모두 건 열세 번째 함선이 있었다.

열두 전함과 수백의 수송선, 상륙선, 쾌속선, 호위선을 총지휘하는 기함, ‘템페스타’였다.

템페스타는 돌격 명령을 내릴 순간을 고르는 왕처럼 침묵했고, 열두 전함은 충직한 기사처럼 그들의 왕에게 눈과 귀를 집중하며, 종자들의 시중을 받았다.

“비스킷, 염장 고기, 성수, 연고…….”

전함이 기사라며, 종자에 대응하는 배들이 이 수송선들이었다.

폭풍함대의 수송선은 전장 60m에 부풀어 오른 빵처럼 큰 덩치를 가진 거대 범선이었지만, 150m에 달하는 전함 앞에서는 상어를 따라다니는 빨판상어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수송선 수백 척이 토해내는 물자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라서, 전함의 거대한 창고도 그득그득 들어차고, 아랫단이 조금 더 물 밑으로 꺼져 들었다.

“전하! 보급이 완료되었습니다.”

카리오사를 따르는 바다 사나이들은 언제나 ‘전하!’에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오랜 세월을 후작 각하로 살아온 카리오사가 공작 전하가 된 게 고작 작년 일이다.

수백 년을 이어온 가문의 격이 오르는 순간을 함께한다는 영광이 그들 모두의 목소리에 어려 있었다.

카리오사가 호탕하면서도 간드러진 웃음으로 답했다.

“그럼. 해 뜨는 바다로 가자.”

전함 옆에 있던 수송선들과 호위함 일부가 항구로 돌아갔고, 거대한 전함 열두 척이 기동하며 물결을 일으켰다.

촤아아아-!

3열을 2열로 바꿔서 좌우 두 줄로 늘어선 대형을 만들자, 그사이 넓은 공간에 상륙선 수십 척이 들어왔다.

쾌속선과 호위함들이 기사의 부하들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함 옆으로 달라붙었고, 거대한 쐐기 같은 형태가 만들어졌다.

전함 한 척 한 척이 워낙 거대했고, 호위함이니 쾌속선이니 하는 배들까지 거느리다 보니, 선두의 기함 템페스타부터 최후미 전함까지의 간격은 5km도 넘었다.

까마득하다 못해 수평선 아래로 사라져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부에서 제일 강력한 함대의 선원들은 깃발, 물수리 전서응, 비룡 기사들을 통해 순식간에 상황을 전달했다.

카리오사가 흡족하다는 듯 웃으며 선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기함의 선장은 항해사에게, 항해사는 전투 마법사들에게 지시해 다시 한번 바람을 일으켰다.

펄럭!

촤아아아-!

거대한 삼각돛이 부풀어 오르고, 움직이는 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나는 카리오사 옆에 서서 이 모든 걸 바라보았다.

“장관이로군.”

회귀 전에 내 활동 무대는 대부분 육지였기에, 이런 전함을 제대로 타 본 적은 없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얼굴에 스쳤다.

카리오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가문은 이런 함대를 일곱이나 거느리고 있는데도 공작 작위를 못 받았었지.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배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해적, 어인족 도살 전문가들이 가득가득 타 있었다.

그녀는 이런 함대를 여섯 개나 더 거느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목덜미가 가볍게 당겨오는 걸 느끼며 답했다.

“그래서였을 수도 있다.”

“그게 무슨 물고기에게 젖 먹이는 소리…… 아.”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공작급인 가문인데, 그걸 인정해줘 버리면 안 되었겠지. 우리 아세노르타가 동부를 완전히 먹어버릴 테니까.”

“제이릴리스 폐하 전까지만 해도 황실의 기조는 어떻게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거였으니까. 또 형평성 문제도 컸다. 공작이나 대공 작위를 주려면 계속 세베릭의 셉텐트리오스하고 비교하게 되니까.”

카리오사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돼. 황실이 피 흘리기 싫다고 한 가문에게 북부 땅을 죄다 몰아줘 놓고, 그거하고 같은 권세를 갖추라는 건 어느 세상 논리지?”

난 어깨를 으쓱했다.

“어리석은 물음이다. 공작. 이 세상 말고도 그런 논리가 통하는 세상이 있을 거 같아?”

“하. 그것도 그렇네. 생각해보면 좋은 세상이야. 그러니까 내가 이래도 되는 거지.”

그녀가 내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 보이더니, 내 귓불을 가볍게 깨물었다.

내 옆에 서 있던 텐티아 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배에 타 있던 종군 사제가 주를 부르짖었다.

“선원들이 본다.”

“보라고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남자를 끼고 다니는지.”

“50대 궁정 귀족들이 애인을 데리고 다니며 할 만한 소리군.”

카리오사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물색 머리가 앞으로 날리고, 회색 눈이 열기가 차 빛났다.

“50대 궁정 귀족도 그 짓을 하는데, 내가 못 할 이유가 있을까?”

“맙소사. 같은 단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었네.”

“많은 단어가 그렇지 않나? 신실, 자비, 충성…….”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 속에서 신실은 기도 횟수가 아니라 기부금 액수를, 자비는 용서가 아니라 용서받아 마땅한 상태를, 충성은 헌신이 아니라 강자에 대한 굴복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걸 제대로 쓴 사람들이 칭송받는 거지. 텐티아 경이나 나 같은.”

카리오사가 눈을 부릅떴다.

“넌 빼지? 동부 영주들 군량을 다 태워버렸으면서. 양심이 남아 있는- 아. 그럴 리가 없지.”

난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같이 낄낄 웃었다.

발렌시아누스와 양심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양심 없는 소리였다.

텐티아 경과 종군 사제가 목덜미를 잡았다.

“침식자는 잘 잡아 죽이고 있지?”

“내 직할령은 원래 깔끔했고, 내 봉신들도 꽤 깔끔했어. 새로 편입된 곳들이 문제인데, 치안 유지랑 식민 사업 진행 겸해서 군대를 보내 놨고, 신학교에 추가 자금도 지원 중.”

“좋네.”

“그래. 좋지. 하루에 한 1천 3백 명씩 태워 죽이고 있다는데.”

* * *

해적 제독 타르티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출항을 준비했다.

잘 손질한 동방 식 붉은 갑옷이 번쩍번쩍 빛났고, 사슴뿔 투구는 저택 대문처럼 웅장했다.

“내가 그 빌어먹을 쪽빛 사제 놈을 꼭 잡아 죽이고 만다. 바닷물에 몇 번 담그고 빼면 버릇이라는 걸 배우게 되겠지.”

그의 함선 30척과 그와 함께 노략질에 나설 다른 제독들의 함선 백수십 척이 항구에 모여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다리가 보인다! 이 머저리들아!”

해적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죄수 출신 이주민들을 닦달했다.

그들은 따개비 자라는 몸을 이끌고 배에 보급품을 실었다.

한 죄수가 판자 사다리 위를 걷다 휘청였다.

“어?”

죄수가 그대로 물속으로 빠졌다.

풍덩!

평소였다면 헤엄을 쳐서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그는 지쳐 있었고, 다리에는 무거운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 ……!”

발버둥 소리와 물거품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타르티는 해적들을 거칠게 해치며 물가로 다가갔다.

“비켜 봐. 예쁜 남자애인가 보게.”

“하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동방 대륙 해적들은 배에 여인 대신 예쁘장한 소년을 태우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살려 주십쇼!”

타르티는 물에 빠진 죄수가 수염 난 40대임을 확인했고,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봐 버렸네. 눈 버렸다.”

그의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여인이 조소했다.

“구할 수 있는데도 안 구해줘? 너 물 위 걸을 수 있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낮고 중성적이었고, 얼굴에는 긴 흉터가 있었으며,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두건을 썼다.

악명 높은 암살자이자 타르티의 오랜 친구, 사야 옌이었다.

타르티는 양손을 연극적으로 들어 보였다.

“나 같은 귀하신 몸이 그런 노동을 함부로 할 수는 없지. 내 부하들도 그렇고. 게다가 저놈 최소 강도살인 급 흉악범이라고. 여기서 가라앉는 게 속죄 아닐까?”

사야 옌이 다시 한번 조소했다.

“너 자신이 거물급 해적인 건 알고 하는 소리지?”

“나만 악당이냐? 너도 똑같아. 인마. 빨리 가자. 동부 항구도시들을 다 털어먹어야지.”

“위로 올라갈 거야?”

타르티가 질린다는 듯 답했다.

“아니. 남쪽으로 내려갈 거야. 최근에 북부 대공이 북쪽에 부동항 하나를 얻어서 아주 난리래. 난 소드 마스터랑 싸울 생각 조금도 없어.”

소드 마스터라는 말을 들자, 사야 옌 역시 이를 떨었다.

“대체 그런 괴물 같은 놈들이 왜 생기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 남쪽으로 내려가자.”

붉은 갑옷을 입고 붉은 두건을 두른 타르티의 부하들이 하나둘 승선했다.

그들은 가문이 몰락한 뒤에도 타르티를 따라온 충신들이었다.

타르티는 여전히 문장 깃발을 든 부하들과 그를 따라오고자 희희낙락하고 있는 다른 해적 제독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잔혹하던 눈빛에 우수가 차기를 잠시, 그는 대나무 해도를 펼치며 바닷길을 파악했다.

그가 체스 말 몇 개로 점선을 그렸고, 옆에서 보던 사야 옌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 백상아리가 거느린 함대랑 싸울 생각은 아니지? 그러다 진짜 죽는다. 배 체급부터 다른 거 알잖아. 실수 어쩌고 하면서 그쪽으로 데려가면 가만 안 둬.”

타르티가 어울리지 않게 의뭉스럽게 웃었다.

“알잖아. 아무리 큰 배도 혼자 꾀어낸 다음에 사방에서 조지면 잡을 수 있는 거.”

사야 옌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죽고 싶으면 그냥 내게 말하지.”

타르티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나 혼자 한다는 소리는 아니지. 그래서 이렇게 많이 데려가는 거잖아. 홍보까지 해가면서.”

“!”

사야 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닻을 올려라!”

“따듯한 남부로 가자!”

“빈집털이 작전 시작이다!”

이름난 해적 제독인 타르티가 함께한다는 소식에 해적 제독들과 민간 사략선 선장들이 잔뜩 몰려왔다.

아무리 불침전함이 강해도 한 척 정도는 어찌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타르티가 야망에 찬 소년처럼 웃었다.

“안심해. 나도 바다에서 백상아리랑 싸울 생각은 없어. 쟤들이 시간을 끌어주면 그때 배에 올라타서 백병전을 벌일 거야. 내 애들은 다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니까. 그 불침전함 한 척만 있어도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사야 옌은 마지막까지 의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끝나고 쟤들이 너한테 칼을 겨누면? 우리를 칼받이로 썼냐면서.”

타르티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때 난 불침전함을 가지고 있겠지. 그리고……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사야 옌이 다섯 손가락을 모아 창처럼 뾰족하게 만들었다.

타르티는 낄낄거리며 간판 위를 달려 도망쳤다.

“자! 가자!”

‘이참에 경쟁자들을 좀 털어 내고, 큰 배 한 척을 마련하고, 빌어먹을 쪽빛 사제에게 아주 큰 엿을 먹여 주자고.’

* * *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다.

바다 아래로 태양이 떨어지는 모습은 언제나 처연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모두 여기서 함께 죽으리라.”

“우리가 불타야 한다면, 모두 여기서 함께 불타리라.”

“전하는 불타지 않으시잖습니까?”

“그도 그렇군.”

텐티아 경과 몰락의 서사시를 읊으며 즐기고 있자니, 저 동쪽 하늘에서 바다 수리한 마리가 날아왔다.

“정찰이군.”

수리가 돌아와 전투 마법사의 가죽 건틀릿 위에 앉았다.

수리와 마법사의 눈은 모두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잠시 후 사그라들었다.

마법사는 수리에게 고깃덩이 하나를 먹였고, 수리는 기분 좋게 울며 새장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놈들의 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총 170척이 넘는 함대입니다. 이름난 해적 제독, 아니. 두목이 직접 나선 듯합니다.”

전투 마법사가 그들의 군주에게 보고했다.

순간 카리오사의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어렸다.

그녀의 세로 동공이 수축했고,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입술이 말려 올라가고, 상어 같은 이빨이 엿보였다.

굶주린 맹수가 뜨거운 피 냄새를 맡은 듯했다.

이윽고 그녀가 설렘에 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폭풍함대. 사냥을 준비하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