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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아아-.
밤바다는 고요하고 서늘하며 신비로웠다.
저 멀리 하늘의 어둠과 수평선이 하나로 녹아든 경계가 자꾸만 물결치며 보는 이의 정신을 빼놓았다.
내가 아니었다면 혼란에 찬 정신이 오염되거나 경계 너머의 존재가 찾아왔을 만큼 기이한 광경이었다.
이래서 뱃사람들이 미신을 많이 믿나 보다.
쏴아아아-.
기함 템페스타는 호위함도 쾌속선도 거느리지 않고 홀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늘을 오가던 비룡 기사들도 보이지 않았고, 뒤따르던 함대도 보이지 않았다.
카리오사는 흉흉한 미소를 지으며 항진만을 명령했다.
나는 의구심에 차 물었다.
“공작. 왜 함대를 대동하지 않는 거지? 해전에서도 숫자는 곧 힘일 텐데?”
그녀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대공. 육식성 사냥감을 잡기 제일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
“자기가 사냥하고 있다고 믿을 때…… 라는 건가?”
“1대 1 싸움에서 공격 사이에 속임수를 섞고, 평야 회전에서 부대 사이에 가짜 빈틈을 만드는 거랑 똑같아.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훨씬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거지.”
저 멀리 크고 작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170척이 넘는 범선들이 일제히 다가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동방 대륙 언어로 뭐라 떠드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범하자-.”
회귀 전에 공부해둔 탓에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썩 살려주고픈 마음이 생기는 말들은 아니었다.
카리오사가 서늘하게 명령했다.
“돛을 접어라. 그리고 깃발을 내려. 낚시할 때 물고기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필요는 없지.”
이건 전쟁이 아니라 토벌이었다.
쏴아아아-!
한 척의 전함이 수백 척의 해적선을 향해 전진했다.
척, 척, 척, 척.
등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기사 20명과 소드 유저급 종자 80명이 간판 위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비늘 같은 철편을 꿰매 만든 갑옷을 입었고, 두 자루 이상의 직도를 찼으며, 카리오사 못지않게 흉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동부의 바다 사나이, 해적에게 재물을 빼앗고 어인족을 회 쳐 먹는, 바다에서 제일 잔인한 전사들이었다.
“준비 완료했습니다.”
카리오사가 낄낄거리며 선두의 해적선을 바라보았다.
꽤 커다란 배였지만, 템페스타 앞에서는 호랑이 앞의 고양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배가 선봉장의 영광 또는 굴레를 차지한 듯했다.
“……! ……!”
두목으로 보이는 사내가 뱃머리에 서서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두 배의 간격이 300m쯤 되었을 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나는 내심 전투 마법사들이 주문을 발사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움직인 건 마법사들이 아니라 간판에 모인 기사와 정예병이었다.
“‘망치 상어’ 가레온. 백상아리의 명령을 받듭니다.”
“‘눈먼 작살’ 켈시. 백상아리의 명령을 받듭니다.”
두 기사가 각자 종자 넷을 거느리고 물속으로 몸을 날렸다.
풍덩!
나와 텐티아 경은 기겁하며 카리오사를 바라보았다.
“공작! 무슨 인신 공양 주술이라고 쓰는-.”
카리오사가 고개를 저으며 수면을 가리켰다.
“뭍에서 온 촌놈 티 내지 마. 발렌시아누스.”
텐티아 경이 탄성을 흘렸다.
“……세상에.”
두 기사와 여덟 종자가 물고기보다 빠르게 수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차라라라락!
갑옷을 이룬 강철 비늘 한 장 한 장이 파도치듯 연달아 비틀리며 추진력을 만들었다.
그게 경량화, 부력 증가, 진동 증폭 등의 주문과 함께하니, 바다 사나이들은 문자 그대로 바다를 제집처럼 누볐다.
그들이 해적선 앞까지 다다르자, 해적선 간판도 분주해졌다.
“온다!”
“우리도 건너가야 한다! 갈고리 가져와!”
“쟤들이 갈고리 던지는 걸 끊어야 한다. 다들 준비해!”
그때 카리오사가 전투 마법사들에게 손짓했다.
“전격 방사의 화살.”
한 전투 마법사가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 거대한 은 화살을 들고 와 기함에 장착된 대형 쇠뇌에 걸었다.
치지지직!
그가 은 화살에 전격 주문을 부여했고, 화살이 푸르게 달아올라 빛났다.
“발사.”
치이이잉!
쇠뇌 화살이 쇠뇌를 떠나고, 푸른 불꽃을 튀기며 300m를 날았다.
어둠을 밝히는 그 모습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청상아리 같았다.
그러나 나는 화살이 해적선을 맞추지 못 하리라고 생각했다.
각도를 보아하니 이대로라면 간판 위를 헤엄치듯 낮게 가로지를 듯했다.
쐐애애액!
예상대로 화살은 간판 위를 길게 가로지르기만 했다.
치지지직-!
나뭇가지 같은 전격 수십 줄기를 뽑아내 그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감전시키면서.
세레라지에의 ‘확산’ 술식이 없는 이상, 전격은 범위 공격에 효율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해적 중 그 전격을 맞고 죽은 이는 없었다.
“아아악!”
“이 X발!”
“조졌…….”
그러나 잠시 몸이 굳기에는 충분했고, 그때 열 개의 갈고리가 간판에 걸렸다.
촤라라락!
두 기사와 여덟 종자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배에 올라섰다.
해적 선장과 항해사가 다급하게 노잡이들까지 무장시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 죽어라.”
“항복하는 자는 목을 잘라 죽일 테고, 끝까지 싸운 자는 바다에 던져질 것이다!”
어느 쪽이 해적인지 모를 문장을 내뱉으며, 두 기사가 검을 뽑았다.
* * *
해적선이 함락되는 것보다, 종자들이 잔당을 소탕하고, 시체와 다친 해적들을 바다에 던지는 게 더 오래 걸렸다.
카리오사는 기함으로 돌아와 선장의 목을 바친 두 기사를 칭송했고, 내게 씩 웃어 보였다.
“해전은 이렇게 하는 거다. 대공.”
나는 남은 해적들이 쉽게 나서려 하지 않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기세를 꺾어놓고, 패주하는 적들을 쫓아가 도륙하는 건가?”
“그렇지. 큰 틀에서는 육지와 같다. 자. 다음에는 누가 나설지 보자고. 용감한 자나 약한 자가 나서겠지. 이번에는 아마 여섯 척이나 여덟 척쯤 나올 거다.”
“왜 죄다 몰려나오지 않고…… 아. 멍청한 질문이었군.”
텐티아 경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고, 난 작게 속삭였다.
“백병전으로 이행하려면 붙어야 하는데, 아무리 전함이 커도 한 번에 붙을 수 있는 숫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 밖에서 공격할 수단도 마땅찮고.”
“단순히 한 명의 기사가 여러 병사와 싸우는 것과는 다르군요.”
카리오사의 말대로 이번에는 일곱 척이 나왔다.
멀리서부터 대형 쇠뇌를 쏘며 다가왔고, 용병 마법사가 있는지 화염구 같은 주문을 날리기도 했다.
눈먼 쇠뇌에 병사 하나가 꿰여 죽었지만, 그 외의 사상자는 없었다.
용병 마법사들은 첫 주문을 쓰자마자 위치를 특정 당했고, 아세노르타 전투 마법사들의 디스펠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우리 배가 훨씬 크다 보니 저들은 쇠뇌도 위로 쏴야 하는군. 그냥 조준 자체가 힘들어 보여. 이게 전함의 위용인가?”
카리오사가 물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뭍 식으로 비유해 보자면, 키 6m의 거인을 병사 여섯으로 해치우려는 꼴이지. 이제 슬슬 눈 돌아간 놈들이 나올 거다. 돌진해서 들이받으려 하겠지.”
그녀는 예언자라도 된 듯 말했고,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충파다!”
“불태워버려라.”
이에 그녀는 전투 마법사들을 시켜 불꽃 화살을 발사, 돛을 죄다 태운 다음, 기사들을 보내 유령선으로 만들어버렸다.
유령선이 된 배가 우리 옆을 지나쳤다.
“가라앉히지는 않는 건가?”
“가라앉히려면 얼마든지 가라앉힐 수 있지. 싸구려 배는 그렇게 처리해. 그런데 마법 회로를 새겨 만든 제대로 된 대형 범선은 한 척당 금화가 수천 닢이야. 함대를 일곱 개나 굴리려면 유지비가 미친 듯이 나온다고. 그러니까 내 성격이 이 모양이 되었지.”
나는 준비하던 불의 창을 시무룩하게 흩었다.
카리오사는 기사들이 베어 온 해적 두목들의 머리를 툭툭 걷어차고 있었다.
나도 이제 군대를 유지한다는 게 대충 얼마나 드는 일인지 알았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카리오사가 막 들어온 머리 하나를 들어 올리며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등 뒤에 걸린 마법 등잔이 그녀의 물색 머리에 아득한 후광을 비췄다.
동부의 백상아리가 해적 선장의 머리를 사냥 대회 우승 잔처럼 쳐들었다.
“히히.”
잘린 목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저건 이해 못 할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내 머리도 자르고 싶나?”
카리오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니. 세상에는 살아있을 때 더 아름다운 게 많아.”
툭.
그녀가 들고 있던 머리를 바닥에 던지고, 날 기둥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다고 했으면 어쩔 뻔했어?”
“아.”
“너희 황족은 너무 무방비해. 그리고 너무 완벽해. 도전해보고 싶게 만들어. 알잖아? 높은 산은 오르고 싶고, 아름다운 꽃은 꺾어서 가지고 싶고. 그런 거야.”
나는 회귀 전에 어느 나라의 공주와 왕자들에게 했던 짓을 떠올렸다.
그건 강대한 혼혈 귀족과 용혈 황족의 본능과도 같았다.
“……피 냄새에 취했군. 정신 차려. 공작. 네가 최고 지휘관이야.”
“그래. 알아. 지금도 잘 보고 있다고.”
카리오사가 기둥에서 손을 떼고 적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거리에서도 해적들이 동요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상태를 보아하니, 애초에 결전을 치르겠다는 각오로 나온 게 아닌 듯했다.
“왜 카리오사가 여기 있는 건데?”
“우리를 약탈하려고 남부로 가는 거 아니었어?”
“타르티 그 개자식이!”
동방 대륙 말과 제국 공용어가 뒤섞인 욕설이 끝도 없이 들려왔다.
이미 템페스타 뒤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유령선만 서른 척이 넘었다.
결전의 각오로 나왔어도 사기가 꺾이기 충분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근처 장교 기사에게 물어보니, 저 배들은 전투 끝나고 와이번으로 찾아서 선원들을 투하, 항구로 보낸다고 한다.
“텐티아 경. 우리가 할 건 아무것도 없을 듯하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하.”
나는 아예 선실로 들어갈 생각까지 했다.
그때 해적선 스무 척이 한 번에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중에 붉은색 바탕에 하얀 글씨가 쓰인 깃발을 단 배가 세 척 있었다.
* * *
카리오사는 이번에도 그들이 충분히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동부 기사 10 명과 종자 40명을 보냈고, 전격 방사 쇠뇌를 준비시켰다.
차르르륵!
갑주 비늘이 회전하며 물살을 일으키고, 기사와 종자들이 돌고래처럼 파도를 갈랐다.
“발렌 전하?”
선실 문을 열고 있던 텐티아 경이 날 불렀다.
나는 붉은색 깃발을 단 배에 탄 해적들을 바라보았다.
“쟤들은 해적이 아닌데?”
그들은 동방 풍의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었고, 오거의 얼굴을 따라 한 철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가면은 동방에서는 소드 유저 급만 쓰는 것이었다.
뭔가 불안해져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물론 내가 아는 걸 카리오사가 모를 리는 없었다.
게다가 동부 기사들은 소드 엑스퍼트고, 이 배에는 강력한 전투 마법사들이 가득하며, 정 안 되면 나나 카리오사가 직접 마법으로 구워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 세 척의 배에서 동방 무사 90여 명이 뛰어내린 순간, 안도감도 그만 안녕이었다.
“미친.”
나는 반사적으로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촤악! 촤아아악!
동방 식 갑옷을 입은 무사들은 물 위를 걸었다.
무릎까지 물속에 잠기는 자도 있었고, 발목까지 잠기는 자도 있었고, 아무튼 첨벙첨벙 물 위를 걸었다.
회귀 전에도 못 본 마도구였다.
대체 어떤 마법 회로를 새긴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챙, 챙!
그들이 두 자루 곡도를 뽑아 들고, 본격적으로 파도 위를 내달렸다.
촤아악! 촤악!
옆을 지나던 다른 해적선들이 그들의 뒤로 멀어졌다.
카리오사가 물개에게 물린 백상아리, 쥐에게 물린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장교기사가 뿔 나팔을 불어 다급하게 후퇴 명령을 내렸고, 동부 기사들이 반전했다.
촤아아악!
그러나 양쪽 모두 마도구를 사용하는 이상, 수영이 달리기를 속도로 이길 수는 없었다.
“꺄하하하!”
“크윽!”
푹!
동부 종자들이 하나둘 검에 찔려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소드 엑스퍼트인 기사들도 물속에서는 마나 블레이드를 만들기 어려웠다.
촤아아악!
스무 척의 해적선이 템페스타를 향해 다가왔다.
“이 바다 쓰레기들이 감히!”
카리오사가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마법검 폭풍을 빼 들었다.
“내가, 불러온, 재앙을!”
우우우웅!
검푸른 칼날에 바람이 중첩되고, 마치 오러 블레이드처럼 하얗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한 해적선을 향해 검을 베어 내렸다.
사아아아-!
하얀 바람 칼날이 쏘아져 나가고, 바람 칼날이 길게 부풀어 올랐으며, 선두를 달리던 해적선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콰지지직!
마치 바닥에 세워둔 칼날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온 멧돼지를 보는 것 같았다.
나무판자가 박살 나고, 50m에 달하는 해적선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게 저들에게 보낸 신호라도 된 듯, 지금껏 가만히 대치하던 백수십 척의 해적선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