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전진하라!”
타르티가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촤아아악!
붉은색 깃발을 올린 그의 배가 앞장섰고, 호위함 10여 척이 붙었으며, 그 뒤로다른 제독과 선장들의 배가 합류해 쐐기 진형을 만들었다.
‘본래 여기서 내보일 기술은 아니었다. 가문 비전의 마도구였다고. 하지만 이건 기회다. 카리오사를 물러서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명성을 얻을 수 있어. 그렇게 세력을 키우면 언젠가 다시 고국으로 복권할 수도 있겠지.’
‘절대 방심할 생각은 없다. 지금 저들이 사용하는 건 학익진 계열의 진법이군. 카리오사의 함대는 지금 저 멀리서 항해하며 우리를 천천히 포위하고 있겠지. 본대나 양동 작전을 경계하려고. 그리고 그런 게 없다는 걸 안 순간, 싹 몰려와 우리를 쓸어 먹을 거다.’
“그 전에 끝내는 거다.”
‘그러니 제발 도망쳐라. 제국의 백상아리야. 제발 도망쳐서, 내게 널 물러나게 했다는 명성을 안겨다오!’
타르티는 오만 가지를 생각했지만 겉으론 싸우고 죽일 생각만 가득한 듯 굴었다.
“가자! 상어 사냥이다!”
‘우리가 사냥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겨누었고.
“다들 작은 배 내려! 수로 몰아붙여야 한단 말이다.”
‘진짜 더럽게 크네. 스쳐도 가라앉겠다. 거리 유지가 생명이겠어.’
다른 해적 선장들에게 강력하게 권유했으며.
“동부 기사들이 바다를 가른다고 무서워하지 마라! 내 무사들은 바다를 달리니까!”
‘제발 아무도 다치지 마라. 이 해적 놈들 사이에서 믿을 건 너희뿐이란 말이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광경을 보여주며 사기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해적이란 자들이 다들 그렇듯, 해적 선장들은 그 광경에 열광했고.
“우리도 간다!”
“500m 거리에서 강습선을 내려라! 주문으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돌격한다.”
“저 전함이 우리 것이다!”
“돛을 펴라! 들이받아 버리겠다!”
“해적은 원한을 잊지 않지. 이번 아세노르타도 바다에서 죽을 것이다!”
밤바다에 때아닌 물결이 일고, 수백 척의 강습선이 내려왔다.
열댓 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소형선이었는데, 아주 빨라서 순식간에 적 배 아래 붙은 뒤, 등반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갈고리 긴 걸로 챙겨라! 저건 움직이는 성이야!”
“가라앉지 않는다는 불침(不沈)전함도 우리의 공격까지 막아내는 불침(不侵)전함은 아닐 거다!”
“가서, 조져라!”
해적선 한 척에서 강습선 여섯 척 정도가 내려왔다.
남은 해적선이 총 150여 척이었으니, 합 700척도 넘는 강습선이 물 위를 갈랐다.
갈고리를 찬 해적이 허공에 사납게 손짓하고, 모욕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나무판자 위를 걷게 해주마!”
“고기밥으로 만들어주자!”
붉은 깃발을 단 배에서 동방 무사들이 물로 뛰어내렸고, 강습선과 나란히 내달렸다.
촤악, 촤아악!
“가자!”
“타르티 님을 위하여!”
수백 척의 강습선이 기함 템페스타를 향해 돌진했다.
촤아아악! 촤아아악!
상처 입은 백상아리를 향해 덤벼드는 백기흉상어 떼 같았다.
“본때를 보여주자!”
아세노르타의 거대한 기함은 바위 섬과 같으나, 해적의 사기는 파도와 같으니, 지금 파도가 바위를 덮기 위해 달려들었다.
타르티는 그 모습을 진중하게 바라보며 템페스타로부터 300m 앞까지 해적선을 몰고 갔다.
‘진짜 크다.’
수백 년간 동쪽 바다를 다스려온 대가문의 기함에는 절로 올려다보게 되는 위용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챙, 챙!
그가 길고 짧은 쌍도를 뽑아 들고 수면으로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가 다다른 곳은 부드러운 수면이 아니라, 딱딱한 나무판자였다.
쾅!
“악!”
“안 돼!”
마지막 한 걸음을 앞두고, 사야 옌이 그의 허리를 힘껏 잡아챈 것이다.
우당당탕!
타르티가 그대로 간판 바닥을 굴렀다.
“옌! 지금 뭐 하는-!”
그는 역정을 내며 몸을 일으켰고, 사야 옌은 어울리지 않게 손을 떨며 수면을 가리켰다.
“어?”
타르티는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물 위에서 불이 타올랐다.
화르르륵!!
치이이익-!
사방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고, 새빨간 불길이 혀를 날름거렸으며, 잔학무도한 해적들이 비명을 질렀다.
“배를 돌려라!”
“으아아악!”
“뜨거워!”
* * *
폭풍함대의 기함 템페스타를 중심으로 지름 500m 범위의 바다에 불길이 치솟았다.
1m도 넘는 화염이 고개를 들며 바닷물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었다.
불길에 물들어 붉게 변한 바다가 섬뜩했다.
타르티는 간판 난간을 붙잡고 바다와 템페스타를 바라보았다.
강인하던 얼굴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뭐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 여기는 바다 한가운데라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불이……?’
세상은 원래 모습을 지킬 때 아름답다.
하늘이 푸르고, 밤은 캄캄하며, 물이 불을 끄는 게 세상의 법칙이고, 그 법칙을 지킬 때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롭다.
법칙이 뒤틀어진 세상의 모습은 기괴하기가 이를 대 없었다.
물 위에서 불길이 혀를 날름거렸다.
막 작은 강습선이 불길에 휩싸였다.
“끄아아악!”
“불, 불 꺼!”
“물 가져와!”
“이, 멍청한 놈아! 사방이 물이잖아! 이게 물로 꺼질 불인 줄 알아?”
치이이익!
치솟은 수증기가 공포를 극대화하고, 숨쉬기를 어렵게 했으며, 시야를 가렸다.
고속으로 나아가던 강습선 둘이 충돌했다.
쾅!
배는 측면을 비스듬히 맞았고, 파손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크게 흔들렸으며, 배에 타고 있던 해적들은 불타는 바다로 떨어졌다.
“끄아아악!”
“꾸르르륵!”
“살려줘!”
숨 막히는 자의 비명과 불타는 자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사악한 파도 같던 기세가 썰물처럼 사그라들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손이 수면 위로 치솟아 발버둥 치다 천천히 타올라 가라앉았다.
타르티는 황망한 표정으로 제 무사들과 가신들을 바라보았다.
“주군!”
“끄으으윽!”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그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타르티의 배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살려줘!”
“제발, 제발!”
“나, 나도 데려가!”
다른 해적들이 그들의 다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동방의 무사들은 장도를 휘둘러 그 손을 잘라 냈다.
“베어버리겠다!”
“비켜라!”
“이놈!”
사악!
그들은 제일 빨리 돌격했고, 가장 빨리 템페스타 아래에 도착했으며, 따라서 가장 오랫동안 불길 속에 머물렀다.
그들의 갑옷도 화염 내성이 있었지만, 바다가 끓어오르는 판에, 아직 잿더미가 안 된 게 기적이었다.
“빠, 빨리. 사다리, 줄사다리를 내려라!”
타르티는 가히 초인적인 판단력으로 침착함을 되찾고 명령했다.
넋을 놓고 템페스타를 올려다보던 하급 무사와 선원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예! 주군!”
“줄사다리를 내려라!”
“무사님들을 구조해!”
그때 템페스타의 뱃머리에서 누군가 움직였다.
먼 거리였지만, 타르티는 그 모습을 이상하리만큼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솔레타라스.”
하얀 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냈고, 노란 눈동자로 직접 만든 지옥도를 무심히도 관조했다.
각 잡힌 하얀 제복과 금장 장식은 거친 바다와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는 어디서든 제가 원하는 대로 입을 듯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한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고, 한 손은 벗어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손에서 오렌지색 불빛이 심장 박동처럼 깜빡였다.
“……용혈 황족.”
우우우웅!
대기 중 마나가 심상찮게 요동쳤고, 타르티의 본능이 위기를 알렸다.
“타르티!”
“알아!”
사야 옌 역시 고함쳤고, 타르티는 목이 터지도록 후퇴를 외쳤다.
“배를 물려라!”
쾅-!
화르르륵-!
다음 순간 불길이 세 배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
“주군!”
거의 불길 밖으로 달려 나왔던 무사가 폭발하듯 날아올랐고, 그대로 검게 그을려 가라앉았다.
치이이익-!
하얀 수증기가 벽처럼 치솟고 가라앉기를 한 차례.
수백의 강습선과 수천의 해적이 몰려들던 템페스타 주변에, 지름 500m의 공백이 발생했다.
쏴아아아-.
바다는 언제 끓어올랐냐는 듯 무심히 출렁였고, 강습선 판자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타르티는 철 가면 아래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솔레타라스 황족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저렇게 강하다고?”
카리오사도 폭풍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그녀가 해전에서 폭풍이나 소용돌이를 실제로 일으킨 횟수는 손에 꼽았다.
그녀는 해적들이 가진 배를 빼앗길 원했으며, 신민과 재물을 되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전투 마법사들을 이끌고 있으면서도 불의 창이나 힘의 창을 잘 날리지 않았고, 일곱 함대를 거느렸으면서도 상륙 작전을 더욱 선호했다.
타르티 역시 해적으로 살며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러나 수천 명이 칼 한 번 내질러 보지 못하고 죽는 건,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사야 옌이 입술을 깨물었다.
중성적인 목소리에 분노와 압도감이 모두 어려 있었다.
“발렌시아누스야.”
“발렌시아누스?”
“신성 황제의 쌍둥이 오빠.”
타르티는 이를 악물었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수평선은 문제없다.’
아직 카리오사의 포위망은 완성되지 않았고.
‘그래도 불탄 강습선보다 살아남은 강습선이 많아. 금방 정신 차리고 자기 배로 돌아가겠지.’
해적들의 잔존 병력도 상당했으며.
‘우리 무사들은 그나마 많이 살아남았어.’
피해 역시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물러나자. 경쟁자들을 털었다고 생각하면-’.
그때 템페스타에서 강습선 한 척이 내려왔다.
그곳에는 하얀 제복을 입은 용혈 황족이 타 있었다.
타르티는 그를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황족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 * *
“신세를 졌어. 발렌시아누스.”
카리오사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자를 잃은 게 적잖게 자존심에 상처였던 듯했다.
“성수 가져와!”
“토부터 시켜! 바닷물 너무 많이 먹었다.”
막 뒤쪽에서 다친 기사와 살아남은 종자가 끌려 올라오고, 종군 사제가 이리저리 내달렸다.
나는 약간의 어지럼증과 두통을 느끼며 답했다.
“신세는 무슨. 같은 배에 타고 있는데.”
“원래 넌 칼 장식처럼 끼고 다닐 생각이었다. 게다가 네가 전투에 나선 이상, 네 황제가 나한테 얼마짜리 청구서를 보낼지 상상도 안 되는군.”
나는 그녀가 정확한 표현을 사용하도록 도와주었다.
“내 황제일 뿐만이 아니라 네 황제기도 하다. 공작.”
카리오사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도록 하지. 대공.”
난 기사들이 치료받는 걸 보고, 슬쩍 말했다.
“종자들 시신까지 같이 가라앉혀 버린 것 같다. 유족과 기사들에게 사과를 전해줄 수 있겠나?”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가문과 그 봉신들은 원래 수장한다. 바다가 우리 고향이야. 적들은 영원한 익사의 고통을 겪을 거고, 종자들은 심해의 궁전에서 그동안 날 섬긴 보답을 받겠지. 사과는 필요 없을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방금 보았던 광경을 잊으려 노력했다.
“하아.”
해적을 태워 죽이는 건 아무리 깐깐한 사제나 법관도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난 빈민가에서 어쩌면 죄가 없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도륙해본 몸이었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어느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겹쳐 보이는 거다.
겹쳐서 들리는 거다.
이건 쓸데없는 공감이었고, 문제였다.
제이릴리스가 경계하라고 했던 것이었다.
죽어 마땅한 자들과 죽여야만 했던 자는 다르다.
저들은 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다.
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어야 했다.
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다.
욱신!
머리 안쪽이 깨질 듯 울렸다.
“X발.”
나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 욕을 내뱉다 끝내 이를 악물었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발렌시아누스?”
카리오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순간 혹하는 표정을 짓더니, 손을 뻗어 내 눈가를 훔쳐 주었고, 그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미친.
난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거짓말은 체질상 받지 않으니, 진실을 다 말하지 않는 정도를 지켜야 했다.
“아까 그 마도구. 물 위를 걷는 신발. 탐났는데 말이야.”
죽이고 가져와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걸 가진 놈들을 내, 아니. 황실 휘하로 끌어들이면 더 좋을 듯했다.
“나도 그렇다. 강습선 내릴까 생각 중이었어.”
“내 건 내가 챙기고 싶은데, 보내줄 수 있나?”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몰려들던 강습선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자기 모선을 향해 도망치고 있었고, 템페스타의 전투 마법사들은 이동식 중대형 쇠뇌에 파괴술 마법을 부여해 발사했다.
‘표식’ 주문과 ‘추적’ 주문으로 강습선을 쫓고, 굵은 쇠뇌 화살에 ‘충격파’ 주문을 부여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착, 착, 착, 쐐애애액!
보라색으로 빛나는 화살이 밤바다를 가르면, 강습선 한 척이 어김없이 가라앉았다.
쾅!
화살이 선체에 닿는 순간 보랏빛 파동이 퍼지고, 나무 조각과 해적 고기 조각이 날아올랐다가 후드득 소리를 내며 물에 떨어졌다.
주변 강습선에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가 떨어지면, 해적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카리오사는 그 비명이 감미로운 찬송가라도 되는 듯 치유 받는 표정으로 말했다.
“뭔 일 생기면 바로 구하러 갈게. 수영은 할 줄 알지? 가서 다 죽여 버려.”
그 흔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심 쓰게 웃었다.
기대와 달리 죽이려고 가는 게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