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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88)화 (288/340)

(288)

“발렌 전하. 면목이 없습니다.”

텐티아 경이 침울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백금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작은 강습선 하나 타고 적진에 돌진하기에 그 갑옷은 너무 무겁고 위험했다.

물론 백금 갑옷에는 얼음으로 몸을 감싸고 수면 위로 부상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지만, 바다가 중무장한 기사가 나서기 좋은 전장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난 괘념치 말라 웃었다.

해적을 회유하러 간다는 걸 알면 텐티아 경이 비명을 지를 게 분명했다.

“날 지키는 게 경의 일이지. 저 백상아리가 날 날름 먹어 치우지 못하도록 눈 새파랗게 뜨고 있는 걸로 족하네.”

“저…… 전하. 제 눈은 파란색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들었지 않나?! 다녀오겠네!”

나는 줄사다리를 타고 강습선으로 내려갔다.

휘이이잉!

카리오사가 가볍게 손짓했고,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살아있는 돛처럼 바람을 맞았고, 저 앞 붉은색 깃발 단 배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촤아아아-!

방금 완전히 타지 않은 해적 시체 하나가 배 바닥을 긁었다.

나는 진절머리를 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고, 고개를 들며 애써 웃었다.

정신은 육체의 노예에 불과하다.

“뱀 뿔 잎을 먹으면 팔을 자르는 동안에도 웃고, 검은 점 가시 나무즙을 먹으면 아침에 좋아하는 사람과 이어지고 저녁에 금광을 찾아도 우울함에 빠져 죽고 싶어지지.”

눈에 보이는 걸, 손에 쥘 수 있는 걸, 수로 셀 수 있는 걸 마음의 등불로 삼아라.

“그렇게 살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를 악물었고, 애써 웃으며 광소했다.

“하하하하!”

머리가 더더욱 아팠다.

그래도 몇 번 더 웃다 보니, 관성처럼 웃음이 나왔다.

“하, 하. 그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어 붉은 깃발을 단 배를 노려보았다.

붉은색 동방 풍 갑옷을 입고 사슴뿔 투구를 쓴 해적 두목이 부하들과 함께 간판에 서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헉, 헉!”

“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다카! 포기하지 마라!”

왜 도망치지 않는 건가 궁금해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 물 위를 달리던 해적 무사 몇몇이 아직도 각자의 모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몰려든 놈들은 일단 다 태워 죽이려 했는데, 화력이 약했었나 보다.

붉은 깃발 단 배들은 템페스타 주변을 맴돌며 살아남은 해적 무사들을 끌어 올렸다.

“해적치고는 보기 드물게 의리가 있네.”

미래의 종병으로서 나쁘지 않았다.

난 비릿하게 웃으며 용언으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두목이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삼았나? 좋은 광경이야.”

노란 기운이 검은 장갑 낀 손바닥 위에 어리고, 일대의 마나가 우우 몰려왔으며, 나는 마나를 향해 단호히 명령했다.

“미끼를 걸었다면 물어 줘야지. 배에 불을 붙여라. ”

마나를 매개 삼아 실체화한 불의 정령 셋이 씩 웃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선을 그리는 뿔이 난 소년의 형태였는데, 상반신을 벗고 있었다.

정령이 점점 날 닮아가는 거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화르르륵!

후우우욱!

정령들이 해적선 주변을 빙빙 돌며 불을 토했고, 해적선에서 색색으로 빛나는 활이나 쇠뇌 따위가 쏘아져 나왔다.

쐐애액! 쐐애액! 쐐애액!

“잡아라!”

“아아아악!”

“머리를 맞춰!”

배 전체를 태워버릴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마도구가 내 용언의 불길에 상하거나, 저 동방 해적들이 다 죽는 건 원치 않았다.

만에 하나, 죄다 겁을 집어먹고 벌벌 기며 항복해줄지도 몰랐다.

어느새 내가 탄 강습선이 놈의 해적선 바로 아래 도착했다.

검은 철 가면을 쓴 무사들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눈동자는 잘 제련된 살의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래. 내 일이 그렇게 잘 풀릴 리가 없지.”

나는 만에 하나 따위의 생각을 한 걸 후회하며, 강습선을 박찼다.

“아니마!”

펑!

발밑에서 거센 바람이 치솟았고, 내 몸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

슈우우욱!

60m가 넘는 해적선은 물 위의 성 같았지만, 나는 하늘을 새처럼 날아 간판 위까지 올라섰다,

“하하하하!”

불의 정령이 돛을 불태우고, 막 끌어올려진 무사 하나가 간판에 바닷물을 토하는 가운데, 동방 풍 갑옷을 입은 무사 수십 명이 경악에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챙!

사슴뿔 투구 쓴 놈이 발도했고,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사슴뿔 투구 쓴 놈을 뒤로 잡아당겼다.

쾅!

나는 간판 위에 유유히 착지했다.

사슴뿔 투구를 쓴 놈이 입을 열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인가? 이 몸은 동방의 귀족, 타르티…….”

나는 왼손에 낀 염동력 장갑, 보이지 않는 손을 몸속으로 흡수했다.

“대공 ‘전하’라 불러라. 천한 것아.”

이미 손 안쪽은 아즈의 파편으로 변모한 채였고, 손등은 깨진 도자기처럼 갈라져 붉은 결정을 엿보였으며, 심장이 뛸 때마다 화기가 결정과 결정을 오가며 공명했다.

몸속과 머릿속이 모두 기분 좋게 뜨거웠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난 손짓만으로 네놈과 네놈의 배를 죄다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살고 싶다면 내 앞에 무릎 꿇고 그 머리를 조아리거라.”

* * *

타르티는 눈앞의 대공을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젊은이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앳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껏 바다에서 온갖 괴물을 다 보아 왔다고 자부했지만, 이런 괴물은 본 적이 없었다.

‘벨 수 있을까?’

비인간적인 노란 눈과 붉은 결정이 튀어나온 왼손은 함부로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충분했다.

따라서 타르티는 물었다.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 살려줄 건가?”

발렌시아누스는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다.

살려서 황실의 사략 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 것이었으니까.

그 순간 쓸데없는 상념 하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이걸 내가 바로 대답해도 되나? 이쪽 사법권은 전부 카리오사가…… X발.’

침묵이 너무 길었고, 타르티는 그걸 거절로 받아들였다.

‘단숨에 끝낸다.’

그가 한 걸음 크게 나아가며 장도를 길게 베어 올렸다.

사아아아-!

붉은색 갑옷과 대비되는 녹색 검기가 그의 장도에 은은하게 어렸다.

사악!

바람 같이 휘둘러진 장도가 소년 대공의 목을 노렸다.

소년 대공이 기겁하며 몸을 틀었고, 장도는 그의 목을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 깊이로 흩고 올라간 다음, 각도를 바꿔 유성처럼 떨어져 어깨를 깊게 베었다.

촤악-!

타르티와 사야 옌은 그 순간 승리를 확신했다.

‘목을 저 깊이로 베였다면, 끝이다.’

‘즉사를 피해도 과다 출혈로…… 어?’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치직, 치지직!

그의 목에서는 선혈 대신 붉은 불꽃과 결정이 튀며 상처를 회복시켰고, 찢어진 제복 자락은 그 자리에서 바느질한 듯 꿈틀거리며 다시 달라붙었으며, 어깨 안쪽에는 인간의 살점 대신 적갈색 비늘이 가득했다.

스르르륵!

그 순간 소년 대공은 망나니 대공으로 돌변했다.

“이 버러지가 질문을 던져 놓고 대답도 하기 전에 칼을 휘둘러?!”

이는 제국에서 어지간한 막장 용병도 하지 않는 더러운 수법이었다.

회귀 전의 발렌시아누스조차도 애용하지는 않았을 정도였다.

화아아악!

그의 몸에서 비인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분위기가 다시금 일변했다.

해적 무사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섰다.

‘저게 뭐야?’

‘이건 아니지.’

‘용혈 황족이라는 게 진짜였어? 진짜 이종족이 지배하는 거냐고?’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이물을 정면에서 마주한 듯했다.

발렌시아누스의 목소리가 중성적으로 변했다가 한없이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수십 명이 동시에 고함치는 듯했다.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머리카락을 불태우고, 눈알을 녹이고, 피부 아래 지방층을 불태워, 살아 있는 양초로 만들어 주겠다!”

‘내 손을 거절해? 따끔한 매질로 버릇부터 가르쳐 줘야겠네.’

타르티와 무사들은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윽!”

“선장님!”

“나도 알아. 이거…….”

눈앞이 침침해지고, 색감이 이상해지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간지러운 동시에 따갑다.

병이 아니라면, 정신 오염이나 정신 파동에 당했을 때 생기는 증상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정령들에게 용언과 공명의 불길을 보냈다.

파바바박!

정령들의 온몸에 용의 비늘이 돋고, 덩치가 두 배로 커졌다.

화르르륵!

세 정령이 배의 앞과 양옆에서 동시에 불을 뿜었다.

“아아아악!”

소금기와 습기에 절은 목재는 잘 타지 않았고, 대형 범선이 그렇듯 화염 내성 마법진도 가지고 있었지만, 발렌시아누스의 불길은 끝내 그 저항을 이겨내고 목재에 파고들었다.

우우우웅!

화염 저항의 녹색 기운이 흐트러지며 밀려나고, 그 자리에서 새빨간 불길이 혀를 날름거렸다.

타르티 옆에 있던 무사가 장도를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타악!

“주군! 피하십쇼!”

장도에 은은한 녹색 마나 블레이드가 어렸고, 찌르기의 궤적은 정확히 심장을 노렸다.

발렌시아누스는 피하지 않았고, 되려 한 걸음 나아갔다.

장도와 망나니 대공의 몸이 부딪치고, 거센 파공음이 일었다.

카가가강!

사람이 아니라 제련한 쇳덩이를 식칼로 긁은 듯한 소리가 났다.

무사는 손목이 저릿해지는 감각에 신음했고, 오싹한 감각에 한 번 더 신음했다.

“이잇-!”

그는 장도를 거두며 연격을 준비했지만, 발렌시아누스가 오른손을 가볍게 휘젓는 게 더 빨랐다.

사아아아-!

착 달라붙는 검은 장갑에서 염동력 특유의 보라색 기운이 날카롭게 빛나고, 무사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투두둑, 털썩.

그의 코에서 희고 붉고 걸쭉한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뭐, 뭐야?”

“경계해라! 불꽃만 다루는 요술쟁이가 아니야!”

“이 새끼가 감히!”

염동력으로 머릿속을 직접 헤집어 버린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나서는 자와 물러서는 자가 미추의 대비를 이뤘고, 망나니 대공은 그들 모두에게 공평한 사형선고를 내렸다.

우우우웅!

그가 한없이 달아올라 있던 왼손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 신기한 마도구는 내가 잘 써주마.”

“쳐라!”

타르티가 장도를 쳐들었고, 동방 무사들이 주군을 따라 갑판을 박찼다.

녹색 마나 블레이드가 우우 피어오르고, 한 호흡에 여덟 번 이상을 베는 빼어난 무사들이 단 한 사람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시이이잉!

장도들이 울며 허공에 녹색 궤적을 만들어 나갔다.

완전 변이 급 침식자를 단숨에 참수할 수 있을 만큼 예리한 공격들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턱을 쳐들며 무사들을 오만하게 흘겨보았다.

“죽어라.”

황금빛 눈동자에 선두에 선 사슴뿔 투구와 그 뒤로 이어지는 장도들이 비쳐 보였고.

지이이잉!

다음 순간 그의 왼손에서 반투명한 붉은색 파장이 부채꼴로 뻗어나갔다.

드드드드-!

파장에 얻어맞은 해적 무사들이 걷어차인 공처럼 뒤로 날아갔다.

거구의 사내도 장신의 사내도 붉은 파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유일하게 피할 수 있던 건 사야 옌 뿐이었고, 그 자리에서나마 버티고 선 건 타르티뿐이었다.

“크흑, 어?”

“불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머리가? 으윽!”

쓰러진 무사들은 의문을 표했고, 제일 놀란 건 발렌시아누스 본인이었다.

이글거리던 분노도 한순간 사라질 정도였다.

‘왜 불이 아니라 역장이 나간 거지?’

분명히 막대한 화기를 공명시키다 내질렀다.

‘태워서 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충격파로 날려버릴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왜 불꽃이 아니라 파동이 나가? 쟤들 죽지도 않은 거 같은데?’

해적 무사들은 의아해하면서도 다시 장도를 들었고, 타르티 역시 그렇게 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죽여라!”

“저 반반한 놈 맛 좀 보자!”

“황족은 피부도 야들야들하겠지?”

발렌시아누스는 반사적으로 흑루를 뽑으려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아아악!”

“끄아아악!”

“끄으으윽!”

땡그랑, 땡그랑!

역장에 맞았던 해적 무사들이 장도를 떨어트리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을 굴렀다.

엄청난 작열통을 느끼는 듯 온몸을 긁어대는 자도 있었고, 경련을 일으키다 코피를 분수처럼 뿜는 자도 있었고,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자도 있었다.

사야 옌조차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독?’

타르티는 순간 제 몸이 불길에 휩싸이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너, 넌 대체. 뭐 하는 괴물이냐?”

발렌시아누스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글쎄다.”

‘아. 죽일 생각 아니었는데.’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하얀 이빨이 엿보였다.

“이제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저 마도구라도 빼앗은 다음에 생각하자.’

다음 순간 그는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타악!

타르티는 기겁하며 장도를 휘둘렀다.

사악, 사아악! 사아아악-!

녹색 마나 블레이드가 우우 일어나 예리한 벽이 되었다.

“널 물에 던져버리고 마저 생각하려고!”

쾅! 쾅! 쾅!

발렌시아누스는 팔꿈치, 주먹, 발뒤꿈치를 내지르며 타르티가 세운 벽을 부수었다.

아즈의 결정을 받아들인 그의 육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갑옷 같은 강도를 자랑했다.

챙!

타르티는 기겁하며 조금 더 짧은 곡도까지 빼 들었다.

‘전투 마법사 수준의 체술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숙련되어 있어!’

사악!

그리고 쉭!

그는 베기를 찌르기로 연계한 쌍수 도법을 펼쳤고, 발렌시아누스는 바위 비늘을 두른 드레이크처럼 돌진했다.

“하하하하!”

사야 옌조차 중간에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었다.

타르티가 장도를 베어 내렸고, 곡도로 발렌시아누스의 손목을 노렸다.

츠츠츠츠!

그 순간 발렌시아누스는 비늘 두른 손아귀로 곡도를 잡아채는 동시에, 팔뚝으로 장도를 받아냈다.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울리고, 타르티의 장도가 발렌시아누스의 팔뚝에서 밀려났으며, 발렌시아누스의 팔뚝에서 비늘 조각이 튀었다.

“크윽!”

녹색 마나 블레이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타르티가 신음성과 피를 동시에 토했다.

후욱!

빠르게 돌진한 발렌시아누스가 타르티의 발목을 움켜쥐고 거꾸로 들어 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타르티가 몸을 떨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무사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모욕이었고, 정당한 항의였지만.

“대답도 안 듣고 칼부터 휘두른 놈이 감히 내게 질문을 던져?”

눈알이 돌아간 발렌시아누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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