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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누스가 왼손으로 타르티를 붙잡고 난간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오른손만으로 타르티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겼고, 이내 신발 밑창에 아이젠 형태의 마도구가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역시 이런 식이었네. 앞으로는 내가 잘 쓰겠다. 감사히 여겨라.”
그가 타르티를 붙잡은 채로 죽은 무사들의 신발 아래에서 아이젠을 뜯어냈다.
고귀한 외견과 지고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치졸한 행동이었다.
“네놈이 그러고도 대공이냐?”
사야 옌이 충격받아 목소리를 높였고, 발렌시아누스가 타르티를 방패처럼 쳐들었다.
“난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적 놈아.”
그가 타르티를 갑판 난간 너머로 넘겼다.
“타르티라고 했나? 넌 내가 질문을 던질 때 칼을 휘둘렀지만, 난 천한 해적이 아니라 제국의 대공이니, 마지막 말 정도는 들어 주겠다.”
타르티는 실소하며 제 배를 바라보았다.
“그거…… 참 감사할 따름이군.”
세 마리의 정령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을 뿜었고, 가문의 전함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수십 년간 그를 섬겨 온 무사들이 차갑게 식어갔고, 선원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간판 위에 앉아 있었다.
‘쪽빛 사제 놈의 말이 맞았군. 이놈은 사람이 아니라 악귀다.’
타르티는 목에 힘을 주며 발렌시아누스를 노려보았다.
철컥, 아슬아슬하게 턱에 걸려 있던 철 가면이 투구 안쪽으로 젖혀지고, 그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형형한 눈빛에 제독다운 기세가 어려 있었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나도 귀족이었다.”
일순 발렌시아누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이제 목숨을 구걸해라. 그럼 살려 줄게.’
귀족 출신 사략 제독, 딱 그가 찾던 인재였다.
“……짐작했다. 해적 따위가 차고 다닐 마도구가 아니었지. 해적 따위가 거느릴 만한 부하들도 아니었고. 애초에 내 앞에서 벌벌 떨지 않을 수 있었다는 자체가 보통 혈통은 아니었다는 뜻이니.”
“그러니 명예롭게 참수를-.”
그러나 그 인재는 그의 손을 잡아 오지 않았다.
‘참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발렌시아누스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제국에서 귀족이라 불리려면 타고난 혈통이나 물려받은 영지보다 중요한 조건이 있다. 폐하나, 폐하의 봉신이나, 폐하의 배신을 섬기는 것이지. 아무도 섬기지 않을 수 있는 분은 혈통의 정점, 제국의 태양, 신성하신 폐하뿐이야.”
폐하를 섬긴다면 살려 주겠다.
그렇게 말했음에도, 타르티는 여전히 발렌시아누스를 노려보았다.
발렌시아누스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렸다.
기껏 살려 주려 했는데 참수 운운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살의가 들끓었다.
“너에게 열린 길은 둘뿐이었다. 귀족으로 죽거나, 도적 두목으로 살거나. 이를 악물고 때를 기다렸다면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화르르륵!
해적선에 걸린 화려한 깃발에 불이 붙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발목을 잡았구나.”
황금빛 눈동자에 동정의 시선이 어렸다.
타르티는 그걸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몸을 비틀며 발렌시아누스를 저주했다.
“발렌시아누스! 네놈도 반드시 나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 네놈도 나처럼 주군 없는 귀족이 될 것이다!”
발렌시아누스는 내심 한숨 쉬며 불꽃을 피워 올렸다.
‘일단 잡아가고 보자. 약간의 고통은 녹슨 검에 칠하는 기름과도 같지.’
“그래. 잘 들었다. 이건 이야기 삯이니 고맙게 받도록.”
화르르륵!
불꽃이 그 주인의 의지를 따라 거꾸로 흘러내리며 타올랐고, 타르티의 온몸이 불길에 휩싸였으며, 난간 바깥쪽으로 돌아 발렌시아누스를 기습하려 했던 사야 옌이 몸을 굳혔다.
그 순간 발렌시아누스는 히죽 웃으며 타르티를 잡은 손을 놓았다.
풍덩!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군.”
그는 가볍게 갑판을 박차 강습선으로 뛰어내렸고, 타르티를 건져 템페스타로 돌아갔다.
정령들이 마지막으로 배에 불을 뿜었다.
화르르륵!
주인 잃은 해적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 * *
카리오사가 물거품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시아누스. 저 정도 전함이면 금화가 9천 닢이다. 조금만 손보면 호위함이나 상륙선으로 쓸 수도 있었어.”
“아이고. 미안하게 되었군.”
“어쩔 수 없지. 오늘 밤에 몸으로 갚도록.”
나는 못 들은 척 태연하게 물었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할까? 꽤 고위급 해적 같아서 챙겨 왔는데.”
“군입이로군. 난 놈들과 협상할 생각이 없어. 그냥 바다에 던졌어도 아무 말 안 했을 텐데…….”
“그래도 일단 살려는 놓는 게 어때?”
내심 조마조마하며 물었고, 다행히도 카리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기껏 챙겨 왔으니, 일단 배 아래 감옥에 넣어 놓겠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노획해온 아이젠을 내 것, 텐티아 경에게 줄 것, 마커스에게 양산을 지시할 것까지 세 개만 빼고 모두 카리오사에게 넘겼다.
그녀가 얼마나 해적을 증오하는지 알고 있다 보니, 가슴을 콕콕 찌르는 죄책감이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카리오사는 그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고, 마법검 폭풍을 들어 바다를 가리켰다.
“봐라. 발렌시아누스. 해전이란 생각보다 이기기 힘들다.”
내가 물 위에서 불을 일으켜 태워 죽인 해적이 4분의 1 정도였다.
마법 한 번에 전군의 25%를 갈아버린 거면 엄청난 전공이었지만, 바꿔 말하면 75%는 살아 있다는 뜻이었고, 그들은 무사히 자기들 배로 돌아가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눈살을 가늘게 뜨며 해적선 군단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많이 죽였는데도 여전히 120척도 넘어 보이는군.”
“배라는 건 생각보다 튼튼하니까. 뭐. 그래도 이만하면 되었다. 방금 막 보고가 들어왔거든.”
“보고?”
한 전투 마법사가 물수리를 팔뚝에 얹고 있었다.
카리오사가 물수리 발목에 묶여 있었을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양동 작전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음. 포위 섬멸로 이행.”
“아.”
저 멀리 수평선에서 마법 등잔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바탕에 백상아리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높은 나팔 소리와 낮은 북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
둥! 둥! 둥! 둥!
떠다니는 섬처럼 거대한 전함 열두 척이 호위함들을 이끌고 사방의 수평선에서 모여들었다.
시계의 숫자들이 한 점으로 모이는 듯했다.
텐티아 경이 가볍게 숨을 들이켰고, 카리오사가 싱긋 웃었다.
“이런 거다.”
나는 위엄차게 흔들리는 깃발을 보며 물었다.
“낚시할 때 상대가 누구인지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카리오사가 어울리지 않게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시간을 끌어야 할 때와 쓸어 담아야 할 때는 다르니까. 우리 애들 사기 문제도 있고.”
“그렇군. 이해하겠어.”
“깨물어주고 싶네.”
나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고, 카리오사는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 순간 막대한 두통이 날 덮쳤다.
욱신!
“커헉!”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난간을 잡고 매달렸다.
카리오사가 낄낄 웃다 목소리를 굳혔다.
“반응 너무 좋은…… 발렌시아누스?”
내 손에서 뜨겁고 끈적한 게 느껴져 손을 떼 보니, 검은 장갑 위에 피가 흥건했다.
“피?”
양쪽 코에서 코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도 깨지는 듯 아팠고, 귀에서는 이명이 울렸다.
삐이이이-.
“공작! 무슨 짓을 한 거요!?”
챙!
텐티아 경이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무슨 상황이야.”
“전하를 지켜라!”
동부 기사들이 당혹스러워하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난 한 손을 들어 텐티아 경부터 말렸고.
“경. 공작이 한 게 아닐세. 기막힌 타이밍이었군.”
난처한 표정을 한 카리오사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별거 아니다. 약간…… 피곤했을 뿐이다. 선실에서 조금 쉬겠다. 함대가 집결했으니 내가 할 일은 없겠지.”
“그래. 일단 쉬어. 사제와 마법사들을 보내줄 테니까.”
카리오사가 핏기 사라진 얼굴에 안도의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너스레가 잘 먹히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애써 중심을 잡으며 선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게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인지 모르겠다.
* * *
“일어나셨어요?”
생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성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미성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다행히 두통은 사그라들었지만, 온몸이 쑤셨다.
선실에 어찌어찌 내 발로 들어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부터 기억이 없었다.
“넌 누구지?”
나긋한 답이 돌아왔다.
“로렐라이에요. 카리오사 님의 봉신이자, 아세노르타의 방계죠.”
“카리오사가 보낸 마법사인가?”
“네. 누님 전하가 저를 보내셨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침대 옆 의자에 그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내 또래나 되어 보였고, 밝은 오렌지색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덮었다.
눈동자는 머리카락과 똑같은 오렌지색이었고, 동공은 카리오사처럼 검은 세로 동공이었다.
비늘처럼 반짝이는 피부와 상어 이빨까지도 똑같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에게는 카리오사 같은 지배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구로 호리호리했고, 허리와 팔다리도 얇았으며, 목도 아주 가늘었다.
꿀꺽,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일어났다.
“내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아나?”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마도구 부작용이었다.
자연적으로는 생기지 않는 마나 흐름을 너무 가까이하다 보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상아탑에서 준 ‘보이지 않는 손’ 장갑이나, 제이릴리스가 만들어 준 이 제복은 아예 몸속으로 스며드는 형태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로렐라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정신에 특화된 마법사예요. 사제님과 생조술사님은 전하께 손도 대지 못했어요.”
나는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마도구 부작용 따위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정신? 내가 미쳤다고?”
로렐라이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보다는 물리적인 거예요.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래요. 음. 몸과 정신이 안 맞는다고나 할까요? 그게 맞춰지는 과정의 부작용이에요. 혹시 최근에 ‘영생’같은 최고급 영단 드신 것 있으세요? 체질 자체가 변한 거라서.”
“아.”
나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어. 진짜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
짐작되는 게 아주 많았다.
화정, 영생, 용찬, 정령 정수 이식, 불의 정화를 통한 이물의 힘 흡수, 쿠이트 아즈 흡수…….
분명히 깔끔하고 정석적으로 수련해서 경지에 오르겠다 다짐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 꼴이 났다.
로렐라이가 탄식했다.
“제가 편하게 해 드릴 수는 있는데, 결국 시간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예요. 영혼도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요. 한동안은 무리하시면 안 돼요. 그럼…….”
“그럼?”
로렐라이가 못을 박듯 말했다.
“영혼이 천천히 맞춰지지 못하고 갈려 나갈 수도 있어요. 인간의 본질을 지킨 상태로 몸에 스며들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갈려 나가버리면…… 최악의 상황에는 폐인이 될 수도 있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다 보니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아마도 아즈의 파편을 이용해 힘을 증폭하는 과정이 큰 무리였던 듯했다.
그건 정말 원래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물질로 몸을 바꾸는 거니까.
영혼이 비명을 지를 만도 했다.
로렐라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주 작고 여리여리해 보이는 손이었다.
“어떤 식으로 몸이 변했는지 알면 더 큰 도움도 드릴 수 있어요. 제게 잠시 마음을 열어주실래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보이지 않는 손 장갑을 흡수하고 왼손을 내밀었다.
영혼을 다루는 마법사들은 아주 희귀하고 침식에 약했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체가 그의 실력을 증명했다.
척.
로렐라이가 한 손으로는 손을, 한 손으로는 손목을 잡았다.
생각보다 손아귀 힘이 야무졌다.
“잠깐 아찔하실 수도 있어요.”
그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더니, 다음 순간 하얀빛이 번뜩였다.
번쩍!
그리고 내 눈앞은 까맣게 물들었다.
“커, 커어억!”
강력한 파괴술 주문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듯,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동시에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숨도 잘 안 쉬어질 정도였다.
“너, 너. 이, X발……! 이게 아찔이냐?”
나는 피를 토할 듯한 기분으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니에요.”
로렐라이의 얼굴은 안타까움과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상어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눈동자는 한없이 수축했으며,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수도 함락 사태 당시 거대 이물이 내려오는 걸 본 내 표정이 딱 그랬을 듯했다.
* * *
“능력 있는 애지. 그런데 우리 가문답지 않게 겁도 많고 속도 물러. 뭐, 사실 영혼이나 마음 다루는 마법사들이 다 그렇지. 너도 알고 있잖아. 상대 마음이 잘 보인다는 건, 사람에게 실망하기 딱 좋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 실망감이 냉소적으로 드러나는 애들도 있고, 걔처럼 방어적으로 드러나는 애들도 있는 거지.”
나는 카리오사의 선실에 초대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네 선실 중 한 방이었다.
시종 시녀들이 다가와 커다란 편백 나무 나무통에 뜨거운 물을 채워 주었다.
김이 펄펄 피어올라서 선실 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상큼한 편백 향을 맡으니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뻐근하지? 들어와서 몸 좀 녹여.”
카리오사가 낮은 목소리로 달콤하게 제안했다.
그러나 난 행동에 앞서 중요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했다.
“질문이 두 개 있어. 왜 탕이 하나지?”
카리오사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답했다.
“이 크기로 두 개 넣기에는 선실이 좁아서? 두 번째 질문은 뭐야?”
“왜 어깨끈이 안 보이지?”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물에 젖은 그녀의 손등과 어깨, 목이 오팔처럼 빛났다.
“그래서 안 들어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