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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90)화 (290/340)

(290)

카리오사의 선실은 천장, 바닥, 벽 모두 투명한 방수 수지가 꼼꼼하게 발라져 있었다.

게다가 방 한쪽 구석에 배 밖으로 물을 빼는 황동관 배수구까지 있었는지라, 물이 넘쳐서 바닥이 흥건해지거나, 나무에 습기가 차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무 욕조는 내가 앉으면 목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로 깊었고, 나와 카리오사가 마주 보고 앉아 다리를 뻗어도 간신히 발끝이 닿을 정도로 넓었다.

물론 나도 그녀도 1년 만에 만나서 손끝 발끝이나 부딪치며 놀 생각은 없었다.

욕조에서 물이 넘치고, 내 등과 가슴에서 흐른 피가 물을 붉게 물들이고, 시녀 시종들이 새로 뜨거운 물을 가져다가 붓고, 카리오사가 포식자의 웃음을 짓고…….

불꽃이 몇 번이고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들 무렵, 카리오사가 입맛을 다시며 물어왔다.

“아파?”

그녀의 진주색 손톱이 내 복근 위를 끈적하게 훑었다.

나를 바라보며 커진 눈동자가 보기 좋았다.

“아프지?”

비록 내 온몸이 손톱자국과 이빨 자국으로 물들었지만, 그래도 보기 좋았다.

“당연히 아프지. 못 버틸 정도는 아니지만. 대체 그 손은 어떻게 만들어진 거야?”

난 온갖 걸 불태워 먹어 치웠고, 내 몸은 영혼이 이질감을 느끼고 비명을 지를 정도로 강해졌다.

용찬의 힘을 쓰면 어중간 한 마나 블레이드를 맨몸으로 받아내는 것도 가능했고, 어지간한 마법이나 주술, 저주는 통하지도 않았으며, 아즈의 안정성 덕에 강력한 무사의 참격도 곧바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카리오사가 이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긁어댈 때면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할 만큼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고, 돌피부 주문을 새긴 가죽 갑옷만큼 단단한 피부도 종잇장처럼 베여 나갔으며, 피도 잘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괜히 옆 방에 사제를 대기시켜 놓은 게 아니었다.

“혈통과 노력?”

“맞네. 그 둘로 못할 건 없지.”

“그래. 그리고 난 둘 다 있지.”

카리오사가 탕에 머리를 기대고 반쯤 누워 나른하게 웃었다.

물색 머리카락이 물속에 녹아든 듯 풀어져 이리저리 흔들리고, 가볍게 벌어진 이빨 사이로 선홍색으로 물든 목욕물이 드나들었다.

그녀가 천국에 간 광명교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자니, 그 카리스마 넘치는 마검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신선하기도 했고, 약간 귀엽기도 했고, 언제 내 목을 물어뜯고 보다 신선한 것을 원할지 몰라 무섭기도 했다.

따라서 난 마지막 생각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빙 돌려서 질문했다.

“입욕제를 엄청 많이 넣었잖아. 이 나무통도 측백나무고. 피 향이나 맛이 나?”

카리오사가 보글보글 거품을 뿜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네 피 냄새를 싫어할 것 같아서 넣은 거야. 난 서머린의 후예야. 넓은 호수에 피 한 방울만 떨어트려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하.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

“내 머리도 자르고 싶냐고 묻던 패기는 어디 갔어?”

“패기롭게 도전하던 자들을 패는 게 일과다 보니, 쉽지 않네.”

“음. 괜찮은 핑계야.”

나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이유가 아니라 핑계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카리오사가 고개를 살짝 들고 기울였다.

선홍색 물방울이 뺨을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예를 들자면?”

“날 여기 부른 이유처럼.”

그녀가 큭, 하고 웃었다.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는 포식을 마친 상어처럼 풀려 있었다.

“그래. 눈치 하나는 진짜 빠르네.”

* * *

천장에 붙은 물방울이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선실, 온갖 최고급 입욕제가 들어간 욕조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나고, 짙게 피어오른 김은 두 남녀의 몸을 가린다.

하지만 조금 후각에 집중해 보면, 비릿한 쇠 향기를 느낄 수 있고, 조금 눈을 부릅뜨면 포악한 상어 이빨과 탐욕스러운 용의 눈을 볼 수 있겠지.

카리오사가 노래하듯 읊조렸다.

여전히 상반신 전체를 물속에 담근 체였다.

“맞아. 저놈들은 내가 지금까지 물리쳐온 애들처럼 보통 해적이 아니야. 동방 대륙 왕공 귀족들에게 인정받은 사략선 선장이지. 진짜로 작위를 받은 놈들도 있어. 죄수, 유랑민, 빈민 대상으로 이주 사업도 진행 중이고.”

이미 잘 알고 있는 사항들이었다.

“직접 말해줄 줄은 몰랐군.”

그녀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이미 다 알고 왔으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해버리는 말이었다.

“우리 아세노르타 가문의 영지는 일단 제국 동부 해안까지고, 닻 군도는 지금까지 미개척지대였어. 먼저 깃발 꽂는 놈이 임자라고. 그리고 저놈들이 먼저 깃발을 꽂았지.”

카리오사가 서늘하게 웃었다.

“안 좋은데.”

완전히 이완되었던 몸에 다시금 긴장감이 어렸다.

“동방 대륙 왕들은 유민과 해적을 모두 처리할 수 있어 좋고, 해적들은 인정받아서 좋고, 유민들은 새 땅이 생겨서 좋지. 그리고 그건 전부 나에게 안 좋은 일들이야.”

불을 보듯 뻔한 일들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방 대륙 왕들은 닻 군도를 거점으로 제국 동부에 압박을 가할 거고, 그 압박이라는 건 해적들을 보내서 온 항구도시를 신나게 약탈하는 거겠지. 닻 군도의 개척민들이 낸 세금은 그대로 해적의 보급품이 될 테고.”

카리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닻 군도가 필요해. 인구 늘어난 동부 내륙에서 농노들을 빼다가 닻 군도에 보내야 하니까. 새로 얻은 봉신들 힘도 빼야 하고, 기강도 잡아야 하니까. 닻 군도에는 요새를 쌓고 함대를 주둔시킬 거야. 내 왕국이 될 곳이니까. 그럼 바다뱀 군도와 배들의 무덤 군도에 있는 어인족도 양면으로 토벌할 수 있겠지.”

여전히 물에서는 김이 올라왔다.

하지만 난 어딘가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그럼 그 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죽여야겠군? 한 명도 살려두지 말고. 땅을 차지해야 하고, 사람을 심어야 하니까.”

대답을 듣는 게 무서웠다.

확인한 순간, 그리고 그걸 말리지 않는 순간, 내 책임도 생기는 거니까.

카리오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해가 동쪽에서 뜨냐는 질문에 답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래. 다 죽일 거야. 그것들이 내 영지에서, 내 보호령에서 그랬듯.”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시체로 쌓인 산과 그 위에 서서 광소하는 동부의 상어 떼가 눈에 선했다.

해적에 대한 증오심이 내 생각보다도 깊은 듯한데, 타르티를 어떻게 빼내서 데려가야 할지도 막막했다.

“……내가 필요하겠지. 그렇게까지 해버린 이상 동방 대륙의 견제를 받을 테고, 그걸 막기 위해서는 신성 황제의 후광이 필요하니까. 닻 군도의 독립 국왕 카리오사가 아니라, 강력한 신성 황제의 봉신 카리오사로 보여야만 하니까.”

이번에도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웃음기까지 어려 있는 목소리였다.

카리오사가 몸을 내 쪽으로 돌리며 손을 뻗었다.

비늘을 두른 듯 빛나는 손이 다시금 내 복근 위를 더듬었다.

그녀가 음영 진 얼굴로 꿈꾸듯 웃으며 말했다.

그 꿈이 누군가에게 악몽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피를 타고 흐르는 가학성을 더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난 왕이 될 거야.”

“그래.”

난 그녀가 날 얽매도록 내버려 두었다.

“싸우고, 이기고, 그 열매를 쥘 거야. 가문과 내 이름에 불멸의 명성이 깃들게 할 거야.”

“그래.”

“황형을 끼고 살 만한 권세를 얻을 거야.”

“그래.”

“랑소와 이야기를 들었어. 소문답지 않던데? 그 발렌시아누스가 죽일 수 있는 적을 죽이지 않았다니. 이번에도 그렇게 할 거야?”

회색 눈동자가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

내가 뭐라고 해도 나를 원망하지 않을 걸 알아서, 날 뿌리치지 않을 걸 알아서,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기를 막겠다 하면 날 때려눕힐 거고, 막지 않겠다고 하면 기뻐할 거다.

유민들이라도 본토로 돌려보내자고 하면…… 돌아가 봐야 그들이 떠돌이로 살다가 침식되거나 죽을 운명인 건 내가 더 잘 안다.

회색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내가 한없이 부러워한, 지금도 부러워하고 있는 그 눈빛이었다.

나도 황제를 한번 해보겠다며 그 제이릴리스에게 도전한 그 야심이, 그 혈기가, 그 용기가, 그 패기가, 그 욕망이!

부럽고도 두려웠다.

난 대답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런 문제는 해적을 다 쓸어버린 다음에 고민하도록 하지. 그다음에는 유민들의 숫자와 건강 상태, 사상의 건전함을 파악하겠어. 처우에 관한 결정은 그다음이다.”

카리오사가 피식 웃었다.

“도망이야? 아까하고는 다른데?”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유민이 충분히 안 넘어왔을 수도 있고, 알고 보니 이미 침식이 시작되어 있어서 다 죽일 수밖에 없을 수도 있지.”

“음.”

“예상보다 개간할 수 있는 영토가 넓을 수도 있고, 그들 중에 쓸만한 인재가 나올 수도 있어. 실상을 확인하고 생각하자고. 우리는 말이 아니라 현실을 다스리는 사람들이니까.”

그래.

신민을 기만해야 하는 쪽인 내가 되려 기만당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사람에 얽매여도 말에는 얽매이지 말자.

확인하지 않은 일을 고민하지 말자.

실제로 일어나는 일만 처리하자.

생각 따위에 지배당하지 말자.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내가 하지 않으며 누가 해줄 수 있을까?

누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세상의 두려움으로부터, 신민들을 기만해줄 수 있을까?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손익을 따진 다음에 행동해도 늦지 않는다.

제일 중요한 건 제이릴리스에게 바칠 많은 부와 명성을 최대한 많이 들고 돌아가는 거다.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고 싶으며, 그렇게 살았다.

아무래도 에릭 얀 베네틱트 때문에 다소의 정신 오염이 있던 듯하다.

그걸 알아차리자 머릿속이 한결 맑아졌다.

난 카리오사를 향해 뻔뻔하게 웃었다.

카리오사가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신비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내가 그 표정 좋아하는 거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대답 보류한 값이야. 충분한가?”

“잘 쳐서 받았네. 좋아.”

그녀가 씩 웃더니, 느긋하게 하품했다.

“그럼 됐어.”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슬슬 일어날까? 하고 간접적으로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들어가. 난 더 쉬다가 들어갈게. 오늘도 못 일어나겠어.”

“먼저 가려 하면 물어뜯을 줄 알았는데.”

카리오사가 여유만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래 봐야 내 배 안이지. 잔머리 굴리지 마. 정신 차려 발렌시아누스. 너 이미 나한테 먹혔어.”

그래.

저 솔직한 모습이 부러웠다.

“그렇군.”

내가 탕 밖으로 나서자, 카리오사의 시녀와 시종들이 내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의복은……?”

“아. 가져왔네.”

“예?”

가볍게 마나를 운용했다.

츠츠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에서 하얀 실이 뿜어져 나왔고, 태어난 그대로의 몸 위에 다시금 권위적인 제복이 덧씌워졌다.

제이릴리스가 만들어 준 새 제복이었다.

카리오스가 눈동자를 키웠고, 시종 시녀들이 입을 쩍 벌렸으며, 나는 옅게 웃으며 선실을 나섰다.

* * *

천천히 복도를 가로질러 내 선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모퉁이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나는 숨소리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다.

아마도 중성적인 미성을 가진 영혼 마법사겠지.

“로렐라이. 나오지?”

“…….”

“난 열사암후 시카리우스까지 만나봤어. 내 기감은 못 속인다.”

잠시 후 오렌지색 머리의 소년이 모퉁이 밖으로 나왔다.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가 망설임 어린 어조로 물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말하라.”

“누님 전하랑 깊은 관계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로렐라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한동안…… 거리를 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일단, 이유를 물어보지.”

내가 쓰러졌을 때도 슬슬 새벽이었고, 이미 날은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간판 위에서 노획물 이야기를 나누는 장교기사들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다.

순간 로렐라이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전 대공 전하의 영혼을 봤습니다.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하처럼 위험한 분을, 누님 전하 곁에 둘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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