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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큰 모욕으로 느낄 만한 말이었지만, 혼혈 귀족이 가득한 솔레타라스에서는 그리 부정적인 표현도 아니었다.
카리오사는 서머린의 후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나 역시 솔레타라스의 피 덕에 대공 소리를 듣고 있으며, 텐티아 경의 새 보검 만하를 만든 장인 역시 드워프 피 덕에 그 정도의 야금술을 손에 넣었다.
따라서 나는 로렐라이의 말을 비꼬았다.
“사람이 아니라서 위험하다고? 일단 그 이빨부터 어떻게 하고 다시 말하는 게 어떤가?”
로렐라이 역시 상어 같은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울컥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분노 어린 미성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가볍게 손짓해 그가 날 따라오도록 했으며,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아니라고? 내가 보기에는 친애하는 누님 전하를 망나니 대공이 능욕할까 두려워하는 듯한데?”
“!”
로렐라이가 입을 쩍 벌렸다.
얼굴에 장갑을 얻어맞고 칼에 찔려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난 몇 시간 전 일대를 휘감는 화염 폭풍을 선보였고, 카리오사의 손님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숙련된 사람 분쇄기였다.
나보다 한 뼘 반 정도 작은 로렐라이가 ‘이 귀축!’ 하고 외치며 단검을 뽑아 들고 덤벼도, 단숨에 벽에 밀어 붙여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녀석이 나에 대해서 뭘 알고 있는지 자기 입으로 다 말하게 하는 게 중요했다.
격정에 차 나를 매도할수록 지금 내 몸과 영혼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확실해질 테니까.
로렐라이가 입술을 깨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런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대공 전하가 정신 파동을 사용했다는 거예요.”
난 순간 내 귀에 물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신 파동?”
“아까 붉은색 파동을 봤습니다. 그건 정신 파동이었어요.”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로렐라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물을 불로 정화해 흡수했다는 말은, 그 너머의 존재가 이 세상에 녹아들었다는 말이에요. 이제는 확실히 섞이겠죠. 대공 전하의 몸을 매개체로요. 그런데 이물이 다른 세상에서 와서 위험한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잠시 망설였다.
랑소와 공화국과의 접경지에서 내가 이용했던 이물은 한없이 마수에 가까웠고,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로렐라이가 마음속에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 전하의 경우에는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서 문제인 게 아니라, 뭔가와 섞이는 것 자체가 문제예요.”
나는 당혹감을 억누르며 애쓰며, 최대한 냉정하게 답했다.
“참고하지.”
그가 무례 직전까지 언성을 높였다.
“참고가 아니라-.”
“입 다물어.”
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서늘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서.
로렐라이의 세로 동공이 팽창했고, 오렌지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으며, 비늘처럼 빛나는 하얀 피부에 무엇으로부터 기인했는지 알 수 없는 홍조가 어렸다.
“저, 전하?”
“치료는 감사하지. 하지만 다시 날 몰래 따라다니다 걸리면 책임을 묻겠다.”
섞이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 가지 상념도 떠올랐다.
용혈 황족을 좋아하는 게 서머린 후예들의 본능 같은 거라면, 로렐라이의 연적은 내가 아니라 카리오사일지도 몰랐다.
……환장하겠네.
나는 내 선실로 돌아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느껴진 인기척은 분명 하나가 아니었다.
* * *
‘발렌 님은 잘 계실까 모르겠네요.’
루디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도 부르주아들이 개최한 무도회에 나갔다.
긴 머리는 높게 올려 묶고, 정갈한 하얀 드레스 위로 레이스 풍성한 갈색 숄을 걸쳤으며, 사점 안경은 품속에 넣고 보석 같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전 잘하고 있어요. 아니. 그걸 인정해줄 분이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발렌시아누스를 대신해서 사교 활동을 이어가고, 최종적으로 사교계의 흑막 또는 거물이 되어야 했다.
‘재미있네요.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마음 불편하게 노는 건.’
금화와 은화는 썩어나게 많은 이들답게, 홀도 장식도 화려하기가 이룰 말할 수 없었다.
“콘세크라투스 백작님. 이렇게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아르젠타 마도구 공방의 소믠입니다.”
“에즈라 건설 조합의 라피입니다.”
그러나 루디는 그 홀에서 궁정 귀족들이 비웃는 졸부의 천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장식이 계절에도 상황에도 안 맞네요. 봄에는 생화 장식을 안 한다고요.’
무도회를 열 때는 기본적으로 그 계절에 나지 않는 장식을 쓴다.
밖에서 볼 수 있는 걸 굳이 안에서 볼 필요가 없다는 의미기도 했고, 내가 얼마나 이 무도회에 신경 썼는지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봄에는 화려한 봄꽃보다는 녹음 짙은 잎과 덩굴, 수수한 여름꽃 장식이 정석이었다.
‘꽃과 금을 같이 걸면 안 되죠. 전 저랬다가 선배에게 뺨 맞았는데.’
생화는 사랑과 순간을 상징하기에 주로 가면무도회나 젊은이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썼고, 금은 부귀와 불변을 상징하기에 조금 더 무게가 있는 자리에 썼다.
그러나 루디는 굳이 그걸 지적할 만큼 공격성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루디 각하. 혹시 어디 눈에 걸리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냥 잠깐 옛날 생각이 났을 뿐이랍니다.”
해맑게 웃으며 백포도주 잔을 들었다.
“저분이 그분이지?”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칼날.”
“설마 협박으로 작위를 얻었다는 게 진짜일까요?”
“그런 사람이 황궁 안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루디는 주변의 부르주아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았다.
‘다 보인다고요.’
이럴 때는 시녀 사수의 감각이 야속하기도 했다.
‘당신들이 귀족을 질투하면서 부러워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게 저 시선의 근간이었다.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고, 귀족보다도 화려한 무도회를 열지만, 어딘가에는 사라지지 않는 자격지심이 남아 있다.
‘그건…… 귀족이 되려 하는 게 아니라 귀족의 겉모습을 따라 하려 하기에 그렇겠지요.’
루디는 그들의 눈치를 보는 대신, 더더욱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전 소중한 발렌 님의 대리인이니까요.’
그녀는 여기 놀러 온 게 아니고, 부탁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청탁받기 위해 온 거였다.
“루디 백작 각하.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이쪽에서 사업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으실까요?”
중장년의 사내 둘이 제 딸뻘이나 될 여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루디는 그런 대우에 어느새 익숙해지려 하는 자신을 약간 책망했고.
“안내하세요.”
약간은 기특해했다.
‘저 잘하고 있는 거 같아요. 발렌 님.’
으슥한 구석에서 돈이 얽힌 이야기가 나왔다.
사람 목숨을 어찌 돈으로 매길 수 있겠냐마는, 그 돈이면 좋은 용병단을 몇 년간 고용해 군소국가들을 점령하고 공왕을 칭할 수도 있는 돈이었다.
“원래 15층으로 허가받았던 석조 건물을 20층 이상으로 올리고 싶다?”
오늘의 손님은 건설 조합과 자재 길드 쪽 사람들이었다.
“예. 루디 각하.”
“신시가지의 등대 같은 상징이 될 것입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성공만 한다면 조합 채권이 몇 배로 팔릴 겁니다.”
“인근 상권도 크게 활성화될 거고요.”
“여기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들은 액수를 말하지 않았고, 손에 주머니를 쥐여 주지도 않았으며, 담백하게 본론만 이야기했다.
금화와 은화는 마차로 실어서 보내 주겠다는 뜻이었다.
루디는 그들 중 한 사람을 선택했다.
“렌리. 잠시 남아서 이야기 좀 더 하죠.”
“……예! 각하.”
주변 부르주아들은 성자를 영접한 광명교도를 바라보는 듯 렌리를 올려다보다 아쉬움을 품고 돌아섰다.
그는 다른 부르주아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 비슷한 액수의 뇌물을 가져왔지만, 보고서 하나를 더 첨부했다.
골렘 마법을 이용해 지하 축대를 다지고 기둥을 연결하면, 지반이 훨씬 더 단단해져서 탑을 높게 올려도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연구였다.
최근 부랴부랴 열렸던 ‘제1회 상아탑 주최 학술회’에서 나왔던 자료였다.
‘세레라지에 전하의 사제가 발표했던 거였죠. 그 상아색과 붉은색 그라데이션 된 머리카락. 이름이 니아르였던가요?’
루디는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세상 참 좁네요.’
* * *
발렌시아누스의 사두마차는 열심히 구겨 넣으면 열두 명도 탈 수 있을 만큼 넓었고, 루디는 그곳에 혼자 앉아 있었다.
‘금화 자루 덕에 외롭지는 않네요.’
진작 야간통행금지가 시작된 시간이었지만, 어떤 치안감도 천하의 시녀 사수를 건들 엄두는 내지 못했다.
‘새로운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네요. 앞으로 점점 더 높은 건물들이 솟겠어요. 대지 마법사 인력의 가치가 더 높아질 거고. 상아탑 대지 학파와 아카데미 대지 마법 교수들이 탄성을 지르겠지요. 그럼 대귀족들이 첩자를 보내 빼가려 할 테니, 진에게 그 첩자들을 막을 준비를 하라고 말해 줘야겠네요.’
루디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시트에 기대 꾸벅꾸벅 졸았다.
딱!
“히이이잉!”
그때 무언가 날아드는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루디는 다급히 물었고, 마부가 거칠게 답했다.
“별것 아닙니다. 각하. 골목에서 미친놈들이 돌을 던진 모양입니다. 말은 괜찮습니다. 바이콘 피가 섞여 튼튼한 놈들이어서요. 각하가 누구신지 모르는 모양인데, 제가 가서 혼쭐을 내놓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가 새로 고용한 마부는 정예 기병 출신이었다.
그가 마부석 옆에 둔 철퇴를 집어 들었고, 루디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과거 남부의 공포새 기병들을 마주했던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아니요. 마부 아저씨는 거기 계세요.”
“예?”
“함정 같아요. 제가 처리할게요.”
진득한 졸음기는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고, 녹색 눈에 뜨거운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이 근처에는 아직 가로등이 없어요. 원래 부유한 거리도 아니고, 당장 가로등을 도입해야 할 만큼 막장인 거리도 아니었죠.’
‘저를 알고 노렸다면…… 문을 이용하는 건 위험해요. 이미 사각지대에 쇠뇌 사수가 있을 겁니다.’
‘그럼…….’
루디는 천천히 손을 뻗어 마차 지붕에 설치된 미닫이문을 소리 없이 단숨에 열었다.
타앗!
검은 그림자 하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피잉!
동시에 굵은 쇠뇌 두 발이 날아와 마차 좌우의 문 앞에 박혔다.
화살촉에 어린 검은색과 보라색 기운은 강력한 저주 마법이었다.
“칫!”
“읽혔다!”
문으로 나갔다면 꼼짝없이 직격당했을 각도였다.
‘예상대로네요.’
루디는 한 번의 도약으로 인도를 건너뛰어 석조 건물 벽에 붙었고, 창문틀, 베란다, 배관을 오가며 옥상으로 올라갔으며, 마지막 도약을 하는 순간 품속에서 사점 안경을 꺼내 썼다.
사아아아.
철혈당주 마커스의 지혜와 지식이 부여된 렌즈가 시야에 덧씌워지고, 야간 투시, 시야 확장, 열 감지의 주문이 발현되었다.
루디는 등 뒤까지 보이는 그 감각에 잊어버린 팔다리를 되찾은 듯 전율했고, 길 반대편 건물과 옆 건물에서 자신을 겨누고 있던 두 쇠뇌 사수를 발견했다.
“어디 갔어?”
“젠장!”
반대편 건물의 사수는 어영부영하고 있었고, 옆 건물의 사수는 다음 쇠뇌를 장전하고 있었다.
루디는 그대로 몸을 날려 옆 건물의 사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퉁!
그녀의 몸이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땅을 박찼고, 둘 사이의 거리가 땅이 접힌 듯 좁아졌으며, 루디의 입가에 해맑은 미소가 어렸다.
퉁!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휘날리는 가운데,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마법 소검 ‘생동’이 쥐여져 있었다.
츠츠츠츠!
얼음으로 된 칼날이 장검만큼 길어졌다.
“죽어주세요!”
“이-!”
사아아악-!
루디와 사수가 교차했고, 얼음 칼날이 멋들어진 원을 그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쇠뇌 사수의 머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쐐애애액!
“!”
타악!
다음 순간 루디는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두 번째 쇠뇌 화살을 피했다.
반대편 건물의 사수가 어느새 장전을 마친 것이었다.
쐐애애액!
안도감도 잠시 연달아 쇠뇌가 날아왔다.
‘미리 장전해둔 건가요?’
푸른 전격이 그 촉에 어려 있었다.
루디라 해도 공중에서 몸을 돌리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역장 반지에 마나를 주입하는 동시에, 왼손으로 마총 아가테를 뽑아 들었다.
텅!
타아앙!
반투명한 역장이 번뜩였고, 쇠뇌 화살이 튕겨 나갔으며, 마탄은 쇠뇌 사수의 이마 정중앙을 꿰뚫었다.
“젠장!”
“뛰어!”
마총 소리를 듣고 일이 틀렸음을 짐작했는지, 골목길에서 침음성과 발소리가 들려왔다.
루디는 총구 끝을 후, 하고 분 뒤, 생동과 아가테를 쥐고 건물 아래로 몸을 날렸다.
‘내일은 크리에스 백작의 봄맞이 무도회인데, 피곤하겠네요. 활력의 마법약 하나 받아와야겠어요.’
시녀 사수의 즐거운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