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용 없는 산에 와이번이 왕처럼 군다.
발렌시아누스 없는 수도 사교계에서 루디가 왕처럼 군다.
루디는 궁정 귀족들이 그 말을 내뱉을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아주 좋은 분위기에서 가끔가다 나오는 말이었고,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진작 은퇴한 중, 노년의 귀족들이었다.
사실상 출세한 손녀를 대하듯 하는 말이었으니, 그때는 하하 호호 웃어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또래 귀족들 사이에서 그 말을 듣는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결국 운이 좋아서 출세한 것 아닌가?”
“혈통이 고귀한 건 아니고, 진귀한 지혜를 가진 것도 아니고, 빼어난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지. 검을 잘 다룬다 하나 소드 엑스퍼트는 아니지 않나?”
“흥. 우리 눈도 못 마주치던 시녀 주제에.”
모두에게 환호받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상했어요. 제가 벼락출세한 건 맞으니까요.’
해맑은 웃음과 상냥한 인상만 보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녀는 얼굴 가죽 속에 천 마리 뱀을 숨겨 놓고 있었다.
드센 선배와 음흉한 후배들 사이에서 10년을 살아남은 그녀다.
물지 않을 거면 위협해도 안 되고, 물 거라면, 다시는 못 일어나게 끝장내 버려야 한다.
첫 실전에서 어보미네이션을 사살한 본능은 수많은 경험으로 벼려져 든든한 실력이 되었다.
물론 예전처럼 다짜고짜 다가가 얼굴에 장갑을 집어 던질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는 그녀보다 강한 사람이 많았고, 동등한 관계망 속에서는 명분이 존중받는 법이었다.
‘완전히 얼굴을 마주하고 말한 것도 아니에요. 등 뒤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독한 술까지 홀짝이며 한 말이죠. 더더욱 장갑부터 던질 수는 없어요.’
루디는 천천히 사점 안경을 쓰며 몸을 돌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주변에 모인 추종자들에게 가볍게 손 인사를 했고, 다 들리는 뒷담을 나눈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술이 과하신 듯해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말실수했다고 사과하면 넘어가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들은 가볍게 눈을 마주쳤고, 대표 격 되는 푸른 머리의 사내가 씩 웃으며 답했다.
외모는 수려하고 귀족적이었으나, 귀족답게 말 속에 뼈를 담았다.
“하하. 이 정도로는 문제없소.”
말실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가 다시금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루디 백작. 난 카모스 백작이요. 그대와 큰 차이 없는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았지. 너무 어린 나이에 큰 책임을 지게 되어 힘들었소.”
나도 힘들 정도였는데, 너에게는 그 작위가 과분하다는 뜻이었다.
루디는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전 대공 전하를 섬겨 왔는데요. 이렇게 말하자면 오만한 말이겠지요. 요즘 하루하루가 즐거울 따름이랍니다.”
난 너 같이 나약한 놈과 다르다는 뜻이었다.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카모스가 얼굴을 가볍게 굳혔다.
“하. 그렇군. 좋소. 무엇에 헌신하기에 그리 즐겁소?”
이번에는 루디가 얼굴을 굳힐 차례였다.
귀족은 생업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
군사, 법복, 배지, 재화, 행정, 마도 등등.
루디가 가장 가까운 건 군사 귀족이었지만, 기사 작위를 받으려면 소드 엑스퍼트는 되어야 했다.
‘한 방 먹었네요. 제가 소드 엑스퍼트가 가주로 있는 가문의 구성원이었다면 혈통적 정당성이라도 내세울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니까요.’
넌 귀족의 자격이 없다는 치명적인 일갈이었다.
‘하지만, 아직 꼬리를 말 정도는 아니에요.’
루디는 상냥하게 웃으며 답했다.
“말씀해주신 대로, 제가 가진 건 주인의 신뢰와 그에 보답할 보잘것없는 재주뿐이죠.”
목덜미를 물었다는 듯, 카모스가 눈을 번뜩였다.
“겸손의 미덕을 갖추고 있으시군. 아주 기껍소.”
그때 루디는 카모스의 주변 추종자들의 복식이 유독 화려한 점, 이종족 특성이 거의 없는 점, 군사 귀족들과 거리가 멀고 배지 귀족들과 가깝다는 점에서, 그가 재화 귀족이리라 추측했다.
‘그가 후원하는 건설 길드에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패악질 부리는 거네요.’
그렇다면.
루디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승부수를 걸 때임을 알아차렸다.
“카모스 백작.”
주변 귀족들은 에메랄드같이 아름다운 눈동자에 새빨간 안광이 튀는 환각을 보았다.
상냥한 웃음에 깊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가진 건 주인의 신뢰에 대한 자부심밖에 없는 시녀 백작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든다면, 장갑에 얻어맞아도 할 말은 없겠지요?”
* * *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족이란 힘으로 군림해온 자들이었고, 상무 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각하. 루디 백작님이 영광의 길을 걸으시겠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화끈해서 좋군.”
“나 젊을 때 보는 거 같아.”
“내가 혈마법사라네. 포션도 가져왔지. 죽지만 않으면 살려줄 테니 멋지게 붙어 보라 하게.”
노귀족들은 그들이 한때 가지고 있던 젊은이의 혈기를 칭송했고, 순식간에 판을 준비했다.
홀에 단단한 직사각형 테이블 몇 개가 길게 붙었고, 그 위로 두툼한 융단이 깔렸다.
‘영광의 길’이라 불리는 결투로였다.
카모스는 재화 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검과 마도구 반지를 점검하며 생각했다.
‘당했군. 시녀를 상대로 결투라니. 이겨봐야 본전이다. 하지만 이길 수는 있어.’
그 역시 한때 기사단에 들어가려 수련에 힘썼던 소드 유저였다.
끝내 마나 블레이드를 만들지 못해 재화 귀족의 길에 들어섰지만, 검술 하나만큼은 기사들보다 뛰어나다는 평도 받았다.
‘빼어난 실력자라지만, 소드 엑스퍼트는 아니다. 검술보다는 기이한 마도구 무기를 잘 다루는 걸로 이름이 높아. 이 길에서의 정면 대결은 내가 유리하다. 오히려 잘됐어.’
사수, 암살자 모두 군사 귀족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군사 귀족이 재화 귀족에게 결투로 밀린다면 그런 창피도 없지. 내가 지지난 무도회부터 내가 후원하는 길드를 좀 밀어달라고 그렇게 어필했는데, 그걸 무시해? 망나니 대공이 돌아오기 전에 본때를 보여주마.’
챙!
카모스는 푸른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고, 검 면은 좁지만, 두께는 두툼한 한손직검을 뽑아 들었다.
“이 카모스, 콘세크라투스 백작의 결투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소.”
루디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감사해요. 카모스 백작. 따로 입회인은 필요치 않겠죠?”
“여기 모두가 우리의 입회인 아니겠소?”
무수한 귀족이 이 진지하고도 재미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모스 쟤 진짜 난처하겠다. 이겨 봐야 시녀 상대로 이긴 모자란 놈 되는 거잖아.”
“하지만 이겨도 모자란 놈 져도 모자란 놈이면 이기고 모자란 놈 되는 게 낫지.”
“난 루디 백작이 더 기대되는데? 소문만큼 강할까?”
무도회의 주최자인 노백작이 시작을 외쳤다.
“정의의 여신이 이 결투를 바라보신다!”
말이 떨어진 순간 카모스가 세 걸음 달려 나오며 검을 내질렀고, 루디가 새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다.
샹들리에에 머리가 스칠 듯한 도약이었다.
타악!
카모스의 찌르기는 완벽히 허공을 갈랐고, 루디는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카모스의 뒤에 내려섰다.
착.
미리 합을 맞춘 듯 보일 정도로 깔끔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군사 귀족들은 카모스가 얼마나 다리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루디가 얼마나 빠르게 반응했는지 알아보았다.
‘저렇게 피할 줄은 몰랐군.’
‘눈 하나는 정말 뛰어나.’
‘그것뿐인지 아닌지는 곧 확인해볼 수 있겠지.’
‘이렇게 말하기는 뭣하지만, 카모스 백작은 그걸 검증해줄 실력은 되거든.’
“이-!”
카모스가 빙그르르 돌며 검을 휘둘렀다.
루디는 물러서는 대신, 얼음 칼날을 길게 뽑아낸 생동으로 막아냈고.
챙!
동시에 손목을 틀며 카모스의 목을 노리고 검을 찔러넣었다.
사악!
카모스는 반지 낀 왼손으로 검 면을 쳐 밀어냈다.
땅!
얼음 검 생동의 면이 꽤 넓었기에 가능한 동작이었다.
루디의 검이 밀려나고, 카모스는 다시 한번 긴 찌르기를 날렸다.
‘이 위에서는 피하기가 힘들다. 날랜 몸놀림보다 과감함이 필요해!’
사악!
예리한 칼날은 허공을 갈랐다.
루디가 곡예 하는 듯 몸을 젖히며 피하는 동시에 구두 앞코로 카모스의 손목을 걷어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지요.’
퍽!
소드 유저는 검에는 마나를 실지 못하지만, 육체는 마나로 강화할 수 있는 경지였고, 달리 말하자면 체술과 검술의 위력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모스는 손목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신음했고, 루디는 생동을 역수로 고쳐 쥐며 달려들었다.
타악!
츠카아아-.
순간 카모스는 루디의 눈빛을 보았다.
아무런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 단호한 눈빛.
그녀가 비슷한 수준의 강자들을 상대로 많은 경험을 쌓아왔음을 의미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왼손에 낀 전격 방사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이익!”
적절한 마도구를 갖추는 것도 귀족의 소양인지라, 결투라 해도 마도구로 힘을 강화하는 정도는 용인받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공격용 마도구까지 사용하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파지지직!
푸른 빛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고, 생동의 날이 깨져 나갔다.
마나에 유독 민감한 귀족들 몇몇이 직후 벌어질 일을 짐작하며 탄식했다.
그러나 루디가 바닥을 구르는 일은 없었다.
“이거…… 많이 아프네요.”
그녀가 낀 피뢰의 반지는 대부분의 전격을 무사히 발아래로 흘려보냈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을 쓰러트리고도 남을 위력이었지만, 루디는 이제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라 콘세크라투스 백작이었다.
루디는 자루만 남은 생동을 던져버리고 샌드웜 이빨 단검을 빼 들었다.
유리질 칼날이 샹들리에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그것이 시카리우스 가문의 보검임을 알아챈 귀족들이 탄성을 흘렸다.
이미 루디는 카모스에게 바짝 붙은 뒤였고, 카모스가 든 긴 검으로 할 수 있는 공격은 손잡이로 등을 내리찍는 정도였다.
루디는 상냥하게 웃으며 카모스의 목 아래에 단검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음에 청탁을 넣으려면 안정성도 좀 신경 써서 넣으세요. 그 건물이 무너지면 발렌 님이 책임져야 하는데, 제가 미쳤다고 금화 몇 닢에 발렌 님을 팔겠어요?”
“!”
등골이 오싹해지는 목소리였다.
“아셨죠?”
루디는 생글거리며 단검을 거두었고, 카모스는 넋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망치듯 무도회장을 나서 마차로 향했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내가 미쳤었나 보군.’
“나리. 괜찮으십니까?”
‘내가 미쳤어.’
“나리?”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루디의 뒤에 있는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두려워서였다.
그래야만 했다.
* * *
카모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가문이 운영하는 상단과 건축 길드를 개선하는 동안, 루디는 이세아스 백작과 마를리나 공녀가 개최하는 마도구 경매에 참석했다.
이세아스 백작은 단정한 흑발에 실눈을 뜬 젊은이였고, 마를리나 공녀는 잔망스러우면서도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였다.
“루디 백작님도 마도구에 대한 조예가 아주 깊으신 거 같았어요.”
“바람을 이용한 신체 강화와 전류를 이용한 신체 강화 반지를 둘 다 끼다니. 역시 배우신 분입니다.”
그날의 승리는 루디가 발렌시아누스와의 연결고리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는 증명이었다.
“부족한 재주를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디는 상냥하게 웃으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진기한 흑마법 마도구와 상아탑 밖 마법사들이 만든 기이한 마도구가 유리 진열장 안에 띄엄띄엄 놓여서 고급스러운 불빛을 받고 있었다.
얼굴에 가면을 쓴 귀족들이 그 안을 오가다 원하는 마도구 옆에 번호를 적은 종이를 올려놓았다.
루디는 진짜로 위험한 물건이 있나 감각을 곤두세우는 동시에, 두 남녀의 배경을 되새겼다.
‘둘은 약혼 관계예요. 백작은 젊고 공녀는 셋째죠. 기반이 약한 만큼 상아탑과 수도 공방이 지배하는 마도구 시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신, 비주류 틈새시장을 공략하기로 했어요.’
‘위험하고 신비한 이미지를 매력으로 삼고 있지만, 그 탓에 신실한 분들에게는 거부당하고 종래에는 교회가 공격할 위험도 있죠. 따라서 계속해서 사교계의 거물들과 저 같은 신성들을 끌어들이며 인식을 개선해야 해요.’
‘즉, 오늘 들어온 물건들은 아주 안전할 확률이 높아요. 아니면 위험을 알면서도 혹할 만큼 매력적이거나.’
그때 루디의 감각에 기이한 기운이 잡혔다.
재질 모를 두 개의 검은 촉수가 서로 감고 올라가는 형태의 조각상이었다.
루디는 이세아스 백작에게 물었다.
“저건…… 어디서 왔나요?”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