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93)화 (293/340)

(293)

이세아스가 그 촉수 조각상이 있는 진열장 앞으로 다가가 서류를 바라보았다.

[제국 남부 항구도시에서 올라온 검은 촉수 조각상. 해당 지역에서 오랜 시간 섬김받았던 신의 상징이나, 이제는 아무도 섬기지 않는 쇠락한 교리의 추억.]

[약 450년 전의 물건으로 추정. 물의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명상 수련에 도움이 되나. 남용 시 정신 오염 확률 높음. 위험도 35]

일련의 글귀를 읽은 그가 멋쩍게 웃었다.

“으음. 루디 백작님 같은 분이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은 아닌 듯합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은 걸 보니 더더욱요.”

루디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로 상념에 빠져들었다.

‘제국 남부라면 옛것을 섬기는 아미르 토후국과 육로와 해로로 이어진 곳이죠. 유목민족과 해적을 통한 밀수도 잦고요.’

‘대놓고 정신 오염의 가능성을 적어놨어요. 물론 정신 오염이 곧 침식은 아니지만, 침식에 아주 취약해지는 상태죠. 또 정신 오염이 전부라는 보장도 없고요.’

‘이건 침식자 교단이 이세아스 백작을 통해서 수도로 들어오려는 음모일까요? 아니면 이세아스 백작과 공녀까지 이미 한패일까요? 그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들어온 멋진 옛 유물일 뿐일까요?’

루디는 그의 웃음 너머를 보려 했지만, 이세아스 백작의 실눈은 도저히 틈을 내주지 않았다.

그가 시원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건 말고, 저런 게 어떻습니까? 동방에서 온 마도구입니다. 오늘 공개한 것 중에는 제일 인기가 좋지요.”

루디는 그의 손끝이 향한 곳에 있는 마도구를 바라보았다.

검은 천과 검은 가죽으로 만든 가면이었는데, 눈 아래부터 목까지 감쌀 수 있는 형태였다.

입이 있는 곳에는 붉은 염료와 하얀 염료로 이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발렌 님이 썩 좋아하실 만한 모양새는 아니네요.’

루디는 그렇게 생각하고 관심을 돌리려 했지만, 이세아스는 한 마디만 더 들어보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 마도구 ‘귀면’은 영체화 기능이 있답니다.”

그건 확실히 혹하는 기능이었다.

당장 며칠 전 마차에서 내릴 때도, 내리는 순간에만 영체화를 사용했으면 쇠뇌 저격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한 번 보기만 하겠어요.”

루디는 ‘귀면’ 앞으로 다가가 설명을 읽어보았다.

[동방의 어느 암살자가 사용했을 가면. 한때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당신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의 물건으로 추정. 짧은 시간 동안 영체로 몸을 바꿀 수 있으나, 영체 상태에서는 침식자의 정신 파동이나 고위 전격 마법에 취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위험도 15]

모두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그건 그것대로 유용한 정보였다.

감정을 맡길 때 이러한 기능이나 위험이 실제로 있는지 물어보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인기 있는 물건이라는 말이 사실인지, 이미 번호 여럿이 놓여 있었다.

‘빠르게 몸을 빼거나 자리를 잡을 때 사용하면 아주 유용하겠어요. 제가 보통 시녀가 아니라는 건, 귀족이라면 누구나 아는 비밀이죠.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는 사람들의 눈을 속일 만큼 대단한 마도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요.’

루디는 잠시 값을 짐작해 보았다.

영체화 마도구라면 분명 아콰테그 이상의 기물이었다.

발렌시아누스라면 살 만한 물건이겠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예산으로 살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물론 금화를 좀 썼다고 해서 발렌시아누스가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섬기는 이의 권세가 제 권세인 양 거들먹거리는 건, 시녀와 시종이 보일 수 있는 행동 중 제일 꼴불견이었다.

섬기는 이의 돈이 제 돈인 양 손을 대는 건 고려할 가치도 없다.

‘애초에 이런 마도구가 필요해졌을 때 딱 운 좋게 나타난 것도 이상해요. 세상은 저 좋은 대로 돌아가 주지 않는다고요.’

루디는 이세아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어떻습니까?’ 하며 의뭉스러운 눈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루디는 마지막 가능성까지 떠올랐다.

‘검은 촉수 조각상은 계산에 없었고, 이쪽이 진짜 침식 마도구일 확률도 있지만-.’

“입찰하겠어요.”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마도구 보증서랑 매입, 운송을 맡은 상단의 보증서는 떼 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그럼 저 검은 촉수 조각상까지 입찰할게요.”

“……알겠습니다.”

* * *

“그래서 나한테 가져왔다는 거니?”

세레라지에가 종합공방 구내식당에서 수프를 떠먹다 말했다.

푸른 눈과 노란 눈은 여전히 총기로 번뜩였지만, 그녀의 뺨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약간 더 들어가 있었다.

루디는 적어도 사흘에 한 번은 종합공방을 방문해야겠다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라지에가 흐음,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뭐. 일단 영체화가 사실이라면, 꽤 싸게 샀구나. 영체화 마도구를 연구하게 해주는 값으로 그 정도 금액은 대납해줄 수 있잖니.”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래. 네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입찰을 안 한 녀석들도 꽤 많았을 거란다. 그쪽 가면은 그냥 분위기 내려고 쓰는 거잖니.”

“아하하하. 전하 말씀대로예요. 다 어디서 본 사람들이더라고요.”

“바로 보자꾸나.”

루디는 손가방에서 천에 싸인 가면과 조각상을 꺼냈다.

세레라지에가 가면을 집어 들어 지긋이 바라보더니,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잘 샀잖니. 남은 대금은 내가 치르겠단다. 이세아스 백작이라고 했니? 이런 물건을 들여올 수 있다면 꽤 수완가잖니. 투피올! 투피올 어디 있니?”

한쪽 테이블에서 붉은 반삭 머리의 제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지금 가겠습니다!”

그는 생도 깡패 출신이었는데, 세레라지에의 평에 따르자면, ‘마법 실력은 그저 그렇고, 공방과 사업을 관리하고 확장하는 데 두각을 드러내는’ 자였다.

루디는 그가 막 ‘매콤하고 칼칼한 국물에 구불구불하게 말아 튀긴 면을 끓여 먹는’ 요리를 한 젓가락 먹으려 했던 찰나였음을 보았기에,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스승님. 찾으셨습니까?”

“이세라스 백작에게 편지를 보내려무나. 내가 종종 찾아갈 거라고 말이잖니. 혹시 감정받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말하라고도 적어 주려무나.”

루디는 잠시 당황했다.

“전하. 그게-.”

이세라스 백작이 침식자와의 연결고리라면, 침식자를 찾아내는 마도구를 개발한 희대의 마법사 세레라지에가 오자마자 짐 싸 들고 도망갈 게 뻔했다.

“제가 지금 발렌 님 명령대로 궁정 귀족들 사이에서 수상한 흔적을 찾는 중인데, 전하 같은 분이 강림하시면 다들 도망갈 거 같아요.”

세레라지에는 턱을 쳐들었다.

“그래서 이런 마도구를 구해오는 재화 귀족을 내버려 두라는 말이니?”

이색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렸고, 루디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게 아니라-.”

“뭐. 네가 그렇다면야 알았잖니. 투피올. 찾아가겠다는 말은 빼고, 원하면 찾아오라고 적으려무나. 아. 그래. 루디 네가 자주 갈 테니, 이런 물건이 있으면 쓸어 오려무나. 내가 계산하면 되잖니.”

그녀는 너무나 마법사답게 태도를 뒤집었고, 루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일단 이세라스 백작과는 계속 만나봐야 할 듯했다.

“그래. 그럼 이제 그 촉수 조각상도 보자꾸나.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하잖니.”

“아, 네.”

세레라지에는 검은 촉수상도 ‘귀면’을 볼 때처럼 바라보았고, 약간 전류를 흘려 보기도 했고, 지팡이를 들어 그 위에 달린 보석으로 긁어 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잠시,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 듯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루디. 이건 조금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거 같구나. 6층 검사실로 가자꾸나.”

그녀가 남은 수프를 훌훌 마시고 제자 몇몇을 불렀다.

“6층이잖니!”

힘이 펄펄 넘치는 어조였다.

루디는 이름 불린 제자들이 아주아주 잠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들고 있던 식판에 놓인 음식을 한 입이라도 더 먹은 뒤, 빵을 쥐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했기에, 제대로 먹지도 못할 제자들의 쥐꼬리만 한 휴식 시간을 빼앗았다는 사실에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세레라지에 전하. 그렇게까지 자세히 봐주실 필요는 없는데.”

세레라지에가 잔뜩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니. 이건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란다. 방금 약간 전류를 흘려 봤는데, 이 세상 물질의 진동 계수가 아니잖니.”

“네?”

“그래. 이것도 그 수정처럼 옛것의 파편이란다. 그 서류도 줘 보렴. 아무래도 상인을 만나봐야 할 거 같잖니.”

루디는 한 대 맞은 기분으로 세레라지에를 따라 6층으로 향했다.

이 세상 물질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제자들이 좀비 떼 같은 소리를 내며 둘의 뒤로 몰려들었다.

“세레라지에 전하. 체력 훈련 좀 하세요. 너무 허약해지셨어요.”

“넌 소드 유저고, 난 마법사잖니.”

“그래도 3층부터 업히시는 건 안 되세요.”

* * *

세레라지에의 제자들이 검은 촉수 조각상을 온갖 방법으로 분석했다.

“시약 가져와!”

“지난번에 발렌 전하의 비늘을 녹일 때 썼던 지성 용해액 어디 있어?”

“산소 뺄 거니까 그 안에 촛불 켜 놔.”

강산, 염기, 신성력, 가열, 냉각, 전류 흘리기, 고문헌 대조…….

세 시간 정도 검사실이 복작복작했다.

마지막으로 사제의 검사까지 받은 뒤, 세레라지에는 명쾌한 결론을 내놓았다.

“루디. 이건 옛것 마도구가 맞잖니. 추종자들이 기도할 때 썼던 듯하구나.”

루디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1년 전의 사태가 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내달렸다.

“그럼…… 수도는 다시 망할 뻔했던 거예요?”

세레라지에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옛것 마도구라면서요.”

루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고, 세레라지에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듯 진중한 표정으로 루디의 볼살을 조물락거렸다.

“아몬도 옛것이고 유스타티아도 옛것이잖니. 거기 쓰여 있던 설명 대부분 맞았단다. 한 400년 전까지 남부 해안 도시에서 명맥을 이어가던 신앙인데, 광명신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쇠퇴했잖니.”

악의를 가진 옛것이나 존재만으로도 인간을 변질시키는 동떨어진 옛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루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진짜로 물의 축복을 내려 주거나, 명상 같은 거 잘되게 도와주는 거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신도가 워낙 줄어서 한참 추종받았던 때만큼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잖니.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결국 미지의 물건이니 수집품이라면 몰라도 수련용으로는 안 쓰는 게 좋겠구나. 명상이라고 해 봐야 텐티아 경이 알려준 명상 수련보다 효과도 떨어질 거잖니.”

“아.”

“너가 잘못되면 동생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감도 안 오잖니. 사리려무나.”

“네.”

세레라지에는 그렇게 말을 맺었고, 루디는 화제를 돌렸다.

“개발은 잘 되어 가세요? 전이의 마도구를 만들고 계셨잖아요.”

스윽.

순간 검사실 안에 있던 모든 마법사가 루디를 바라보았다.

“어, 어?”

세레라지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분명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다 해보는 수밖에 없었잖니. 일단 1만 7천 8백여 가지의 시안을 은 잉크로 그려 보고, 그중에서 조금 가능성 있어 보이는 걸 5백 66가지 추렸잖니.”

“네?”

루디는 단위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시안이 1만 7천여 가지?

0을 두 개 뺀다고 해도 많은 숫자였다.

“그런데 그 연꽃이 워낙 섬세한 물건이라서, 566가지를 한 번씩 만들어 보는 것밖에 답이 없잖니.”

“금도 많이 들어갔던 거 같은데…… 예산은 괜찮으세요?”

세레라지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재사용은 가능하잖니. 내 사재도 약간 털었단다. 또 폐하도 많이 도와주셨잖니.”

그녀는 루디를 이끌고 4층으로 향했고, 한 방을 열어 보여주었다.

“아, 하하.”

루디는 마법사가 되지 않은 걸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십 개의 테이블마다 금으로 된 연꽃과 양피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중 한 테이블에서 마커스 후작이 조수들과 함께 철필을 들고 회로를 새기고 있었는데, 적잖이 피로해 보였다.

멀쩡한 쪽 눈은 초점도 풀려 있었다.

“루디 백작? 안녕하셨습니까?”

“아, 안녕하세요. 마커스 후작 각하.”

“왜 다들 안 돌아오나 했더니, 백작이 방문해서였군요. 장애인을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짝짝.

“자. 다들 마도의 발전에 기쁘게 헌신하자꾸나.”

식사를 마친 죄수, 아니.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루디는 잠시 세레라지에가 악덕 마름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세레라지에가 마커스 앞에 마주 앉아 철필을 쥐는 걸 본 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악덕 마름이 아니라 감옥 범털이셨네요.’

그래도 착실하게 일이 진행되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그때 금발의 제자 로레인이 들어와 외쳤다.

“세레라지에 스승님. 발현 가능성 있는 모형 제작 초안을 132개 추가 발견했습니다.”

루디는 끌어들여지기 전에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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