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이 세상 모든 것은 제자리를 지킬 때 아름답다.
태양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낮의 하늘이 푸르고, 밤의 어둠이 지친 지상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줄 때, 사람은 안정감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스으으윽.
그러니 템페스타의 복도 한쪽을 뱀처럼 기어 다니는 어둠은 분명 제자리를 떠난 것이었고.
그것의 본질은 사람의 안정감을 깨고 비일상을 향해 걷어차는 것이었다.
기함의 복도에는 밝은 마법 등이 여럿 켜져 있었지만, 그 어둠은 도저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윽고 어둠이 한 선실 앞에서 멈춰 섰다.
어둠이 일렁이며 조금씩 조금씩 인간의 형태를 이루었다.
“…….”
긴 머리카락은 질끈 묶어 올렸고, 코와 입은 두건으로 가렸으며, 날카로운 눈매에는 살기만이 번들거렸다.
그녀는 착 달라붙는 질긴 천 갑옷을 입고 있었고, 그 위로 뻣뻣한 천으로 만든 품 넓은 겉옷을 둘렀으며, 겉옷 소매와 바지 밑단은 붕대로 동여매 몸에 착 달라붙게 하고 있었다.
사야 옌, 타르티의 오랜 친구이자 동방 대륙 출신의 암살자가 천천히 선실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열렸다.
침대에는 기사 하나가 누워 자고 있었다.
그는 감옥 구역 경비의 총책임자였다.
동부 바다 사나이답게 약간은 이국적인 외모가 섞여 있었고, 머리는 단발로 길러 꽁지머리로 묶었으며,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육체는 강철 같았다.
며칠간 면도를 하지 못해 수염이 약간 자랐고, 해풍을 맞으며 살아온 탓에 얼굴이 약간 삭았지만, 그 모든 걸 고려해도 객관적인 미남이었다.
사야 옌은 천천히 손바닥을 펴 보였다.
바늘 굵기의 침 하나가 그녀의 손아귀에 잡혔다.
기사를 암살할 때는 절대로 마나를 모아서도 안 되고, 살기를 내비쳐서는 안 되었다.
아주 약간의 마나만 감지해도 벌떡 일어나 위력적인 맹공을 가할 테고, 그건 그녀 같은 암살자에게 승패를 떠나 실패였다.
따라서 사야 옌은 언제나 그랬듯, 상대가 통나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큼은 증오스러운 발렌시아누스마저도 잊었다.
그녀는 그 대신 오랜 친구이자 주군인 타르티를 떠올렸다.
호쾌한 웃음이 인상적이었던 사슴뿔 투구의 사내를 떠올렸다.
이 거대한 배의 어딘가에서 신음하고 있을 해적 제독을 떠올렸다.
가문이 몰락하고 그를 따라 해적질을 시작한 게 벌써 몇 년이었던가?
어쩌면,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야 옌은 기사의 심장 위에 침을 겨누었다.
강철 같은 뼈는 피했고, 열 겹 가죽 방패 같은 피부가 최대한 팽팽하게 당겨진 곳을 찾았으며, 철사 묶음 같은 근육 사이를 정확하게 짚었다.
마나를 쓰지 않고 초인을 죽이려면 노력이 필요했다.
푹!
최고급 은철에 다른 별에서 온 운석을 섞어 만든 침이 부러질 듯 떨렸다.
사야 옌은 손목이 저릿한 저항감에 이를 악물며 침을 찔러 넣었다.
그날 밤, 동부 기사 하나가 죽었다.
* * *
쏴아아아.
저 멀리 수평선이 하늘과 만나고, 하늘은 구름 한 점이 푸르렀으며, 파도가 일 때마다 바다에 비친 햇살이 눈부시게 갈라졌다.
나는 텐티아 경을 대동하고 카리오사 옆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탁 트인 광경을 보고 있으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하하하.”
실없이 웃음을 터트리니, 텐티아 경이 약간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전하는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벌써 며칠째 물 위에서만 둥둥 떠다니고 있잖습니까?”
카리오사 옆에 선 쥴 경이 묘한 승리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나약하군. 경.”
카리오사가 쥴 경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더니, 할 말이 없다는 듯 양손을 연극적으로 치켜들었다.
“텐티아 경. 해전도 육상 전투와 그렇게까지 다르지는 않아. 누가 포위망을 만들고 더 오래 버틸 수 있냐의 싸움으로 흘러갈 때가 많지.”
텐티아 경이 당황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럼 저희가 불리한 게 아닙니까? 저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잖습니까?”
카리오사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개간을 시작한 땅이다. 제대로 수확을 내려면 짧아도 3년, 길어도 5년은 걸리지. 바닷바람에 적응하지 못한 작물은 다 죽을 거고.”
“아.”
“난 해금령을 내렸지. 폭풍 함대만 거느리고 나온 게 아니라고. 흑룡, 백린, 폭풍, 강철까지 총 네 개 함대가 군도 주변을 포위하고 있다.”
“정말 공을 많이 들이셨군요.”
텐티아 경이 기사로서 감명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고, 카리오사는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호쾌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반드시 성공할 거다. 그러려고 네 소중한 대공 전하까지 불러다 앉혀 놓은 거고.”
그녀가 템페스타의 깃발을 올려다보았다.
아세노르타의 백상아리 깃발이 멋들어지게 휘날리고 있었다.
“우리 가문은 수백 년간 어인족, 해적과 싸워 왔지. 이제 됐어. 내 대에서 다 끝낼 거다. 적어도 해적 하나만큼은 다 끝낼 거야.”
“멋진 야망이군.”
“세베릭에게 들었어. 북부도 정리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안에 모든 마경이 닫히고 마수 산란지가 불태워질 거다.”
카리오사가 비릿한 표정을 지었다.
“몇 년이라. 따라잡으려면 노력 좀 해야겠군.”
“노력?”
“전쟁이 끝나면 용병대장을 쫓아내지. 폐하께 숙청당할까 두려운 북부 대공이 제 여동생이나 사촌 동생을 데려다가 내 남자를 보쌈해갈 수도 있으니까.”
“세베릭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북부 대공은 그런 사람일걸? 개개인의 성향은 가문의 행보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아.”
내가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려니, 부관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가 카리오사에게 뭐라 속삭였다.
“전하…….”
얼마나 은밀한지,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텐티아 경에게 슬쩍 눈빛을 보내니, 그녀 역시 안 들린다는 듯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감히!”
카리오사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상상도 하지 못한 무언가에 발목이 잡힌 듯했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몇 번 차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휘이이잉!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맑은 하늘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카리오사!”
나는 다급하게 외쳤고, 그녀는 그제야 아, 하며 구름을 향해 손짓했다.
먹구름이 다시 흩어졌다.
“으음. 썩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네. 대영주로서 좋지 않은 태도였어. 미안해. 그래. 둘 다 몸에는 문제없지?”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텐티아 경은 무언가 집히는 게 있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실은…… 며칠 전 해적 토벌 이후부터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배를 타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전하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카리오사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이를 바드득 갈았다.
“발렌시아누스. 이 배에 암살자가 탄 거 같다. 동방 해적 놈들 사이에 끼어있던 모양이야.”
난 그 말을 듣자마자 흑의의 여인을 떠올렸다.
“아”
타르티의 해적선을 태워 가라앉히기는 했지만, 그 여인의 죽음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동방 무사들이 물 위를 달릴 수 있었으니, 그녀 역시 같은 마도구가 있을 게 당연했다.
이건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미안하다. 카리오사. 아마도 내가 잡아 온 그 해적을 되찾기 위해 온 것 같다.”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사과했고, 카리오사는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일이 아니다. 나도 그 불 속에서 누가 살았으리라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이거 피곤하게 되었군.”
“그래. 당장 선체 수색을 진행하면-.”
“의미 없다.”
카리오사가 고개를 저었다.
“발렌시아누스. 이 배는 길이가 150m도 넘는다. 1천 명도 넘는 선원이 타고, 갑판이 다섯 층에, 선실과 창고도 수백 개야. 같은 배에서 일하는 형제가 1년간 항해하면서 한 번도 못 마주치기도 한다. 암살자가 숨어들면 못 찾아.”
목덜미를 잡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 해적 두목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게 좋겠군.”
“이미 숨어들었다. 아니면 우리가 해적을 인질로 잡기 위해 감옥 문을 여는 순간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굳게 닫아 놓는 게 최선이야.”
“생조술을 쓸 줄 아는 마법사는 없나?”
“기사를 죽일 정도의 암살자가 은마력 마도구 하나 없을까. 피곤하게 됐어.”
얼마 전 로렐라이와 마주쳤을 때 느꼈던 인기척을 떠올렸다.
내게도 그 정도로 흐릿하게 느껴진다면, 사실상 수색은 불가능했다.
나는 기함 템페스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파도도 적도 부수지 못한다는, 거대수로 만든 불침 전함.
이 안 어딘가에 우리를 노리는 암살자가 있었다.
“공작. 기생충이 있는 걸 알고 살 수는 없다.”
“계속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데. 그래. 그렇지.”
그리고 파격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태워버리자.”
카리오사가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이빨 가득한 턱이 벌어지고 세로 동공이 멍하니 풀렸다.
아주 드문 광경이었기에, 잘 기억해 두려 노력했다.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발렌시아누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쥴 경 역시 사색이 되었다.
“대공 전하. 이런 배는 값을 매기지 못합니다. 순수한 건조비만 금화 1만 8천 닢이 들었습니다. 거대수는 아세노르타 영지의 걸 썼고, 마법 회로도 가문의 마법사들이 직접 새겼죠. 그러고도 1만 8천 닢이란 말입니다.”
“흠.”
“사실상 카리오사 전하 같은 대귀족이 아니라면 못 만드는 배입니다. 대대로 수리하며 물려 받아온 기물이란 말입니다. 암살자 하나 잡자고 태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나는 히죽이며 답했다.
“놈도 똑같이 생각하겠지.”
* * *
동방 암살자들 사이에는 귀식대법(龜息大法)이라는 기술이 내려왔다.
심장 박동과 체온을 모두 낮추고 마나도 감춰서 죽은 척 위장하는 기술이었다.
적잖은 후유증이 있었지만, 한정된 공간에 오랜 기간 숨어들어야 할 때는 꼭 필요했다.
호흡 역시 조절하기에, 귀식대법을 쓰는 중에는 잠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이었다.
가장 어둡고 깊은 창고의 한구석, 사야 옌은 비몽사몽간에 생각했다.
‘섬에 남은 애들은 잘 버티고 있겠지.’
‘돌아간 배가 그래도 다섯 척은 될 거야. 남은 배도 있고. 그 정도 세력이면 권력에서는 밀려나도, 굶지는 않을 거야.’
‘일족을 지켜야 해. 반드시 타르티를 구해서 돌아갈 거야.’
그건 무의식에 새겨진 각인이었고, 동시에 귀식대법에서 깨어나는 열쇠였다.
두근, 두근.
그녀는 천천히 호흡과 심박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오늘따라 약간 멍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늘은 3층 갑판 중앙 물통에 독을 섞는 날이야. 독약은 이제 열두 알…… 아니. 아홉 알 남았네. 그럼 이미 3층을 작업했다는 건가?’
귀식대법에서 막 깨어나면 오감도 이상했고, 직전에 있던 일이 잘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품속의 약과 손등에 쓰인 몇 가지 글씨를 통해 전날인지 전전날인지 모를 날에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3층은 끝났어.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천천히 죽겠지. 물론 그걸 기대하지는 않아. 가장 결정적인 순간 아주 잠시만 발목을 잡아 주면 충분해. 기사도 한 명 죽였으니 이제 슬슬 수색이 시작되겠지. 오히려 잘됐네. 날 노리려 움직이다 보면 기존의 감시 체제는 일그러질 수밖에 없어. 그때 감옥으로 향한다.’
그때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났다.
암살자의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며 위기를 알렸다.
타닥, 타닥 하는 소리.
눈과 코를 맵게 하는 매캐한 냄새.
‘멍한 이유가 있었어!’
배에 불이 났다.
사야 옌은 이를 악물며 창고 바깥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질식당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감옥 쪽은 격벽이 내려져 있었으니, 당장은 불과 연기로부터 안전할 거야.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자.’
휘이익!
그녀는 발소리 하나 없는 고양이처럼 달렸다.
타닥, 타닥!
불타는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아무도 없어. 이미 배를 버리기로 한 거야. 이 거대한 전함이 이렇게 쉽게 불탈 리가 없는데? 황형 발렌시아누스가 뭔 짓을 한 건가?’
선실이 즐비한 중앙 구역에도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거대한 전함이 텅 비어 있었다.
다섯 번째 갑판에 도착하니, 본격적으로 불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붉은색과 노란색이 세상을 갈라 나눠 먹겠다며 이와 혀를 드러냈다.
“윽!”
후욱!
강력한 열기가 밀려와 숨쉬기도 힘들었다.
모든 공기가 위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야 옌은 숨을 참으며 계단을 내달렸다.
불바다가 된 복도를 뛰어넘고, 벽을 타고 달리고, 천장 널빤지를 뒤집으며 그 위 갑판으로 올라갔다.
‘거의 다 왔어.’
마침내 상갑판으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이 활활 불타고 있었기에, 그녀는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타악!
암살자의 신영이 하늘로 치솟고, 사야 옌은 마침내 상갑판에 섰다.
“하아.”
신선한 공기가 폐부로 밀려 들어왔다.
검푸른 밤하늘에 짙은 구름이 보였다.
그때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나왔어? 오래 기다렸네.”
참으로 괘씸하게도, 연인이라도 기다리던 듯한 어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