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사야 옌은 황급히 주변을 경계했다.
화르르륵!
상갑판 거의 모든 곳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바닥부터 돛, 밧줄과 바닥, 난간까지 불길에 휩싸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도 지독한 열기 탓에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조용히 죽어버린 줄 알고 놀랐잖아. 네 주군이 얼마나 슬퍼하겠어. 기껏 부하가 구해주러 왔다가 죽어버리면.”
불길 속에서 다시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알았다.
사야 옌은 숨소리와 기척, 마나의 기운, 목소리의 울림을 통해 원수의 위치를 파악했다.
‘저기다.’
단상 위, 배의 조타륜 쪽에서 유독 불길이 거세게 치솟았다.
단숨에 뛰어오르려 다리에 힘을 준 순간.
딱.
거짓말처럼 불길이 사라졌다.
“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타오르던 갑판 바닥에서도, 위태롭게 흔들리던 밧줄에서도, 너울거리는 벽처럼 불타던 돛에서도, 불길이 사라졌다.
남은 건 기함 템페스타와 고요한 밤바다뿐이었다.
사야 옌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단검을 빼들었다.
밝은 빛에 적응해 있던 시야가 점멸하고 눈앞에 잔상이 내달렸다.
수레바퀴 같은 조타륜 앞에 하얀 형체가 서 있었다.
‘부엉이?’
그 샛노란 눈과 전신을 휘감은 하얀 제복 때문에 언 듯 보면 거대한 맹금이 앉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아아아-.
때마침 밤바람이 불어와 하늘의 구름이 걷혔고, 달빛이 갑판 위에 내리쬈으며, 사야 옌의 시야가 어둠에 적응했다.
“……발렌시아누스.”
하얀 머리카락을 올린 사내가 달 아래서 오만하고 뻔뻔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공 전하라 불러라. 천한 것아.”
그가 계단 난간을 잡고 조타륜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왔다.
사야 옌은 단검을 역수로 고쳐 쥐며 긴장을 유지했다.
증오해 마땅한 그녀의 적은 용혈 황족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백발은 달빛을 받아 반투명하게 빛났고, 황금빛 눈동자는 저주받은 보석처럼 요사스럽게 빛났으며, 핼쑥한 뺨과 붉은 입술은 광기와 품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사야 옌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고,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서늘하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그 짧은 물음에 수십 가지 질문이 어려 있었다.
어떻게 배를 비운 거냐, 어떻게 배를 불태운 거냐? 어떻게 그 불길을 한순간에 거둔 거냐? 어떻게 돛도 밧줄도 불타지 않은 거냐?
발렌시아누스는 피식 웃으며 검은 장갑 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화르륵!
그 끝에서 촛불만 한 불꽃이 피워 올랐고, 그는 가볍게 손목을 휘둘러 사야 옌에게 불꽃을 날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날을 칼처럼 휘둘러 막아냈고, 곧이어 그 온도가 미지근하다 못해 서늘함을 깨달았다.
발렌시아누스가 여유롭게 읊조렸다.
“진짜 불이 아니었거든. 내가 마법으로 피워 올린 불이지. 제일 뜨거운 부분도 100도를 안 넘었다. 이 배의 내화 마법을 이겨내기에는 터무니없이 낮은 온도지.”
사야 옌은 침음성을 흘렸다.
지독한 낭패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불타는 듯 뜨거웠는데.”
“사람은 50도만 넘어도 괴로워하는 게 보통이야. 넌 평소에 마나를 억누르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겠지. 사방에 불길이 너울거리고 있으면 착각하기도 쉽고.”
“그럼 연기는-.”
발렌시아누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자욱하게 번지는 불꽃.”
그가 짧은 주문을 외는 동시에 장갑 위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솟았다.
그녀는 침음성을 흘렸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턱을 쳐들었다.
“‘회색 눈물’이라는 주문이다. 연기를 만들지.”
“이…….”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당했다는 사실에 이를 떨었고, 발렌시아누스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
“순순히 생포되어주지 않겠어? 너 때문에 나도 곤란해졌거든. 내가 널 끝장내지 않은 탓에 네가 딸려왔으니까 말이야.”
“이-!”
“카리오사도 널 많이 보고 싶어 하지. 그녀는 지금 다른 배에 가 있어. 네가 도망치거나 반항하면, 네 주군을 바우스프릿에 매달고 닻 군도로 진격할 거라는군.”
* * *
사야 옌은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은신과 잠입, 심리전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그녀다.
이제 스물이나 되었을 새파란 소년 대공에게 완전히 농락당해 다급하게 뛰쳐나왔다는 사실이, 암살자의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그녀의 눈매가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내가 저들 사이에 섞여 도망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을 텐데.”
그럴수록 발렌시아누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미련 갖지 마라. 그래도 대답해주자면…… 난 너희 같은 애들을 몇 번 만나 봤거든.”
“뭐?”
“귀식대법. 쓸 줄은 모르지만, 그런 게 있다는 건 안다. 죽은 듯 기척을 감출 수 있지만, 막 깨어나면 기억도 오락가락하고 감각도 이상하지.”
사야 옌은 적의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꼈다.
‘어떻게?’
발렌시아누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쪽은 우리보다 힘은 약하지만, 마나로 기이한 재주를 부린다는 것도 알고.”
“너.”
“대공 전하라 부르라고 말했을 텐데. 네 주군이 숨을 한 번이라도 더 쉬게 하고 싶으면.”
그 순간 그녀는 살아나가는 걸 포기했다.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에 안정이 돌아왔다.
“넌, 이미 타르티를 죽였어. 난 복수를 하려 온 거야.”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나지막이 저었다.
비릿한 조소가, 숙련된 궤변론자의 미소가 황금빛 눈동자에 어렸다.
“난 지금까지 바다의 모래알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인 사람도 많지만, 숫자 하나, 문서 한 장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였지. 그리고 그렇게 죽인 사람들이 더 기억에 오래 남고.”
“!”
“난 이미 말했다. 반항하거나 도망친다면 그 타르티란 놈을 매달겠다고. 그러니까 똑바로 들어. 여기서 검을 잡는다면, 그를 죽이는 건 너야.”
타악!
다음 순간 사야 옌은 바람처럼 땅을 박찼다.
스으으으-.
그녀의 마른 장신이 농밀한 어둠에 휩싸이고, 반짝이던 단검 날 역시 어둠에 휩싸였으며, 인영과 공간의 윤곽선이 흐릿해졌다.
사악!
그림자가 땅을 기는 뱀처럼 나아갔고, 물속에서 도약하는 상어처럼 뛰어올랐으며, 어둠에 감싸인 단검이 발렌시아누스의 목을 노렸다.
‘벤다고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잘라낸다.’
망나니 대공은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초격의 성공을 직감한 순간.
쾅!
“감히 누구에게 그 더러운 손아귀를 가져다 대느냐!”
다음 순간 텐티아가 발렌시아누스가 내려왔던 계단 뒤쪽에서 뛰쳐나왔다.
기사의 손아귀에는 한손직검 ‘만하’가 들려 있었다.
“!”
사야 옌은 발렌시아누스가 조타륜 위에 멋들어지게 서 있던 것조차 시선을 끌기 위한 심리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냥 검 정도는 내 능력으로……!’
돌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순간, 금속 질 백색광이 맴도는 칼날에 순식간에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일어났다.
일반적인 기사들보다 세 배는 빠른 속도였다.
‘미친.’
츠카아악!
붉은색 반원이 허공을 가르고, 흑의의 암살자는 달려들던 그 기세 그대로 튕겨 나갔다.
발렌시아누스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나 혼자 있다고 말했었나?”
“그 아가리를 찢어 주겠어. 반드시.”
사야 옌은 바닥에 몸을 착 붙이고 둘을 노려보았다.
적기사 텐티아가 발렌시아누스 앞을 방패처럼 막아서고 있었다.
‘최악이다.’
제대로 공격이 통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마법사와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의 조합이었다.
암살자에게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텐티아가 분노한 늑대가 울부짖듯 내뱉었다.
“네가, 내게 독을 먹였구나. 무슨 술수를 부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깟 그림자 따위로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발렌시아누스가 얄밉게 명령했다.
“경. 살려만 놓게.”
다음 순간 움직이는 성채 같은 신영이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타악!
붉은색 망토와 투구 끈이 길게 휘날리고, 보검 만하에서 다시 한번 마나 블레이드가 타올랐다.
츠카아악!
사야 옌은 왼쪽으로 파고들 듯 속임수를 넣고, 그대로 몸을 낮추며 텐티아의 검을 피했다.
푸욱!
그리고 근거리에서 그녀가 쓸 수 있는 최고의 기술들을 모두 사용했다.
탁, 탁, 탁, 타악!
팔꿈치로 투구를 치고, 발끝으로 무릎을 걷어차고, 손바닥으로 턱을 올려 치고, 무릎으로 간과 내장이 있는 옆구리를 노린다.
푸푸푹! 푸욱!!
역수로 쥔 단검을 갑옷 옆구리 틈을 노리고 쑤시고, 가느다란 침을 투구 눈구멍과 숨구멍 사이로 찔러 넣었으며, 발끝과 발뒤꿈치에서 나오는 칼날로 기사의 발목과 무릎을 공격했다.
차악-!
무릎에서 튀어나온 칼날로 손목을 노리는 건 덤이었다.
마지막으로 마나를 약간 끌어 올려 어깨, 팔꿈치, 손목의 회전으로 강화한 다음, 단숨에 내질렀다.
발경.
검은 기운이 손바닥에 어려 쏘아져 나갔다.
터어엉!
손바닥이 흉갑과 부딪친 순간 거인의 일권 같은 파공성이 울렸고, 텐티아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크윽!”
갑옷의 충격 완화 마법과 두툼한 갬비슨을 모두를 뚫고 들어갈 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비켜라. 무식한 기사야.”
‘잡았다. 이제 뛰어넘어서…….’
사야 옌은 승리를 확신하며 몸을 날렸다.
타악!
아무리 강력한 기사라 해도 방금 같은 공격을 맞는다면 전투 불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텐티아는 멀쩡히 버티고 서서 왼손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고 있었다.
‘어?’
우우우웅!
백금 건틀릿 위로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사야 옌은 이를 악물었다.
‘젠장!’
쾅!
텐티아의 주먹이 사야 옌의 신영을 후려쳤다.
사야 옌이 두른 어둠은 대부분의 공격을 흘려 냈지만, 텐티아는 정령의 힘을 가진 발렌시아누스를 섬겼고, 흐릿함 너머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했다.
백금 건틀릿이 어둠을 찢어내고, 붉은색 기운이 허공에 원을 그리며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커억!”
사야 옌은 허공으로 붕 떠오른 다음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텐티아가 오른손 손목을 뚜둑, 소리를 내 맞추며 말했다.
“거기 서라. 나약한 암살자야.”
* * *
츠카카각!
텐티아의 만하가 허공에 붉은색 선과 원, 반원을 그려 나갔다.
‘한 번만 베면 팔다리를 날려버릴 수 있다. 감히 해적 따위가 복수를 꿈꿔? 마땅히 심연에서 고통받아야 할 도적 따위가?’
사야 옌은 텐티아의 주변을 빙빙 돌며 한 방을 노렸다.
‘아까 손목을 다시 맞췄어. 내 기술이 아예 안 통하는 건 아니다. 붙어서 한 방에 끝내면 승산이 있어.’
초일류 기사와 초일류 암살자가 모두 한 방을 노리는 가운데, 적색 신영과 흑색 신영이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타악!
사악!
텐티아가 갑판 바닥까지 같이 베어버릴 기세로 검을 내리쳤다.
츠카아아악-!!
그러나 사야 옌은 마지막 순간 한 걸음 물러섰고, 아슬아슬하게 만하를 피했다.
슥!
“윽!”
코끝에서 피가 흐르는 가운데, 사야 옌은 텐티아의 손목을 밝고 뛰어올라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며 텐티아의 등을 잡았다.
물론 판금 갑옷 입은 기사의 목을 조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머리카락 포박.’
동방의 암살자들은 언제나 기이한 기술을 뽐내는 법이었다.
츠츠츠츠!
사야 옌의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나며 텐티아의 갑옷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불, 번개, 같은 기사의 검까지 막아내는 백금 갑옷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푹, 푸푸푹! 푸욱!
강철 같은 근육에 수천 개의 침이 파고 들어가듯 머리카락이 파고들었다.
‘천 번 찔러 죽여주마.’
그러나 텐티아는 순순히 당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기이한 기운을 느낀 순간 상체를 숙이며 왼손을 등 뒤로 뻗어 사야 옌의 멱살을 붙잡고 엎어치기를 시도했다.
쾅!
사야 옌이 텐티아의 등 뒤에서 떨어져 나와 다시 한번 갑판 위를 굴렀다.
“칫!”
길게 늘어났던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 끝에서 피가 뚝뚝 묻어 나왔다.
“!”
발렌시아누스가 불꽃을 피워 올리려던 순간, 텐티아는 우렁차게 외쳤다.
“암살자야! 이 텐티아가! 이 배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만 있을 줄 알았느냐!”
도움은 필요 없다는 선언이었다.
쐐애액!
사야 옌은 그 대답으로 단검을 날려 주었고, 텐티아는 주먹과 검으로 쳐내며 나아갔다.
“한 줌 핏물이 되거라!”
텐티아가 다시금 주먹을 말아 쥐었고, 사야 옌은 암살자다운 판단을 내렸다.
‘이번 공격도 실패하면 바다로 뛰어내리는 척하면서 감옥 구역으로 가겠어. 모험이다. 딱 한 방만 더!’
후우욱!
텐티아가 사야 옌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정의로운 일격을 받거라!”
사로잡기 위해 검이 아니라 주먹을 썼다지만, 검을 쓰는 게 사야 옌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을 듯했다.
‘잡았다.’
‘조금만 더!’
사야 옌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기술을 사용했다.
‘철기무용(鐵器無用).’
쩌저저적!
몸속에서 무언가 비틀리는 소리가 나고, 그녀의 몸이 뼛속까지 쇠로 채운 듯 변모했다.
텐티아의 주먹은 성문을 으깨버릴 기세로 쏘아져 나갔고, 사야 옌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쩍-!
사야 옌의 발밑 널빤지가 그대로 갈라졌다.
쨍그랑!
비기 중의 비기인 철기무용이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풀렸다.
“하아!”
하지만 사야 옌은 튕겨 나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데 성공했고, 역수로 빼든 단검을 텐티아의 왼팔 겨드랑이 안쪽에 찔러넣을 기회를 얻었다.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