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96)화 (296/340)

(296)

텐티아는 사야 옌을 가격한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터어엉, 하는 소리와 함께 막대한 반동이 손목에 내달렸다.

‘당했군.’

그다음 벌어질 모든 일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내달렸다.

암살자는 농밀한 어둠에 둘러싸여 손발의 윤곽선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텐티아의 저항은 손쉽게 파훼될 것이고, 그녀의 왼쪽 겨드랑이에 단검이 꽂힐 게 확실했다.

왼손을 거두기에는 늦었고, 검을 쥔 오른손은 암살자를 노리기에 너무 멀었다.

그 순간 그녀는 동부 기사 쥴의 찌르기를 떠올렸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한 번에 한 명을 정확히 잡기 위한, 긴 찔러 베기.

타악.

다음 순간 텐티아는 보검 만하를 놓아버렸다.

사야 옌의 날카로운 눈이 일순 커졌다.

‘어깨만 나가는 게 아니라, 상체와 같이.’

‘아예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검 없이도 검을 쥔 듯, 그녀의 손끝에 붉은색 마나블레이드가 타올랐다.

사야 옌의 단검이 텐티아의 왼쪽 겨드랑이를 찌르고.

푹!

텐티아의 수도가 사야 옌의 왼쪽 어깨를 깊숙이 꿰뚫었다.

푸욱!

사야 옌이 이를 악물었다.

‘타르티. 내가 갈게.’

츠츠츠츠!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수천 가닥의 침처럼 솟았다.

텐티아는 그 기괴한 광경을 정면에서 마주하고도 뜨겁게 웃으며 외쳤다.

“내가 이겼다. 암살자!”

단검은 옆으로 찔러 들어왔지만, 그녀는 정면으로 찔렀다.

정면에서는 제자리에서도 연격을 넣을 수 있었다.

우우우웅!

마나를 어깨, 팔꿈치, 손목에서 공명시켜 증폭하고, 진각을 밟으며 방출한다.

발경.

퍼어엉!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고, 사야 옌의 어깨 뒤에서 피가 물보라처럼 뿜어져 나왔다.

촤아아악!

“윽!”

암살자가 거친 신음성을 토했고, 끝까지 그녀의 몸을 감싸던 어둠이 결국 무너져 내렸다.

쨍그랑,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마른 장신의 윤곽선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끄윽!”

사야 옌은 마나의 흐름이 억지로 끊어진 반동으로 눈, 코, 귀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했다.

텐티아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고, 암살자를 질질 끌고 발렌시아누스에게 향했다.

“발렌 전하! 이 텐티아가 사악한 암살자를 잡아끌고 돌아왔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을 지었다.

“경.”

같이 공격했다면 훨씬 빨리 이겼을 것이다.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저 기술도 용언의 불길 한 방이면 흩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사야 옌이 들어온 것도 그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텐티아는 기사의 본분을 다하려 했고, 발렌시아누스는 그녀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게 존중이겠지. 좋은 기사를 두니 이런 사치를 다 부려 보는군.’

그는 감정을 정리하고, 환하게 웃으며 텐티아를 치하했다.

“잘했네. 경. 내 경 같은 기사를 두어 매우 자랑스러워. 어서 치료받도록 하게. 육지로 돌아가면 크게 포상하겠어.”

그게 기사의 주군이 해야 하는 말이었다.

텐티아는 투구를 벗으며 씩 웃었고, 사야 옌을 꽁꽁 묶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하늘에 불의 창을 쏴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폭풍 함대의 병사와 기사, 선원들은 배를 타고 돌아왔다.

하지만 함대의 주인은 제 기사를 죽인 암살자를 최대한 보고 싶어 했고,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상갑판 위에 내려왔다.

“발렌시아누스.”

“잘 끝났다.”

“그래. 네가 내 기사를 죽인 암살자구나.”

카리오사가 사야 옌을 문자 그대로 씹어먹을 듯 노려보았다.

피를 본 회색 동공이 번들거렸고, 턱이 쩍 벌어져 뾰족한 이빨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듯한 기세였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사야 옌을 바닥에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다.

“알아내야 할 게 많겠어.”

* * *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심문실에서 울렸다.

어인족도 사람 말을 하게 만드는 고문 기술자들과 반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종군 사제들이 사야 옌에게 달라붙었다.

그 수위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와이번핏에 죄수를 던져 준 건 애교 수준이었다.

기사를 잃은 카리오사의 분노는 그렇게나 깊었다.

그녀는 복도에 서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실의에 찬 표정은 회귀 전에도 못 보았는지라, 매우 당혹스러웠다.

“일곱 살에 시동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던 녀석들이다.”

“그래.”

“열다섯 살에는 종자가 되고자 따귀를 구걸하러 다니는 것도 보았지.”

“그래.”

“그리고 녀석은 스물한 살에 소드 엑스퍼트가 되었고, 난 녀석에게 검을 주었다.”

카리오사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작전 중이 아니었다면 술을 마셨을 게 분명했다.

“망한 가문의 뭍 놈에게 죽을 녀석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10여 분 정도 죽은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녀는 마지막 찬물을 호쾌하게 들이키고, 잔을 난간에 거세게 내려놓았다.

딱.

“자. 애도는 이만하면 되었다. 내 성실한 부하들이 알아낸 것들을 말해 주지.”

그 순간 카리오사의 목소리에서 비애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입가에도 다시 강자의 여유가 어린 미소가 걸렸다.

나는 당황과 황당 사이의 감정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발렌시아누스. 군주가 지는 빚은 눈물이 아니라 승리로만 갚을 수 있거든. 난 그의 유족에게 기사 연금을 주고, 닻 군도의 해적 놈들을 다 태워 죽일 거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내가 제이릴리스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소심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10분은 너무 짧지 않나?”

“묵념 3분에 애도 5분, 내 감정 정리로 2분. 그거면 충분하지. 그보다 얼른 들어 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많이 알아냈으니까.”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과 설전을 벌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고, 대귀족이 계속 쳐져 있는 것도 못 볼 짓이었음으로, 난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듣고 싶군.”

“좋아. 일단 놈들은-.”

카리오사가 회색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찰나, 부관 기사 쥴이 복도로 달려왔다.

“전하!”

적잖이 당황한 표정에 적잖이 당황한 목소리였다.

카리오사가 약간의 짜증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해적 두목 아퀼라가 사절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사절? 해적이 무슨 사절?”

“백기를 올린 선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카리오사가 혀를 한 번 찼다.

“언제든 격침할 수 있게 준비해놔.”

* * *

템페스타의 상갑판 위에 기사들과 전투마법사들이 모였다.

나는 텐티아 경을, 카리오사는 쥴 경을 대동하고 갑판에 나왔다.

“정말이군.”

호위함 두 척이 백기 올린 해적선 한 척을 좌우로 포위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우우우웅!

호위함에 탄 전투마법사들이 대형 쇠뇌에 파괴술 주문을 부여하고 있는 게 보였다.

보랏빛 광채를 보니, 몇 발이면 저 해적선을 반파시킬 수 있을 듯했다.

키이이익!

비룡 착륙장이 있는 후방 전함에서 비룡 기사 넷이 날아오르는 것도 보았다.

일대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배가 있으면 곧바로 투창 마도구부터 던질 기세였다.

해적선과 호위선은 템페스타로부터 3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췄다.

해적선에서 작은 배가 내려왔고, 그 배에 노잡이 둘과 번지르르하게 차려입은 해적 놈 하나가 탔다.

작은 배가 템페스타 아래 멈춰 섰고, 노잡이 둘은 템페스타에서 10m 정도 떨어졌으며, 차려입은 해적 놈은 홀로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텐티아 경이 침음성을 흘렸다.

“해적 따위에게 해줄 평가는 아니지만, 조금도 책잡힐 구석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경 말대로일세. 작은 배까지 뒤로 물리는 건 인정해 줄만 하군.”

탁, 탁, 타악.

차려입은 해적이 템페스타의 상갑판 위로 올라섰다.

놈은 왼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편 채로 심장 위에 가져다 댄 다음, 카리오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카리오사 공작 전하. 닻 군도의 왕이자 연합 항구의 총독이신 아퀼라 전하의 명령을 받아 이곳에 방문하게 된 넬입니다. 아퀼라 전하의 궁정에서 외무 장교의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자신을 넬이라고 소개한 해적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잘랐고, 검은 바탕에 녹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제복을 입었으며, 얇은 한손직검을 차고 있었다.

역시 트집 잡을 구석 없는 정장이었다.

그러나 놈이 자신을 소개한 말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야 할 내용으로 가득했다.

제국의 공문서에서 아퀼라는 왕이 아니라 해적 두목이었고, 그곳은 연합 항구가 아니라 도적 떼 소굴일 터이며, 궁정이 아니라 산채였으니까.

카리오사가 허, 참. 하고 중얼거렸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당장이라도 넬을 쪼개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기사들 역시 넬에게 흉흉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아퀼라 그 새끼가 뭐, 전하?”

“지금 저게 죽고 싶어서-.”

어지간한 사람은 기절하고도 남았을 기세였지만, 넬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우선, 얼마 전 타르티 제독의 무차별 공격을 정식으로 사죄드리려 합니다.”

나는 그의 첫 말을 듣자마자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섬 의회에서는 제독의 출격을 불허했지만, 타르티 제독은 사병을 이끌고 출격했습니다. 그를 억제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큰 피해를 보지 않으신 듯하니, 부디 양국 간 우호 관계를 위해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놈은 나만큼이나 대단한 궤변론자였고, 악마의 주둥아리를 가진 외교관이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아퀼라 전하께서는 그동안 전하께서 벌이셨던 대규모 사략 활동을 크게 후회하고 계시며, 직, 간접적으로 배상할 용의가 있으십니다.”

제국에서 태어나 제이릴리스의 신하가 되지 않은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동방 대륙 왕국들의 합의로 닻 군도의 중립화가 결정되었고, 개간이 시작된 만큼, 이제 저희는 사략 활동을 벌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용서해 달라 말할 마음은 없으나, 더 이상 동쪽 바다에 졸리 로저를 건 배가 나타날 일은 없으리라 맹세합니다.”

그리고 저놈의 상위 호환으로서 생각해 보면.

저건 완전히 개소리였다.

말 한마디로 금화 천 상자를 갚으려는 시도였다.

카리오사가 헛웃음을 터트렸고, 동부 기사들이 목덜미를 잡았다.

나는 카리오사에게 바싹 붙어 놈의 말에서 알아낸 몇 가지 사실을 속삭였다.

“공작. 아퀼라란 놈이 동방 대륙 왕들이랑 입을 맞춘 모양이다. 닻 군도 평정하고 걔들까지 묶어둘 수 있겠나?”

카리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으로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사략선 따위를 고용해 해군을 보충한 놈들이다. 바다에서는 절대 안 져.”

그럼 아무 문제 없었다.

나는 넬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외무 장교 넬이라 했나?”

그는 날 보고도 가볍게 눈을 내리깔았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제가 어떻게 불러 드려야 하겠습니까?”

“솔레타라스 제국의 대공, 황형 발렌시아누스다. 대공 전하라 부르도록.”

나는 입가에 은근한 웃음을 띠었다.

카리오사가 날 부른 이유가, 이 순간에 있었다.

“예. 대공 전하.”

난 이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솔레타라스 제국의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 폐하의 말씀을 전한다. 그분께서는 닻 군도와 바다뱀 군도, 배들의 무덤 군도가 모두 제국의 영토임을 선포하셨고, 카리오사 공작을 배들의 무덤 군도와 바다뱀 군도의 총독으로 임명하셨으며, 그녀를 닻 군도의 왕으로 인정하셨도다!”

동부 기사들이 환하게 웃었다.

술렁거림 사이에서 만세 소리가 하나둘 터졌다.

“제이릴리스 폐하 만세!”

“카리오사 국왕 전하 만세!”

넬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카리오사 공작의 독단 행동이 아니라, 솔레타라스 제국의 공식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마지막 남은 끈을 붙잡는 듯 말했다.

“닻 군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으신 건 아퀼라 전하이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서 함대를 이끌고 가고 있잖아?”

넬이 쓴웃음을 지었다.

“두 번째 전하께서 협상과 타협의 미덕을 아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놈의 얼굴에 대고 중지 손가락을 펴 보였다.

“그래. 나도 협상 참 좋아하지.”

“…….”

“이 자리에서 제국의 대공으로서 정식으로 제안하겠다. 당장 닻 군도에서 퇴거하고 목숨이라도 건지거나, 아니면 산 채로 불타거나. 선택하도록.”

* * *

카리오사는 넬이 돌아가기 전, 승선 요금으로 한쪽 팔을 받아냈다.

“백기를 올리고 왔는데, 그럴 것까지 없지 않았나?”

“난 놈들을 다 죽일 거다. 발렌시아누스 너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를 거야.”

“음. 좋군.”

“표정이 썩 밝지 않은 듯한데, 걸리는 게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퀼라라는 놈도 우리에게 진지하게 저런 소리를 한 건 아닐 거다.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걸 알았겠지.”

카리오사가 긍정했다.

“그렇지. 그놈은 개새끼지만 멍청한 새끼는 아니니까.”

“그럼 대체 왜 저런 놈을 보낸 걸까? 애꿎은 부하와 배만 잃을 위험이 있는데. 뭘 노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게 걸린다.”

카리오사가 히죽 웃었다.

“바로 그걸 사야 옌이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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