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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강해질 수도 있고, 소중한 사람이 인질로 잡혀서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니 제일 좋은 건 나보다 강력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닐까?
적어도 제이릴리스는 누군가의 인질은 되지 않을 테니까.
카리오사가 템페스타 아래쪽 감옥 구역으로 향했다.
워낙 큰 배인 만큼 감옥 구역은 격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사야 옌이 뚫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입구는 단 하나였고, 마나를 흐트러트리는 흑요석 비석이 몇 개나 세워져 있었다.
“기분 더럽군.”
“나도 그렇다.”
“이미 그 암살자는 모든 걸 다 말한 게 아니었나?”
“교차 검증해야지. 데려와라. 둘 다.”
잠시 후 병사들이 사야 옌을 심문실로 데려왔다.
그녀는 하얗고 빳빳한 면 옷을 입고 있었고, 마나를 봉인하는 마도구 수갑을 차고 있었으며, 여전히 눈빛에 독기가 차 있었다.
건강하게 그을린 색의 얼굴에 째진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의자에 앉으며 마지막까지 날 노려보는데, 당장이라도 내 목을 베고 싶어 하는 듯했다.
“…….”
심문은 말 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줘야 의미가 있었기에, 그녀의 몸에는 상처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딱히 아무 말도 들을 필요가 없는 상대는 치료해줄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다.
지익, 지익.
뭐가 끌리는 소리가 나고, 고기 썩는 듯한 고약한 냄새가 풍겨 왔다.
나는 신문실 문 쪽을 바라보았고, 회귀 전의 경험으로 대충 무슨 꼴을 한 사람이 들어올지 눈치챘다.
“충격 요법인가?”
카리오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당하던 거다.”
“이를테면?”
“막 어인족을 상대로 항구 하나를 방비해냈는데, 다른 항구가 해적에게 뚫려서 3천 명이 죽고 1만 명이 노예로 잡혀갔다는 보고를 듣는다거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오. 광명이시여.”
심문실 안에 타르티가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놈이 아니라 웬 시체가 들어온 줄 알았다.
그는 도저히 제 발로 걸을 수 없는 상태였기에, 두 병사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온몸에는 끔찍한 화상 상처가 가득했고, 불탄 옷이 상처에 붙어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눈에 초점이 있는 게, 역시 소드 엑스퍼트는 엑스퍼트가 싶었다.
다행히 아직 마음이 망가지지는 않은 듯했다.
“타르티?”
사야 옌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얼굴에 경악, 분노, 증오의 감정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다음 순간 검은 머리카락이 3m도 넘게 늘어나며 내 심장을 향해 투창처럼 날아들었다.
쐐애애액-!
난 왼손으로 머리카락 뭉치를 잡아챘다.
콰직!
단숨에 으깨버릴 생각으로 힘을 주었고, 실제로 뭔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새끼손가락 뒤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촉수처럼 길어지며 다시금 찔러들었다.
“미친.”
나는 사야 옌을 진정시킬 필요를 느꼈고, 병사에게 눈짓했다.
“예. 전하.”
동부의 바다 사나이는 용맹뿐만 아니라 눈치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그는 내 눈짓을 보자마자 단검을 뽑아 타르티의 허벅지를 찔렀다.
푹!
동방의 해적 제독이 몸이 떨고, 사야 옌이 이를 악물었다.
나는 턱을 쳐들며 서늘하게 일갈했다.
“치워라. 암살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
“내가 말했지. 검을 뽑는 순간 네 주군은 바우스프릿에 매달릴 거라고.”
“발렌시아누스!”
“살려 준 걸 감사하거라. 해적 놈아.”
사야 옌이 이를 악물었고, 길어졌던 머리카락이 츠츠츠츠, 소리를 내며 보통 길이로 돌아갔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카리오사에게 물었다.
“지금 마나 봉인 마도구 찬 거 아닌가?”
그녀 역시 약간이나마 당황한 기색으로 답했다.
“미안하다. 뭔지 모르겠군. 마나를 이용한 기술이 아닌 건가? 모든 힘과 신비에 영향을 줄 텐데?”
* * *
귀족에게 위신은 목숨만큼 중요했고, 카리오사는 날 위험에 처하게 할 뻔했다.
이는 위신이 매우 상하는 일이었고, 응당 더 큰 보복으로 다시 위신을 세워야 했다.
카리오사가 허리춤에서 톱날이 솟은 단검을 빼 들었다.
사야 옌이 이를 악물었고, 난 카리오사를 말렸다.
“들을 것부터 듣고, 다 듣고 난 다음에는 목을 매달지.”
제이릴리스와 관련된 상대도 아니고, 내게 큰 상처를 입히지도 못했으니, 고통을 주려 하지 않아도 이상한 태도는 아닐 거다.
사야 옌이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카리오사는 면목 없다는 듯 혀를 찼고, 품속에서 치유 물약 한 병을 꺼내 병사에게 건넸다.
병사는 방금 단검이 박혔던 타르티의 다리에 물약을 약간 부어 준 뒤, 한 모금 정도 먹였다.
“옆방으로 데려가. 교차 검증할 거다.”
“예. 전하.”
병사들이 타르티를 데리고 갔고, 카리오사가 사야 옌을 노려보았다.
“우선 서머린의 이름으로 하나 약속하지. 방금 같은 짓을 다시 했다가는, 네 앞에서 저놈을 잡아먹을 거다. 이게 비유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라.”
사야 옌이 부들부들 떨다,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오사가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지겹게 했던 질문들을 처음부터 다시 물어볼 거다. 그리고 대답이 나올 때마다 옆방의 해적 놈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거야. 만약에 답이 다르면…… 그때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네 탓이야. 알아들었지?”
사야 옌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도.”
“……알았어.”
굴욕감에 찬 목소리였다.
카리오사가 가학적으로 웃었다.
“그럼 우선 항구의 방위 체계부터 이야기해 볼까?”
많은 질문이 이어졌고, 사야 옌은 성실하게 답했다.
닻 군도의 닻 날개에 해당하는 섬들을 따라 설치된 발리스타 포대.
요새의 구조와 미로 같은 저택.
따개비에 먹히기 시작한 죄수들.
해적들이 동원할 수 있는 전투원들의 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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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에서 28만이라고?”
물론 잡아 온 노예에게 창 한 자루만 달랑 들려주고 병사라고 우기는 수준이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믿기지 않는 숫자였다.
동방 대륙이 사람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숫자로 들으니 확실히 숨이 턱 막혀 왔다.
“타르티는 서른 척의 배를 이끄는 제독이고 그를 따라 140여 척의 배가 나왔지. 하지만 그는 회의에 참석한 무수한 해적 제독 중 한 명일 뿐이야. 배 한 척 한 척의 질은 좋지만, 딱히 많은 배와 강력한 세력을 가진 제독은 아니라고.”
“하.”
“자잘한 조각배까지 합친 이야기기는 하지만…… 혼자서 1천 척을 거느린 해적 제독도 있어.”
“점점 이야기가 두리뭉실해지는데,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동맹이고, 연합이지만, 그렇게까지 끈끈한 사이는 아니야. 아퀼라도 가장 강한 해적으로서 우리를 대표할 뿐이지. 서로가 정확히 얼마나 많은 전력을 가졌는지는 다들 비밀로 하고 있다고. 애초에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놈들도 많아.”
“너 같은 암살자도 모르는 건가?”
“나 같은 암살자나 되니까 이 정도라도 알고 있는 거야. ……타르티가 물 위를 달릴 수 있는 마도구가 있다는 건, 아퀼라도 모르고 있었어.”
그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진 사이일 줄은 몰랐다.
“닻 군도의 서쪽에 머물며 제국을 상대로 사략 활동을 했던 해적들이 있고, 닻 군도의 동쪽에 머물며 같은 동방 대륙을 상대로 사략 활동을 했던 해적들이 있지. 물론 이 경계도 확실하지는 않아. 교집합도 많고.”
“음.”
“아퀼라는 어떻게든 각 왕국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냥 해적질이나 계속하려 드는 녀석들도 있어. 제국과 싸워서 닻 군도의 영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장들이 있는가 하면, 당장 내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장들도 있고.”
해적들도 조직 내부는 언제나 세력다툼으로 난장판인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딱히 의외인 일도 아니었다.
영주들에게 충성맹세 받겠다고 뭔 짓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말을 말자.
난 몸을 부르르 떨었고 카리오사가 씩 웃었다.
저 말을 듣고 보니, 아까 넬이라는 놈이 왜 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닻 군도의 영주로서 사절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 지지자를 결집하고, 그 시도가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여 결사 항전을 외치려 들겠지.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던 놈들을 구별하게 털어내려는 의도도 있을 거다.
곧 그 섬에서도 피바람이 불겠군.
“발리스타가 있다고 했는데, 마도구인가?”
“동방 대륙 왕공 귀족들이 지원해준 걸로 알아. 아주 강력하다고 했어. 아린스라는 해적 제독이 맡고 있는데, 활의 명수지.”
역시 해적들만으로 이뤄진 세력도 아니었다.
옆에서 질문과 답을 받아적던 병사가 타르티에게 교차검증하고자 나갔다.
새삼스럽게 회귀 전의 카리오사가 더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동시에 제이릴리스에게도 반기를 들었을까?
피 냄새에 눈이 돌아가 아무런 생각도 못 하게 된 거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카리오사가 피식 웃었다.
“뭘 보고 있어? 어젯밤 생각해?”
“네 생각을 했다.”
“바로 앞에 두고서 생각만 해?”
“그런 생각 아니다.”
나는 잡념을 떨쳐 내며, 병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전하. 아무 문제 없습니다.”
병사가 돌아와 고개를 숙였다.
사야 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카리오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넌 오늘도 네 주군을 살렸군. 성수 두어 병을 부어 주마. 혹시 더 이야기할 게 있으면 말해라. 쓸모 있는 이야기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사야 옌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카리오사는 감옥 구역을 나섰다.
“발렌시아누스.”
“그래.”
“저 둘 서로 좋아하는 거 같지?”
“아니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분명히 남녀의 관계일 거다.”
“쯧. 그럼 일단은 살려 놔야겠군.”
“바로 매달 줄 알았는데?”
몹시도 의외였다.
물론 나로서는 다행인 이야기였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찰나였다.
“바다 위에서 연인을 모두 죽이면 재수가 없다.”
“……농담이겠지?”
설마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닐 거다.
아무리 뱃사람들이 미신을 많이 믿는다고 해도, 방금 그건 배에 여자를 태우면 재수가 없다는 수준의 미신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바다에는 그 자체로 신비가 있다. 모든 미신에는 이유가 있고, 가끔은 그 미신 자체가 어떠한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뱃사람들에게 미신은 미신이 아니라 경험으로 증명된 법칙이었다.
“……하기야. 공작도 바다 위에서 훨씬 강해졌지. 언제까지 살려둘 건가? 솔직히 찝찝한데.”
카리오사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상륙선 바우스프릿에 매달도록 하지.”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
그럼 그 전에 한 번 만나 놔야겠다.
* * *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들을 만큼 들었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카리오사는 장교기사들을 모아 놓고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 역시 그 자리에 함께했다.
“본격적으로 닻 군도에 접근하면 그때는 상륙선을 써야 한다. 전함은 너무 커서 얕은 물에는 못 올라가.”
“발리스타 포대가 문제겠군.”
“상륙선에 전투 마법사들을 대거 투입할 거다. 최대한 방호해야지. 그리고 닻 군도 날개에 해당하는 섬에도 기사들을 상륙시킬 거다.”
“참수 작전인가?”
“그래. 그 아린스라는 해적 두목을 잡아 죽인 다음 상륙선을 투입한다.”
“나도 그쪽에 합류하겠다. 좌객으로 앉아만 있기는 싫거든.”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한 말이기도 했지만, 이번 승리에 황실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높여야 해서 한 말이기도 했다.
카리오사가 그걸 안다는 듯 날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건투를 기원하지. 대공.”
“고맙군.”
대형 지도 위에 말 몇 개가 놓였다.
“그렇게 상륙 후에는 곧바로 공성으로 이행한다. 해안 요새를 점령하고 해적 두목들의 저택을 박살 낸 다음, 이 항구를 교두보 삼아 군대를 투입할 거다. 그럼 끝이다.”
한 장교기사가 질문을 던졌다.
“도망치는 해적들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카리오사가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
“난 닻 군도 일대에 해금령을 내렸지. 강철 함대가 동방 왕공 귀족들을 견제할 거고, 흑룡 함대와 백린 함대가 도망치는 배들을 침몰시킬 거다.”
장교기사가 약간 머뭇거리며 물었다.
“놈들이 목숨 걸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카리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라고 해라. 두 함대에는 나포를 명하지 않았어. 원거리에서 마법으로 다 침몰시킬 거다.”
13살 때부터 해적, 어인족과 싸워 온 여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마찬가지다. 포로는 필요 없어. 다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