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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98)화 (298/340)

(298)

깊은 밤,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카리오사의 선실을 나섰다.

내일 낮이 강습이었고, 그전까지 최소한의 경계 인원을 제외한 모두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전장에 나서기 전에 몸을 섞으면 재수 없다고 하지 않나?’

‘이 싸움이 끝나면 몸을 섞자는 약속보다는 나아. 발렌시아누스.’

‘큰일 날 뻔했군. 죽을 뻔했어.’

‘백 번 죽여줄게.’

들어가기 전 나눴던 대화의 내용이 잠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냥, 세상일은 참 모르는 것 같다.

마나를 끌어 올리니, 제복이 몸속에서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츠츠츠츠.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소매와 단추, 바짓단이 완성되어 갔다.

가슴팍이 마지막으로 여며졌고, 목깃을 올려 정리했다.

모퉁이 너머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 놀라지도 않고 그를 불렀다.

“로렐라이. 내가 따라다니지 말라고 했을 텐데?”

“누님 전하가 걱정될 뿐이에요.”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가는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반박했다.

나는 그 수려하고 선 가는 얼굴이 약간 일그러질 정도로만 꿀밤을 먹였다.

“얼굴색이 머리카락 색하고 똑같아지려고 한다.”

“!”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 로렐라이. 나 보려고 온 거지?”

오렌지색 머리의 마법사가 기함했다.

“아닙니다. 대공 전하.”

“왜 대귀족들이 나이 들면 남색에 빠지는지 알아?”

“관심 없는 주제입니다.”

“그 나이에 사생아라도 생기면 골치 아프거든.”

“그건…… 몰랐습니다.”

나는 내심 웃으며, 말로 된 미끼를 던졌다.

“그런데 나랑 카리오사가 사생아 걱정할 사이는 아니잖아?

놈은 그걸 콱 물어버렸다.

“왜 아닙니까? 당연히 걱정해야지요. 수도에서 황제 폐하가 황족 사생아들과 황족들을 다 죽여…….”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그걸 집행한 게 나야.”

이제 놈은 완전히 붙잡힌 물고기였다.

“네?”

“그러니까 날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아니, 제가 언제 전하를 걱정했던 말입니까? 전 누님 전하를 걱정했을 뿐…….”

말하면서도 방금전 말과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는지, 로렐라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는 못을 박듯 내뱉었다.

“그러면 왜 아세노르타 영지 주교들 이야기가 아니라 수도의 황제 폐하 이야기를 꺼냈지?”

그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황제 폐하가 황실의 피를 훔친 아세노르타를 정벌하려 들까 두려워서입니다.”

“카리오사 공작이 날 데려가겠다고 황궁에 쳐들어왔을 때도 봐줬는데?”

“…….”

“제이릴리스는 다 알아. 카리오사가 즉위식 날 황족들을 몇 명 챙겨서 돌아간 것도, 걔들이 지금도 성 어디 갇혀 있는 것도 안다고. 알고도 봐주고 있는 거지. 대귀족이면 침식 정도는 관리할 수 있으니까.”

로렐라이가 이를 악물었다.

나는 가볍게 히죽거리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난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거니까.”

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쿠이트 아즈 맞지요? 마지막에 흡수한 게.”

그래.

이런 정보를 기대했다.

나는 내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공명의 힘을 최대한 쓰지 말고 싸우세요. 그래야 영혼이 덜 다칠 겁니다.”

“그래?”

“가장 이질적인 변이가 그것이니까요. 아즈의 힘을 쓰는 건 몸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혼이 주인을 헷갈릴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려 주었다.

“고맙다. 기꺼이 참고할게. 만약에 내가 또 쓰러지면 그때도 치료해줄 거지?”

로렐라이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낄낄 웃으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끝까지 고개를 젓지 않았다.

남녀를 떠나 사람 마음을, 그것도 내게 호의를 가진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논다는 게, 썩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불편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신경 쓰기에, 난 너무 멀리 왔다.

“텐티아 경.”

“전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잠깐 아래쪽으로 내려가도록 하지. 그 암살자 놈을 만나야겠어.”

* * *

감옥 구역을 지키는 병사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카리오사도 동부 기사도 대동하지 않은 인물이 찾아와 면회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동부의 바다 사나이들은 부당한 외압에 굴하지 않았지만, 황형 발렌시아누스는 병사 하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외압이었다.

“아니. 무리라면 굳이 열어주지 않아도 되네. 그냥 내가 가서 카리오사를 깨우겠어. 방금 같이 씻고 왔는데, 다시 가서 귀찮게 하면 그녀가 참 좋아할 거야.”

“진짜 잠깐만 보고 나오셔야 합니다. 놈은 위험한 암살자입니다.”

“걱정하지 말게. 텐티아 경도 데려왔잖은가.”

병사가 끝내 황족의 권위를 이기지 못하고 길을 텄고, 발렌시아누스는 봉마 역장을 지나 감옥 구역에 들어섰다.

그는 감옥 문을 열고 사야 옌을 마주했다.

사야 옌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낮에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머리카락 길이였다.

템페스타의 병사들은 그녀의 기이한 기술을 어떻게든 봉인하기 위해, 병영 조직에서 떠올릴 법한 해결책을 사용했다.

사야 옌은 텐티아 경 못지않게 짧은 쇼트커트로 머리가 잘려있었다.

쥐가 파먹은 듯 자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쇼트커트로 자르고도 예쁘면 정말 예쁜 거라는데, 꽤 잘 어울리는군. 텐티아 경만큼은 아니지만.”

사야 옌에게도 묘하게 로렐라이와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라 부르라고 했을 텐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피식 웃었다.

“존귀하신 대공 전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나? 날 조롱하려고 오셨나? 아니면 희롱하려고 오셨나?”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들척지근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 포로로 잡은 젊은 미남미녀 귀족들을 상대로 했던 짓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일부러 소문을 퍼지도록 유도, 저항 세력이 뛰쳐나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짓에는 손 털었지. 딱히 그립지는 않은 이야기야.”

“그러면 왜 왔지?”

그는 턱을 쳐들며 본론을 꺼냈다.

“내가 바라는 게 네게 있다면, 네 주군이랑 같이 살려 주겠어.”

한순간 사야 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짓이라도 생각하지 마. 내 쪽도 꽤 절박해서 말이야.”

훈련된 전사는 절망에 굴하지 않으나, 황금 망치로도 부서지지 않는 마음을 부수는 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사야 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내가 가진 건 이 몸뚱이뿐이지. 대공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을 듯한데.”

그녀는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미소 짓는 천사 탈을 쓴 악마처럼 제안했다.

“아까 마나도 없이 어떻게 기술을 썼지? 그것도 결국 육체를 변화시키는 거잖아. 기능적인 거라고. 어떻게 혼의 반발을 억눌렀지? 그 방법을 말해.”

‘쿠이트 아즈와 똑같아. 로렐라이의 말대로라면, 사야 옌 역시 변이한 육체에 적응하지 못한 영혼이 갈려 나가야 해.’

하지만 그가 보기에 사야 옌이 기술을 쓰고 두통을 느끼는 거 같지는 않았다.

‘동방 대륙의 신비인지 뭔지는 몰라도, 뭔가 있다. 배울 수 있는 거라면, 나 역시 희망을 걸어 봐도 괜찮겠지.’

사야 옌이 진심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혼의 반발이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술을 연마하다 코피를 흘리거나, 폐인이 되거나, 마음이 망가지는 동료들은 있었지.”

발렌시아누스는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기분을 애써 참았다.

사야 옌은 외관상으로 10대 후반으로나 보였다.

아무리 차근차근 익혔어도 줄었다 늘었다 하는 육체에 혼이 적응하기는 힘들 거고, 그럼 그걸 제어하기 위한 모종의 방법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건 명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서쪽 대륙의 기사들도 명상하지 않나? 애초에 문제가 생길 리가 없을 텐데?”

“말이 길어.”

“10년도 넘게 수련한 걸 짧게 말할 수는 없어.”

발렌시아누스는 차분히 서서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를 기다렸다.

사야 옌이 그를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집중해.”

“언제나 그랬을 텐데?”

“내 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야.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래야 반발 없이 변할 수 있어.”

기대했던 방향과는 약간 다른 방향의 대답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들이쉬었다.

“쓰읍.”

로렐라이는 가능한 한 변하지 말라고 하고, 사야 옌은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한다.

로렐라이가 사야 옌보다야 믿을 만하지만, 사야 옌은 그의 눈앞에서 기기묘묘한 기술을 쓴 사람이었다.

‘형체가 흐릿해지고,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텐티아 경이 내지른 주먹을 막아냈다. 이 모든 걸 마나가 아니라 육체적 기능으로 할 수 있다면…….’

“혹시 너 정령 혼혈이냐?”

“정령이 인세를 떠나간 지 수백 년은 되었지. 아직 정령술사는 만나 보지도 못했어.”

사야 옌은 그런 건 왜 물어보냐는 듯 답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몸을 돌렸다.

이 정도면 그가 원하는 만큼은 들었다.

“대공. 약속은-.”

사야 옌은 절박하게 그를 불렀다.

‘타르티만큼은 살려야 해.’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멈춰 선 뒤, 비릿하게 웃으려다, 끝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지독한 자괴감이 치밀어 올랐다 가라앉기를 몇 번, 망나니 대공은 끝내 입을 열었다.

“그래. 약속하지. 반드시 타르티를 살려 주겠다. 물론 너도 같이.”

“필요하다면…… 난 죽어도 돼.”

“아니. 너도 살아야 한다. 그쪽이 더 안전할 거 같거든.”

사야 옌은 그 말에서 안도감이 아니라 경계심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새삼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았다.

“대공……?”

절대 호의에서 나온 말은 아닌 듯했다.

“너희 둘이 각자 살아 있어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마침내 발렌시아누스가 말을 이었을 때, 사야 옌과 텐티아는 모두 얼굴을 굳혔다.

* * *

“동남부에 황실 소유의 항구가 있다. 타르티는 거기서 다시 해군을 기르게 될 거다.”

난 사야 옌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등 뒤에서 텐티아 경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야 옌이 흉터 깊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 이해가 안 가는데?”

중성적인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나는 웃음기 있게 말했다.

“해군은 하루아침에 기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지. 해적, 상인, 해군이 그렇게까지 딱딱 나뉘는 개념도 아니고. 일족의 부활을 원하는 동방 귀족이라면 충분히 끌어 들일만 하지 않나?”

그녀가 삐뚜룸한 미소를 지었다.

“……대공이 배에서 했던 말, 기억하고 있어. 귀족은 섬기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그래.”

“타르티에게 섬길 자를 주겠다는 건가?”

“그렇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굳이? 황실이 해군을 기를 필요가 있나? 일곱 함대를 거느린 백상아리를 데리고 있는데?”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사야 옌이 날 멍하니 올려다보다 얼굴을 굳혔고, 텐티아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발렌 전하.”

“경이 생각하는 그건 아닐세. 난 망나니지만, 그런 개자식은 아니야.”

카리오사를 견제할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꽤 믿었고, 아주 많이 동경했으며, 애초에 이제는 믿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미 그녀에게 공작 작위를 주었고, 왕을 칭하는 걸 허락했으며, 세 군도를 비롯해 온 동쪽 바다를 내주었다.

견제할 생각이었다면 이것들을 주었으면 안 되었고, 이것들을 주었으면 견제할 생각을 하면 안 되었다.

황실이 그녀에게 기대하는 건 동방 대륙 왕들의 견제, 해적 토벌, 어인족 토벌이다.

그건 동쪽 바다의 왕이 되려 하는 카리오사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하는 일이기에, 분투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이유로 해군이 필요할 때가 있다면, 동쪽 바다가 아닌 북쪽 바다로 나가야 할 때가 온다면, 해군을 소모품처럼 사용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때도 카리오사가 최선을 다해 협조해주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물론 내 얼굴을 보고 배와 병사를 내주기는 할 거다.

하지만 그건 결국 호의였고, 호의가 용납해주는 희생에는 한계가 있었다.

난 한계 없는 함대가 필요할 날이 올 걸 알았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남쪽 바다에서 인어들의 준동이 일어날 거다.

그때 쓸 함대가 필요했다.

귀족 출신 제독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그 애인을 인질로 잡았다면 더더욱.

“황실에 충성한다면, 반드시 너희 둘을 살려줄 거다.”

사야 옌이 침음성을 흘렸다.

“으.”

“가능하다면…… 섬에 남아 있을 너희 일족도 빼 주지. 그러니까 긴장 놓지 말고 착하게 굴고 있어.”

끝내 흉터 새겨진 눈에 희망이 어렸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대답은?”

그녀의 대답은 물론 내 예상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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