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99)화 (299/340)

(299)

해적왕 아퀼라는 사절 넬이 돌아오자마자 모든 제독들을 소집했다.

저택 회의실에 해적 제독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수백 척의 배와 거대한 연맹을 이끄는 우두머리들이었다.

아퀼라는 위엄 있게 그들을 굽어보았다.

“카리오사 공작은 우리의 화해 요청을 거절했군. 이제 남은 건 전쟁뿐이오. 제독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섬을 지키도록 하시오.”

‘준비는 할 만큼 했다. 결국 이 항구를 막으면 이기고, 빼앗기면 뚫린다. 공성은 수성보다 몇 배는 어렵고, 이미 요새화는 완료되었어.’

그가 아끼던 부하, 넬이 한쪽 팔을 잃은 채로 그의 곁에 서서 명분을 더했다.

물론 해적 제독들은 순순히 ‘예.’라고 말하지 않았다.

“저희의 강점은 변화무쌍과 자유로운 움직임입니다.”

“감정적인 판단으로 이점을 약화하는 게 아닌지 우려됩니다.”

“각자 바다로 나가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약간 돌려서 말할 뿐, 대놓고 도망치겠다고 하는 자도 있었다.

아퀼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명을 내렸다.

저런 말은 듣는 척도 해주면 안 되었다.

“텐예 제독. 오운굴라 장군. 항구와 요새를 지키시오. 제독들에 대한 지휘권을 주겠소. 타르티 제독 휘하의 검객들도 가져가시오.”

거구의 변발 사내와 갈고리 단 장군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예. 전하.”

변발 사내 텐예는 동방의 초원 출신이었고, 갈고리 단 장군은 7살 때부터 산적, 마적, 해적, 도적을 오가며 살았던 순혈 약탈자였다.

“아린스 제독. 날개 섬으로 가 발리스타를 맡으시오. 상륙선들을 모두 침몰시키시오.”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언제나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는 미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아퀼라가 두려워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제발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기를.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단 말이다.’

아니, 그는 아퀼라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두려웠다.

아퀼라 옆에 앉은 고혹적인 미인, 페이진이 두려웠고, 언제나 자신을 숨기고 있는 쪽빛 사제가 두려웠으며, 타르티를 죽였다는 발렌시아누스가 두려웠다.

고향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활을 잡았다.

타고난 재능은 검에 있었지만, 활을 잡았다.

멀리서 쏴 죽이려고.

“좋소. 그럼 마지막으로…….”

아퀼라는 아린스를 시작으로 제독들을 둘러보았다.

해적에게 뭘 기대하는 게 잘못이지만, 믿을 자가 참으로 적었다.

전장에서는 강한 적보다 못난 아군이 무서운 법이었다.

그런 자들을 잘 솎아내야 가장 중요한 순간 뒤통수를 맞지 않았다.

쾅!

사방의 문이 열리고 무장한 부하들이 들어와 몇몇 제독들을 끌어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아퀼라! 아퀼라!”

“오해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해란 말이오.”

해적 제독들은 끌려 나가면서도 거칠게 반항했지만, 아퀼라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그들을 제압하고 목에 단검을 꽂았다.

몇몇 제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몇몇 제독은 불안에 차 그 광경을 흘깃거렸다.

아퀼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을 치켜들었다.

“자. 다들 축배를 듭시다.”

* * *

태양이 정점에 달했다 꺾이기 시작한 오후, 맑은 하늘에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왔다.

쿠르르릉!

먼 바다에서부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습한 바람이 불어오고, 검푸른 물결이 높게 일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파도와 구름을 보고 변화무쌍한 자연을 두려워하겠지만, 해적 제독 아린스는 한 사람을 두려워했다.

‘카리오사다.’

동부의 백상아리, 아세노르타의 가주, 서머린의 후예, 폭풍의 딸, 동부의 패자…….

13세에 검을 쥔 뒤로 무수한 이명으로 불리며 동쪽 바다에서 군림하던 대영주가 닻 군도의 연합 항구로 오고 있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해적들은 매일 같이 제국의 동쪽 해안을 약탈했다.

아세노르타 가문의 함대는 그때도 강건했지만, 해적들은 함대가 아니라 항구와 해안 마을을 노렸고, 함대는 해적들의 뒤꽁무니나 쫓는 게 일상이었다.

그랬던 함대가 지금은 해적들의 재앙이 되어 있었다.

카리오사는 해적이 급증하는 시기에 태풍을 일으켜 바닷길을 막아버렸고, 물수리, 와이번 등을 사용해 정찰 반경을 넓혔으며, 크고 작은 섬을 초토화시키며 그들의 거점을 없앴다.

때로는 어인족을 해적들 쪽으로 밀어내 차도 살인을 꾀하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이제 카리오사가 해적 섬을 노렸고, 해적들이 방어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해적들을 바다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소리였다.

‘해적이 군대를 상대로 방어를 하다니.’

아린스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주어진 포대들을 확인했다.

바위섬들이 바다 위로 길게 뻗어 있었고, 섬마다 거대한 발리스타가 가득 설치되어 있었다.

섬과 섬 사이를 잇는 줄사다리들 위로 수천의 해적들이 지나다니며 발리스타에 얹고 쏠 대형 화살과 기름통을 날랐다.

“빨리빨리 가져와!”

“조심해. 그거 불붙으면 절대 안 꺼진다.”

“덮개 벗기고 체인 걸어!”

아린스는 수십 개의 날개 섬 중 가장 동쪽 섬에 서 있었다.

서쪽 끝으로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항구가 보였고, 동쪽으로는 끝없는 바다가 보였다.

물론 저 바다는 끝없는 바다가 아니다.

그는 이 바다의 물길을 꿰뚫고 있었고, 어느 해안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 달달 외우고 있었다.

‘이런 걸 얻기 위해 떠나온 게 아니었는데.’

그는 해적들이 가져온 발리스타 화살을 한쪽에 차근차근 적재했고, 부하들을 시켜 거대한 발리스타를 아래쪽으로 겨누었으며, 가늠자가 정확한지 확인했다.

‘이제 돌아가는 것도 무서울 뿐이야.’

서쪽으로 길게 뻗어 항구까지 이어지는 수백 개의 발리스타에서도 똑같은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 난 모든 게 두렵지.”

그는 동쪽 수평선에 보이기 시작한 돛과 깃발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잘 준비했어.”

푸른 바탕의 상어 깃발과 소용돌이 깃발이 먹구름 아래서 웅장하게 휘날렸다.

“폭풍함대다!”

“폭풍함대가 온다!”

“카리오사다!”

해적들은 고함치고, 깃발을 들어 휘둘렀고, 종을 울렸다.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150m에 달하는 불침전함들이었다.

아린스는 그 전함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거대한 전함은 결코 이 얕은 해안까지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함들이 좌우로 갈라져 길을 트고, 거북처럼 넓적한 상륙선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말이 좋아 상륙선이지, 한 척 한 척이 60m에 달하고, 400명도 넘는 병사들이 타 있었다.

동부에서 제일 악명 높은 군대의 병사들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세노르타 가문의 병사들은 부사관급만 되어도 소드 유저들이 넘쳐났고, 젊은 병사조차 어인족 목 몇 개를 가볍게 베어내는 무용을 자랑했다.

해적이라면 인정사정없이 목을 베어 장대에 걸어버리는 게 그들이었다.

아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외쳤다.

수려한 얼굴에 어김없이 긴장감이 어렸다.

“전원! 발사 준비!”

* * *

크르르르! 크르르르!

톱니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움직여라! 게으름뱅이들아! 움직여!”

“후, 하!”

“장전 완료!”

해적 넷이 달려들어 발리스타를 조준했고, 해적 둘이 수레바퀴처럼 생긴 도르래를 감아 시위를 당겼으며, 해적 하나가 마상용 장창보다도 긴 화살을 발리스타에 얹었다.

화살촉 앞에는 큰 기름 항아리를 매달았는데, 화염 꽃이라 불리는 식물에서 뽑아낸 인화점 낮은 기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우우웅!

화살이 얹힌 순간, 발리스타가 은은하게 발광했다.

주문이 부여된 부품이 활의 탄성을 더했고, 거대한 화살에 속도를 실어주었다.

그리 대단한 수준의 마법은 아니었지만, 화살 자체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등을 조금만 밀어줘도 절대적인 위력이 크게 올라갔다.

촤아아아! 촤아아아! 촤아아아!

스무 척의 상륙선이 날카로운 쐐기꼴을 그리고 파도를 가르며 다가왔다.

뿌우우우!

아린스는 뿔 나팔을 불어 해적들을 대기시켰다.

‘한쪽에 대여섯 발을 퍼부으면 배를 침수시킬 수 있다.’

본래 해적이란 기다림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인종이었지만, 그들은 아린스의 활 솜씨를 알았다.

함부로 반항했다가는 저 멀리서 날아온 화살에 머리가 날아갈 게 분명했다.

“기다려라!”

“끌어들여!”

“이 안쪽까지 들어와야 한다.”

한 배의 선장 정도 되는 해적들이 곳곳에서 소리치고 채찍을 휘두르며, 아린스가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더, 더 가까이 와라.’

아린스는 상륙선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는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거대한 마나의 흐름을 알아챘다.

‘카리오사? 아니야. 이건…… 바람이 아니라 불이다.’

저 멀리, 수평선 가까이 떠 있는 기함 템페스타에서 기이하리만큼 거대한 화기가 느껴졌다.

사아아아-!

거인이 숨을 들이마시기라도 한 듯, 해일이 덮치기 전 바닷물이 쓸려 내려가듯, 어마어마한 마나가 그곳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화르르륵!

아린스는 템페스타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걸 보았다.

공간 자체가 무언가에 잠식당한 듯 흔들렸고, 점점 붉게 달아오르더니, 서서히 회전하며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아지랑이가 회오리가 되어 하늘로 솟아올랐다.

휘오오오-.

먹구름이 아지랑이와 함께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거대한 먹구름이 검붉게 달아올랐다.

피 같던 붉은색이 점점 짙어지더니, 결국 노을빛처럼 은은하게 타올랐다.

휘오오오-!

“아.”

아린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안 돼, 안 돼, 안 돼!”

쪽빛 사제가 왜 어인족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했는지도 알아챘다.

콰콰콰콰!

결국 먹구름 낀 하늘에 화염 태풍이 휘몰아쳤다.

지름은 수백 미터가 넘는 듯했고, 지옥불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수 킬로미터 밖인 이곳에서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대, 대장님. 저게 대체 뭡니까?”

의문을 표하며 바들바들 떠는 해적은 침착한 편이었다.

“광명신이 노하셨다!”

“해저 화산을 폭발시킨 거야!”

“카리오사가 불의 악마를 데려왔다!”

선장 중에서도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자들이 있었다.

아린스도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빼어난 눈에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 상반신을 벗은 중성적인 소년들이 보였다.

그들은 미친 듯 웃고 있었고, 머리에는 굽은 뿔이 솟아 있었다.

“하, 하하하하…….”

아린스는 살짝 눈을 돌려 폭풍의 눈을 바라보았다.

폭풍의 눈과 불꽃의 벽 사이, 그 한가운데 한 인영이 편안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인영은 백발이었고,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분명 웃고 있었다.

아린스는 참담한 기분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망나니, 망나니 황형 발렌시아누스.”

인영이 손을 앞으로 겨누었고, 거대한 화염 폭풍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먹구름 낀 하늘에 열풍이 내달렸다.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닻의 날개’에 해당하는 섬들 위로 휘몰아쳤다.

바위섬에 자란 이끼와 잡목이 말라비틀어지고.

“아아아악!”

“X발! 뜨거워!”

“저걸 어떻게 이겨……?”

“전 도망치겠습니다! 제독님.”

“기다려라, 명령이다!”

“X 까십시오!”

해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발리스타를 뒤로 하고 내달렸다.

아린스는 이대로라면 한 발도 못 쏴보고 패주할 걸 알았다.

지이이익!

그는 언제나 메고 다니는 활을 당겨 한 선장의 머리를 겨냥했지만, 끝내 화살을 쏘지는 못했다.

‘난…… 나와 함께 죽으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화염 태풍이 상륙선 선단 위를 지나 닻 날개 섬들 위쪽까지 다가왔다.

태풍의 소용돌이에서 ‘불의 창’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불의 창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떨어졌고, 해적이 아니라 발리스타 포대를 노렸다.

쾅!

창이 떨어진 순간 발리스타가 불타올랐다.

용언이 깃든 불꽃은 주문이 부여되어 있던 핵심 부품까지도 녹여버렸다.

화살에 달려 있던 화염 꽃 기름 항아리가 튀어 올라 내용물을 흩뿌렸고, 일대에 남아 있던 해적들은 잿더미가 되거나, 잿더미가 된 자들을 부러워했다.

“으아아악!”

“살려줘!”

“발사! 발사! 맞춰서 떨어트려. 저기 술사가 있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저건 그냥 불덩이라고! 저기에 쏴 봐야 아무런 일도 없어. 도망쳐!”

“불의 신이 노하셨다! 카리오사가 우리를 다 죽일 거야.”

“발렌시아누스 대공이다. 용혈 황족이 온다는 소리는 없었잖아?”

“딴 놈들에게 싸우라고 해! 난 애초에 도망치자 주장했다고!”

“죄수들부터 풀어! 새 삶을 받기로 한 놈들이잖아.”

아린스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드 아래 수려한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끄아아악!”

수천에 달하는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쐐애애액!

소용돌이에서 불의 창이 떨어지고.

화르르륵!

동방의 왕공 귀족들이 지원해준 발리스타 수백 개가 죄다 타오르고.

촤아아악!

아세노르타의 상륙선이 그를 희롱하듯 그의 눈앞을 유유히 지나는 가운데.

“아.”

그는 이 모든 게 어떠한 옛것의 장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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