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00)화 (300/340)

(300)

“이게 장난 같아?”

나는 시작 전 카리오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난 언제나 진심이었는데.”

카리오사는 상륙 전 참수 부대를 꾸리려 했다.

그들의 역할은 닻 날개에 해당하는 섬들을 남쪽으로 빙 돌아 공격하는 것이었다.

‘등 뒤에서 아린스와 발리스타 다루는 해적 놈들을 노리는 거다.’

나는 거기서 한술 더 떴다.

내가 화염 태풍을 일으켜 시선을 끌 테니, 참수 부대는 섬들 남쪽으로 우회해 발리스타 다루는 해적 놈들을 노리라고.

카리오사는 할 수 있겠냐고 꽤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죄책감 때문에라도 약간은 무리해줄 생각이었다.

그녀를 보려고 와 놓고 뒤로는 해적 제독을 빼돌리려 한다는 사실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분투해서 역사(役事)하고, 보속(補贖) 해야지.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싸워서 죄를 갚을 수 있다는 건 공허하면서도 달콤한 말이었다.

그래서 광명교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거겠지.

무리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태풍을 준비하는 데에는 고작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승기류를 만들었고, 카리오사의 손짓 한 번에 그 기류가 태풍으로 뒤바뀌었다.

유지 정도는 내 불꽃과 정령들만으로도 충분했고, 내 몸은 상승기류와 염동력 장갑으로 조종하면 되었다.

화르르륵!

심장에서 마나가 끝없이 흘러나갔지만, 그리 부담되지는 않았다.

용언 한 마디면 지금까지 쓴 것보다 더 많은 마나를 끌어모을 수도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마나 로드가 터져 죽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러나 아즈를 흡수한 이래 내 마나 로드는 황실이 닦은 가도만큼 강인해졌고, 밀물처럼 몰려드는 마나도 손쉽게 다룰 수 있었다.

아직 아즈의 힘을 이용한 공명의 불길은 쓰지도 않았다.

어쩌면 쓸 필요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가자! 용감한 병사들아!”

“해적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우리는 가장 깊은 곳으로 갈 것이다!”

동부에서 제일 잔학한 기사들과 병사들이 닻 군도의 날개 섬 남쪽에 상륙했다.

지금 상륙선 선단이 향하는 연합 항구는 닻 군도의 몸통과 날개가 만나는 지점의 동쪽 만에 있었다.

그곳은 수심도 그리 깊지 않고 파도도 잔잔했으며 암초도 거의 없었지만, 참수 부대가 상륙한 남쪽만은 맑은 날에도 폭풍이 몰아치는 수준으로 파도가 쳤다.

바다 사나이들은 충성심과 갈고 닦은 기술로 그 파도를 뚫고 상륙해 해적들의 등을 잡은 것이다.

“기사들이다!”

“왜 여기서 기사가 튀어나와!”

“싸워- 컥, 커억!”

바다 사나이들은 착실하게 해적들을 도륙했다.

미늘 솟은 작살을 던져 선장급 해적의 등을 꿰뚫고, 파도가 몰아치는 듯한 검술로 해적들을 쓰러트리고, 긴 찌르기를 날리며 적진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화염 태풍의 힘을 천천히 흩었다.

저 아래 후드를 뒤집어쓴 해적 놈이 제 친위대와 함께 연합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항구 방위에 합류할 생각인 듯했다.

물론 그걸 눈 뜨고 봐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 *

아린스는 살아남았으면서도 도망치지 않은 부하 수백을 모아 항구로 달렸다.

“너희는 4번 다리로 가라! 너희는 3번!”

섬과 섬은 수 개에서 10여 개의 흔들다리로 이어져 있었고, 엉켜 떨어지지 않으려면 이합집산을 잘 반복해야 했다.

‘발리스타 포대는 이미 망했다. 항구라도 제대로 막는 게 맞아.’

그는 주관적인 평가와 달리 꽤 훌륭한 해적 제독이었고, 생각보다 많은 부하가 그의 명령을 따라 항구로 이동했다.

섬 중간중간 고립되었던 해적들까지 합류하니, 총합 1천 5백에 달하는 무리가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아린스는 어쩌면 아직 해 볼 만 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의 몸은 날렵했고, 시선에는 총기가 어렸으며, 활은 단단했다.

그때 등 뒤에서 타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크윽!”

“제독님!”

“아아아악!”

부하 몇이 두른 망토가 그을리다 못해 끝내 불타오른 순간, 아린스는 이 열기가 단순한 열풍이 아님을 알아챘다.

타악!

그는 뛰어오르며 몸을 돌렸고, 어떠한 존재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걸 보았다.

“하, 하하하하.”

아린스는 수려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후드 아래 얼굴에 깊은 수심이 어렸다.

‘저걸 어떻게 이겨?’

하늘에 먹구름이 요동치는 가운데 화염 태풍이 그 먹구름을 붉게 물들이고.

거대한 불의 창 열두 발이 시계 숫자들처럼 늘어선 가운데.

그 중심에 선 발렌시아누스가 지상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라. 천한 것들아!”

황금빛 기운은 성인의 광배처럼 빛났고, 세로로 갈라진 눈은 맹수처럼 잔혹했으니.

야만적이라기에는 한없이 멋들어진 옷차림이었고, 정중하다기에는 광폭한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

마치 종말의 날에 강림한다는 파멸의 천사 같았다.

그가 신성 황제의 첨병, 망나니 대공이었다.

“불의 악마다!”

“천사가 강림했다!”

“카리오사가 전투 천사를 불러왔다.”

“우리는 다 죽을 거야!”

항구로 이동하던 해적들이 항구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교적 남아 있던 대형도 다시 무너지려 했다.

우왕좌왕하다 밟히고 넘어지는 자들도 있었다.

아린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활을 들었다.

‘이대로는 전멸이다. 분위기를 바꿔야 해. 저놈도 많이 내려왔다. 약 30m. 충분히 맞출 수 있어.’

그의 고향에는 두 번째 태양을 쏴 떨어트렸다는 궁수의 신화가 전해졌다.

“용혈 황족을 죽여 본 적은 없지만…….”

드드드득-!

활줄이 팽팽해지고, 바람의 정령이 그 화살에 깃들었다.

화살이 푸르게 달아오르고, 천사처럼 강림하던 발렌시아누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정령 궁수?”

핑, 그리고 쐐애애액!

푸른 화살이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쇄도했다.

반투명한 어린 소녀의 형상이 화살 옆에서 환상처럼 번뜩였다.

바람의 정령, 실프였다.

어지간히 잘 만든 마법 갑옷도 꿰뚫을 위력이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같잖다는 듯 입술을 씰룩였고, 손바닥 위에서 불길을 피워 올렸다.

‘해적 무리 속에서도 침식되지 않았다니, 놀라울 따름이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이다!”

화르르륵!

근육질 상반신과 왕도마뱀의 머리를 가진 거인의 형상이 화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불의 상급 정령, 샐러맨더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터지고, 소녀의 형상이 흩어졌다.

샐러맨더가 그대로 지면을 향해 돌진했다.

정령의 형태가 일그러지며 불덩이로 변하고, 아린스는 얼굴을 굳히며 몸을 날렸다.

쾅-!

지면에 충돌한 불덩이가 사방 40m를 휩쓸었다.

휘말린 해적 수십이 바닥을 구르고, 아린스가 충격파에 휩쓸려 붕 떠올랐다.

“크윽!”

그러나 그는 의식을 놓아버리는 대신, 주문을 외우며 눈을 빛냈다.

“내게, 불어온, 바람이!”

순간 그의 등 뒤로 또다시 반투명한 소녀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는 허공에서 추락하는 동시에 몸을 돌리며 활을 당겼다.

쐐애애액-!

퍽!

푸른 빛줄기가 망나니 대공의 귓가를 스치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타악.

아린스는 능숙하게 착지했고, 부하들에게 산개를 명령했다.

“흩어져서 쏴라! 결국 한 명이다!”

그 역시 곧바로 활을 들어 재차 화살을 날렸다.

쐐애애액!

“저놈도 피를 흘린다! 피를 흘린다면, 죽일 수도 있겠지!”

“이, 이익!”

“쏴라! 쏴! 아린스 제독님을 따르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해적답게 싸워 보고 도망치자!”

지리멸렬하게 도망치던 해적들이 다시금 기세를 가다듬었다.

쐐애액! 쐐애액! 쐐애액!

화살과 쇠뇌 살이 바람을 갈랐다.

간부나 선장급은 마도구 쇠뇌도 가지고 있었기에, 저주나 주문의 힘으로 강화된 것도 여럿이었다.

이에 발렌시아누스는 불의 창 열두 발을 단번에 내리꽂는 것으로 답했다.

사아아아!

시계 숫자처럼 누워 있던 불의 창들이 허공에서 회전하고, 붉은색 선은 붉은색 점이 되어 해적들에게 찍혔으며, 이내 유성 같은 꼬리를 남기며 떨어져 내렸다.

쾅! 콰아앙! 콰아아앙!

한 발 한 발이 반경 수십 미터를 휩쓰는 수준이었다.

“순순히 죽어줄 거라고는 기대 안 해. 모든 생명은 자기 목숨을 위해 발버둥 치거든. 그게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발렌시아누스는 그렇게 피어오른 불꽃을 지배하며 마나를 공급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거둬 가야겠지!”

불꽃이 터지고, 불씨가 사방으로 튀고, 튄 불씨가 불똥으로 변하고, 불똥이 불길이 튀어 휘날리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

이윽고 검은 바위뿐인 닻 날개 섬에 사람 키보다 두 배는 커진 불길이 피어오르고, 무시무시한 화염 파도가 되어 해적들을 바다로 몰아냈다.

“으아아악!”

다가오는 불길을 피해 절벽 아래 바다로 몸을 던지는 자가 절반이었고, 동부 기사들이 상륙한 남쪽 해안을 향해 달려간 자가 또 절반이었다.

그리고 동부의 상어 떼는 그렇게 몰려온 해적들을 순식간에 분쇄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모든 걸 바라보며, 이제 수십 명의 부하만 곁에 남은 아린스 앞에 내려섰다.

스윽.

조금도 그을리지 않은 하얀 머리카락과 제복은 불길 치솟은 섬과 이질적이었다.

검은 장갑이 손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고, 그가 약간은 창백해진 얼굴로 아린스를 바라보았다.

“정령 사수. 네가 아린스 맞지?”

“……발렌시아누스 대공.”

“원래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하지. 그런데 지금 난 지휘관이 아니라 어떤 약속도 못 하겠군. 항복해도 죽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항복해주지 않겠어?”

“…….”

* * *

난 아린스와 최후의 부하들에게 제안했다.

물론,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린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의 수려한 얼굴을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코가 높고, 눈이 깊었으며, 이목구비가 전반적으로 뚜렷했다.

해적으로 살며 관리를 제대로 못했을 것까지 고려하면, 엘프 혼혈의 귀족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두꺼운 회색 로브 아래로 가죽과 얇은 은색 철판을 써 만든 갑옷을 입었고, 소검 여러 자루를 차고 있었으며, 활을 들고 있었다.

로브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그 역시 어떠한 마도구인 듯했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항구를 바라보았다.

이 닻 날개 섬은 항구와 아주 가까웠다.

돌로 포장한 선착장, 짐을 내리고 실을 때는 쓰는 넓은 공터, 검역소를 겸하는 두툼한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 성벽 위와 뒤로 즐비한 해적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보일 정도였다.

놈의 목적이 아마도 항구 방비에 합류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거의 이루기 직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린스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주변 해적 놈들도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놈이 날 노려보며 애써 유쾌하게 외쳤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라! 이 괴물아!”

“……하.”

제 부하들을 돌아보며 활을 들었다.

“용감히 싸우고, 안 될 듯하면 도망가자!”

사아아아!

푸른 기운이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졌다.

해적들의 몸이 은은한 푸른빛으로 빛났고, 난 팔다리가 약간 무거워진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군의 신체 능력을 북돋고 상대의 발목을 잡는 정령의 축복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와아아아!”

해적 수십과 아린스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작살을 쥔 놈, 갈고리와 커틀라스를 휘두르는 놈, 삼지창과 그물을 든 놈, 꼬챙이 같은 칼을 든 놈, 안대를 차고 큰 방패를 큰 놈, 칼날 같은 부리를 단 거대 앵무새 다섯 마리를 거느린 놈, 양손에 손도끼를 든 놈, 구리 채찍을 든 놈, 끝이 둘로 갈라진 창을 든 놈…….

“그래야 다 죽여도 미안하지 않잖아.”

난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흑루를 뽑아 들었다.

흑루에 마나 블레이드가 어리고, 왼손이 비늘에 감싸였으며, 내게 엉켜 들었던 실프의 기운이 산산조각으로 찢어졌다.

난 서늘하게 웃으며 땅을 박찼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영원히 헤매거라.”

난투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작살 든 놈의 작살을 부러트리고 목을 베었고, 갈고리 찬 놈의 갈고리를 뽑아 놈의 머리에 찍었으며, 그물 든 놈이 던진 그물을 불태우고 삼지창을 베어냈다.

꼬챙이 같은 칼을 든 놈은 흑루로 머리를 날렸고, 방패를 든 놈은 방패를 주먹으로 뚫어버리고 눈알을 관통했으며, 새를 부리던 놈은 새와 함께 태워 죽였다.

양손에 손도끼를 든 놈은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반으로 쪼갰고, 구리 채찍을 든 놈은 그 채찍으로 감아 목을 졸랐으며, 끝이 둘로 갈라진 창을 든 놈은 그 창에 꿰어 바다로 던졌다.

“네가 마지막이야.”

난 아린스의 멱살을 잡았고, 놈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놈은 끝까지 저항했고, 내 몸에 화살 몇 대와 소검 몇 방을 꽂는 데 성공했지만, 난 그 정도로 죽지 않았다.

“슬슬 부하들 곁으로 보내 주마.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 전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뭐?”

보여준 기백에 비해 썩 멋없는 유언이었다.

난 눈살을 찌푸렸고, 놈은 계속 몸을 비틀었다.

스윽.

내 손가락 비늘에 놈의 후드가 걸려 벗겨졌다.

그때 난 놈의 얼굴에 다소 기이한 형태의 신체 부위가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엘프?”

놈의 귀는 거의 반 뼘 길이였고, 나뭇잎처럼 날카로웠다.

내 기억이 옳다면, 공식적으로 약 130년 만에 등장한, 혼혈이 아닌 진짜 엘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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