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엘프는 세계적으로 핍박받는 종족이었다.
솔레타라스의 왕공 귀족만이 엘프를 비롯한 이종족을 향해 비교적이나마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단 우리도 그 피 덕에 미모와 힘을 얻었으니.”
“기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들이 우리의 적이었다는 건 사실이고말고.”
그런 귀족들도 이 정도니, 이종족에 대한 신민들의 인식은 문자 그대로 나락이었다.
“쫓아라~ 쫓아라~ 귀쟁이를 쫓아라.”
지역 축재나 기념일, 동요의 유래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이종족 사냥과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지금도 엘프가 과거에 살던 거대수림을 불태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거대수림 주변에 감시 초소를 만들어야 합니다! 언제 귀쟁이 놈들이 정령을 거느리고 돌아올지 모릅니다.”
“아니. 그냥 다 베어버리면 안 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아무리 미워도 그 비싼 자원을 다 베어버리자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 거대수가 없다면 전함은 뭐로 만들라고?”
숲지기들 사이에서도 거대수림의 숲지기는 기피 보직이었다.
“저는 그곳 숲지기는 하기 힘들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리.”
그놈들이 천 년 전까지 인간을 대하던 방식을 생각해 보면, 신민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따라서 살아남은 엘프들은 아주 깊은 숲속에서 아주 은밀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신비가 살아 숨 쉬고, 아몬 신도들이 광명 신도들과 함께 싸우는 북부에서조차, 엘프의 마지막 목격담은 수십 년 전에 끊어졌을 정도였다.
수십 년에 한 번꼴로 인근 영주들과 교류하기도 했고, 길 잃은 나무꾼이나 사냥꾼 아이와 마주쳐 소년의 가슴에 낭만을 심어 주기도 했지만, 그냥 그 정도였다.
권력의 핵심이었던 나 역시 그들을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무해하고도 고요한 삶을 살았다.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가 엘프 전사들을 반란에 참전시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지금 엘프가 세상에 나와 있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너, 뭐냐?”
수십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미 유스티아누스가 이종족과 만났을 가능성.
이종족이 자체적으로 반란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
내전이 일어나지 않자 귀족령 인구가 늘고, 늘어난 인구 탓에 화전민이 늘어났으며, 살 곳을 잃은 엘프족이 집단 이주하게 되었을 가능성.
어떤 미친 엘프 하나가 종족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다며 가출해서 해적 함대에 투신할 가능성.
엘프들이 해적으로 위장해 제국에 복수를 꿈꿀 가능성.
미간을 찌푸리며 아린스를 노려보았다.
길게 땋은 금발과 짙은 녹색 눈, 뾰족한 귀, 달콤하게 느껴지는 마나의 잔향.
다시 봐도 진짜 엘프였다.
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읍소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은 해적 토벌이 먼저였다.
“그래. 살려줄 테니까 좀 자고 있어라.”
퍽!
나는 아린스의 목덜미를 손날로 힘껏 내리쳐 기절시켰고, 놈의 턱, 양쪽 어깨와 팔꿈치, 양쪽 무릎과 발목 관절을 죄다 뽑았으며, 놈이 가지고 있던 활과 화살, 단검을 모두 절벽 아래로 던졌다.
이렇게 해 놔도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내 등에 어딘가 숨겨둔 칼을 꽂으려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저 항구가 먼저다.”
……제발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후.”
나는 고개를 들어 바다와 항구, 성벽을 바라보았다.
폭풍함대의 상륙선들이 ‘닻의 날개’에 해당하는 섬들 안쪽으로 들어왔다.
촤아아아! 촤아아아!
수심이 얕아지며 검푸른색이던 바다가 파란색으로 변하는 지점이었다.
이제 곧 해적들의 연합 항구에 도달할 수 있을 듯했다.
연합 항구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는데, 한 번에 입항할 수 있는 배가 3백 척도 넘어 보였다.
“여기서 막는다!”
“일단 항만 안에서 붙들어 놓고, 방어 탑에서 발리스타로 포격할 거다!”
“충격에 대비해라!”
지금도 1백여 척이 그 자리에 남아 폭풍함대 상륙선의 입항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뒤로 판석으로 포장된 넓은 부두와 성벽이 있었다.
부두와 성벽 위에는 이미 해적 놈들이 바글거렸고, 성벽 중간중간 설치된 발리스타는 당장이라도 거대한 화살을 쏘아낼 듯한 기세였으며, 거석으로 쌓은 성벽은 ‘힘의 창’ 백 발은 막아낼 수 있을 듯 뚱뚱했다.
그러나 난 놈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섬에서 섬 두 개만 더 건너면 저 항구였다.
즉.
놈들로부터 2km도 안 떨어진 곳 하늘에 지름 수백 미터짜리 화염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먹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불의 태풍을 올려다보았다.
휘오오오-!
화르르르!
불의 정령들이 깔깔거리며 빙빙 돌았고, 습기 찬 열풍이 내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 모습은 마치 엄청나게 거대한 뱀이 몸을 말고 있는 듯했다.
“해보자고.”
나는 눈동자를 세로로 바꾸며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사아아아-.
태풍의 회전 속도가 한 박자 느려졌고, 불꽃으로 된 뱀이 몸을 펴기 시작했다.
막대한 열풍이 전방을 향하고, 내 등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사아아아-!
태풍이 소멸하는 동시에 거대한 창이자 폭발로 화했다.
모든 열기를 한 대 모아 만든 불의 창이 대각선 아래를 노렸다.
나는 저 멀리 경악에 찬 해적들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불꽃이 대기를 가르고, 이윽고 불기둥이 치솟았다.
퍼어어엉-!
눈앞이 붉게 물들었고, 열풍이 머리카락을 날렸으며, 잿가루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삼중 성벽 왼쪽이 길게 뚫렸다.
종이 위에 세 줄을 가로로 그어 놓고, 왼쪽 끝에 한 줄을 길고 거칠게 그어 놓은 듯했다.
나는 항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깨진 돌 더미와 나무 조각만 남았구나.”
“저런 쓰레기로는 어디 움막이나 지을 수 있을까.”
“나의 황제께서 인정하신 이 땅의 주인이 왔노니.”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거라.”
* * *
폴렉은 해적 제독이자 육상 사령관인 오운굴라의 부관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소드 유저였으며, 녹색 코트를 즐겨 입었다.
주요 임무는 포로를 잡는 것이었고, 취미는 포로 중 고귀한 피가 섞인 여인과 미소년에게 어린아이가 봐서는 안 될 짓을 벌이는 것이었다.
한때는 그 역시 명예로운 전사였다.
밤낮으로 수련해 소드 유저에 올랐고, 밤낮으로 공부해 한 배의 선장이 되었다.
‘영주님!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영지의 방비를 다른 영주에게 맡긴다는 건 항복이나 다름없습니다.’
‘시끄럽다! 내일부터는 나오지 마라.’
‘이제야 돈 먹는 뱃놈들이 없어지겠군요.’
‘잘됐습니다. 난폭하고 자존심만 센 놈들이었으니까요.’
‘그 돈으로 파티나 엽시다. 하하하.’
그의 영주는 돈 많이 드는 해군을 유지하는 대신, 동부의 백상아리에게 보호세를 내기를 택했다.
폴렉이 선장이 된 이듬해였다.
‘선장. 이대로 망할 겁니까?’
‘귀족 놈들이 선장이 수상한 행동을 보인다고 난리입니다.’
‘선장이 군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씌우려 들고 있습니다. 그 쥐꼬리만 한 돈을 어떻게 아꼈는지는 모르고서!’
그렇게 폴렉은 해적이 되었다.
‘그래…… 앉아서 망할 수는 없지.’
그 뒤로 그는 복수하듯 해적질을 이어갔다.
한때 그가 지키던 도시를 약탈하고 도시 유지들의 딸과 아내를 포로로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해군 그까짓 거 돈만 먹고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포, 폴렉!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느냐!’
‘닥쳐.’
복수는 달콤했다.
‘……갑자기 왜 옛날 생각이?’
문득 폴렉은 자신이 왜 옛날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민했다.
삐이이이-.
귓가에서 이명이 울렸고, 눈꺼풀은 무거웠으며, 누군가 그의 몸을 흔들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선장님!”
“선장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어, 어?”
폴렉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리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마에서 뭔가 흘러내리고 있어 문대 보니, 새빨간 피가 손바닥에 흥건했다.
“이게 무슨……!”
그는 자신이 기절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마지막 보았던 광경을 기억해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태풍이 거대한 창으로 변하고, 뱀이 턱을 벌리듯 돌진해오던 모습을.
“하.”
폴렉은 비틀거리며 일어섰고, 하늘, 부두, 성벽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화염 태풍은 찾아볼 수 없었다.
툭, 투툭!
먹구름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합 항구 부두는 길이가 총 1.5km 정도였고, 1차 성벽도 그 정도 길이었다.
그의 담당 구역은 중앙이었는데, 그곳까지도 바위와 시체가 날아와 굴러다니고 있었다.
대마법에 직격당한 곳은 바다 쪽에서 볼 때 오른쪽으로 3분의 1 정도 되는 지점이었는데, 성벽이고 뭐고 완전히 평지가 되어 있었다.
“방어선 다시 구축해!”
“3번 성벽도 틀렸습니다. 말 열 마리도 나란히 서서 지나가겠습니다!”
“야, 야! 저 새끼들 잡아! 탈주한다!”
“누가 제발 약을 좀 줘! 아니면 술이라도!”
목소리를 들어 보니 저 안쪽까지 다 부서진 듯했다.
그는 성벽의 대략적인 형태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1차, 2차, 3차가 있고, 점점 높아지고 두꺼워지지. 3차 성벽은 두께만 20m이다. 그런 성벽 세 개가 한 번에 다 뚫린 거야. 당연히 그곳으로 공격이 집중되겠지.’
“선장님!”
부하가 그를 불렀고, 그는 나름 냉철하게 답했다.
“듣고 있다. 이거 완전히 조졌군.”
“앞을 보십시오!”
그리고 폴렉은 다시 한번 침음성을 토해야 했다.
촤아아아! 촤아아아!
폭풍함대 상륙선들이 항만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세노르타의 백상아리 깃발이 위압적으로 흔들렸다.
“그래. 이거 완전히 조졌군.”
* * *
폴렉의 상관 오운굴라는 2m도 넘는 장신에 한쪽 손에 갈고리를 단 거친 인상의 사내였다.
산적, 마적, 해적까지 다 해본 도적질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가 항구 전체에 우렁우렁 울렸다.
“전원 전투 준비! 놈들의 상륙선이 우리 해적선들에 발이 묶이면 발리스타로 포격한다. 돛을 불태워 후퇴를 막도록!”
“쇠뇌 사수들과 궁수, 투석 병, 용병 마법사 모두 다들 입구 쪽을 정조준해라! 나오는 순간 최대한 큰 피해를 줘야 한다.”
“용병 마법사들은 전투마법사 말고 병사와 기사들을 노려라! 적 전투마법사는 쇠뇌 사수 저격병들이 상대한다!”
“이번에 살아남으면 아퀼라 전하는 진짜 왕이 되고, 너희는 왕의 병사들이 된다! 해적의 오명도 끝이다! 목숨 걸고 싸워 권리를 취해라!”
그 순간이 오자, 의외로 해적들은 침착해졌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목숨 걸고 싸우는 것뿐이라고.
촤아아아-!
폭풍함대 상륙선들이 들이닥쳤다.
캉!
항만 앞쪽에 걸어둔 쇠사슬이 쇳소리를 내며 끊어져 가라앉았다.
전장 60m에 최대폭이 20m에 달하는 뚱뚱한 상륙선은 무지막지한 체급을 자랑했다.
그런 상륙선 스무 척이 선착장을 향해 돌진했다.
꼭 거대한 일각수 무리가 몰려드는 듯했다.
“온다!”
“백병전이다!”
“여기서 묶어둘 거다!”
“죄다 고기밥으로 만들어 버려라!”
선착장 바로 앞에는 백여 척의 낡은 해적선이 묶여 있었고, 배마다 사나운 해적들이 바글거렸다.
제대로 배를 대지 못하게 방해하고, 필연적으로 취약해지는 상륙의 순간을 노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카리오사가 얼마나 이를 갈고 왔는지 몰랐다.
“우리가, 불러온, 파도에!”
“내가, 사랑한, 바람이!”
상륙선 갑판에 선 전투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웠다.
8m도 넘는 파도가 일고, 거센 바람이 상륙선 돛을 팽팽하게 당겼다.
“어, 어?”
“저들이 속도를 줄이지 않습니다!”
“이 미친 상어 새끼들이-!”
쾅-!
바람과 파도를 탄 상륙선들이 돌진하는 황소비룡처럼 해적선들을 들이받았다.
상륙선들은 바닥에 황동 판을 달고 강화 마법진을 새겼고, 체급에서 한참 밀리는 해적선들을 문자 그대로 짓뭉개며 나아갔다.
쾅! 쾅! 쾅!
상륙선 선두의 바우스프릿이 선착장에 부딪혀 부서졌고, 배가 선착장 위로 올라가 버리거나, 아예 옆으로 돌아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항구에 배를 대는 데 성공했다.
폴렉은 침음성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쇠뇌 사수들이 다급한 표정을 지었고, 발리스타에 붙은 병사들도 조준하느라 바빴다.
‘저놈들이 한 박자 빨랐다.’
뿌우우우-!
나팔 소리가 울리고, 한 상륙선 아래쪽 문이 좌우로 열렸다.
“쏴라!”
폴렉이 외쳤고, 쇠뇌와 돌, 화살과 저주 주문이 쏟아졌다.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그러나 그 문은 열렸지만 열린 게 아니었다.
거대한 직사각형 방패를 든 바다 사나이 12명이 입구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텅! 티잉! 퉁!
주문과 화살이 방패를 때릴 때마다 방패에서 푸른 빛이 번뜩였다.
철컥, 철컥, 철컥!
그들이 방패 벽을 앞세워 침착하게 걸어 나왔고, 그 사이에서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하얀 판금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였고.
한 명은 찰갑을 입고 가오리 가죽 코트를 두른 검객이었다.
폴렉은 숨이 멎은 듯한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늘처럼 반짝이는 얼굴과 뾰쪽한 이빨, 세로로 찢어진 동공과 회색 눈동자.
야만적인 아름다움과 이해할 수 없는 위엄을 동시에 가진, 동부 제일의 대귀족이었다.
“ -. ……백상아리.”
카리오사가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저 바다 구더기들을 다 죽여라! 아무도 남기지 마라!”
왈칵! 왈칵! 왈칵! 왈칵!
그 순간 모든 상륙선에서 문이 열리고. 동부의 바다 사나이들이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