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동부 사람이라면 모두가 카리오사라는 이름을 알았고, 해적이라면 누구나 그 상어 깃발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카리오사의 외모는 의외로 해적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녀를 본 해적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풀렉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동부 바다 사나이들을 바라보았다.
“다, 죽여라!”
“바다 구더기들이 득실거리는구나!”
“머리를 쪼개 바다에 던지자!”
“죽은 자들을 부러워하게 해 주어라!”
상어 떼가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며 배에서 달려 나왔다.
그들은 철편을 꿰매 만든 갑옷을 입었고, 푸른 망토를 둘렀으며, 다섯 자루 이상의 작살과 묵직한 직도로 무장했다.
텅!
그들의 갑옷은 어지간한 쇠뇌도 정면에서 막아줄 정도로 강했고.
쐐애애액!
그들의 투창은 세 번째 성벽 뒤에 있는 해적 선장을 꿰뚫어버릴 만큼 강인했으며.
츠카아아악-!
그들의 검술은 해적 두셋을 단숨에 일도양단해버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 선두에 서 있는 건 마법검 폭풍과 순풍을 쥔 카리오사였다.
“죽은 사람 관 위에, 열다섯 사람!”
그녀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바람 칼날이 뿜어져 나갔다.
“게다가 럼주가 한 병이라!”
아세노르타 가문의 본성에는 유명한 해적 제독들의 표본이 전시된 방이 있다고 한다.
모든 해적은 그 소문을 믿었고, 회색 눈을 번들거리며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카리오사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듯 보였다.
그녀가 읊조리는 노래 역시 위대한 대영주보다는 피에 젖은 사냥꾼에게 어울리는 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쏴, 쏴라!”
“머리 말고 다리를 노려라!”
“한 명에게 집중해서 사격해라!”
성벽 위.
갈색 피부의 고혹적인 해적 제독, 페이진이 고래고래 외치며 궁수들과 쇠뇌 사수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셋이서 한 명을 맡는다!”
“막아내는 데 집중해라! 위에서 잡아 줄줄 거다!”
“거리를 유지해라! 뛰쳐나가지 마!”
성벽 아래.
녹색 코트의 폴렉, 변발의 텐예, 갈고리 오운굴라가 어떻게든 이 해적 놈들이 대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발리스타 발사 준비!”
“배를 노려라!”
“상어 놈들을 물속으로 보내주자!”
성벽 위에는 중간중간 발리스타가 설치되어 있었고, 해적들은 아린스에게 그 사용법을 배운 바 있었다.
“장전!”
“기름 항아리 달아!”
“조준!”
“발사!”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깃대만큼 거대한 화살들이 쏘아져 나갔다.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콰지지직!
아세노르타 가문의 상륙선은 거대하고도 단단했지만, 발리스타 화살을 막아낼 정도는 아니었고, 3층에 달하는 갑판도 끝내 관통되었다.
항아리 안에서 걸쭉한 기름이 새어 나와 불이 붙었고, 곧이어 매캐한 연기가 미친 듯 피어올랐다.
“콜록! 콜록!”
화염 내성 주문으로 보호받는 배를 태우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니, 선원들이라도 고통받게 하기 위해 개량한 기름이었다.
“좋았어!”
“엉덩이를 걷어차 주어라!”
“이대로 몰아붙이자!”
효과가 있었는지, 상륙선에서 쏟아져 나오는 바다 사나이들의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그때 카리오사는 검 하나를 검집에 집어넣고 나팔을 불어 전투마법사에게 신호했다.
뿌우우우!
나팔 소리를 들은 전투마법사는 하늘로 ‘불의 창’을 쏘아 올려 전함에 2차로 신호했다.
쐐애애액!
“전하의 명령이시다!”
“발리스타 포격 준비!”
“파괴술 캐스팅 시작!”
“조준 보조 주문 발현!”
발렌시아누스가 닻 날개 섬들을 제압하는 걸 돕게 되어, 굳이 상륙선 보호를 위해 많은 마법사를 둘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열두 전함에 고스란히 남아서 명령을 기다렸고, 마침내 부름을 받았다.
착! 착! 착!
갑판에 줄줄이 설치된 발리스타에 거대한 은철 화살이 걸렸다.
전투마법사 둘이 발리스타 하나에 붙어 화살에 주문을 부여했다.
“순수한 힘이여, 세상을 바꿀 힘이여!”
“나아가라, 나아가라. 이 세상의 끝까지!”
파괴술 간판 주문인 ‘힘의 창’, 순수한 힘의 확산인 ‘비산의 구’, 사정거리를 늘려주는 ‘순풍’까지.
황금 물약, 벼락 맞은 나뭇가지, 태풍 새의 깃털 등 온갖 값비싼 시약이 잔뜩 소모되었지만, 동부 제일의 대영주에게는 별 무리도 아니었다.
“폭풍의 딸께서 뭍에 발을 들이시니!”
배에 남은 장교기사가 발사를 명하고.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전함 한 대에서 수십 발의 발리스타가 불을 뿜었다.
신비한 보라색 빛에 감싸인 거대한 쇠뇌 화살은 본래라면 불가능한 속도와 정확성으로 수 km 거리를 가로질렀고.
쾅-!
삼중 성벽의 발리스타들을 하나하나 날려버렸다.
페이진은 파편을 피해 머리를 숙인 채로 얼굴을 검게 물들이며 좌절했고.
‘안 돼. 안 돼. 안 돼.’
피에 굶주린 카리오사는 이빨을 희번덕거리며 광소했다.
“가서, 조져라!”
* * *
폴렉은 동부 병사 하나가 그의 부하의 목을 베어낸 뒤, 그 머리통을 성벽 위로 집어 던지는 걸 보았다.
“으하하하!”
섬뜩한 웃음소리가 부두에 울렸다.
여전히 해적들은 수적으로 유리했다.
전함의 전투마법사들 역시 오인사격을 우려해 더 이상 주문 부여한 발리스타를 쏴 대지는 못했다.
그러나 상어 깃발을 단 정예병들은 오늘 모든 걸 끝내리라 마음을 먹었다.
“이 지긋지긋한 바다 구더기 놈들을 죽여라!”
“이 섬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걸 찢어버리겠다.”
“도적질과 약탈의 응보를 줄 때가 왔으니!”
해군은 하루아침에 기를 수 없었다.
아세노르타 가문의 병사들은 대부분 직업군인이었고, 이 시대의 모든 정예병이 그렇듯, 대를 이어 아세노르타에 헌신해온 자들이었다.
이종족 시대부터 들끓어온 해적들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싸움의 끝을 내는 역사적 순간에 함께한다는 건, 그들에게 깊은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한 동부 병사가 폴렉을 향해 돌진했다.
“선장급이다!”
“죽여라!”
쐐애애액!
작살이 위력적으로 날아와 폴렉의 머리 위를 스쳤다.
폴렉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저놈은 내 거다!”
“머리카락을 잘라 선실을 장식하자!”
“폭풍의 딸 앞에 붉은 융단을 깔아라!”
흥분으로 가득 찬 눈빛 앞에서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때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폴렉의 정신을 깨웠다.
“폴렉! 성벽 안으로 후퇴해라!”
거구의 제독, 오운굴라가 멀쩡한 오른손으로 폴렉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쾅!
갈고리를 휘둘러 날아든 작살을 쳐내는 건 덤이었다.
“가서 두 번째 성벽 안쪽에 바리케이드를 쌓아라. 이대로라면 다 끝이다.”
“제독님께서는-!”
폴렉은 반사적으로 그의 안위를 물었다.
바다에서 제일 잔인한 군대가 부두에 상륙했고, 이미 첫 번째 성벽에 올라선 동부 병사들도 여럿이었다.
오운굴라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평생 도망치며 살았다. 더는 도망칠 장소가 없을 거 같구나. 폭풍의 딸이나 백금 기사 같은 거물을 마주할 기회도 흔치 않고.”
오운굴라의 거친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이 어리고, 폴렉은 뒤돌아 달렸다.
“꼭 돌아오십시오!”
오운굴라는 멀쩡한 손에 긴 삼지창을 쥐었다.
“그러기는 힘들 것 같군.”
그리고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텐티아에게 향했다.
* * *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의 호위 기사였고, 본래라면 상륙 작전에 참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닻 군도의 날개 섬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동부 기사 여럿이 빠져나갔고, 카리오사는 그 전력 공백을 메우고 싶어 했으며, 발렌시아누스는 타르티를 빼돌린다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서 전공을 더 세우고 싶어 했다.
‘미안하네. 경.’
‘아닙니다. 명령만 하십시오.’
따라서 텐티아는 충실한 기사답게 주군을 위해 철과 피로 봉사하기로 했다.
“사실 배에서 이걸 보기만 하는 것도 못 할 노릇입니다.”
챙, 그리고 퍽!
텐티아는 날아든 화살을 백금 갑옷으로 흘려 내고, 해적 한 명의 목을 날려버리며 중얼거렸다.
“적의 핵심 거점에 상륙해 치열한 공성전을 치를 수 있다는데, 이건 못 참지요.”
투구 면갑 아래 그녀의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 웃고 있었다.
“게다가 동부의 뱃놈들에게 황실 기사의 힘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텐티아는 전장을 둘러보았고, 완연한 승기를 잡았음을 확신했다.
“빠져라!”
“도망쳐!”
첫 번째, 두 번째 성벽에 올라선 해적들은 이미 세 번째 성벽으로 후퇴 중이었다.
“아아아악! 네가 감히-!”
“원망하지 마십쇼! 저희는 개죽음당하기 싫습니다.”
선장이나 간부의 목을 베고 동부 병사들에게 달려오는 해적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사이좋게 목이 베여 추가적인 수급이 되었다.
“가자, 가자, 가자!”
“우리는 제일 높은 곳으로, 제일 깊은 곳으로 갈 것이다!”
동부 바다 사나이들은 이미 무너진 성벽을 통해 침투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을 가로막는 한 인영이 있었다.
2m도 넘는 키에 거친 수염, 오운굴라였다.
그가 동부 병사들 앞을 막아서며 삼지창을 휘둘렀다.
“크하!”
부우우웅-!
퍼억!
푸른 마나 블레이드 타오르는 삼지창이 거대한 반원을 그리고, 동부 병사 여럿이 바닥을 굴렀다.
“나는 해적 제독 오운굴라다! 날 넘지 못하는 자는 절대 성벽도 넘지 못할 것이다!”
날 보라는 듯한 외침이었다.
물론 동부 바다 사나이들은 ‘강력한 1인’을 상대해본 경험도 많았다.
“쏴라!”
순식간에 병사들이 착착 모여 진을 짰고, 마도구 쇠뇌 수십 발이 발사되었다.
텐티아는 오운굴라가 바닥을 구르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소드 엑스퍼트라 해도 저걸 맨몸으로 받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다칠 거고, 전투력이 떨어질 거고, 그러다 피 흘리며 죽겠지.’
티디딩!
그러나 들려온 건 예상과 다른 반발음이었다.
“!?”
텐티아는 오운굴라의 옷 아래 보라색 비늘이 잔뜩 돋아 있는 걸 보았다.
지지직!
옷이 찢어지며 그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귀 쪽에 아가미 같은 지느러미가 펄럭였고, 손가락 사이에는 물갈퀴가 돋았으며, 척추를 따라 가시가 튀어나왔다.
‘혼혈?’
텐티아는 발걸음을 돌려 그에게 향했다.
“너희 상대가 아니다. 내게 맡겨라.”
‘해 보고 싶었던 말이다.’
진중하고 늠름한 목소리와 달리, 면갑 아래에 슬그머니 웃음을 지으면서.
동부 병사들이 텐티아를 바라보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비늘 두른 거인과 판금 두른 기사가 서른여 걸음 간격을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텐티아는 화한에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다.
화르르륵!
“발렌시아누스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이름은?”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핏물 파도처럼 일렁이고, 오운굴라 역시 삼지창에 푸른색 마나 블레이드를 더했다.
우우우웅!
“오운굴라. 해적 장군이다.”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전사된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텐티아는 약간은 호기심을 느끼며 일부러 도발적으로 물었다.
“두목이겠지. 어느 왕이 널 장군으로 임명했느냐?”
“아퀼라 전하시다. 이 닻 군도의 군주시지.”
“자칭 왕이로군.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너희는 다른가?”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할 말은 없다.”
텐티아는 한 걸음 나아가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소드 엑스퍼트로군. 이런 짓 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텐데, 왜 해적이 되었지?”
오운굴라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비늘 돋친 괴물을 받아주는 곳은 도적 패거리밖에 없더군.”
텐티아는 고개를 주억였다.
태어날 때부터 저런 모습이었고, 힘을 쌓은 다음에야 비늘을 숨길 수 있게 되었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었다.
“그들은 널 받아준 게 아니라, 널 이용한 거다. 가련한 전사여.”
오운굴라가 혀를 찼다.
“그럼 넌 다른가? 기사?”
주군에게 이용당해 살육을 저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어쩌면 한때는 내심 고민했을지도 모르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텐티아는 이제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대나 나나 인간 도살자로 살며 밥을 먹지. 그러나 똑같이 사람 죽이는 놈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야. 무엇을 위해 검을 휘두르느냐에 명예가 깃드는 것인데.”
세상일은 결국 해석하기 나름이었고, 어떻게 해석할지는 각자가 정하는 거였다.
“안타깝구나. 괴물아. 지킬 것과 섬길 주군이 있었다면, 멋진 전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텐티아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다.
엘프와 오거와 인간이 섞여 만들어진 기사라는 인종은, 혼혈 특색 강한 자들에게 대게 호의 어린 시선을 보냈다.
오운굴라는 삼지창을 쳐들며 외쳤다.
“내게 그렇게 말한 건 네가 처음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도 아니겠지!”
타악!
다음 순간 비늘 거인과 적기사가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