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오운굴라와 텐티아 사이의 거리는 거의 30m에 육박했다.
그러나 소드 엑스퍼트라는 초인들의 대결에서 30m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타앗!
텐티아가 땅을 박찬 순간, 붉은색 망토가 잔상처럼 뒤로 펄럭였다.
그녀가 단 두 걸음 만에 20m를 가로질렀고, 땅을 접듯 도약했다.
오운굴라의 정수리를 아득히 내려다보고도 남을 높이였다.
구름 사이에서 태양이 비추듯, 화한에 어린 마나 블레이드가 번뜩였다.
사아아악!
당장이라도 오운굴라를 한 줌 핏물로 만들어버릴 기세였다.
“으, 하!”
그러나 비늘 돋친 거인은 오른손에 쥔 삼지창을 정확하게 찔러 올렸다.
보라색 안광이 번뜩이는 동시에 보라색 마나 블레이드가 타오르고, 셋으로 갈라진 창 촉이 텐티아의 화한을 정확히 가로막았다.
타아앙!
땅에서 하늘로 찔러 올라간 오운굴라의 삼지창과 하늘에서 땅을 내려 벤 텐티아의 검이 요란한 불꽃을 튀기며 맞부딪쳤다.
치지지직!
이색의 마나 블레이드가 요동치고, 강력한 반발이 둘 모두를 덮쳤다.
적기사는 손목을 감으며 반발을 흡수했고, 비늘 거인은 창을 밀어 올리는 동시에 한 걸음 나아가 적기사를 격퇴하려 했다.
부웅!
“흡!”
텐티아는 어지간한 사내보다 키가 컸고, 25kg짜리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전신의 무게를 한 점으로 모아 베어내고 있었다.
오운굴라의 팔뚝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다음 순간, 그 텐티아가 하늘로 다시 밀려 올라갔다.
텅!
적기사는 면갑 안쪽에서 눈을 부릅뜨며 탄성을 표했다.
“나보다 힘센 자를 마주한 건 오랜만인 듯하오!”
그녀는 허공에서 다리를 차올리며 중심을 잡고 착지하려 했다.
“흐!”
비늘 거인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 달려 나갔다.
사아아악!
왼손을 대신한 흉악한 갈고리에서 마나 블레이드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비늘 거인이 갈고리를 내리그었고, 텐티아는 검을 가로로 눕히며 막아냈다.
쾅!
갈고리와 검이 부딪치고, 텐티아의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큭!”
쩍!
부두를 포장한 판석에 금이 가고, 강철 부츠가 흙 아래로 짓눌렸다.
마나 블레이드를 다루는 초인이 된 이상, 근력은 육신보다 마나의 힘이 좌우했다.
그러나 2m도 넘는 거구에서 나오는 박력은 어마어마했다.
“아직은 내가 죽을 때가 아닌가 보군!”
오운굴라가 텐티아를 으깨버릴 기세로 찍어 눌렀다.
쾅-!
“기사님!”
“텐티아 경을 도와라!”
“이쪽으로 전투마법사들 데려와!”
동부 병사들이 비명을 토했고, 텐티아가 신음성을 토했다.
“필요, 없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굽혀지기를 몇 초, 적기사가 왼손을 들어 화한 날 쪽을 받쳤다.
치지지직!
마나 블레이드 타오르는 검에 닿은 건틀릿이 불꽃을 튀겼고.
끼익!
한없이 내려앉던 몸이 그대로 정지했다.
“역시 한 손으로는 힘들군.”
“!”
다음 순간 적기사가 화한 날을 왼손으로 밀어 올리며 오른쪽으로 획 뒤집었다.
스윽!
“크윽!”
갈고리와 왼손이 돌아가 버린 오운굴라가 비명을 토했다.
그가 도끼를 치켜들 듯 삼지창을 들었지만, 텐티아는 이미 그의 코앞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둘 사이의 간격은 수십 cm도 되지 않았고, 그건 창이나 장검이 아니라 단검과 팔꿈치, 무릎의 거리였다.
오운굴라 역시 그걸 알았기에 아예 레슬링으로 상대할 생각을 했다.
‘일단 무릎으로 차올리고, 발차기로 거리를 만든 뒤 삼지창으로 잡는다.’
그러나 적기사는 장검 화한의 날 중간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장검 앞쪽은 단창처럼, 크로스 가드 쪽은 장도리 철퇴처럼 쓰는 기술인 ‘하프소딩’이었다.
‘그 암살자 때문에 근거리 기술을 연습했지. 이제 이 거리에서도 장검을 쓸 수 있다. 거리를 벌려줄 생각, 없어!’
치지지직!
다시 한번 마나 블레이드와 건틀릿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푸푸푹!
화한 날이 오운굴라의 가슴과 배를 찔렀고, 단단한 크로스 가드가 쇄골을 내리쳤다.
“크아악!”
오운굴라는 온몸에 단단한 비늘을 두르고 있었지만, 텐티아는 그보다 단단한 비늘을 두른 사내와 매일같이 대련해온 사이였다.
콰지직, 콰지직! 카드드득!
그녀는 마치 생선 비늘을 벗기듯 검을 찔러 넣었고, 오운굴라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텐티아 경!”
“오오오오!”
“역시 백금 기사라는 건가?”
동부 바다 사나이들이 탄성을 터트렸고, 텐티아는 왼손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하!”
“가장 높은 곳으로!”
“가장 깊은 곳으로!”
동부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고, 오운굴라는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텐티아가 다시 화한을 쳐들며 말했다.
“오운굴라. 항복하라. 적어도 참수로 보내주지.”
오운굴라는 삼지창을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평생을 도망쳐 왔지. 비겁한 도적으로 살면서.”
“…….”
“사실 나도 알고 있었을 거야. 세상이 날 무서워하기보다 내가 세상을 더 무서워한다는 걸.”
“…….”
“그러나. 보게. 백금의 기사여.”
비늘 거인 앞으로 거의 백 명의 병사가 모여 있었다.
강력한 전투마법사, 중쇠뇌를 든 정예병, 동부 기사들도 섞였다.
그들의 앞에 선 건 슬슬 제국 전체에 명성을 떨쳐 가는 적기사 텐티아였다.
“내가 언제 이런 무대에 설 수 있겠나? 언제 이런 영광을 받을 수 있겠나? 죽음이 기다린다 한들, 경이라면 도망칠 수 있겠나?”
텐티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지는 못하겠지.”
오운굴라가 항구 전체가 울리도록 울부짖었다.
“나 역시 그러하다네, 기사여!”
텐티아는 면갑 아래서 들척지근하게 웃으며 읊조렸다.
“……도적 두목 주제에. 하지만 나쁘지 않군.”
다음 순간 둘은 마지막 돌격을 준비했다.
한 번씩 주고받았으면 탐색전으로는 충분했다.
오운굴라는 삼지창을 앞으로 겨누었다.
‘힘은 확실히 내가 위다. 창으로 놈의 장검을 걷어내고, 갈고리로 단숨에 목을 친다.’
텐티아는 화한을 어깨 위로 쳐들었다.
‘만하를 써서 마나 블레스트만 날려도 이길 수는 있겠지. 그렇게 이겨야 할 만큼 절박하지는 않아. 단숨에 목을 쳐주마. 불운한 괴물아.’
타악!
텐티아가 땅을 접는 듯 쏘아져 나갔다.
붉은색 잔상이 마치 유성의 꼬리처럼 그녀 뒤로 길게 남았다.
오운굴라가 그 유성을 부수려는 듯 창을 찔러 들었다.
사악!
캉!
삼지창 창날 사이에 화한이 부딪친 순간, 오운굴라는 손목을 틀며 화한을 떨어트리려 했다.
“흡!”
무기를 빼앗고, 갈고리로 목을 찍는다.
그를 지금까지 살려준 최고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텐티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화한을 놓아버렸다.
“뭣!”
오운굴라가 당황하며 눈을 부릅뜨고, 적기사가 투구 리본을 휘날리며 늑대처럼 도약했다.
타악!
비늘 거인은 갈고리를 치켜들었지만, 적기사가 왼손으로 한손검 만하를 뽑는 게 더 빨랐다.
스르르릉!
뼈인지 금속인지 모를 광택이 흐르는 검이 뽑혀 나오고.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덧씌워지고.
츠카아아악-!
붉은 반원을 그렸다.
“후우.”
적기사가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늘 거인의 거구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들은 직후, 다시금 한쪽 주먹을 하늘로 쳐들었다.
척!
“우와아아!”
“적기사! 적기사! 적기사!”
“가자! 이제 우리 차례다!”
“적기사 나리가 해적 두목을 잡았다.”
“진격! 진격! 진격!”
동부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성벽 무너진 오른쪽 끝으로 달려갔다.
* * *
카리오사는 텐티아와 오운굴라를 힐끔거리는 걸 멈추고, 다시 성벽 왼쪽 끝 성문 공략에 집중했다.
“그래. 발렌시아누스가 좋은 기사를 뒀네. 그때 내 앞을 막아선 패기가 오만이 아니었어.”
그녀 주변에는 제독급 해적 네 명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모두 소드 엑스퍼트였던 자들이었다.
“으윽!”
“카, 카리오사.”
“살려주십시오. 충성을…….”
카리오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들이 고통스럽게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 소리는 내 바다에서 내 사람들을 물어뜯기 전에 했어야지.”
“제발!”
“더 울어 봐. 너희의 진심을 들려달라고. 얼마나 살고 싶은지 말해줘.”
정말로 죽음이 다가왔다는 걸 느낀 해적들이 비명을 토했다.
“안 돼! 안 돼!”
“나는 못 죽는다! 나, 나만은!”
“이 빌어먹을 괴물 새끼가!”
“죽어서도 널 저주할 거다!”
평생을 죽이고 빼앗으며 살아온 자들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그 난폭한 가면을 벗어던졌다.
카리오사는 비릿하게 웃으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난 그걸 비웃는 게 좋거든. 이 바다 쓰레기들아.”
그녀는 죽음 앞에서 삶을 경멸하는 것으로 진심으로 그들을 멸시했다.
“아. 좋은 날이야.”
텐티아는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 봐 카리오사를 바라보았다.
‘그럴 필요 없겠군.’
그녀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고, 동부 병사들을 따라 무너진 성벽 쪽으로 향했다.
지익, 지이익!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는 듯하기도 했지만.
챙, 챙!
“아아아악!”
전장의 소음에 묻혀버렸다.
화르르륵!
그때 등 뒤에서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텐티아는 화들짝 놀라며 뒤돌았고, 오운굴라가 그녀 뒤로 기어 오고 있던 걸 알아챘다.
“……아.”
“경. 조심하게. 비늘 달린 놈들은 생명력이 강하거든. 나처럼.”
발렌시아누스가 오른쪽 바위산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먹구름 아래,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하얀 제복이 인상적이었다.
텐티아는 그를 보며 약간은 어색하기까지 한 기분을 느꼈다.
“발렌 전하. 무사하셨군요.”
“그래. 경. 경도 무사해 다행이군.”
“그놈은 뭡니까?”
발렌시아누스는 어깨에 후드 쓴 사내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사지의 관절이 다 빠진 듯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엘프이자 두목급 해적, 아린스였다.
발렌시아누스가 동부 병사 하나에게 그 해적을 넘겼다.
“잘 부축하고. 날 따라오게.”
“예, 예? 하지만 포로를 잡지 말라는 명령이…….”
“어허. 시키는 대로 하도록.”
병사는 끝내 권위에 굴복했고, 텐티아는 옅은 웃음을 토했으며, 발렌시아누스는 무너진 성벽을 가리켰다.
“자. 경. 가볼까?”
* * *
나는 텐티아 경을 대동하고 성벽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툭, 투두둑!
하늘에는 먹구름이 자욱했고, 실제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지만, 폭우가 내리지는 않았다.
싸움이 정리된 후에 몰아서 퍼부으려는 듯했다.
어쩌면 화염술사인 나를 은근히 배려해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성벽 안쪽은 이미 살육의 도가니였다.
사악!
푸푸푹!
츠카가각!
“다 죽여라!”
“물어 뜯어라!”
“가서 조져라!”
동부 병사들이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눈을 번들거리며 해적들을 쓰러트렸다.
이미 삼중 성벽은 반 이상 우리에게 넘어왔고, 남은 반도 카리오사가 곧 무너트릴 듯했다.
세 번째 성벽까지 들어가니, 성벽 너머로 꽤 번화한 마을이 보였다.
곱슬기 있는 긴 붉은 머리에 건강한 갈색 피부를 가진 여인이 성벽 위에 서서 해적들을 지휘했다.
“이 뒤로 우리 가족들이 있다! 카리오사는 그들까지 다 죽일 거다. 싸워라! 해적질을 그만두기 위한 싸움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성벽 아래까지 울렸다.
해적들이 무너진 성벽 잔해 위에 서서 검을 휘둘렀다.
선장급이나 제독급도 여럿 끼어 있어서, 동부 병사들만으로는 뚫기 힘들어하는 듯했다.
“도망쳐!”
“백상아리의 군대가 왔다!”
“우리를 다 죽일 거야!”
성벽 뒤 보이는 마을에서는 한참 피난이 이뤄지고 있었다.
여자, 부상자, 어린아이…… 동방 언어가 간간히 들리는 걸 빼면, 어느 피난민 무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확실히 해적 무리보다는 사략 함대와 그 가족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텐티아 경이 갑옷을 절그럭거렸다.
“…….”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성벽 위 선 갈색 피부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절박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아. 나쁜 놈 된 기분이네.”
화르르륵!
난 불의 창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언제는 안 그랬나!”
그리고 성벽 위 여인을 향해 날렸다.
쐐애애액!
소름끼치는 파공성을 들으며 생각했다.
닻 군도 이주 사업은 황실에도 꼭 필요하다.
카리오사의 세력이 왕성해져야 동방 왕국들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방 왕국들이 바다 너머에 욕심을 부릴 때면, 언제나 동부 해안이 불탔다.
등 뒤의 적은 침식자로 족하다.
그리고 저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빼앗아 간 밀을 먹고, 우리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며 살아온 악질들이다.
불의 창이 하늘을 날았다.
나는 성벽 위 여인과 해적 친위대가 죄다 잿가루가 되리라 생각했다.
쾅!
그때 녹색 마나 블레이드가 불의 창을 가로막았다.
제독급이 한 명 더 나왔다.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동부 병사들 사이로 나섰다.
“그래. 내 일이 이렇게 잘 풀릴 리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