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텐예는 머리카락을 뒷머리만 남기고 민 뒤, 길게 땋아 내린 독특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 머리는 변발이라 불렸고, 동방 대륙 초원 유목 민족들의 상징이었다.
그는 검이 아니라 몸으로 마나를 다루는 권법가였고, 해적 제독들 사이에서 몇 안 되는 인격자였다.
아퀼라의 애인 페이진이 그 진의를 의심할 정도였다.
어느 저녁, 두 제독은 저택 복도를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텐예. 너는 왜 아퀼라 님을 따르지?’
‘무엇이 궁금한 것이오?’
‘나나 오운굴라는 원래 해적이었고, 타르티는 몰락해서 일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난 동방 귀족이지. 그런데 너는 왜 이 섬까지 온 거야?’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소이까?’
‘이상하잖아? 딱히 살인이나 약탈을 즐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싸우러 나가면 제일 열심히 싸우고. 그런 주제에 여자도 남첩도 재물도 다 거절하고.’
텐예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재물은 거절한 게 아니라 달아둔 것이오. 나중에 왕께서 논공행상할 때 땅으로 받을 수 있도록.’
‘땅?’
‘소인도 따지자면 타르티 공과 같은 과요. 부족이 추방당했으니, 새로이 살 곳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그럼 여자나 남자는? 혹시 터부나 규율 같은 거야? 내가 알기로 유목민족들은 그런 거 안 가린다고 했는데?’
이번 머뭇거림은 조금 더 길었다.
‘……마음에 정해 둔 정인이 있는데 육욕에 빠질 수는 없소.’
페이진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도발적인 자세로 놀리듯 물었다.
‘정인?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이라도 있어? 문제네. 그거 우리는 죽음의 복선이라고 한다? 그런 소리 하는 놈은 다 죽는다고.’
텐예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서 문제요.’
‘오오! 여기서 만난 거야? 누구야 누구?’
페이진은 흥분해 물었고, 텐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녀도 참으로 잔인하시오.’
페이진은 눈치가 빨랐다.
그녀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난 우리 전하 좋아해.’
텐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넌 영원히 짝사랑만 하게 될 거야.’
‘그것도 알고 있소.’
‘남자는 그런 사랑 싫어하잖아? 너 좋다는 여자 많아.’
‘누구나 그런 사랑 싫어하오. 그리고 싫다고 그만둘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이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거요. 마음 역시 정리하도록 노력하겠소. 난 대전사고. 왕께 누구보다 잘 보여야 하니 말이오.’
* * *
쐐애애액!
불의 창이 성벽 위로 날아오는 걸 본 순간, 텐예는 땅을 박차며 주먹을 내질렀다.
“하!”
녹색 마나 블레이드가 어깨에서부터 타오르듯 일어났고, 넓은 끈이 한 점으로 모이듯 주먹에 어렸으며, 그 주먹이 한 바퀴 돌며 쏘아져 나갔다.
방각(防却).
반투명한 녹색 마나 블레이드가 반원형 역장을 그리며 펼쳐졌다.
쾅!
불의 창과 충돌한 역장은 크게 흔들렸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되려 불길을 성벽 아래쪽으로 밀어내며 그 굳건함을 과시했다.
눈을 질끈 감았던 페이진은 작열통이 느껴지지 않자 당황했고, 곧이어 한 사내의 넓은 등을 보았다.
“텐예?”
휘몰아치는 먹구름 아래, 동부의 상어 떼와 하얀 제복을 입은 초인이 숨통을 조여오는 가운데, 무복 입은 사내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가시오. 페이진. 곧 요새 문이 닫힐 것이오.”
“!”
“쪽빛 사제를 비롯한 제독들이 남아있으니 농성은 할 수 있을 것이오. 카리오사는 땅을 차지하는 게 목적이니, 그 앞을 무한정 포위하고 있지는 않겠지. 며칠 버티다 보면 생존 정도는 협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페이진은 그럼 넌? 이라고 묻지 않았다.
텐예의 목소리에서는 일족을 위해 고향을 떠나온 전사의 기백과 정인 앞에서 당당히 서고자 하는 인간의 기백이 동시에 느껴졌다.
“……내가 여기서 키스해주면-.”
“최악의 사망 복선일 것이오. 그러니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가시오. 여기는 내가 맡겠소. 돌아오면 뭘 주겠느니, 그런 말도 하지 마시오.”
페이진은 해적답게 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문화에 완전히 적응했네.”
텐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나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내가 알아서 돌아가 쟁취하겠소.”
쐐애애액!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불의 창이 날아들었다.
텐예는 다시금 방각을 펼치며 막아냈고, 페이진은 친위대 몇몇을 이끌고 요새를 향해 달렸다.
“페이진 님이 후퇴한다!”
“틀렸어!”
“이제 끝이다!”
해적 중에서 이탈자가 나오려던 찰나, 텐예는 하늘을 우러러 소리쳤다.
“텡그리시여!”
‘여기서 막아야 한다.’
발렌시아누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인간 같지 않은 기이한 분위기를 두른 저 미남자가 더 이상 다가오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대의 분노를 내게 주소서!”
그가 모시는 신이자, 동방 초원 전사들에게 섬김받는 옛것이 전사의 부름에 답했다.
우우우웅!
초원 대전사의 온몸 핏줄이 녹색으로 달아올랐다.
마치 온몸에 가시덩굴 문신을 한 것 같았다.
눈 역시 광기 어린 녹색으로 물들었다.
우득, 우드득!
안 그래도 장신이던 체구가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발을 구를 때마다 금 간 성벽이 흔들릴 정도였다.
텐티아는 그 모습을 보며 한탄했다.
“오운굴라도 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놈은 어찌어찌 인간을 상대하는 기분으로 잡을 수 있었지만, 저건 확실히 마수 급입니다.”
발렌시아누스 역시 나지막이 혀를 찼다.
“오거보다 크군. 자기 통제가 가능한 완전 변이 침식자 급이야. 이교의 신이나 옛것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걸 고려하면…… 그때 랑소와에서 싸웠던 침식자 사제와 기사를 합쳐둔 수준이겠지.”
타앙!
텐예가 성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콰르르륵!
끝내 반동을 이기지 못한 성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마어마한 거구에도 불구하고, 잔상이 남을 정도의 속도였다.
텐예가 무너진 성벽을 밟으며 달려 내려왔다.
“우워어어!”
그 기세에 눌린 동부 병사 몇몇이 한두 걸음 물러났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자리에서 동공을 세로로 바꿔 뜨며 중얼거렸다.
“불타버려라. 야만 전사야.”
화르르륵!
최상급 화염 술사이자 용찬자의 의지가 마나를 사역했다.
바닥에서 일어난 불길이 텐예의 키보다 커지고, 마치 파도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물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닿는 순간 피부 안쪽으로 파고들어 지방층을 녹일 지옥의 불길이었다.
그러나 텐예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의 주먹이 다시 한번 회전하며 쏘아져 나갔다.
방각.
콰아앙!
반투명한 녹색 역장이 ‘화염 파도’를 가로막았다.
붉은 불길이 흩날리고, 그 사이를 헤치며 초원의 전사가 달려 나왔다.
그가 단단히 말아 쥔 왼손 주먹을 허공에 내질렀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핏줄이 녹색으로 달아올랐다.
주먹이 내질러지는 속도와 핏줄이 달아오르는 속도는 완전히 일치했다.
텐예가 허공에 주먹을 뻗는 순간, 녹색 빛은 주먹 앞에 어려 있었고.
콰아아아!
반투명하고도 거대한 주먹의 형태를 그리며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탄권(彈拳).
8층 석조 건물보다 큰 거인이 주먹을 날린 듯했고, 파괴술 고위 주문 ‘분노의 손’을 녹색광으로 구현한 듯했다.
텐티아는 기겁하며 만하를 뽑아 들고 발렌시아누스 앞을 막아섰다.
‘마나 블레스트?’
“전하!”
우우우웅!
용골 검에 순식간에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어렸고, 텐티아는 반투명한 주먹을 정면으로 베어냈다.
쾅!
반투명한 주먹과 검이 충돌하고, 적기사가 마차에 들이받힌 듯 비틀거렸다.
콰콰콰콰!
게다가 녹색 기운은 한 번 부서진 채로도 쏘아져 나갔고, 발렌시아누스와 텐티아 뒤로 서 있던 동부 병사들을 쓰러트렸다.
“크으윽!”
“쿨럭!”
“젠장!”
병사들이 뼛속까지 파고든 충격에 신음을 토했다.
기술을 쓰느라 잠시 멈춰 있던 텐예가 다시금 성벽을 달려 내려왔다.
쿵! 쿵! 쿵! 쿵!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을 울리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용! 혈! 황! 족!”
발렌시아누스는 이를 악물며 불길을 피워 올렸다.
다시금 그의 앞으로 화염 파도가 일어났다.
화르르륵!
“대공 전하라 불러라! 이 천것아!”
살아 있는 것이라면 뭐든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불길이었다.
그러나 텐예는 미끄러지듯 땅을 박차 불길의 범위에서 벗어났고, 탄권을 날려 발렌시아누스를 공격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왼손 위로 지옥 같은 열기를 끌어모았지만, 뒤에서 신음하는 병사들을 보고 침음성을 흘리며 흩어버렸다.
“미치겠네.”
* * *
솔직히 말해 죽을 맛이었다.
마나가 부족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놈은 어중간한 불길은 제 기술로 흩어버렸고, 불의 창은 잘도 피했다.
“으하하하!”
성벽 위아래를 가볍게 오가며 맹공을 퍼부었고, 내가 거리를 벌리려 하면 순식간에 달려왔다.
카리오사는 성벽 오른쪽에 몰려 있던 해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발리스타 예비 부품을 모아 왔다!”
“용병 마법사들 준비 끝났어. 언젠가 꺼진다 한들, 마지막 불꽃을 태워 보자고!”
“선장급 49인 돌격 예정! 저 상어 놈에게 한 방 먹여 주자!”
망치와 모루 전략에 대입해 보자면, 사실상 내가 망치고 그녀가 모루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녀가 버텨 주는 동안 내가 이 안쪽을 청소하고 그녀를 상대하면 해적들을 앞뒤로 포위해야 하는데, 내가 그녀가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펑!
“히히히히…….”
막 내가 보냈던 여섯 정령 중 마지막 정령이, 녹색 기운 어린 주먹에 얻어맞고 터져 나갔다.
저 텡그리라는 옛것이 어떤 옛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바람 정령과 마나, 영혼과 육신 모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만능 옛것이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치유력까지 있는지, 놈이 가까이 붙었을 때 텐티아 경이 입힌 몇 안 되는 상처도 거의 나아가고 있었다.
광명신만큼은 아니지만, 숭배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상황이 안 좋을수록 잡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
물론 난 저런 잽싼 놈을 잡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바싹 붙어서 난투로 몰고 가거나, 아니면 강력한 광역 기술로 구워버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둘 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놈은 이미 난투가 통할 덩치를 넘어섰고, 광역 기술을 쓰기에는 주변에 부상자가 너무 많았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놈이 막아내지 못할 만큼 강력하고도,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는 정확한 기술로 단번에 구워버려야 했다.
“그런 게 쉬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콰콰콰콰! 콰콰콰콰! 콰콰콰콰!
반투명하고 거대한 녹색 주먹들이 바람을 품고 날아왔다.
동부 병사들은 무너진 성벽을 오르고, 해적들을 해치우고, 텐예의 기술을 피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텐티아 경 역시 저 기술을 베어내며 조금이라도 흩는 게 전부였다.
“발렌 전하! 뭐라도 해 보십시오!”
“차라리 이쪽에 합류해 주십시오! 길을 뚫어 주시면 저희가 안쪽에 들어가며 마을 사람들은 인질로 잡겠습니다!”
“몇 놈 목을 치면 저놈도 멈칫할 겁니다!”
텐티아 경과 동부 병사들이 나를 불렀다.
텐티아 경이 동부 병사들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저, 전하?”
동부 병사들은 나와 아주 말이 잘 통할 듯했다.
하지만 이미 마을은 텅 빈 지 오래일 거다.
물론 추격이야 가능하겠지만, 그게 적어도 당장 저놈을 멈춰 세울 방법은 아닐 거다.
……저놈도 그걸 알까?
나는 놈이 그랬듯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자랑스러운 동부의 병사들아! 해적 소굴에 있는 자들을 모두 죽여라!”
그리고 불의 정령 몇 마리를 불러내 성벽 무너진 곳으로 보냈다.
해적과 병사들 간 전력 차이는 명백하고, 텐티아 경까지 합류했으니 곧 뚫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저 악 바친 상어 떼는 마을을 불태우고 해적 가족들을 죄다 쓰러트리겠지.
저놈도 우리가 그러리라고 생각하겠지.
“!”
놈이 녹색 안광을 번뜩이며 달려왔다.
“망나니란 소문이 진실이었군!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그럴 수가 있소!”
쿵! 쿵! 쿵! 쿵!
땅이 흔들리고, 양 주먹에 녹색 마나가 번뜩였다.
나는 저 멀리 솟은 석조 요새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까 놈이 구한 여자도 그곳으로 갔겠지.
“그리고 저 요새를 불태우고, 안에 든 모든 사람을 광산 노예로 삼겠다! 죽을 때까지 일하다, 일하지 못하면 죽게 해주마!”
“!”
놈이 날 부수어 버리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쳐들었다.
난 비릿하게 웃으며 왼손에 아즈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결국 이것뿐이다.
시이이잉!
찰칵, 찰칵, 찰칵, 찰칵!
팔뚝 안쪽이 이질적인 물질로 변이하는 경쾌하면서도 기이한 감각이 내달렸다.
역시 정인이었나 보다.
그것도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정인.
텐티아 경에게 말했었다.
그것은 원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고, 원하지 않는다고 찾아오지 않는 게 아니며, 그것이 머물고 있을 때는 그것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듯하다고.
“나도 마찬가지겠지.”
놈의 거구가 내 앞에 선 순간, 난 공명의 불길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