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발렌시아누스의 왼손이 깨진 도자기처럼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작은 붉은색 수정 결정이 돋아났다.
우우우웅!
손바닥 안에 붉은 열기가 모여들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 이글거렸다.
텐예가 발렌시아누스를 땅속에 파묻어버릴 기세로 양 주먹을 쳐들었다.
“같이 가자!”
가볍게 내리치기만 해도 소년 대공의 육신을 고기 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듯했다.
후우우욱!
녹색의 마나 블레이드가 타오르는 주먹이 대공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진 순간.
지이이잉-!
발렌시아누스의 왼손 손바닥에서 열선이 뿜어져 나갔다.
그는 텐예를 껴안을 듯 바짝 붙었고, 오른손 손바닥으로 턱을 쳐올리는 동시에, 왼손을 텐예의 심장 앞에 가져다 댔다.
화악-!
옛것의 힘으로 변이한 두 육체 사이에 막대한 열기가 어렸다.
발렌시아누스의 손바닥과 텐예의 몸 사이에서 태양 같은 불길이 타올랐다.
텐예의 육신 역시 어지간한 불길로는 그을리지도 않을 만큼 강건했으나 불꽃 그 자체나 다름없는 발렌시아누스보다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쩍, 쩌저적!
발렌시아누스의 손바닥이 한없이 달아오르고, 텐예의 몸에 굵은 금이 내달렸다.
먹구름이 몰려들어 밤처럼 캄캄해진 하늘 아래, 한 줄기 열선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지이이잉-!
“쿨럭!”
초원에서 온 거인이 피를 토하며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아.”
발렌시아누스 역시 오른팔을 축 늘어트리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즈의 파편이 왼팔 안에서 미친 듯 공명하며 울어댔다.
“후우.”
그 결과로 텐예의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쿵, 쿵!
녹색으로 달아올라 맥동하는 심장이 훤히 내보였다.
광전사의 온몸을 내달리던 마나 블레이드가 빠르게 흩어졌고, 거인에 필적하던 체급 역시 말린 귤처럼 쪼그라들었다.
치이이이!
기계 기사가 내뿜는 증기 같은 열기가 그의 등 뒤에서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광전사의 안광은 꺼져들 줄 몰랐다.
“으흐으.”
텐예가 왼손을 찍어눌렀고, 발렌시아누스는 오른손을 들어서 막았다.
용의 비늘을 두르기도 전에 으지직,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소년 대공의 손아귀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세상 XX!”
발렌시아누스는 육두문자를 퍼부으며 텐예의 심장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이질적인 힘을 불태워 그 힘을 흡수하는 정화의 불길이었다.
녹색 심장 위로 새빨간 불길이 혀를 날름거렸다.
“안, 돼!”
텐예가 다시 피를 토하며 왼손을 휘둘렀다.
쾅!
발렌시아누스가 걷어차인 돌멩이처럼 날아가 성벽에 부딪혔다.
성벽 돌이 와르르 떨어져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고, 선혈이 흘려 백발을 적셨으며, 광전사가 지축을 울리며 달려왔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노란 눈을 부릅뜨며 불길을 더더욱 피워 올렸다.
‘여기서 잡는다.’
그는 일어날 생각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불꽃에만 집중했다.
화르르륵!
텐예의 심장에서 불길이 터져 나왔다.
열기가 온몸을 자글자글 태우고, 대전사의 손아귀가 망나니 대공의 머리와 점점 가까워졌으며, 녹색 심장이 조금씩 붉은색으로 달아올랐다.
마침내 텐예의 흉악한 손아귀가 발렌시아누스 바로 앞에 다다랐다.
먹구름 낀 하늘 아래, 돌 더미에 파묻힌 백발의 황족과 고귀한 야만인이 멋들어진 대비를 이루었다.
그 순간.
“내가 이겼다. 이 괴물아.”
발렌시아누스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텐예의 녹색 심장이 완전히 붉은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광전사의 몸에 깃든 옛것의 힘이 완전히 불탔고, 그의 색으로 물들었음을 의미했다.
어느새 텐예의 덩치는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망나니 대공이 왼손을 뻗어 텐예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광전사가 품고 있던 옛것의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파란 정맥이 생명의 기운에 환희했고, 성자에게 축복받은 듯한 생동감이 혈관 속을 내달렸으며, 그는 씩 웃어 보였다.
‘역시.’
몸속에서 아즈의 파편이 고요해지는 게 느껴졌다.
펄펄 끓는 물에 찬물 한 잔을 부은 듯했다.
보다 인간에게 친숙한 옛것의 힘이 용, 정령, 이물, 다른 별에서 온 존재로부터 기이한 이질적인 힘을 한결 중화시켰다.
그 순간 기묘한 환상이 그의 눈앞에 일렁였다.
* * *
나는 난데없이 초원에 서 있었다.
파란 하늘에는 매가 날고 있었고, 주변에는 이국적인 옷차림을 한 사내와 여인들이 서 있었으며, 그 사이에서 나는 말을 타고 웃고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듯 풍경이 일변했다.
두 부족이 전쟁을 벌여 우리 부족의 천막들이 불탔다.
복수를 행했지만, 동방 왕국의 관리는 내 부족에 약탈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우리는 추방령을 받았으며, 나는 해적 섬으로 왔다.
그곳에서 대전사가 해서는 안 될 해적질을 했고,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했으며, 막아서서는 안 될 괴물을 막아섰다.
잠시 주변에 어두워지고, 나는 다시 발렌시아누스 대공으로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낮고 품격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소.”
“하지만 최선의 노력이 최고의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지.”
“운명과 타협한 것이 잘못이었소?”
“아니면 진작 타협하지 않은 게 잘못이었소?”
사아아아-.
“아.”
녹색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다시 성벽 아래에 서 있었다.
텐티아 경이 막 성벽 위로 올라가는 데 성공한 순간이었다.
“텐티아 경 만세!”
“나팔을 불어라! 삼중 성벽을 점령했다.”
“아세노르타 가문의 깃발을 올려라!”
“기사님들께 공작, 아니. 국왕 전하를 지원하라 전해야 한다! 전령을 보내!”
동부 병사들이 만세를 부르며 해적 잔당들을 도륙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을 털어냈고, 텐예를 바라보았다.
“아.”
그는 수십 년 전에 죽은 사람처럼 완전히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중얼거렸다.
“북부 대공 세베릭에게 동방 대륙 이주민 한 무리를 받아줄 수 있냐고 묻겠다.”
그 같은 전사가 한둘만 복무하더라도 장원 몇 개 정도는 쉽게 받을 수 있을 거다.
“넌 제국을 위해 싸울 수도 있었다. 그 재주가 아깝구나. 바다를 한 번만 더 건너왔다면…… 카리오사를 섬겼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 해적 무리는 싹 다 토벌해야겠다.
나는 무너진 성벽 잔해를 밟고 성벽을 넘어갔다.
텐티아 경이 동부 병사들 사이에서 나와 내 뒤로 붙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녀가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할지 아네. 하지만 경 덕에 병사들이 성벽을 넘을 수 있었지. 저 전사와 성벽 위에서 쇠뇌를 쏴대는 해적들을 동시에 상대하다가는 진짜로 심란했을 거야. 날 잘 도와주었네.”
동부 병사들은 성벽 꼭대기에 깃발을 다는 데 열중하고 있어서, 난 텐티아 경만 대동하고 그 뒤쪽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항구 뒤로 부두와 삼중 성벽이 있었고, 그 뒤로는 꽤 번화한 도시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로에는 판석으로 포장도 하려던 듯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오른쪽으로는 다른 마을로 향할 듯한 길이 보였는데, 마차 바퀴 자국이 선명했다.
도시 왼쪽으로는 커다란 바위산 하나가 솟아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감도 오지 않는 바위 요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돌로 쌓아 만든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피니 산 안을 파서 만든 듯했다.
“세상.”
마법을 퍼부어 완전히 무너트리는 식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사실상 공략이 불가능할 듯했다.
내가 불로 달구고 카리오사가 물로 식히다 보면 깨지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도시 골목 사이에서 인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텐티아 경이 화한을 쳐들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냐!”
그녀가 골목으로 달려들어갔고, 3초도 되지 않아 사내 하나가 질질 끌려 나왔다.
텐티아 경이 놈을 내 앞에 무릎 꿇렸고, 놈은 내게 양손을 싹싹 비볐다.
“사, 살려만 주십시오!”
놈은 외눈이었고, 동방 대륙인이었으며, 왠지 모르게 타르티가 떠오르는 붉은 삿갓을 쓰고 있었고, 장도를 찼다.
느껴지는 기세를 보아하니 꽤 괜찮은 검객 같았다.
나는 혹시, 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타르티를 아나?”
그 순간 사내의 눈동자에 오만 가지 감정이 스쳤다.
‘그런 개자식 모릅니다.’와 ‘예! 제 주군입니다!’ 사이에서 뭐라고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예! 제 주군입니다!”
놈이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정답이다, 자식아.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단둘이 마주칠 기회가 올 줄 몰랐다.
“너희 애들만 모여 사는 마을 있지?”
“예. 나리! 있습니다.”
“가서 전해라. 도망칠 생각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그럼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살려준다고. 땅도 주겠다고 말해.”
“예, 예?”
놈이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바다에 전함들이 쫙 깔렸다. 어디로 도망치든 죽을 거야.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문 열고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놈은 한쪽 남은 눈을 한두 번 깜빡였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앞에서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나리.”
그리고 오른쪽 길을 따라 미친 듯 달려갔다.
텐티아 경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했다.
“타르티 혼자 살려 둔다고 함대가 굴러가는 건 아니니까.”
“전하.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
* * *
쏴아아아!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삼중 성벽 내리막길을 따라 핏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그리고 카리오사는 끝내 정면으로 모든 적을 갈아버리며 올라왔다.
삼중 성벽 안에 있던 모든 해적이 죽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녀의 물색 머리카락은 붉게 젖어 있었고, 그녀는 그게 그녀의 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환하게 웃었다.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간 입술 사이로 뾰족한 이빨이 하얗게 빛났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올 때마다 철편 갑옷 철편들이 부딪치며 경쾌한 찰그락 소리를 냈고, 가오리 가죽 코트 위로 빗방울이 미끄러졌다.
“카리오사 공작. 미안하군. 내가 성벽을 더 많이 부쉈어야 하는데.”
나는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졸전 탓에 부상자들이 나왔다.’ 같은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포석을 깔았고.
“아니. 됐어. 상태가 별로 안 좋다는 소식을 로렐라이에게 들었는데, 무리를 시킬 수는 없지. 원래는 전함에서 노포를 쏴 부수거나 내가 직접 마법을 쓰려고 했는데, 덕분에 깔끔하게 끝났어.”
카리오사는 기꺼이 받아주었다.
적잖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모일 사람들은 다 모였나?”
카리오사가 주변을 슥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 기사들은 닻 군도 날개 섬에 여기저기 흩어진 해적들을 도륙하고 막 모였고, 전투마법사들은 방패 병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요새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야 제대로 된 식사 시작이지. 지금까지는 에피타이저였다고.”
마치 바닷가재 껍질을 부수고 살을 빼먹을 생각으로 기대에 찬 미식가 같았다.
그녀가 도시 쪽을 한 번 바라본 뒤, 흐음 하고 중얼거렸다.
“혹시 한두 척이 내 포위망을 뚫고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완벽한 포위망 같은 건 불가능하니까.”
“그럼 요새는 포위만 해 놓고, 이 섬 여기저기 있을 촌락, 도시, 마을을 불태우는 게 먼저 아닐까?”
나는 그 빼어난 전략적 판단에 혀를 내두르며 경악했다.
“아주 훌륭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기다릴 수 있겠나? 만약 저놈들이 전부 자결해버리면? 아니면 포위에 지쳐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버리면? 아직 놈들의 희망과 전의가 남아있을 때 요새를 뚫고 들어가 개처럼 끌어낸 다음, 쇠사슬에 묶어 바다에 던져야 하지 않겠나? 살고 싶다 애원하는 자칭 해적왕을 조롱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한 명을 하루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회귀했다 한들 동부 사정은 카리오사가 더 잘 알 거다.
이 섬에 있는 사람은, 최소한 이 도시에서 도망치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해적과 그 가족들이겠지.
해적들이 해적질할 이유를 제공한 주제에, 우리는 사람을 죽인 적 없다고 위선을 떠는 것이 역겨워 보일 수는 있었다.
나 역시 악의보다 선의로 사고를 치는 사람들을 더 원망한다.
하지만 정말로 새 인생을 시작하려고 온 사람이 있고, 운 좋게도 이 섬의 농토가 동부 농노들이 이주해 오고도 남을 만큼 넓다면, 살려줄 수 있어야 했다.
다행히도 카리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공 말이 맞아. 역시 황족답게 잘 배웠군. 저걸 기다릴 수는 없지. 게 요리는 따듯할 때 먹어야 안 비리다고.”
……잘 배웠긴 뭘 잘 배워?
그러나 나는 굳이 뱀 그림에 발을 그려 넣는 듯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요새를 향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저걸 어떻게 뚫냐?”
가까이서 본 바위산 요새는 더더욱 견고했다.
계단 굴은 좁았고, 그나마도 완전히 막혀 있었으며, 군데군데 벽돌로 보강한 곳도 아주 튼튼해 보였다.
카리오사가 전투마법사들을 불러 하루 4교대로 주문을 퍼부을 표를 짜기 시작했다.
그때 난 내 포로가 떠올랐다.
“아까 그놈. 아직 안 죽였겠지?”
텐티아 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 동부 병사가 로브 뒤집어쓴 아린스를 잘 부축하고 있었다.
아린스는 정신을 차렸는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수고비로 금화를 몇 닢 쥐여준 뒤, 아린스를 챙겨 카리오사 앞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발렌시아누스. 내가 포로는 없다고-.”
“제독급이다. 비밀통로 같은 걸 알 가능성이 있어.”
엘프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다행히도 카리오사는 그럭저럭 납득해주었고, 아린스는 살고 싶은 마음이 옛 왕에 대한 충성심보다 강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린스의 턱을 맞췄고, 놈은 기다렸다는 듯 내뱉었다.
“예.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제가 똑똑히 알고 있고말고요!”
* * *
“여길 들어가라고?”
“발렌시아누스.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은 고통스럽게 죽여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