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해적들의 바위 요새는 도시 왼쪽에 솟은 바위산 속에 있었다.
아린스는 우리를 그 바위산 아래의 바닷가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사지를 다 뽑아 놨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스스로 맞췄는지, 자기 발로 잘도 걸었다.
항구를 빙 두른 방파제를 넘어가자마자 주변 분위기가 일변했다.
따개비 덮인 기괴한 바위, 파도에 밀려온 거대한 해초, 난파선의 잔해가 그득했다.
쏴아아아.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비를 뿌리고, 밀물이 시작되어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니, 꼭 어인족이나 바다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비늘 달린 놈들 냄새가 나는데.”
카리오사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놈의 등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같은 표정일 듯했다.
바닷가는 모래 해변이 아니라 거대하고 넓적한 바위로 이뤄져 있었는데, 중간에 바위가 크게 갈라진 틈이 있었다.
그 사이로 파도가 들이닥칠 때마다 물보라가 3층 높이만큼 치솟았다.
촤아아아!
물은 소름 끼칠 만큼 검푸른색이었고, 들이닥치는 파도와 밀려 나오는 파도가 부딪치며 조각배 하나둘 정도는 당장이라도 삼켜 버릴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아린스가 당당하게 그 아래를 가르쳤다.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카리오사가 마법검 폭풍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죽여 버리겠다.”
아린스가 양손을 들며 따개비 가득한 바위에 머리를 조아렸다.
“진짜입니다, 진짜입니다! 전 이쪽으로 나와 본 적도 있다고요!”
나는 소용돌이를 한 번 더 본 다음, 아린스에게 물었다.
“어디랑 어떻게 이어져 있는 건데? 아니. 넌 여기가 비밀통로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놈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요새에 지하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는 지하 감옥으로 쓰는 것도 있습니다. 제가 감옥 쪽을 관리할 때, 무너진 벽 사이로 바다 쪽으로 난 동굴을 보았습니다. 그 동굴을 따라 걷다 보니 물이 나왔고, 그 물속으로 잠수해 보니 이곳이었습니다.”
목소리에서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카리오사가 긴가민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믿어주시는 겁니까?”
“대신 네가 앞장서.”
아린스가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카리오사가 그녀를 따라온 동부 기사 몇몇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 넷은 나랑 같이 간다. 넌 돌아가서 쥴에게 포위망을 잘 유지하고 있으라 전해. 놈들이 돌파를 시도하면 전투마법사들에게 일제사격을 지시해라.”
나 역시 텐티아 경을 바라보았다.
“경. 도시 쪽을 맡고 있게.”
텐티아 경이 면갑을 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전하. 전 전하의 호위 기사입니다.”
“나도 여기 있고, 카리오사도 여기 있지. 전력은 충분하네. 동부 기사들은 강하지만, 제독급 해적들이 단숨에 일 점 돌파를 시도하면 포위망이 뚫릴지도 모르고. 그럼 얼마나 넓은지,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도 모르는 이 섬에서 숨바꼭질을 시작해야 하지.”
텐티아 경이 약간 흔들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타르티의 전언과 엇나가는 부분이 있어. 놈은 도시 쪽에 따개비에 먹혀 가는 죄수가 바글거린다고 했네. 그런데 그런 놈들은 못 보지 않았나? 언제 뭐가 나올지 몰라.”
나는 못을 박듯 말했다.
“이 섬에서는 죄악과 부정의 악취가 풍겨. 기사 중의 기사인 경이 아니라면 누굴 믿고 다녀올 수 있겠나? 경이 이 섬에 있는 기사 중 제일 아닌가?”
카리오사와 동부 기사들이 한마디 하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텐티아 경은 동부 기사들을 바라보더니 흐뭇하게 웃으며 면갑을 내렸다.
“예. 전하. 이 텐티아.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이 망할 요새에서 쥐새끼 한 마리도 못 빠져나오게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비밀통로로 들어갈 인원이 정해졌다.
아린스, 나, 카리오사, 동부 기사 넷까지 총 일곱이었다.
카리오사가 수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럿이 들어갈 만하면 썰물 때 이쪽으로 침투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겠어.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줘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물 위를 걸을 때 쓰는 아이젠을 구두에서 빼 제복 주머니에 넣었다.
“아니면 이 요새를 통째로 구워버려도 되고. 아래쪽에서 사흘 정도 불을 때면 위에 있는 놈들도 다 타 죽고 질식해 죽겠지.”
카리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가볼까? 수영은 할 줄 알지?”
“당연하지. 자. 길잡이. 일할 시간이다.”
나는 아린스의 등을 걷어차 물속에 던져 넣었다.
“으아아악! 살려주십시오!”
놈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 * *
뽀그르르. 뽀그르르.
물속은 어두침침했고, 해저 동굴은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 하는 구간도 많았으며, 옆과 위아래로는 크고 작은 굴이 많았다.
날카롭고 기괴한 산호와 거인의 머리카락 같은 해초가 사방에 가득했다.
그러나 거센 물살에 떠밀려 해저 동굴 속에서 길을 잃고 질식해 죽는 끔찍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사아아아.
카리오사가 백 번도 더 드나든 듯 능숙하게 물속을 가로질렀다.
길 안내를 하던 아린스가 당황하며 나를 돌아볼 정도였다.
‘여기 와보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카리오사는 물속에서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눈이 조금도 따갑지 않은 듯했다.
회색 세로 동공이 진짜 상어처럼 좌우로 움직이며 기사들과 나, 아린스를 주시했다.
그녀는 두꺼운 가오리 가죽 코트와 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아주 편안해 보였다.
사아아아.
진짜 물고기처럼 바닥보다 약간 위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이, 육지에서보다도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녀가 무언가 마법을 썼는지, 힘겹게 팔을 내젓지 않아도 알아서 몸이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동굴 안쪽으로 향하는 흐름을 만든 듯했다.
역시 폭풍의 딸, 서머린의 후예였다.
그렇게 편안한 잠영을 즐기고 있으려니, 무언가 내 다리를 붙들었다.
덥석.
동부 기사가 뭐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돌려 했고, 그때 동부 기사들이 어디 있는지 보았다.
내 앞에 셋이 있었고, 마지막 한 명이 막 옆을 지나쳤으며, 아린스는 카리오사와 나란히 가고 있었다.
그 무언가는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미친.
나는 기겁하며 뒤돌았고, 곧이어 그것의 정체를 파악했다.
불그죽죽한 색상에 수십 개의 빨판이 달려 있었고, 혀처럼 자유로우면서도 강인했으며, 야만적이고도 고고했다.
내 몸보다 긴 촉수가 작은 굴 안에서 나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부우우우.”
번쩍.
붉은 눈을 가진 문어가 날 바라보았다.
카리오사와 동부 기사들은 이미 저 앞까지 가 있었고, 서서히 상승하고 있었다.
아마 저 위부터는 육로가 나오는 듯했다.
그 순간 난 야만적인 웃음소리를 들었다.
키득키득키득키득.
상하좌우 가지굴에서 어김없이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내 발목을 잡은 문어가 천천히 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여기가 물속이라는 것도 잊고 기침을 토했다.
“쿨럭!”
놈은 문어가 아니라, 문어 괴물이었다.
맨숭맨숭한 문어의 머리와 촉수로 된 수염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불그죽죽한 색에 기묘한 질감을 가진 인간의 몸뚱이가 붙어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도 촉수였고, 몸뚱이에는 갑옷을 껴입고 있었으며, 등에는 방패와 부채꼴 칼날을 달았다.
촉수로 된 수염도 굵은 뱀만큼 거대했는데, 두 발로 일어서면 키가 8m도 넘을 듯했다.
나는 완전 변이 급 침식자를 한없이 닮은 이 괴물의 이름을 알았다.
어인족 문어 수호자.
세상 X발.
* * *
콰드드득!
놈이 촉수를 감아 날 끌어들였다.
쩍!
검은 부리 같은 주둥이가 쩍 벌어졌다.
내 발목이 아주 먹음직스럽다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그 주둥이에 구둣발 밑창을 겨누며 외쳤다.
“아니마!”
구두에 새겨진 주문 회로가 거센 추진력을 만들었고, 나는 작살처럼 물속을 갈랐다.
촤아아아!
8m에 달하는 문어 괴물이 속절없이 딸려왔고, 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염동력까지 발휘해 동부 기사들을 빠르게 따라갔다.
저 앞에 절벽이, 그 위에 남실거리는 수면이 보였고, 아직 물 밖으로 나가지 않은 동부 기사 셋이 날 보고 경악했다.
나는 한 손을 물 밖으로 내밀어 바위를 잡는 동시에, 한 손으로 문어 수호자의 촉수를 움켜쥐고 힘껏 끌어 올렸다.
“흐읍!”
물론 내가 아무리 힘이 세도 8m급 거구를 물 밖으로 내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힘을 제대로 쓸 수도 없는 물속에서라면 더더욱.
하지만 잠시 놈을 물 위로 떠 오르게 하는 정도면 충분했다.
“발렌시아누스!”
평생 어인족과 싸워 온 폭풍의 딸이 기겁하는 소리였다.
촤아아악!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번쩍 끌어 올렸고, 나는 단숨에 뭍에 올라섰다.
“쿨럭, 쿨럭!”
동굴은 생각보다 천장이 높고 넓었으며, 여기저기 해초가 자라 있었다.
문어 수호자는 여전히 촉수로 내 발목을 쥐고 있었다.
콰득, 콰득!
놈은 거대하고 질퍽한 양손을 물 밖으로 내밀었고, 상체를 천천히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부글부글부글부글!
불그죽죽한 문어 대가리와 촉수, 덜퍽진 상반신이 물 위로 올라왔다.
“워어어어!”
놈이 머리에 난 구멍으로 바람을 뿜으며 포효했다.
검은 부리 같은 주둥이가 쩍 벌어졌다.
촉수가 수백 마리의 뱀처럼 아우성치는 모습은 꼭 악몽에서나 나올 듯했다.
그러나 이놈이 무슨 괴물이든 간에, 일단 불꽃을 피워 올릴 수 있게 된 이상 내 상대는 아니었다.
“환영한다. 이 괴물 새끼야! 그럼 이제…… 심연으로 돌아가라!”
나는 신실한 광명신도처럼 외치며 화기를 끌어모았다.
허공에서 불꽃이 튀고, 놈의 얼굴에 불길이 일었다.
화르르륵!
사람 몸뚱이보다 커다란 면상과 굵은 뱀 같은 촉수가 모두 불타올랐다.
“워어어어!?”
놈이 기겁하며 몸을 비틀었고, 내 발목을 감은 촉수를 휘두르려 했다.
서걱!
그때 카리오사가 마법검 폭풍을 휘둘러 바람처럼 그 촉수를 잘라 냈다.
“어딜 감히!”
수호자가 물속으로 얼굴을 담갔다.
첨벙!
어두침침한 물속이 발광 수정구 마도구를 던진 듯 환해졌다.
카리오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거 안 꺼지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구두 밑에 아이젠을 달았다.
“일단 불꽃을 만들 때는 공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다음에는 마나만 있어도 타. 물속에서도 열기로 물을 끓일 수는 있었는데, 그건 조금 비효율적이라서.”
“그럼 곧 죽겠군. 물속에서 타 죽다니. 저 괴물에게 어울리는 최후야.”
카리오사가 흡족하게 웃고는, 한쪽에서 떨고 있던 아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육식동물 같은 분위기가 어리고, 이빨 가득한 턱이 벌어졌다.
“그럼 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야 할 거다.”
“예, 예?”
“왜 어인족이 여기서 나오지?”
아린스가 다시 한번 바닥에 엎드렸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카리오사와 동부 기사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미 검을 뽑고 있었고, 동부 기사들 역시 작살이나 검을 쥐었다.
아린스가 벌벌 떨며 말했다.
“제, 제가 앞장섰잖습니까?”
카리오사가 혀를 찼다.
“뭔가 표식이나 마도구가 있어서 네놈은 공격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일단 그 후드부터 벗어라.”
아린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후드 그림자 속에서도 애원하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제 길잡이로서는 살려둘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엘프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 정체를 밝혀도 괜찮을 듯하다고 생각한 순간, 저 동굴 안쪽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르르…….”
카리오사가 트라우마라도 있는 듯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이-!”
상어 이빨이 바드득 갈리고,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저게 딴짓 못 하게 보고 있어.”
“어인족인가?”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로 동공이 한없이 수축하고, 그녀의 등 뒤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바다 구더기 놈들이 그 생선 대가리 새끼들하고 손을 잡아? 그래. 차라리 잘됐어. 싹 쓸어 담아서, 사이 좋게 회를 쳐버리겠다!”
낮은 목소리가 신화 속 야수의 포효처럼 울렸다.
아린스가 날 보며 당황한 듯 입을 뻐금거렸다.
‘그런 적 없는데요?’라고 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