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07)화 (307/340)

(307)

위가 명령을 내렸을 때 아래에서 확대 해석을 하는 건 꽤 흔한 일이었다.

이는 제국의 역사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휘관이 ‘교전을 염두로 한 위력정찰을 개시하라.’라고 명령하면 ‘침공’이 되기 마련이었고.

교회 홍의주교가 ‘최근 침식자가 늘어나는데, 사람들의 신앙을 두텁게 할 방안을 고민하라.’라고 명령하면, 이단 심문관들이 사방을 들쑤셨으며.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북부에 가능한 한 많은 밀과 보리를 지원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중부와 남부에서는 수탈에 가까운 징발이 이루어졌다.

그러니.

“전군 요새를 포위하라! 서쪽 후방으로도 참호를 파고 군대를 배치한다.”

“전함에 사람을 보내 전투마법사들을 데려와라. 대규모 파괴술 주문을 사용할 것이다.”

“지진의 서를 준비해라. 최악의 상황에는 저 요새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려야만 한다!”

“공병대. 회전식 투석기를 만들어라. 마법사들의 마나를 아끼기 위해 성벽 돌들을 탄환 삼아 쏘아 보낼 것이다. 쉴새 없이 퍼부을 수 있도록 하라.”

“장교기사를 제외한 기사들은 나를 따라라. 텐티아 경과 함께 위력정찰을 개시할 것이다. 포위망이 바깥쪽에서 공격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연기 마법을 준비해라. 투석기로 벽을 부수고 그 안에 독성 가스와 연기를 밀어 넣을 것이다.”

카리오사가 내린 ‘요새를 잘 포위하고 있으라.’라는 명령이 입과 입을 거치며 ‘요새를 개 박살 내고 안에 숨어 있는 놈들을 죄다 끌어내 아주 갈기갈기 찢어 버려라.’로 변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명령을 전해 온 기사는 자신이 들은 명령과 상황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게 아닌데?’

하지만 장교기사들과 전투 기사들을 말릴 사람이 없었다.

함께 명령을 들었던 텐티아부터 압도적인 무용을 선보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방에 가득한 동부 기사들을 상대로 중부 기사들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고, 동부 기사들은 동부 기사들대로 동부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난 ‘바다의 검’이요! 이번 전투에서 수급 300개를 거두었지! 텐티아 경은 몇 명을 죽였소?”

“‘청상아리’요. 이번 전투에서 제독급 동방 해적 청유의 목을 베었지. 텐티아 경은 누구를 죽였소?”

“‘귀상어’요. 이번 전투에서 용병 마법사 열둘과 침식자 마법사 다섯을 베었지. 텐티아 경은 어떤 죄인을 죽였소?”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적기사’ 텐티아요. 해적 제독 오운굴라와 해적 200명을 베었지. 용병 마법사는 여섯 정도 죽였고, 그중에 침식자는 둘이었소! 이만하면 한 사람 몫은 한 것 같군.”

너희는 한 사람 몫도 못 했다는 기사식 도발이었다.

전투 기사들이 종자를 시켜 말과 창을 가져오라 외치며 위력정찰과 바위산 탐색을 시작했다.

본래 그걸 말려야 하는 카리오사의 부관, 장교기사 쥴은 텐티아에게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회전식 투석기는 준비되었는가?”

“예. 기사님! 조립이 끝났습니다. 밀고 올라오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발리스타를 돌을 쏠 수 있게 개조하라고 명령했다. 상황은?”

“80% 진척되었습니다!”

“전투마법사들과 시약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만타’ 선임기사께서 호위 총책임자이십니다.”

“좋다! 그럼 공격 준비!”

도시와 항구가 모두 굽어 보이는 바위산 요새 앞에 뭍에 올라온 상어 떼가 이를 드러냈다.

거대한 투석기와 돌을 쏠 수 있게 석궁 형태로 개조한 발리스타가 무너진 성벽을 재활용할 준비를 마쳤고, 아세노르타 가문만을 위해 길러진 전투마법사들이 파괴술 주문을 준비했으며, 동부에서 제일 잔인한 기사들이 바위산 주변을 들쑤시며 수상해 보이는 모든 걸 부수고 죽이고 불태웠다.

“발사!”

투석기 서른 대와 개조한 발리스타 서른 개가 동시에 바위를 쏘아냈다.

쾅! 쾅!

돌과 돌이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바위산 요새는 온종일 두드려도 깨지지 않을 만큼 강건했지만, 장교기사 쥴은 벽돌로 보강한 곳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벽돌로 쌓은 곳에 발광 시약 단 화살을 쏴라! 투석기는 그곳을 노리도록!”

아무리 단단한 벽도 어른 몸통보다 큰 돌에 계속 얻어맞다 보면 금이 가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전투마법사들이 보라색으로 빛나는 ‘힘의 창’을 날렸고, 쇠뇌 사수들이 그렇게 부서진 요새 안으로 불화살을 당겼다.

“발사! 발사! 발사!”

불화살 앞에는 마비약과 기름에 적신 솜뭉치가 달려 있었는데, 타들어 가면서 마비 성분 들어간 연기를 피워 올렸다.

가끔 바람이 거꾸로 불어오기도 했지만, 폭풍의 딸을 섬기는 마법사들은 그 바람의 방향조차도 바꾸었다.

“다, 죽여라!”

그렇게 요새 공성이 시작되었다.

* * *

좁은 나선계단 끝 방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기름 등잔 몇 개가 걸려 있었다.

해적보다는 수도자에게 어울리는 분위기였지만, 그 방안 테이블에 둘러앉은 건 한때 바다를 벌벌 떨게 했던 해적 제독들이었다.

쾅! 쾅!

거대한 바위가 날아와 부딪힐 때마다 요새가 흔들리고 천장에서 흙가루가 쏟아졌다.

모자와 두건 위로 흙가루가 쏟아질 때마다 제독이라 불리던 해적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전우들이여. 이제 우리는 다 끝났습니다.”

“남의 빵을 훔쳐 내 배를 불리려 했던 죗값을 받는 것이지요.”

“이 미친 것들아! 아직도 귀족 놀이나 하는 거야? 제정신이냐고! 카리오사가 우리를 다 죽일 거야!”

여전히 고풍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자도 있었고, 본래의 천박한 어투로 돌아간 자도 있었다.

해적왕 아퀼라는 챙 넓고 화려한 선장 모자를 쓰고, 푸른 코트를 입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의 애인, 페이진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이제라도 항복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 섬의 지리나 마을 위치 등을 가지고 협상하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챙 넓은 모자 아래, 해적왕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어렸다.

언제나 야망에 차 있던 아퀼라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페이진 역시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본성을 알았다.

그들은 뼛속까지 해적이었고, 배신, 약탈, 살육, 겁간을 저지르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역시 본성은 그러했다.

그러나.

“항복은 없소. 나의 레이디.”

왕을 칭한 자는 본성을 거부하기를 택했다.

“난 해적으로 태어났지만, 왕으로 살겠소.”

그는 알몸뚱이의 짐승이 아니라, 화려한 흉갑을 입고 금실로 수를 놓은 남색 코트를 둘렀으며, 선장의 모자를 쓴 해적왕이었다.

왕의 결론에 해적 제독들은 각각의 반응을 내놓았다.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있었고.

“전하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으니, 후회는 없군요.”

기겁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자도 있었다.

“다들 미쳤군! 완전히 개자식들이었어!”

“언데드가 될 때까지 깃대에 걸리고 싶은 거야?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하고 옛것에게 혼을 뜯어먹히고 싶은 거냐고!”

아퀼라는 그들 모두를 굽어보며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푸른 후드를 뒤집어쓴 인영이 들어왔다.

본래 얼굴이 보여야 할 곳은 칠흑처럼 검었고, 몸에서는 달큰하면서도 비릿한 물비린내가 났다.

모두에게 침식자로 의심받던 조언가, 쪽빛 사제였다.

해적 제독들이 주전파와 항복파를 가리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쪽빛 사제?”

“살아 있었군.”

“제일 먼저 도망치다가 목이 잘릴 줄 알았는데?”

“여기는 왜 왔지?”

아퀼라의 애인 페이진은 아예 왜 왔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박대에 기가 죽을 법도 했지만, 쪽빛 사제는 조금도 괘념치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장들께서 결사의 각오를 다지셨으니, 전 뿌듯할 뿐입니다.”

“우리가 그런 소리나 듣자고…….”

“제가 동맹군과 살길을 모두 가져왔으니, 일단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본래라면 우리를 놀리는 거냐? 같은 반응이 나왔을 말이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의 위험에 대해 제일 먼저 경고했던 게 그였다는 사실은, 밉상인 존재의 발언에도 약간의 무게를 실어 주었다.

페이진이 혀를 차고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래. 알았어. 이상한 소리만 해 봐.”

쪽빛 사제가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일전 말씀드렸던 어인족과의 동맹이 준비되었습니다.”

“뭐?”

“그들이 지하 비밀통로에서 대기 중이니, 호위받으며 이 요새를 나가시면 됩니다. 이후에는 그들이 준비한 통로를 통해 카리오사의 포위망을 돌파할 것입니다.”

폭발 마법 같은 선언이었다.

해적들의 반응은 셋으로 갈렸다.

“어인족? 그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이 여기 있다고?”

어인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자.

“지하 비밀통로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비밀통로의 존재에 의문을 표하는 자.

“살았다! 시X! 살았다고!”

바닷속에서 올라온 동아줄을 잡고 기뻐 날뛰는 자.

아퀼라가 가볍게 책상을 내리치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제장들이여. 우리가 살 방법이 생겼소. 비록 우리는 잠시 우리의 성을 떠나게 되겠지만, 반드시 물보라를 일으키며 돌아올 것이오.”

“예. 전하!”

“전하가 있는 곳이 수도입니다.”

“배만 있으면 그게 어디든 저희의 왕국이 아니겠습니까?”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순식간에 대세를 차지했고, 해적 제독들이 희희낙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한 제독이 여전히 자리에 앉아 물었다.

“전하 이 섬에 남아있는 이주민들과 정착촌 사람들, 우리가 데려온 식민 사업의 대상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강경한 눈빛이 아퀼라에게 향했다.

아퀼라는 당연하다는 듯 위엄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짐의 신민들은 짐이 후퇴해 국체를 보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장렬하게 희생하겠지. 미리 깊은 애도를 표하겠노라.”

제독이 얼굴을 굳혔고, 아퀼라는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았다.

“아악!”

촤아아악!

피가 튀어 벽을 적시는 가운데, 페이진은 홀로 미간을 찌푸리며, 쪽빛 사제의 후드 안쪽을 바라보았다.

‘비밀통로가 있다는 건 나도 몰랐는데.’

아무도 어인족을 어떻게 데려왔는지, 무슨 협상을 한 건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묻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 이게 진짜 기회라고 믿고 싶어서.’

쿵! 쿵! 쿵!

무시무시한 투석기 소리가 다시 울리고,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졌다.

페이진은 눈을 질끈 감으며 아퀼라 뒤로 바짝 붙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 * *

아퀼라와 쪽빛 사제가 요새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세워져 있던 나무판자를 치우고 벽을 가볍게 두드리자, 돌인 줄만 알았던 기이한 해초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자연 동굴이 아니야. 인위적으로 중축한 흔적이 있어. 그러고 보니…… 이 요새도 누가 지었는지 몰라.’

페이진은 높은 천장과 곡괭이 흔적, 따개비들을 보며 진실을 깨달았다.

‘어인족이 이 섬에도 살았었구나.’

동굴 모퉁이를 한 번 돌자 그들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군.”

쪽빛 사제와 아퀼라는 반갑다는 듯 손을 들었고, 페이진과 해적 제독들은 숨을 들이켰다.

“하, 하하.”

“몇 명이지?”

“마흔 명은 되겠군.”

그들은 키가 컸고 체구가 당당했으며, 온몸이 갑옷 같은 청록색 비늘로 덮여 있었고, 손발에는 물갈퀴가 나 있었다.

얼굴은 농어 같았고, 등에는 가시 돋친 지느러미가 나 있었으며, 따로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작살과 칼로 무장했다.

사람 잡아먹는 바다의 괴물, 어인족 전사들이었다.

그 전사들 사이에는 전사들보다 머리 하나 작은 주술사가 몇몇 끼어 있었다.

그들은 보라색 비늘을 두르고 있었고, 무기가 아니라 산호로 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으며, 시약이 든 바구니를 끼고 있었다.

스르르륵, 스르르륵.

또, 문어의 머리와 촉수 수염을 가진 불그죽죽한 거인들이 네 발로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들은 질긴 몸을 녹슨 갑옷으로 둘렀으며, 아주 예리한 반달 모양 칼을 등에 이고 있었다.

주술사를 지키는 어인족 수호자들이었다.

선두에서는 마차만큼 큰 붉은색 농게가 장창만큼 큰 집게발을 들며 거품을 뿜었다.

길을 뚫고 공격을 받아내는 농게 갑옷 무사였다.

“취이이익.”

“카르르륵.”

“시익, 시익.”

생선 대가리를 가진 식인 괴물들이 해적 제독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페이진은 기절할 듯한 기분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하하…….”

바다에 적응한 이물의 후예와 그 친족, 어인족이었다.

“그럼 가도록 하지요. 언제 요새가 뚫릴지 모르니까요.”

쪽빛 사제가 좌우로 어인족 주술사와 아퀼라를 끼고 길었다.

“이 밑으로 나가면 거친 해안이 나옵니다. 밤까지 기다리다가 남쪽 바다뱀 군도로 내려갈 예정입니다.”

“거기까지 헤엄칠 수는 없는데?”

“대모거북 몇 마리를 준비해 뒀습니다. 등에 타면 충분할 겁니다.”

“비룡 정찰부대는?”

“이 비 오는 날에 밤바다에서 머리 몇 개를 발견할 가능성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 아무리 카리오사가 폭풍의 딸이라도 바다에서 어인족을 이길 수는 없지. 크하하하.”

페이진은 이유 모를 불안함에 그 뒤로 바싹 붙었다.

그때 저 앞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싹 쓸어 담아서, 사이 좋게 회를 쳐버리겠다!”

여유만만하던 쪽빛 사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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