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카리오사를 선두로 동부 기사들이 쐐기꼴을 그리며 달려 나갔고, 나는 아린스를 잡아끌며 그 뒤를 따라갔다.
오래지 안에 완만한 오르막 위에 놈들이 보였다.
“카, 카리오사?”
“폭풍의 딸이다!”
“여기를 어떻게?”
해적 제독들과 어인족 전사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굳히며 기겁했다.
비늘 덮인 거구와 거대한 집게발을 가진 농게를 보고 있자니, 회귀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반역을 일으킨 카리오사를 쓰러트리기는 쓰러트렸는데, 그녀가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해적들과 어인족이 죄다 폭증해 동부 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었지.
강을 타고 내륙까지 올라온 뒤, 도시 약탈권을 두고 해적, 어인족, 그린스킨 무리가 서로 싸울 정도였다.
‘내 거다!’
‘우리 차례야!’
‘취이이익! 취이익!’
그 도시를 지켜야 하는 나로서는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다 꺼져!’
“다 죽어라!”
나는 그들이 사이좋게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환희하며 불의 창을 불러냈다.
화르르륵!
은은한 어둠 내린 동굴 속에서 불길이 피어올라 창의 형태를 이루고, 아찔한 파공성을 내며 쏘아져 나갔다.
쐐애애액!
그러자 어인족 전사 사이에 섞여 있던 어인족 주술사가 나와 산호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웠다.
“카르르르…… 물의 막, 파도의 숨결, 바다의 방패여.”
그리 긴 캐스팅을 하지도 않은 듯한데, 허공에서 물로 이뤄진 거대한 방패가 튀어나와 내 창을 가로막았다.
불의 창의 물의 방패를 후려치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이 폭발했다.
치이이익!
검은 연기와 수증기가 뒤섞여 동굴 안에 퍼졌고, 해적 제독 몇 놈이 기침을 토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보라색 비늘을 가진 주술사 놈을 바라보았다.
어인족 제사장도 아니고 일개 주술사 따위가 내 불의 창을 이렇게 쉽게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리오사가 날 흘깃 돌아보며 외쳤다.
“발랜시아누스! 저 바구니가 통째로 시약이다!”
“!”
보라색 비늘의 주술사 놈들은 하나같이 큼지막한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세상!”
저걸 다 소모 시키려면 수십 분은 공방전을 벌어야 할 것 같았다.
“해보자! 이 사람 잡아먹는 괴물 새끼들아.”
나는 육두문자를 퍼부으며 허공에 불의 창을 띄워 올렸다.
화르륵! 화르륵! 화르르륵!
불길이 피어오르고, 불의 창이 하늘을 날았다.
“물의 막, 파도의 숨결, 바다의 방패여!”
어인족 주술사 놈들은 주문을 외워 물의 방패를 겹겹이 둘렀고, 또 전사들을 축복했다.
“따개비 갑옷, 열 겹 비늘, 뭍의 다리여.”
축복받은 어인족 놈들의 비늘 위로 단단한 따개비가 자라나고, 비늘이 두터워졌으며, 다리가 약간 길어져 육상 보행에 적합한 형태가 되었다.
어인족 전사들이 소름 돋는 고함을 지르며 비탈을 달려 내려왔다.
“카르르르!”
“키이이익!”
“부드러운, 고기!”
마차만큼 거대한 농게가 선두였다.
“우리는, 가장 깊은 곳으로, 갈 것이다!”
놈이 거품을 물며 끔찍한 목소리로 쉭쉭거렸다.
카리오사가 마법검 폭풍과 순풍을 빼 들며 외쳤다.
“내가 저 생선 놈들을 해체할 테니, 발렌시아누스 네가 해적 놈들을 잡아!”
카리오사는 나보다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나는 괴물보다 사람을 잘 잡았으며, 왈가왈부할 시간은 없었다.
“알았다.”
사아아아-!
동부 기사 넷이 직도에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고, 카리오사가 홀로 달려 나갔다.
타악!
거친 마법검 폭풍과 매끈한 마법검 순풍이 은은한 푸른빛으로 달아올랐고, 하얀 마나 블레이드가 나선을 그리며 덧씌워졌다.
물색 머리와 가오리 가죽 코트를 휘날리며 두 자루 검을 늘어트린 그 모습은, 정말로 먹이를 노리고 도약하는 식인 상어 같았다.
농게 갑옷 무사가 장창보다 거대한 집게발을 크게 휘둘렀다.
후-욱!
붉은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집게발이 카리오사의 머리를 노렸다.
거대한 바위도 일격에 깨트려버릴 듯한 공격이었다.
카리오사는 그걸 보면서도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타악!
집게발이 그녀의 코트 자락을 스치는 순간, 그녀의 철편 갑옷 철편들이 푸르게 빛났고,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며 반투명한 역장을 만들었다.
차르르르!
집게발이 역장을 후려쳤다.
땅!
하얀 불꽃이 튀고, 거대한 집게발이 방망이에 맞은 공처럼 튕겨 나가고, 역장이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카리오사는 농게 무사의 등딱지 위에 사뿐히 올라섰다.
“심연 속에서! 영원히 떠돌아 마땅한 괴물이!”
그녀가 폭풍 검을 들어 올려 농게 무사의 주둥이에 깊게 찔러 넣었다.
파가가각-!
장검만큼 긴 한손직검이 자루까지 그 안에 파묻히고, 농게 무사가 눈을 부릅떴으며, 어인족 전사들이 한 박자 늦게 작살을 들었다.
카리오사가 그들 모두에게 분노를 토하며 마법검 폭풍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감히! 내 바다에 발을 들여!”
우우우웅!
폭풍 손잡이 앞 약간 보이는 칼날이 푸르게 달아올랐고, 농게 무사가 거대한 몸을 부르르 떨었으며, 다음 순간 그대로 폭발했다.
펑-!
거대한 집게발이 벽으로 날아가 꽂히고, 조각난 등딱지 파편이 산탄 마탄을 쏜 듯 어인족과 해적들을 덮쳤으며, 고약한 내장이 천장까지 튀었다.
농게의 몸 안쪽에 바람을 끝없이 밀어 넣어 터뜨려버린 거였다.
그다음 순간 비탈 아래쪽에서 기다리던 동부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달려들었다.
“쳐라!”
“카리오사 님을 따르라!”
“비료로도 못 써먹을 놈들이 어딜 기어와!”
“저 생선 놈들에게 먹이사슬의 존엄함을 가르쳐주자!”
폭발에 휘말리지 않도록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던 것이었다.
츠카아아악-!
푸른색 마나 블레이드가 강렬하게 빛났다.
얼굴에 묻은 농게의 잔해를 털어내던 어인족 전사 하나가 그대로 목이 떨어졌다.
“카르르륵-!”
그걸 신호로 사냥이 시작되었다.
* * *
카리오사와 기사들이 어인족을 어인족이었던 것으로 만드는 동안, 해적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뛰어!”
“아무리 빨리 뛰어 봐야 카리오사보다 빨리 뛸 수는 없어.”
“이 멍청아. 저 생선 놈들보다만 빨리 뛰면 돼!”
“!”
그들 중 눈치가 없는 자는 없었고, 의리가 있는 자는 드물었다.
여기까지 내려온 이상 대충 길은 파악했고, 일단 해변으로 나가면 어떻게든 살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단 가자!”
“나가자!”
“살아서 봅시다! 죽으면 바보!”
그랬던 해적 제독들과 페이진은 바다로 통하는 수로 앞에 서 있는 인영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왜들 이제 내려와?”
인영이 낭랑한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흐읍-!”
“기다렸잖아.”
사방에 따개비와 해초, 불가사리와 석주, 바닷물 웅덩이가 가득한 동굴 공동이었다.
사방으로 뻗은 굴이 복잡한 미로를 그리는 그 한가운데,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서 있었다.
무척 오만하면서도 약간은 피로해 보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위험하게 빛났다.
그는 이 음침한 자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제복 차림이었다.
분명 바다를 해치고 나왔을 텐데도 머리도 보송했고, 깔끔하게 넘겨져 있었다.
페이진은 갈색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이며 물었다.
“이곳은 나도 모르던 길인데? 어떻게 여기로 들어왔지?”
발렌시아누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다리 관절을 뽑은 채 바위틈에 숨겨 둔 아린스를 떠올리며 웃었다.
‘역시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 주면 일이 잘 풀린다니까.’
“지엄한 제국법은 모든 사략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린다.”
스르르릉.
그는 흑루를 뽑아 들었고, 멋들어지게 돌린 다음 앞으로 겨누었다.
“황제 폐하의 치안감으로서 너희 해적 놈들에게 정의를 알려 주겠노라.”
페이진은 이를 악물었고, 해적 제독들 역시 이를 갈았다.
그러나 함성을 내지르며 호쾌하게 달려 나가는 이는 없었다.
사아아아-.
백발 금안의 소년 황족에게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손발이 쭈뼛거리고 솜털이 일어설 정도였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야.’
‘용혈 황족이라더니…… 진짜로 드래곤 같은 건가?’
‘언제 카리오사가 타고 나간 유람선을 습격한 멍청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괴담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군.’
해적 제독들이 하나같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마와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
“……! ……!”
지독한 침묵이 흐르고, 그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한 제독이 먼저 달려 나갔다.
“아아아아!”
얀 쉐르는 남부인이었고, 터번을 쓰고 있었으며, 묵직한 곡도로 사람 목을 치는 데에 따라갈 자가 없는 달인이었다.
배 한 척으로 상선 여섯 대를 나포한 적도 있을 만큼 두둑한 배짱과 실력을 겸비한 거물이기도 했다.
우우우웅!
그의 곡도에 푸른색 마나 블레이드가 옅게 어리고, 그는 발렌시아누스에게 달려들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흑루로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얀 쉐르가 발렌시아누스 앞에 다다른 순간.
풍덩!
그가 휘청이는가 싶더니, 거짓말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커헉!”
전력으로 달려가다 따개비 가득한 바위 위로 넘어진 사람의 최후는 끔찍했다.
얀 쉐르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고통에 신음하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고, 발렌시아누스는 검을 들어 그의 등을 찔렀다.
푹!
페이진은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인 다음에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
‘물웅덩이, 물웅덩이가 있었어.’
발렌시아누스는 작지만 깊은 물웅덩이에 한쪽 발을 올려놓고 서 있었다.
‘타르티의 마도구다. 저걸로 평지에 서 있는 척하고 있던 거야. 얀 쉐르는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가다 물에 빠지면서 넘어진 거고.’
해적 제독들이 그 잔학함에 치를 떨었고, 발렌시아누스는 간드리지게 웃었다.
“아무도 안 올 텐가?”
그야말로 개망나니 같은 웃음이었다.
“그럼 내가 가지!”
그가 땅을 박찬 순간, 모든 제독들은 사방의 굴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내가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게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왕을 칭하고 나름 거대한 세력을 일군 만큼, 이 해적 놈들이 나름의 동료애나 의리, 그 비슷한 걸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달려라! 달려!”
“전하! 만수무강하소서~!”
“다들 살아서 보세나! 으하하하!”
나는 쥐구멍을 덮친 고양이가 된 기분으로 해적 놈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뭐 이런 어이없는 새끼들이 다 있어!”
당황을 넘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이런, 이런 개만도 못한…….”
일단 한 놈이라도 잡아야 카리오사 얼굴을 볼 수 있을 테니, 제일 화려해 보이는 놈을 찾았다.
페이진이 금실 코트 입은 제독과 함께 왼쪽 굴로 달려가고 있었다.
“금실 자수 놓인 푸른 코트, 화려한 선장 모자, 위엄찬 얼굴…… 아퀼라.”
타르티가 말해준 해적왕이 분명했다.
나는 놈을 쫓아 땅을 박찼다.
“서라…… 아니. 들을 리가 없지.”
타악, 첨벙, 타악!
물웅덩이를 달려 넘고,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를 난파선 잔해를 뛰어넘고, 벽처럼 솟은 해초를 가르며 달렸다.
중간중간 오르막이 이어졌고, 천장부터 바닥으로 이어진 굵은 석주가 여럿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 있던 곳만큼은 아니지만, 꽤 넓은 공동이었다.
바닥 군데군데 깊어 보이는 물웅덩이가 여럿 보였다.
어디서 빛이 들어오는지는 몰라도, 색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
그 순간 나는 바람처럼 땅을 박차 석주 옆에서 멀어졌다.
촤아아악-!
보이지 않는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석주와 내가 서 있던 공간이 동시에 잘려 나갔다.
“오! 대공답지 않은 몸놀림이군. 아주 흡족해.”
“아퀼라…….”
놈이 바위틈에 숨어서 날 노리고 있었다.
난 처음으로 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문답게 동방 대륙 신민과 제국 신민의 혼혈이었고, 아주 잘생겼으며, 눈 밑에 나보다도 짙은 흑륜(黑輪)이 인상적이었다.
챙 넓은 푸른 모자를 썼고, 아마도 마도구일 흉갑을 둘렀으며, 그 위로 코트를 입고 있었다.
놈은 손에 손잡이와 크로스 가드만 있는 검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로는 거의 완벽히 투명한 바람으로 이뤄진 칼날이 길게 자라나 있었다.
마나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당할 뻔했다.
지금도 정확한 길이는 모르겠다.
놈이 느긋하게 물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나는 등 뒤로 불꽃을 피워 올리며 답했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노리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지.”
“과연 소문 자자한 망나니로군. 기습의 기본을 알고 있다니. 이 해적왕의 상대로 모자람이 없겠어.”
오페라 같이 고풍스러운 어조였다.
나는 저런 것에 집착하는 부르주아들을 아주 잘 알았기에, 멸시 어린 표정을 지었다.
“원래 노예였나 보군.”
“!”
놈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기에, 한 번 더 도발했다.
“숨 쉬는 소리도 천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