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아퀼라의 눈앞에 수년 전의 풍경이 스쳤다.
‘오늘 저녁까지 다 닦아 놔라. 못하면 내일 아침은 없다.’
‘선장님. 이놈은 너무 비리비리한데 그냥 다음 배를 약탈한 다음에 바다에 던져버릴까요?’
‘그럼 던지기 전에 제가 하룻밤 데리고 놀아도 되겠습니까? 사내치고 반반한 게 아주 재미날 거 같은데.’
그는 이를 악물며 마법검 ‘태풍’을 휘둘렀다.
“감히 짐을 노예라 불러!”
태풍은 뼈인지 금속인지 모를 기묘한 재질의 손잡이에서 바람이 된 칼날이 길게 튀어나와 진동하는 마법검이었다.
“태풍이여! 짐의 적을 몰아쳐라!”
그가 마나를 불어넣자, 그 바람 칼날이 길게 늘어나며 채찍처럼 발렌시아누스를 덮쳤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중간중간 크고 작은 석주들이 솟아 있었지만, 투명한 바람 채찍 앞에서 도마 위 채소처럼 잘려 나갔다.
콰지지직!
파삭!
세 개의 석주가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돌가루와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망나니 대공이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선상 하인 출신이었겠지. 그래. 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애 중에는, 그때 당하던 걸 못 잊고 계속 품위나 명성이나 재물에 집착하는 애들이 있어.’
위이이잉!
바람 칼날이 고속으로 진동하며 그의 목을 노렸다.
‘원하던 건 이미 얻었다는 사실도 모르고서.’
타악!
그는 뒤로 뛰어오르며 피했고, 바람 칼날은 그의 어깨를 길게 그었다.
촤아아악!
하얀 제복이 길게 갈라지고,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
발렌시아누스가 허공에서 약간 비틀거리며 착지했고, 분노한 듯 이를 악물며 외쳤다.
“감히 천한 노예 따위가 황형인 내게 상처를 내! 이 죄는 목숨으로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거짓말을 싫어했지만, 그와 별개로 입 밖으로 내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는 외교적 수사라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해야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해야 하는 말은, 아퀼라의 눈을 돌아가게 할 말이었다.
“반드시 판자 위를 걷게 해주마!”
아퀼라가 흑륜 짙은 눈을 부릅뜨며 달려들었다.
스윽!
다시 원래 길이로 돌아온 마법검 ‘폭풍’이 오른손, 막 허리춤에서 뽑은 단검 ‘검은 비늘’이 왼손이었다.
검은 비늘은 날이 두툼한 마름모형에 송곳처럼 뾰족한 단검이었다.
접촉 부위의 물을 지배하는 힘이 있어 선상 싸움에서 아주 유리했다.
한 번만 찌르면 상대 몸속의 피를 죄다 뽑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와라.’
발렌시아누스는 화기를 끌어올리며 정면으로 불길을 방사했다.
콰아아아-!
샛노란 화염이 넓은 부채꼴로 쏘아져 나갔다.
치이이익!
공동 습기가 끓어오르며 수증기로 화하고, 각종 해초가 잿더미로 변했으며, 바닥 곳곳에 보이는 물웅덩이에서 김이 올라왔고, 일대의 산소가 죄다 불타 한순간 진공이 찾아왔다.
아퀼라의 몸을 뼛속까지 구워버리기 충분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해적왕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재차 태풍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하얀 마나의 빛이 강렬하게 피어오르고, 태풍의 날이 채찍처럼 길어지고, 태풍이 불길을 반으로 갈랐다.
사아아아-!
압도적이던 불길이, 선지자의 지팡이 앞에서 갈라진 바다처럼 흩어졌다.
바람 마법과 불꽃 마법 간 사이에 존재하는,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부터 있던 일방적인 상성이었다.
“어리석었다! 대공.”
아퀼라가 그사이 길을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네놈이 감히-.”
쿵.
발렌시아누스가 한 걸음 물러서고, 벽에 등을 부딪치며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혈통만 믿고 오만하게 군 대가를 치러라.”
아퀼라가 단검, 검은 비늘을 들고 달려들었다.
발렌시아누스가 흑루를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아퀼라는 태풍으로 흑루를 쳐내고 짓눌렀다.
챙강, 그리고 끼이이익!
“아직 용혈 황족을 죽여 본 적은 없는데.”
그는 씩 웃으며 검은 비늘을 치켜들었다.
“살려달라고 해 봐라.”
그는 그 말을 듣는 게 너무 좋았다.
상대의 목숨이 자기 의사에 달린 그 순간만은 마치 신이 된 기분이었고, 과거의 치욕도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퉤!”
발렌시아누스는 아퀼라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래. 유감이군.”
아퀼라는 발렌시아누스의 손목을 노리고 검은 비늘을 내리쳤다.
캉!
질긴 제복이 송곳 같은 날 앞에서 뚫리고, 요란한 쇳소리가 울렸다.
사람의 몸을 찌른 감각이 아니었다.
“어엇?”
그때 아퀼라는 발렌시아누스의 어깨에 상처가 없는 걸 알아챘다.
‘옷까지도 그대로라고?’
등골이 오싹해졌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렀다.
츠츠츠츠!
뱀이 기어 오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발렌시아누스의 제복 소매에서 하얀 실이 촉수처럼 자라나 검은 비늘을 옭아맸다.
“보이지 않는 바람 칼날이라니. 그 마도구는 조금 무서워서. 상성도 워낙 안 좋고.”
발렌시아누스가 백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낮고도 중성적인 미성이 해적왕의 머릿속에 울렸다.
짐승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에 세로 동공이 나타나고, 목과 뺨, 손목 등 언 듯 언 듯 보이는 살에 반투명한 암적색 비늘이 자라났다.
공동 벽에 등이 닿은 건 발렌시아누스였지만, 끝까지 몰아세워진 건 아퀼라였다.
‘당했다.’
아퀼라는 이를 악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붉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넌 속은 거야. 배에서 내리게 해주겠다는 말을 들은 선상 노예처럼!”
악룡의 목소리처럼 간사하고도 매혹적이었다.
우우우웅!
무언가 달아오르는 소리가 났다.
발렌시아누스의 오른손이 도자기처럼 갈라지고 새빨간 빛이 번뜩였다.
아퀼라는 검은 비늘을 포기하고 그대로 물웅덩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치잇!”
“아, 하하하하!”
화르르르르르륵-!
공명의 불길이 우우 쏘아져 나갔다.
* * *
돌 끓어오르는 연기가 동공 안에 자욱했다.
‘숨 막혀. 역시 불꽃은 좁은 곳에서 쓸 게 못 돼.’
공동에 다시 산소가 타오르고, 망나니 대공의 머릿속에 지끈거리는 두통이 내달렸다.
‘그래도 그 초원 전사의 힘을 흡수한 뒤로 약간은 나아졌다. 다음에 쓸 때는 사야 옌이 말한 대로 변화를 받아들이려 노력해 봐야겠군.’
발렌시아누스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연기를 흩은 뒤, 아퀼라가 들어간 물웅덩이를 확인했다.
‘……없다. 불가능해. 돌이 끓을 정도다. 물이 남아있다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야.’
물웅덩이 안은 비어 있었고, 해초 탓에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차다. 애초에 거의 달궈지지도 않았어.’
그는 가만히 공동을 둘러보았고, 비슷한 물웅덩이가 여럿 있는 걸 보았다.
발렌시아누스는 시험 삼아 물웅덩이 하나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넣었다.
풍덩.
가볍게 파문이 일고, 주변에 있는 다른 물웅덩이들이 약간 출렁였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몇 가지 사실을 유추했다.
‘이어져 있어. 이 밑은 작은 굴 정도가 아니군. 아까 여기까지 오면서 오르막도 꽤 많았다. 이건 물웅덩이가 아니라 해수면이다. 놈은 지금 바닷속으로 숨은 거야.’
따각, 따각, 따각.
그는 일부러 구둣발 소리를 내며 걸었다.
‘놈도 소드 엑스퍼트 급이라면 20분 정도는 숨을 참을 수 있을 거다. 그 마법검은 내 비늘에도 통해. 내 등을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고, 길을 찾아 바다로 나갔을 수도 있다.’
몇 가지 가능성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아직은 밑물이야. 썰물을 타고 나가는 게 훨씬 유리하겠지.’
그리고 근거 있는 가능성이 근거 없는 의심으로 변하기 일보 직전.
‘설마 파도에 휩쓸려 죽어 버린 건 아니겠지? 수중의 굴 속에서 길을 잃고 익사했다거나? 해적왕이 그렇게 죽을 리가…… 아니야. 기사들의 사망 원인 1위는 익사라고.’
어둠 속에서 빛줄기의 형태를 한 저주가 날아왔다.
“거품의 핏줄!”
온몸의 피가 다 끓어올라 죽게 되는 끔찍한 저주였다.
펑! 펑! 펑! 펑!
붉은색 저주가 날아와 발렌시아누스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러나 저주는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연기처럼 흩어졌다.
“크윽!”
세레라지에의 전격 마법을 견뎌낼 정도로 마법 저항력이 강한 발렌시아누스였다.
용언의 기운을 본격적으로 끌어 올린 이상, 그는 맨몸으로도 주술 회로 새긴 갑옷에 필적하는 방어력을 자랑했다.
“누가 감히-!”
그는 고통 대신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고, 굴 사이사이에서 달려 나오는 인영들을 발견했다.
“잡아!”
“머리를 노려!”
“지금이 기회다!”
실력 좋은 해적 칼잡이들과 해적 선장, 제독 몇몇이 역습을 가했다.
“머리를 노려! 머리! 머리! 머리!”
마도구 쇠뇌와 활이 색색으로 빛나는 화살을 발사했고.
“고통은 저자에게, 축복은 우리에게!”
페이진과 그녀 휘하의 마법사들이 해적에는 축복을, 발렌시아누스에게는 저주를 내렸다.
‘결막염’, ‘치통’, ‘두통’, ‘어지럼증’, ‘환청’, ‘환각’, ‘졸음’, ‘허기’ 등 가벼운 저주부터.
‘출혈’, ‘심장 파열’, ‘혈관 괴사’, ‘뇌출혈’, ‘기절’ 등 무거운 저주까지.
마녀들이 모여 사는 공동 주택 앞에서 십자가를 들고 기도라도 한 듯한 저주의 포화였다.
쐐애액! 쐐애액! 쐐애액! 쐐애액!
어지간한 발렌시아누스조차 모두 막아내기는 벅찼다.
“크윽!”
특히 물 계열의 주문이 깃든 마도구 쇠뇌나 화살은 한 대 맞을 때마다 신경을 찔린 듯 몸이 잠시 굳었고, 두통 계열의 주문은 공명의 불꽃 부작용을 극대화했다.
그는 물웅덩이를 주시하는 동시에, 해적들을 향해 불의 창을 쏘았다.
“이 바다 구더기들이 끝까지-!”
난전이었다.
* * *
해적왕 아퀼라의 분투는 해적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다.
특히 발렌시아누스가 아퀼라의 마법검 태풍을 경계해 심리전을 걸고, 한번 가까이 다가오게 했던 게 핵심이었다.
해적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놈은 원거리 마법에 특화된 마검사다. 검술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마법과 검술을 함께 쓰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요령은 없어.’
‘성벽 세 개를 뚫어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화력을 낼 수 있지만, 긴 캐스팅과 시약이 필요해.’
‘동굴과 공동…… 우리에게 썩 나쁜 상황은 아니야. 뒤를 잡기도 좋다.’
‘도망갈 거라면 인질이 필요하기는 해. 마침 카리오사와도 떨어져 있고.’
그 오해를 토대로 작전이 세워졌다.
‘일단 저주와 마도구 쇠뇌를 퍼부어서 최대한 발목을 잡고, 어떻게든 상처를 입힌 다음에 물에 던지자.’
‘불꽃 마법은 처음 불꽃을 피울 때는 공기가 있어야 한다고 알아. 일단 물에 던지면 승산이 있어.’
‘아퀼라 님이 이미 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은 물에 안 빠져 죽으니까. 무조건 이길 수 있어.’
여기까지 따라온 해적들은 나름 괜찮은 무장에 마도구 무기까지 차고 있었다.
“가자!”
“으아아아!”
“다 같이 조져!”
날이 넓은 곡도 커틀러스, 날이 좁은 곡도 카타나, 작살, 도끼창, 해전용 한손도끼, 해전용 한손직검…….
무수한 무기가 소년 대공을 향해 쏟아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눈에는 희망이 남아있었다.
“황실의 귀공자께서 우리 같은 해적 놈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난전에서는 우리가 위다!”
“이길 수 있어!”
발렌시아누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흑루와 검은 비늘을 쥐었다.
“과연 그럴까?”
츠카아아악-!
마나 블레이드 두른 흑루가 커틀라스를 잘라 내고, 마법검 검은 비늘이 그 커틀라스를 들었던 해적의 목을 슬쩍 긋는 게 시작이었다.
푸와아악!
‘이렇게 쓰는 거군.’
발렌시아누스는 검은 비늘에 마나를 불어넣어야 할 순간을 정확히 파악했고, 해적의 혈관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도록 했다.
“끄아아악!”
시이이잉!
그의 옆구리를 찌른 작살을 비늘로 흘려 냈고, 구둣발로 해적의 가랑이 사이를 걷어찬 다음, 흑루 손잡이 끝으로 목과 머리 사이를 내리쳐 쓰러트렸다.
“이 많은 굴을 언제 다 뒤질까 막막했는데, 이제라도 모여 주니 고맙구나!”
퍼어엉!
초 근거리에서 불의 창이 터지고, 달려들던 해적들이 바닥을 굴렀다.
“끄으으윽!”
몇몇은 그대로 물웅덩이에 빠져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도 했다.
페이진은 입술을 깨물었고, 슬개골 파열의 저주를 준비했다.
“나의 분노는 언제나 정의로우니……!”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백발 금안의 대공이 붉은 머리 해적을 노려보았다.
“흐.”
“크윽!”
페이진은 그 기세에 압도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그 모습을 동정하듯 피식 웃었다.
순간 그에게 한 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지금. 할 수 있을지도?’
난전은 혼란스러웠고, 혼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의식의 확장이 일어났다.
목덜미를 노리는 철퇴와 다리를 노리는 채찍, 어깨를 향해 떨어지는 도끼창과 정면의 에스토크, 저 멀리서 날아오는 저주가 모두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모든 공간으로 수백 개의 손을 뻗어나간다.
‘이 모든 공간이 내 공간이야.’
마도구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염동력을 사용하는 버릇을 들였던 게 도움이 되었다.
간질간질하고 따끔따끔한 열기가 몸속에서 차올랐다.
‘그러니까 이제 네가 내 말을 들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난 이미 변했고, 이제 네가 적응해야 할 거야.’
“아, 아, 아, 아-!”
수백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파바바박!
발렌시아누스의 양손에서 붉은 결정이 살을 뚫고 튀어나왔다.
“아아아아아-!”
동시에 검붉은 파동이 원을 그리며 사방의 굴로 퍼져나갔다.
완벽한 정신 파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