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페이진은 공동에서 벌어지는 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게 뭐야?’
검붉은 파동이 원형으로 퍼지며 일대를 휩쓸었다.
“크으으윽!”
가장 힘이 센 해적도 그 파동을 버텨내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우르르릉!
동굴 천장이 흔들리고 따개비 조각이 떨어졌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마법사였고, 침식에 대해 일반인들보다는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저건…… 정신 파동이잖아. 사람이 쓸 수 있는 힘이 아니라고!’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거친 숨을 내쉬며 공동 한가운데 서 있었다.
“후아아아.”
그는 약간은 지친 듯 큰 손을 부르르 떨었고, 굵은 땀방울로 백발과 용의 비늘 돋은 뺨을 적셨다.
동시에 즐거운 식사를 마친 듯 만족스러운 눈웃음을 지었고, 무언가 해냈다는 듯한 흐뭇하게 가슴을 폈다.
흙먼지 묻은 제복을 탁탁 터는 손길을 보고 있자면, 긴장감이 확 풀릴 정도였다.
“크윽!”
“방금 뭐였어?”
“다들 일어나! 아직 안 끝났어!”
바닥을 구르던 해적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날아가는 순간 놓쳤던 무기를 쥐었고, 다시 이를 드러냈다.
“아니. 끝났다. 너희는 지금껏 저질러 온 패악질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야.”
발렌시아누스는 여유만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렌지색으로 달아올라 있던 흑루도 늘어트렸고, 검은 비늘도 허리춤에 찼다.
페이진은 그 자신감의 근거를 곧 알아챌 수 있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
선장급 해적 하나가 작살 창을 들고 달려든 순간, 그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화르르륵!
아무런 전조도 없이, 살가죽 아래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아아아악!”
해적은 그대로 연극배우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발렌시아누스는 그를 비웃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리라고? 이제는 웃음이 좀 나오느냐?”
페이진은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화륵! 화르륵! 화르르륵!
발렌시아누스의 정신 파동에 당한 해적들 모두 몸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아아아악!”
“물, 물!”
“안 꺼져!”
그들은 고통스럽게 온몸을 긁었고, 몇몇은 물웅덩이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러나 그 불길은 물속에서도 꺼지지 않았고, 물에 뛰어든 해적은 익사와 분사(焚死)를 동시에 겪는 진귀한 경험의 주인공이 되었다.
“물에 빠져 죽는 동시에 불에 타 죽다니. 지옥에 가서 먼저 간 친구들에게 할 말이 많겠구나!”
발렌시아누스는 바닥을 기는 해적들의 엉덩이를 구둣발로 마구 걷어찼다.
“으하하하!”
미친 자처럼 웃기도 잠시, 그는 검을 들었고, 다시 진중한 표정을 지었으며, 해적들의 목을 하나하나 단숨에 날렸다.
서걱!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걸 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지옥의 끝자락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언젠가 내게도 그날이 찾아오면, 천사들이 내 손을 잡고 천국으로 인도할 테니까. 그 광경을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페이진은 그 광기에 혀를 내둘렀고, 한 해적 제독이 고통을 이겨내며 외쳤다.
“네놈도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발렌시아누스는 그에게 조소를 지어 보였다.
“난 살아서는 황제의 쌍둥이고, 죽어서는 성자의 은인인데, 내가 왜 지옥에 떨어지겠느냐? 내가 기부한 돈으로 교회를 수십 개나 지었으니, 난 마땅히 천국에 갈 것이다.”
해적 제독이 혀를 내둘렀고, 발렌시아누스는 연극적으로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오늘, 자비의 미덕과 기부의 미덕을 모두 실현하겠다. 네놈들의 고통을 덜어 주니 자비고, 네놈들의 재산을 교회로 환원할 테니 그게 기부지.”
해적 제독은 끝까지 발렌시아누스를 노려보았고, 발렌시아누스는 그에게도 빠른 죽음을 선사했다.
“내게 감사하는 게 좋을 거다. 카리오사는 너희를 굶겨 죽이려 했을지도 몰라. 어쩌면 어인족 사냥 미끼로 썼을 수도 있고.”
서걱.
제독의 목이 바닥을 굴렀고, 그는 이내 페이진을 바라보았다.
사아아아
세로 동공이 페이진을 꿰뚫었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죽는다.’
그러나 다리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발렌시아누스가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페이진은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이며 주저앉았다.
그 순간 발렌시아누스의 왼쪽 뒤 물웅덩이에서 아퀼라가 튀어 올랐다.
촤아아악!
넓은 모자챙 위에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페이진-!”
사아아악!
마법검 태풍에서 자라난 바람 칼날이 사납게 울부짖었고, 단숨에 떨어져 내렸다.
망나니의 목을 날려버리기 충분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그가 솟아오른 그 순간부터 웃고 있었다.
“잡았다.”
* * *
난 아퀼라가 계속 내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을 걸 알았다.
소드 엑스퍼트는 20분도 넘게 숨을 참을 수 있었고, 부하들이 떼로 몰려와 내 주의를 돌리고 있었으니, 한 방을 노릴 게 당연했다.
육식동물을 사냥하기 제일 좋을 때는 자기가 사냥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였다.
난 방금 해적 수십을 불태워 죽였고, 이제 남은 적은 수도 아카데미 생도들보다도 한참 못한 수준의 마법사뿐이니, 객관적으로 승기를 잡은 상황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 방심했을 거고, 꼼짝없이 아퀼라의 공격에 당했을 거다.
하지만 난 아까부터 놈을 계속 경계하고 있었고, 놈은 내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순간에 나타났다.
타앗!
왼발로 힘껏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고, 허공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크게 돌며, 오른발 발뒤꿈치로 아퀼라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후욱!
텐티아 경이 대련에서 내게 했던 발차기였다.
퍽!
신발 밑창 아이젠 마도구가 놈의 흉갑과 부딪쳤고, 신발 밑창이 놈의 흉갑과 부딪힌 반동이 전해져 왔으며, 아퀼라의 몸이 허공에서 뒤로 기울었다.
난 승리의 미소를 지었고, 그대로 다리에 힘을 주어 아퀼라를 찍어 눌렀다.
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얼핏 보였고, 푸른 제복이 솟아올라 놈의 얼굴을 가렸다.
쾅!
놈이 물웅덩이 가장자리로 내리꽂혔다.
“커억!”
쩌저저적!
두꺼운 돌바닥에 굵은 금이 내달리고, 아퀼라의 다리가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둘 다 물에 빠졌다면 놈이 유리했다.
놈은 입에 산호로 만든 작은 호각을 물고 있었는데, 저건 ‘인어의 입맞춤’이라는 마도구로,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겠다.
회귀 전에 유스티아누스가 저걸 이용해서 운하를 이용해 수도 안으로 침투했던 적이 있었다.
아퀼라가 저걸 가지고 있던 이상, 놈과 물속에서 싸운다면 필패이리라.
하지만 내가 굳이 물 속으로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난 지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
첨벙!
나는 수면 위에 당당히 서서, 물웅덩이 가장자리에 양손을 짚고 있는 놈을 내려다보았다.
챙 넓은 모자 아래 머리카락이 늘어졌고, 축축한 바닷물이 뺨에 눈물처럼 흘렀으며,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속았네. 천한 선상 노예처럼.”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악랄한 표정을 지으며 흑루를 쳐들었다.
아퀼라의 눈에 핏발이 솟았다.
“발렌시아누스!”
놈은 그 와중에도 마법검 태풍을 놓치지 않고 있었고, 단숨에 베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난 소드 마스터 엔시스를 상대로 이와 같은 공격을 당해본 바 있었다.
“두 번 당하느니 내 머리를 내가 깨고 말지!”
사악!
제때 허리를 뒤로 젖히며 피했고, 투명한 바람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내 코끝을 스쳤다.
사아악-!
난 흑루를 베어 올려 놈의 팔을 잘랐다.
붉은 핏방울이 튀고, 마법검 태풍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왼손을 뻗어 태풍의 자루를 잡아채는 동시에, 흑루를 한 번 더 휘둘러 ‘인어의 입맞춤’에 엮여 있던 가죽끈을 잘랐다.
“아아아악!”
아퀼라가 제 팔을 보고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질렀고, 난 ‘인어의 입맞춤’까지 빼앗았다.
“넌 만족을 몰랐어.”
“흐으으윽, 흐윽!”
놈이 신음성을 흘리며 날 노려보았다.
흑륜 짙은 눈이 꼭 내 것 같았다.
“해적왕을 자칭했지만, 영지를 경영해본 적도 없고, 대규모 육상전을 치러본 적도 없고, 외교도 행정도 몰랐지.”
“감히 날 노예라고…….”
“네가 이 꼴이 된 이유는, 능력에 비해 과분한 야심을 가지고 있어서야. 가장 불행한 유형이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유형.”
“나도 황실에서 태어났으면…….”
“멋지게 입고 멋진 말을 한다고 왕공 귀족이 되는 게 아니야. 그거 알아? 충성 맹세 때 선단을 이끌고 황실 항구로 가서 항복하겠다고 했으면, 넌 황실의 제독이 될 수도 있었어.”
“……!”
내가 만족을 몰랐다면, 진작 제이릴리스에게 목이 베였겠지.
마테오스가 만족을 몰랐다면, 신성 제국 운운하다 운석을 맞았겠지.
제이릴리스가 만족을 몰랐다면, 회귀 전처럼 전쟁을 일으켰겠지.
그녀도 만족을 아는데, 너 따위가 감히?
“우리는 야심가를 사랑하지만, 나대는 놈들을 싫어하지. 해적 경험을 살려서 어디 대영주 밑으로라도 들어가 용병 노릇을 하거나, 동방 왕국이랑 손잡고 닻 군도 개간에 힘쓰거나. 이미 몇 년 전에 둘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어.”
“!”
“하지만 넌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게 네가 여기서 나한테 죽는 이유야.”
아퀼라가 멀쩡한 왼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마 단검 같은 걸 꺼낼 생각인 듯했다.
콰직!
난 놈의 흉갑을 짓밟았고, 놈을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 * *
부그르르!
놈이 수면 아래에서 당황과 안도감이 공존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드 엑스퍼트의 생명력 덕에 놈의 팔에서는 이미 피가 멈췄다.
이대로 물속으로 들어간다면 도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놔둘 거 같아?”
이건 죽음이 아니라 처형이었고, 처형은 상징적이어야 했다.
아까는 물웅덩이인 줄 알고 물웅덩이를 증발시킬 정도의 힘을 썼지만, 바다라는 걸 안 지금은 달랐다.
의지로 불꽃을 피워 올린다.
화르르륵!
새빨간 불꽃이 내 주변에서 이글이글 타올랐고, 난 그 열기를 모두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후우우욱!
곧바로 수증기가 솟아올랐고, 놈이 적잖이 당황한 듯 눈을 부릅떴다.
아퀼라가 다른 물웅덩이 쪽으로 나오려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기가 퍼지는 게 더 빨랐다.
화르르륵!
수증기가 맹렬히 치솟고, 공동에 있는 모든 물웅덩이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퀼라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어리석은 놈.”
방금 끓인 물의 양은 상당했지만, 바다 앞에서는 한 방울에 불과했고, 잠시 후에는 약간 따듯한 정도로 식었다.
피 냄새를 맡았는지, 따듯한 물에 이끌려 왔는지, 크고 작은 상어들이 내 발아래로 몰려들었다.
“왕은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건데.”
신민을 돌보고, 영토를 지키고, 법규를 세우다 보면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왕으로 추대한다.
선상 노예에서 시작해 이렇게 거대한 세력을 일굴 정도면, 악인일지언정 무능한 자는 아니었다.
난 악인을 좋아하지 않지만, 대공이란 작위와 위태로운 세상은 유능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놈을 몰락시킨 건, 카리오사나 내가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도 모르는 놈 자신이었다.
나는 가라앉은 아퀼라에게 등을 돌렸고, 한쪽 굴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해적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몇몇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몇몇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으며, 한 명은 날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회귀 전부터 몇만 번은 받아 본 시선이었다.
두려움과 분노가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겠지.
“우리 본 적이 있군. 몇 시간 전에 세 번째 성벽에서 만나지 않았나?”
내게 저주를 퍼부었던 상대는 붉은 머리에 갈색 피부를 가진 육감적인 미인이었다.
“애인이었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날 좋아하는 사람을 다 잃었어.”
“둘 다 내 손이었군. 그런데 날 조금 더 공손하게 대해주면 좋겠다. 난 대공이라고.”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좋아. 아니, 좋습니다.”
난 오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원한다면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
그녀의 눈빛에 잠시 분노가 차올랐다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항복하겠습니다. 해적 제독 페이진의 이름으로 요새 문을 열도록 하지요. 이제…… 그만하고 싶네요.”
“난 이 땅에서 항복한 사람을 처리할 권한이 없다. 일단 요새로 돌아가서 백기부터 올리도록. 귀중한 마법사니,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페이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그걸 바랄 거 같습니까?”
나는 비릿한 웃음으로 받아쳤다.
“바라지 않으니 그렇게 될 거다. 너희 해적들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을 운명이니까.”
* * *
페이진을 그 자리에 놔두고 카리오사에게 돌아갔다.
“끼에에에!”
“숙회로, 만들어주마!”
그녀는 막 문어 수호자 하나를 반으로 찢는 중이었다.
그녀가 마법검 폭풍을 휘둘러 바람 칼날을 날려대며 외쳤다.
“발렌시아누스! 마침 잘 왔다! 저 새끼 잡아!”
“저 새끼?”
“쪽빛 사제인가 뭔가 하는 놈이다! 잡아!”
동부 기사들이 어인족과 뒤엉켜 싸우는 가운데, 요새 위쪽으로 푸른 덩굴무늬 사제복을 입은 놈이 달려가고 있었다.
“알았다. 바로 가지!”
나는 땅을 박찼고, 카리오사가 내 등에 대고 외쳤다.
“아퀼라는?”
“삶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