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12)화 (312/340)

(312)

나는 회귀 전부터 정신 파동을 아주 많이 얻어맞았고, 이제는 정신 파동을 쓸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정신 파동의 전문가라는 거다.

일반적으로 정신 파동을 통한 침식은 다음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옛것의 기운이 섞인 저주파 또는 고주파가 정신을 변질시키고, 변질한 정신이 옛것과 이어지고, 정신을 타고 들어온 힘이 육신을 변이시킨다.

즉, 육신보다 영혼이 먼저 변한다는 말이다.

쪽빛 사제의 노래는 달랐다.

“RA- RaRaRa, RaRaRa-.”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정신과 육신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정신 쪽을 파고드는 목소리를 뿌리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끄윽!”

이를 악물며 눈을 부릅떴지만,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시시각각 느낄 수 있었다.

언덕을 내려오던 해적들이 하나둘 눈이 풀렸다.

“형님, 형님.”

“어어어어…….”

“헤헤헤, 헤헤헤헤.”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놈들이 들고 있던 창과 칼을 떨어트렸고, 기절한 듯 바닥으로 넘어졌다.

푸욱!

“끅!”

자기가 들고 있던 칼 위로 쓰러져 다치는 자도 있었고.

풍덩!

“꼬르르륵…….”

언덕을 길게 미끄러져 내려가 바다로 빠진 자도 있었다.

나는 황당하고 황망한 기분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비가 미친 듯 쏟아지고 하늘이 사납게 울부짖는 가운데, 해적들이 몸을 굳히며 넘어졌고,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가 바다에 빠졌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을 뒤따라갈 듯했다.

“세상.”

마나를 운용하려 했지만, 이미 몸이 굳었다.

철푸덕!

나는 통나무처럼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 내렸다.

하얀 제복에 흙물이 들고, 가시 돋은 잡목을 몇 번이나 들이받았으며, 얼굴을 진흙탕에 처박았다.

젠장.

그때 내 눈에 하얀 백금 갑옷이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게 보였다.

쾅, 우당탕!

“……경.”

텐티아 경이 양손에 선장급 해적 둘을 움켜쥐고 바다를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기계 갑옷에는 대 정신 파동용 ‘정화의 열선’이 들어가 있었지만, 백금 갑옷에는 그런 기능이 없었다.

텐티아 경은 침식자 대주교와 정면으로 싸웠을 만큼 강력한 정신력을 가진 기사였지만, 황족인 나도 몸이 굳어버린 판에, 그녀가 날 구해주는 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촤아아악!

미끄러지는 속도로 봐서 텐티아 경은 확실히 바다에 빠질 듯했다.

이 속박이 언제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20분 이상이라면 텐티아 경도 위험했다.

그녀는 자기가 30분까지 숨을 참을 수 있다고 했지만, 3m에 육박하는 절벽을 물속에서 갑옷 차림으로 기어오르는 건 힘들 것이 분명했다.

내 주머니에는 인어의 입맞춤 부적이 들어 있었지만,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속도로 봐서, 나 역시 바다에 빠질 듯했다.

난 숨을 20분이나 참을 수 있겠지.

저 파도 아래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른다.

그녀는 언제나 날 위해 죽겠다고 했었다.

젠장!

난 언제나 남의 운명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나는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파문당할 수준의 욕설을 신과 운명을 향해 퍼부었고, 손가락 하나를 애써 움직여 땅속에 꽂았다.

가로로 내려가던 몸이 세로로 돌아갔고, 난 눈 쌓인 산에서 판자를 타듯 빠르게 미끄러졌다!

촤아아악!

난 텐티아 경을 따라잡는 데에 성공했고, 모든 정신력을 쥐어짜 제복 주머니 속에서 ‘인어의 입맞춤’을 꺼냈으며, 그녀의 투구 면갑을 들추고 그 안에 밀어 넣었다.

“전, 하!”

그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받지 않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허튼, 소리 말게.”

나는 그녀의 코를 막았고, 반사적으로 그녀의 입술이 벌어진 순간 부적을 물렸다.

날 위해 죽겠다는 사람을 죽게 놔둘 수 없었다.

철컥.

내가 다시 그녀의 면갑을 내린 그 순간, 우리는 언덕 아래에 다다랐다.

촤아아악!

텐티아 경은 미끄러지던 속도 그대로 붕 떠올랐고, 두 해적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

풍덩, 그리고 끼이이익!

나는 간신히, 정말 간신히 바다 앞에서 멈췄다.

양다리가 절벽 아래로 내려가 덜렁거렸다.

곧이어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쳤다.

쏴아아악!

나는 내 머리 위를 뒤덮는 물보라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촤아아아.

바닷물은 차고 축축했지만, 그래도 얼굴에 묻은 흙은 닦아 주었다.

아직도 밀물이 한참이었다.

점점 발밑이 젖어 가고, 손가락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파도가 더더욱 높게 치솟았다.

이윽고 내 몸이 언제나 반쯤은 잠겨 있을 정도로 물이 차오른 순간, 누군가 날 질질 잡아끌었다.

“난 완전히 망했어.”

놈은 제복 차림이었고, 안대를 찼으며,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비 때문에 엉엉 우는 듯 보이기도 했다.

“다 네놈 탓이야. 발렌시아누스. 도망치기도 글렀으니, 복수라도 해야겠군.”

후욱!

놈이 날 언덕에 던졌고, 단검을 빼 들었다.

제독급이었는지, 단검 위로 옅은 연두색 마나 블레이드가 어렸다.

사아아아!

평소였다면 10초도 안 지나서 목을 뽑아 버릴 상대였지만, 지금 내 움직임은 아흔 노인보다도 느릿했다.

“세상.”

콰득.

놈이 내 팔을 잡고, 내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댔다.

단검에는 톱날 같은 날이 나 있었고, 나는 다행히도 아까 둘렀던 비늘을 거두지 않았다.

카드드득, 카득!

놈이 천천히 내 목을 켜기 시작했다.

불꽃이 튀고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짓, 치지직!

몸 상태가 조금씩 괜찮아졌다.

생각보다는 빨리 회복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불꽃을 피워 올리려 애쓰며 놈을 노려보았다.

“도망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 텐데.”

놈이 한쪽 남은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러다 허망하게 죽으라고? 난 내 배와 부하들을 다 잃었어. 죽을 거면 복수라도 하고 죽어야지.”

나는 놈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퉤!

“네 배가 아니라 네가 빼앗은 배겠지.”

놈이 내 뺨을 쳤다.

짝!

반드시 끔찍하게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놈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내 뺨을 쳤으니 지옥에서 자랑할 만할 거다.

“내가 빼앗았으면 내 배지!”

놈이 다시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난 놈의 등 뒤를 보았다.

절벽 가장자리에 하얀 건틀릿이 올라왔다.

콰득.

아직 몸 상태가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은 듯 손이 떨리고 있었다.

놈이 뒤돌아보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고, 나는 다시 놈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퉤!

“이 어린 게-.”

해적 제독이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였고, 나는 진심으로 비웃었다.

“이 천한 게.”

쏴아아악!

그때 큰 파도가 쳤고, 텐티아 경이 파도를 타고 절벽 위로 올라섰다.

쏴아아아-.

갑옷 사이에서 바닷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붉은 망토가 축 늘어져 등에 달라붙었다.

카드드드득! 카득!

해적 제독 놈은 텐티아 경이 올라온 걸 모르고 계속 내 목 비늘을 단검으로 긁고 있었다.

텐티아 경이 놈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어, 어어!?”

“감히 황족을 공격했으니, 네놈의 영혼은 바다 아래 괴물들에게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그녀는 놈의 팔다리를 뚝뚝 부러트리고 바다에 던져버렸다.

* * *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언덕 위로 올라갔다.

도시와 항구가 모두 내려다보였다.

“경. 고맙네.”

“전하! 다음부터는 본인 몸부터 챙기십시오! 만약 같이 빠지셨다면 전하는 익사하실 뻔했습니다.”

텐티아 경은 붉은 악마처럼 화를 냈다.

나는 쩔쩔매며 그녀를 달랬다.

“나도 20분 정도는 숨을 참을 수 있네.”

“갑옷도 안 입고 있으시잖습니까? 저 아래는 암초 때문에 파도가 칠 때마다 몸이 갈립니다.”

“대신 난 용의 비늘을 두르고 있지. 이것 보게. 한 장도 안 잘렸어.”

“자랑이십니다! 절 주군 덕에 살아남은 기사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그런 기사는 살아있는 게 지옥입니다! 절…… 기다리는 쪽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난 쓰게 웃으며 젖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올렸다.

농게 무사의 끈적한 피는 모두 닦여 나간 지 오래였다.

내가 침묵으로 이해를 표하자, 텐티아 경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도시와 항구, 삼중 성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까 그 노래. 다시 당하면 버틸 수 있겠나?”

“예. 전하. 대단한 마력이기는 했지만, 방심했던 게 컸습니다. 거리를 조금만 둬도 효과가 덜해질 겁니다.”

“그래. 그럼 끝을 내도록 하지. 동부 병사들은 다 어디 있나?”

텐티아 경이 손가락을 꼽으며 답했다.

“일단 요새 아래에서 올라온 어인족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군. 생각보다 많이 온 모양이야.”

“동쪽에서 따개비에 침식된 죄수 수천 명이 몰려와 그들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 왜 안 나오나 했지.”

“도망친 해적들을 추격하기 위한 추격대도 꾸렸습니다.”

“……그럼 항구에는 누가 남았나?”

텐티아 경이 얼굴을 굳혔다.

그때 삼중 성벽 사이를 달리는 그림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곳을 가리켰고, 텐티아 경은 침음성을 흘렸다.

쪽빛 사제가 항구를 향해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 * *

나와 텐티아 경은 항구를 향해 미친 듯 달렸다.

“더 빨리!”

“예. 전하!”

중간중간 길바닥에 드러누워 히죽거리고 있는 병사들이 여럿 보였다.

동부 병사들은 최고의 정예병이었지만, 쪽빛 사제의 노래는 나와 텐티아 경마저 쓰러트릴 정도로 강력했다.

기사들이 어인족, 침식 죄수들을 상대하려 사라진 상황에서 병사들만으로 놈을 잡을 수는 없었다.

“저쪽입니다!”

“나도 봤네.”

놈은 카리오사의 상륙선이 가득한 선착장이 아니라, 만 가장자리에 길게 이어진 방파제 앞으로 달렸다.

치렁치렁한 로브 자락 사이에서 하얀 다리가 엿보였다.

쪽빛 사제가 방파제 위로 올라가더니, 뭐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머니시여. 이 딸을 굽어 살펴-.”

나는 단숨에 불의 창을 불러냈다.

“척추를 구부러트리고, 가마솥에 넣어 주마!”

쐐애애액!

불타는 창이 허공을 날았고, 쪽빛 사제가 몸을 날려 피했다.

“꺄악!”

퍼어어엉!

그러나 불의 창은 그대로 폭발해 불의 파도를 일으켰고, 쪽빛 사제를 휩쓸었다.

놈이 몸을 부르르 떨었고, 텐티아 경이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타악!

한손검 만하에서 새빨간 마나 블레이드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네놈이 마지막이다!”

그때 방파제 위로 무언가가 올라왔다.

턱.

그건 하얀 바탕에 보라색 무늬가 있는 불가사리의 발이었다.

꽤 예뻐서 잘 말리면 바닷가 분위기의 커피하우스에서 장식으로 써도 될 듯했다.

보통 불가사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촉수 하나가 2m도 넘었다.

꾸물, 꾸물꾸물.

방파제 전체에 거대한 불가사리들이 올라왔다.

하얀 바탕에 보라색 무늬가 얼룩말 떼처럼 이어졌다.

호기롭게 달리던 텐티아 경이 멈칫거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발렌 전하. 이거 피곤하겠습니다.”

지름이 4m도 넘는 괴물 수백, 어쩌면 수천 마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꾸물, 꾸물꾸물.

그 모습은 그 자체로 섬뜩했다.

쪽빛 사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후드 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방 먹었지? 하고 웃는 것 같았다.

난 그 웃음을 증오했다.

“감히!”

괴물 주제에, 범법자 주제에, 배신자 주제에.

다 죽이기 힘들어 살려주는 건데, 여태껏 살아남은 게 자기들 능력인 줄 알고, 우리가 자기들을 못 잡는 줄 알아?

난 자유로운 척하며 우리 기사들을 비웃는 인두겁 쓴 괴물들을 진심으로 경멸했다.

마법검 폭풍을 쥐었고, 마나를 잔뜩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일순 바람 칼날이 채찍처럼 길게 늘어났다.

“텐티아 경! 머리 숙이게!”

용언의 불길과 마나 블레이드를 바람 칼날에 실었다.

화르르륵!

불길 칼날 채찍이 수십 수백m 길이로 늘어났다.

“다, 목을 쳐주마!”

채찍에 마나 블레이드를 실어 일격에 다수를 베는 기술을 태풍의 눈이라 한다.

불꽃 태풍의 눈.

츠카아아아아악-!

불길 칼날 채찍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방파제 위를 넓게 쓸었다.

화륵, 화르륵, 화르르륵!

괴물 새끼들이 칼 앞 푸딩처럼 잘려 나갔고, 그을린 단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구 꾸물거리며 비틀거리는 모습이 볼만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나는 망나니답게 웃으며 불길 칼날 채찍을 휘둘렀고, 쪽빛 사제를 바라보며 눈을 치떴다.

놈이 여유만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촤아아악-!

다음 순간 방파제 너머에서 괴물이 솟아올랐다.

“워어어어!”

촤아아아-!

괴물이 일으킨 파도가 요새보다 높게 치솟았고, 하얀 물방울이 우수수 떨어졌으며, 그 사이에서 불그죽죽한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어의 머리와 긴 촉수, 인간을 닮았지만 불그죽죽한 색상의 몸통, 물갈퀴, 촉수 달린 손발.

아까 싸웠던 어인족 문어 수호자였다.

키가 40m쯤 된다는 걸 빼면 정말 똑같이 생겼다.

번쩍!

내 몸뚱이보다 큰 까만 눈 네 쌍이 밤바다를 배경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꾸물럭, 꾸물럭!

다시 방파제 위로 불가사리 이물들이 기어올랐다.

난 헛웃음을 흘리며 텐티아 경을 바라보았다,

“저 괴물을 죽이라 명하면 못된 망나니 주군이겠지?”

텐티아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고 다른 기사에게는 그런 명령 하지 마십시오.”

화르르륵!

그녀의 검에서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타올랐다.

“제가 받을 명령도 모자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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