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문어 거인 수호자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몰아오며 몸을 일으켰다.
“워어어어어-!”
쿵! 쿵!
아름드리나무 기둥 같은 양 팔이 방파제 위로 놓이고, 촉수로 된 수염과 머리카락이 수천 사람이 동시에 아우성치듯 떨렸으며, 네 쌍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부리 같은 아가리가 겹겹이 벌어지고, 흉측한 목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수호자가 몸을 일으키며 생긴 파도가, 그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휩쓸어 버릴 듯한 기세로 덮쳐왔다.
쏴아아아!
꾸물럭꾸물럭!
파도를 타고 올라온 수백 수천 마리의 이물 불가사리들은 덤이었다.
제일 용감한 모험가도 검과 창을 내던지고 도망칠 만한 광경이었다.
철걱!
그러나 텐티아는 투구 면갑을 내리고, 보검 화한을 앞으로 겨누었다.
쏴아아아!
미친 파도가 기사의 몸을 거세게 두드리고, 망토와 투구 리본을 축 늘어트렸지만, 그녀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발렌 전하가 쪽빛 사제를 잡을 거다. 난 그때까지 저 괴물 놈이 발렌 전하를 공격하지 못하게 막는다.’
쉬이이익!
파도 속에서 불그죽죽한 촉수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빠르게 튀어나왔다.
말이 좋아 촉수지, 술통보다도 두꺼운 굵이였다.
텐티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츠카아악-!
보검 화한이 촉수를 길게 긋고, 촉수가 쏘아져 오던 그 기세 그대로, 칼날을 들이받은 소시지처럼 잘려 나갔다.
“취이이익!”
문어 거인 수호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몸을 떨었고, 거대한 손을 들어 올렸다.
후우우욱!
폭풍우 치는 하늘에 번갯불이 번뜩이고, 여덟 촉수가 달린 손의 그림자가 텐티아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텐티아는 제국 검술 6단계, 자성분별(自性分別)을 펼치며 그 손을 기다렸다.
사아아아-!
있는 그대로 베어내는 경지.
모든 두려움과 떨림이 눈 녹듯 사라지고, 그녀의 눈에 거대한 손과 살집 두툼한 손목을 연결하는 관절만이 보였다.
쾅-!
거인 수호자의 손이 방파제 중간을 완전히 으스러트렸다.
바위에 가까운 크기의 돌덩이가 튀고, 여덟 개의 촉수가 사방팔방으로 날뛰며 일대를 초토화했으며, 으스러진 틈 사이로 바닷물이 철철 흘러들어왔다.
“하아!”
텐티아는 그 돌덩이를 피하고, 여덟 촉수 중 둘을 잘라 냈으며, 으스러진 돌다리 사이 위태로운 바닥을 단단히 디뎠다.
그녀의 붉은 눈에 담긴 건 괴물의 손목이었고, 그녀의 귀가 잊은 건 발렌시아누스와 쪽빛 사제의 주문이었으니, 그녀의 검에 타오르는 마나 블레이드에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우우우웅!
텐티아가 문어 수호자의 손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츠카아아악-!
수호자의 몸은 열 겹 방패보다 질겼지만, 텐티아의 검은 뼈를 자르고 근육 사이를 파고들었으며, 핏줄과 신경을 사정없이 잘라냈다.
“심연으로 돌아가라!”
그녀는 아예 문어 수호자의 손 위로 올라가 손목을 그어댔다.
쐐액! 쐐애액! 쐐애애액!
수호자의 수염에서 자라난 다섯 촉수가 그녀를 노리고 날아왔다.
텐티아는 화한을 오른손만으로 잡고, 왼손으로 만하를 뽑았다.
화르르륵!
불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용골 검이 마나 블레이드에 휩싸였고, 텐티아는 그 검을 하늘로 베어 올렸다.
사아아아-!
초승달 같은 마나 블레스트가 날아 올랐다.
촤아아악!
조각난 촉수가 바닥에 뚝뚝 떨어져 꿈틀거렸다.
쏴아아아!
“위어어어!”
미친 파도와 비바람이 울부짖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괴물이 사방에 가득한 가운데, 텐티아는 두 자루 검을 쥐고 주군의 앞을 막아섰다.
“기사는 홀로 죽지 않고!”
“싸워라! 용감한 전사야! 언젠가 죽겠지만, 이름은 영원히 남으니!”
“내 몸은 황실 묘지에 남을 것이고, 내 영혼은 천국에 갈 것이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어릴 적 읽던 책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 * *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가 문어 거인 수호자와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경. 더 강해졌군.’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칠 사람 하나 없었고, 무너질 천장도 없었으며, 든든한 아군 하나를 빼고는 모두 적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용언의 힘과 정령의 힘, 아즈의 힘을 동시에 사용했다.
우드드득!
황족의 세련미와 품격으로 넘치던 그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고, 양쪽 관자놀이에서 길고 검은 야만적인 뿔이 솟아올랐다.
그 눈동자 역시 용처럼 세로로 갈라졌고, 잠시 손등 위로 붉은 결정이 솟았다 내려앉았다.
변화의 반동을 아즈의 안정으로 상쇄하고, 그는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너희 바다 쓰레기들을 불로 정화하겠다! 바싹 말려 거름으로나 쓸 괴물들아!”
화르르륵!
새빨간 불길이 우우 일어났다.
불길이 거대한 고리를 그리며 넓게 퍼져나갔다.
도로이센과 인스트루멘툼 경계에서 500m 화염 폭풍을 일으켰던 그 힘이었다.
펑! 펑! 펑!
불가사리 괴물들은 불길에 닿기만 해도 온몸이 타오르며 터져 나갔다.
미친 듯 퍼붓는 비도 하늘을 가릴 듯한 파도도 그 불길로부터 괴물들을 지켜 주지는 못했다.
그는 신성한 분노의 화신이 되어 쪽빛 사제를 향해 나아갔다.
“이번 원정에서 원래 내 역할은 카리오사 옆의 장식이었어. 그런 날 이런 괴물 새끼들과 싸우게 만들어? 이미 죽은 자를 부러워하게 해 주마!”
쪽빛 사제의 후드 속 어둠이 거칠게 일렁였다.
쪽빛 사제가 다시 노래했다.
“Ra- RaRaRaRa. RaRaRa. RaRaRa.”
발렌시아누스는 정령의 불길로 상쇄하려 했지만, 이번 이변은 바다에서 일어났다.
“!”
촤아아아-!
낮게 솟아오른 파도가 마치 문 같은 형태를 이루었고, 빙글빙글 돌며 푸르게 빛났다.
바닷속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 듯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게 무슨 마법인지 알고 있었다.
‘해류의 문? 안 돼.’
해류의 문은 게스타르테의 섬광 이동에 버금가는 빼어난 이동 마법이었다.
진작 잊힌 마법인지라 회귀 전에도 인간이 쓰는 건 보지 못했고, 몇몇 엘프와 인어, 그리고 유스티아누스가 썼을 뿐이었다.
쪽빛 사제가 계속 노래했다.
“RaRaRaRaRaRa-.”
문이 점점 더 안정되어가는 동시에, 푸른 기운이 우우 일어나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아아아!
화르르륵!
용언과 정령으로 버려진 불길도 푸른 기운을 상쇄할 뿐이었다.
치이이익!
발렌시아누스는 쪽빛 사제의 후드 속을 노려보았다.
‘상쇄? 충돌도 아니고 상쇄? 이 세상에 제대로 적응한 옛것인가? 위험한데?’
그 ‘적응’은 이 세상의 법칙을 따르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법칙을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정서적 적응은 지난번 싸웠던 대주교처럼 이 세상 사회를 이용할 줄 알게 되는 것이었고, 물리적 적응이 눈앞의 예였다.
“솔레타라스.”
아득한 부름이 들려왔다.
발렌시아누스가 쿠이즈 아즈를 떠올릴 만큼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그때는 독인 걸 알고도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목소리였다면, 지금은 이게 왜 독이냐고 되묻고 싶어지는 달콤한 목소리였다.
“이 세상은 너희의 게 아니야.”
“크윽!”
“우리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닥쳐!”
“폭풍의 딸? 이 섬의 왕이 되겠다고? 웃기지도 않지. 네 교만한 애인은 아무것도 몰라.”
“닥치라고 명령했다!”
“이 세상은 너희들 것이 아니야!”
아찔한 미성이 소년 대공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그 미성에서 몹시도 거슬리는 단 한 단어를 알아챘다.
화르르르르-.
불가사리 이물들과 쪽빛 사제를 완전히 불태울 듯 다가오던 그가 멈춰 섰다.
그가 잠시 고개를 숙였고, 도도한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쪽빛 사제는 일순 안도했고, 해류의 문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아직 안 끝났어. 동방 대륙에서 지원을 받아내고, 해적 잔당을 규합하고, 어인족과 힘을 합치면…….’
“……그래. 이 세상은 우리 게 아니지.”
발렌시아누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쩍, 쩌적.
그의 양손에 갈라진 도자기 같은 금이 내달렸고, 그 사이에서 붉은 수정 결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 세상은 제이릴리스 거야. 모두 다 그 애 거라고.”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고, 수천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듯 다른 높낮이로 울렸으며, 그의 양손에서 튀어나온 수정 결정도 웅웅 울었다.
지이이잉-!
“초대 솔레타라스는 옛것으로부터 이 세상을 지키겠다 맹세했고, 그 대가로 제국의 통치권을 얻었지. 그 뒤로 우리는 천 년간 각지의 대영주들에게 고귀한 충성을 받아왔어. 그녀 역시 47번째로 맹세하고 맹세를 받았지. 쟁취했고, 앞으로 살아갈 방법대로 책임졌어. 그러니 이 세상은 오로지 그녀의 것이야.”
쪽빛 사제의 후드 속 어둠이 요동쳤다.
역린을 제대로 긁힌 듯했다.
“……온갖 피가 섞여 만들어진, 역겨운 괴물들 주제에!”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살기가 어려 있었다.
발렌시아누스의 눈빛에 총기가 번뜩였다.
“그리고 그녀가 책임을 지는 방법이 나야. 그녀한테 권리가 없다고 질질 짜는 놈들을 죄다 목을 쳐서 장대에 걸어 놓는 거지. 난 황제의 망나니라고.”
“천형으로 쇠락할 것들이, 잘난 척-!”
그는 그가 섬에 온 목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말했다.
“난 이 섬에 있는 모든 괴물 새끼들을 죽일 거고, 내가 동경하는 카리오사가 이 섬을 먹도록 도울 거야. 그리고 그렇게 동부가 조용해지면 이종족과 침식자, 남방대륙을 정리할 거고.”
‘그래. 이제 네가 내 말을 들어.’
철거덕.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자연스러운 변화가 다시금 찾아왔고, 동시에 변하지 않는 영역에 선이 그였다.
시간이 되돌아가고, 뿔과 비늘이 돋고, 손발이 반투명해지고, 결정이 솟는다 한들, 그는 황제의 망나니였다.
‘이거면 충분해.’
“그녀가 마땅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할 거고, 그 밑에서 영원한 영화를 누릴 거야.”
쪽빛 사제가 하늘을 우러러 노래했고, 발렌시아누스가 정신 파동을 터뜨렸다.
“RaRaRaRaRaRa-!”
“아, 아아아아아아아-!”
푸른 파동과 황금빛 파동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폭풍 몰아치는 밤바다에 푸른 빛과 황금빛이 번뜩였다.
쩌저저저저적! 쩌적, 쩌저저적!
사방에서 유리창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끼에에엑!”
“크오오오!”
불가사리 괴물들과 문어 거인 수호자가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빈틈.’
“하!”
텐티아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문어 거인 수호자의 팔꿈치에 올라섰고, 재차 뛰어올라 눈높이까지 올라섰으며, 만하를 휘둘렀다.
츠카가각-!
마나 블레스트가 쏘아져 나가고, 문어 거인의 눈 세 개가 터져 나갔다.
파바바박!
수호자가 하얀 피를 줄줄 흘리며 뒤로 쓰러졌고, 거센 파도가 일어 방파제 위를 덮쳤다.
촤아아악!
“이번에야말로 자유를!”
“이 세상은 폐하의 것이다!”
비틀거리는 쪽빛 사제와 바닷물을 마시면서도 버티는 발렌시아누스가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와장창!
마지막 파공성과 함께 해류의 문이 무너져 내렸고, 쪽빛 사제가 후드 아래에서 피를 왈칵 토했으며, 기절하듯 바닥으로 무너졌다.
“커헉!”
발렌시아누스가 위풍당당하게 다가가 쪽빛 사제의 로브를 잡아 뜯었다.
“너희는 언제나 역겨운 살덩어리처럼 변하지. 정신과 육체가 합일을 이뤄서 그런 거라면, 분명 너희 정신은 그렇게 추악하다는 뜻일 거야.”
뚜드드득!
“넌 얼마나 끔찍하게 생겼는지 보자.”
고위급 인식 저하 마도구인 로브는 잠시 버텼지만, 그의 힘을 버텨 낼 수는 없었고, 끝내 그 주인의 얼굴을 드러냈다.
번쩍!
때마침 하늘에 번개가 치고, 발렌시아누스는 쪽빛 사제의 온몸을 선명하게 보았다.
“……흡!”
그가 양어깨를 부르르 떨며 당황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상상보다도 추악하십니까? 파도가 거세니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아니면 목만 자른 뒤 몸통은 불태워도…….”
텐티아는 다급히 다가와 물었고, 쪽빛 사제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예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는 물에 젖은 채로도 풍성했고, 약간 창백한 하얀 피부는 대리석처럼 매끈했으며, 이국적인 이목구비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푸른 보관과 산호로 장식한 짧은 웃옷은 고귀한 신분을 증명했고, 하얀 골반부터 이어지는 색색의 비늘은-.
‘비늘?’
“발렌 전하! 이거 사람이 아닙니다!”
텐티아는 다급하게 발렌시아누스를 불렀다.
발렌시아누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쪽빛 사제의 다리는 꼬리로 변해 있었다.
“분명히 하얀 다리를 봤는데…… 침식자가 아니라 이종족이었군.”
* * *
“왜 포로를 둘이나 데려온 거지? 내가 분명히-.”
“이쪽은 인어고 이쪽은 엘프다.”
“일단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