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전투가 끝났다.
섬 정복은 이제 막 시작이겠지만, 어쨌건 오늘 밤의 전투는 끝난 것이다.
카리오사는 아퀼라가 머물던 저택에 새로운 주인으로서 입성했고, 바다와 항구가 보이는 넓은 회의실에 왕좌를 두었으며, 휘하 장교기사들의 보고를 받았다.
“전하. 침식된 죄수 1만 1천 중 7천을 쓰러트렸습니다. 비룡 기사들이 출전해 일회성 화염 마도구를 이용한 폭격을 시행 중입니다. 잔당 처리는 차후 모험가들을 이용하겠습니다.”
“잘했다. 쥴. 그렇게 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잘 대응해 주었어. 크게 칭찬한다.”
따개비에 뒤덮인 죄수들의 후처리를 지시했고.
“전하. 지하 통로를 통해 침입하던 어인족 1,355개체 중 1,288개 개체를 주살했습니다. 전하께서 어인족 대 주술사를 해치워 주신 덕에-.”
“난 아부가 싫다. 거기까지.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것들이 여기로 다시 올라왔을 줄이야. 본때를 보여 줘야겠군.”
지하에서 올라오던 어인족을 처리했으며.
“해적들과 그 패거리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는 중입니다. 상공 정찰 결과 섬 동쪽으로 향하는 횃불의 수가 약 5만 4천여 개에 달합니다. 실제 머릿수는 최대 9만에 필적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흑룡 함대에 전하라. 이번만은 나포도 항복도 필요 없다. 섬 일대에 폭풍을 더 세게 몰아치게 하겠다. 혹시 뚫고 나오는 놈이 있다면 다 침몰시키라고 해.”
해적 잔당에게 본때를 보였고.
“항구 방파제 쪽에서 문어 거인 수호자와 불가사리 바다 구더기가 등장했습니다. 백금기사단의 텐티아 경과 황형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께서 물리쳤습니다.”
“또 빚을 졌네. 자칫했으면 상륙선들이 상할 뻔했어. 그 망나니가 뭘 달라고 나올지 무섭군. 알겠다. 내가 직접 치하하고 감사를 표하겠어.”
텐티아 경의 분투를 인정했다.
난 지하동굴에 숨겨 놓았던 아린스와 방파제에서 잡은 쪽빛 사제를 끌고 화려한 회의실에 들어섰다.
“발렌시아누스! 고맙고도 미안하다.”
유리창 뒤로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가운데, 카리오사가 긴 테이블 끝 상석에서 벌떡 일어나 양팔을 활짝 벌리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날 와락 끌어안았고, 난 주변 동부 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
“전하……!”
다행히 주변 기사들은 수도에서 굴러온 망나니가 우리 주군을 희롱해!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챘는지, 카리오사가 귓가에 대고 큭큭 웃었다.
“넌 너무 생각이 많아.”
“하, 하하하.”
“저들이 내 안목을 무시할 거 같아?”
“그것도 그렇군.”
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녀를 안았다.
가오리 가죽 코트와 철편 갑옷에는 습기와 열기가 어려 있었고, 그녀의 목덜미에서는 상쾌한 바다 향기가 났다.
카리오사가 내 목에 돋은 비늘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깨질 뻔했네.”
그녀의 손톱은 비늘 위로 길게 미끄러지다가 중간 흠집에서 톡, 하고 걸렸다.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어쩔, 수 없었지. 손발 다 묶인 상황에서 마나 블레이드로 톱질을 당했으니까.”
카리오사가 노래하듯 분노했다.
“그 빌어먹을 바다 구더기 놈들을 다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그래. 그렇고말고.”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타르티를 살려 달라는 말을 도저히 꺼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카리오사가 날 안았던 손을 풀고, 자기 오른쪽 옆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 아, 네 기사에게는 내게 따로 뭐라도 챙겨 줄게. 깜짝 놀랐어. 문어 거인 수호자랑 정면으로 싸우다니.”
나는 그 자리에 앉으며 씩 웃었다.
“동부로 오라고 하면 안 된다.”
카리오사가 어깨를 움찔했고, 낄낄 웃었다.
“내가 그런 유치한 짓을 안 할 리가 있나?”
“말실수였지? ‘할 리가 있나?’가 제대로 된 문장 아닌가?”
“못 먹는 생선 찔러나 본다. 그런 말 알아?”
“못 먹을 건데 도대체 왜 찔러 보는 거지?”
눈을 마주쳤다.
나도 아직 세로 동공이었고, 그녀는 원래도 세로 동공이었다.
“사람 새끼 하나 없군.”
“왕은 사람이 아니지. 알면서 왜 그래?”
우리는 마주 보고 낄낄 웃었다.
그 웃음이 사그라들 무렵, 카리오사가 물었다.
“그래서 인어니 엘프니 하는 건 뭔 소리야?”
* * *
넓은 회의실에는 카리오사의 부관 쥴을 비롯한 고위 장교기사 열댓 명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아세노르타와 생사를 함께하는 운명공동체였고, 폭풍함대라는 기계에서 꼭 필요한 톱니바퀴들이었다.
만약 내가 저들을 모두 내보내고 카리오사 한 명에게만 말한다고 해도, 카리오사가 대책을 세우는 과정에서 다들 알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텐티아 경을 불렀다.
“경. 이리로.”
텐티아 경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백금 투구는 옆구리에 끼고 있었고, 짧은 붉은 머리는 촉촉하게 젖어 소년미를 자랑했다.
그녀는 그 왕자님 같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도 쇠사슬 하나를 잡아끌고 있었고.
철그럭, 철그럭.
그 사슬에는 엘프 궁수 아린스와 인어 쪽빛 사제가 엮여 있었다.
둘 중 한쪽은 다리가 풀렸고, 한쪽은 다리가 없었다.
따라서 둘은 제 발로 걸어오는 게 아니라 마나 봉인 마도구 족쇄에 엮여서 질질 끌려왔다.
나는 금발 녹안에 긴 귀를 가진 아린스와, 검은 머리에 오색으로 빛나는 꼬리를 가진 쪽빛 사제를 가리켰다.
“소개하지. 이쪽은 엘프이자 해적 제독인 아린스. 이쪽은 인어이자 해적 제독이고, 어인족을 불러온 쪽빛 사제야.”
카리오사가 입을 쩍 벌렸다.
“하.”
뾰족한 이빨이 가득 드러난 모습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지만, 나는 그게 어이없음의 표현임을 알았다.
동부 장교기사들도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아니. 진짜 엘프랑 진짜 인어라고?”
“몇백 년 만에 나타난 거 아닙니까?”
“귀랑 꼬리를 뜯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죽으로 만들어놓고 장난질하는 걸 수도 있잖습니까?”
“이것들이 왜 해적질이나 하고 있어?”
“쥴 경. 경 가문 시조 중에 인어가 있지 않소?”
“경 가문 시조에도 있소. 동부 기사 중에 인어 피 안 섞인 자가 누가 있다고.”
“몇 달 전에 어떤 선원이 인어를 봤다고 하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종족은 천 년 전까지 인간을 핍박했고, 여전히 인간에게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타국과 신민에게 그들의 인식은 최악이었다.
“큰 숲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말거라. 인간 닮은 괴물들이 우리를 잡아먹는단다.”
그러나 제국 귀족, 기사들 사이에서는 이종족에 대한 인식이 약간 복잡했는데, 이종족이 그들에게 힘과 특성을 물려준 선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엘프는 오거와 더불어 기사 가문에 꼭 들어간 피였고, 바다 사나이들에게 인어란 여러모로 동경의 존재였다.
그래서 둘이 해적 제독이라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카리오사는 둘을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져 넣지 않았다.
“아…….”
카리오사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나 그녀는 닻 군도의 왕이 될 사람답게,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일단. 엘프. 아린스라고 했지?”
아린스는 벌벌 떨며 카리오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전하.”
“네가 여기서 해적질하던 걸, 엘프족 전체의 뜻으로 봐도 되겠나?”
“!”
아린스가 녹색 눈을 파르르 떨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더욱 하얗게 질렸다.
안 그래도 이종족 중 제일 악명 높은 엘프다.
카리오사 정도 되는 대영주가 이 일을 공론화하고, 교회와 함께 엘프족 자치구를 불태우겠다고 선언한다면, 엘프는 멸종할 수도 있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지껄여 봐. 왜 엘프가 이 바다에 나와 있는지 말이야.”
*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는 새 땅을 찾으러 나온 탐사대원입니다.”
“탐사대?”
“아시겠지만. 저희 종족은 제국의 은혜 덕에 남동부 자치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최근 큰 마경이 열려 적잖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때를 계기로 인근 영주들이 침입해 아이들을 잡아갔고요. 더더욱 조용히 살 수 있는 새로운 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해적질했다?”
“배들의 무덤 군도로 올라갈 거점이 필요해서 닻 군도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영부영……. -. ”
아린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카리오사가 혀를 찼다.
“어영부영 해적 제독이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아린스는 나름 할 말이 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저, 전 약탈에 참여한 적은 없습니다. 활 솜씨를 인정받아 개간 작업 중에 사냥 조장을 맡았고, 동방 왕국과 아퀼라의 협력이 시작된 다음에는 날개 섬 발리스타 포대 지휘관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 발리스타는…… 한 번도 못 쏴보고 다 불타 부서졌지요. 폭풍의 딸, 위대한 백상아리시여. 믿어 주십시오.”
쾅! 쾅!
그가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머리를 내리찧었다.
동부 기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엘프들이 새 땅을 원하고 있다는 건 사실인 듯했다.
물론 마경 사태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엘프가 침식자와 친한 종족은 아니지만, 그만큼 침식이 잘 되는 종족이기도 했다.
일종의 강경파들이 침식의 힘이라도 써서 제국에 복수하겠다고 나서다가 폭주해서 난리가 났을 수도 있는 거고.
카리오사도 같은 생각인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발렌시아누스. 황족으로서의 판단을 묻고 싶다. 황실은 다섯 종족의 지배자잖아.”
“인간 말고 다른 종족을 지배할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나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린스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일단 이종족의 준동에 대한 조사는 필요할 듯하다.”
카리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천 년 전의 일이 되풀이될지 말지는 아직 모르는 거고.”
“그것도 그렇지.”
“그럼 그때까지는 살려 두는 게 어떻냐? 엘프니까 한 100년쯤 가둬 놔도 괜찮잖아?”
아린스의 얼굴이 반색과 난색을 오갔다.
“저, 전하? 전 고향으로 돌아가야-.”
나는 한 손을 뻗어 아린스의 턱을 들었다.
“해적들에게 자기 의지로 복역했잖아? 죗값을 치러야지. 게다가 누구 마음대로 우리가 준 땅을 떠나려고 해? 농노가 도망치면 사형인 걸 모르나?”
그의 준수한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이, 이!”
나는 그의 턱을 아래로 끌어 내려 눈을 깔게 했다.
카리오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가 데려가지 않는 거냐?”
나는 그녀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 주인은 너야. 진짜로 약탈은 하지 않았다면…… 방조죄로 복역시키는 게 어때?”
“복역?”
“피를 섞어서 새로운 마법사 가문을 만들든, 교관으로 삼아서 정령 궁수나 정령 기사들을 훈련 시키든. 뭐. 처우는 네 마음대로지. 물론 조심해야 할 거고.”
“그거 나쁘지 않다. 그냥 죄질 약한 해적으로 대하라 이거네? 명쾌하군.”
카리오사가 이빨을 보이며 시원하게 웃었다.
난 그 명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복잡한 생각을 했다.
카리오사는 말이 통하는 대귀족이다.
엘프를 궁정에서 부리는 걸 허락해줬으니, 타르티와 사야 옌을 데려가고 싶다고 해도 허락해 주겠지.
아린스가 오만가지 감정이 어린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
나는 그의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웠다.
“그래도 내가 살려준 거야. 웃어.”
그는 이를 악물었고, 씩 웃었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 눈물에서 곧바로 눈을 돌렸다.
“자. 이제 엘프는 해결된 거 같고, 인어에 대해 논해 보실까?”
카리오사가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는 듯 과장된 손짓으로 목덜미를 잡았다.
“그래. 사실 바다에서는 인어가 더 문제다. 그것들이 어인족이랑 어떤 관계인지도 확실하지 않아. 이놈 개인의 일탈인지, 어인족이 인어의 노예 종인지, 아니면 애초에 둘이 같은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럼 조용히 가둬 놓자. 차차 알아가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