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카리오사와 장교기사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차차 알아간다, 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뭔가…… 평소답지 않으시군요. 수도에서 뵀을 때는 깐깐한 면이 있으셨는데.”
나는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카리오사. 예상외로 큰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종족이 아니다.”
그녀는 잠시 쪽빛 사제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지금 급한 건 이 섬을 안정시키는 거지.”
“이종족 문제는 황실이 전담하겠다. 동방 대륙에만 신경 써다오.”
“이 인어를 데려가겠다는 뜻인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쪽빛 사제가 앙칼진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고, 이국적인 외모와 오색 꼬리는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회귀 전 제이릴리스는 인어 왕을 어물전에 걸었고, 인어 공주를 황궁 안 소금물 수조에서 기르며 즐거워했다.
“주겠다면야 고맙게 받겠다. 그런데…….”
쪽빛 사제는 침식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아마도 해적, 동방 대륙, 인어, 어인족을 한데 엮은 거대한 해양 세력을 만들려는 것이었겠지.
성공했다면 큰 위험이 되었겠지만, 그녀의 계획은 시작하기도 전에 부서졌다.
회귀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그때는 양면 전선을 치르던 카리오사의 손에 죽었을 거다.
동쪽 바다에 그렇게까지 대단한 위협이 되지는 못했으리라는 뜻이다.
난 이미 이종족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법이 있었고, 회귀 전 겪었던 치열한 접전 덕에 그들의 전술, 마법, 무기, 요새를 꿰뚫고 있었다.
인어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필요치 않았다.
쪽빛 사제를 데려간다면 순수한 소유욕, 협상용 판돈, 제이릴리스의 유희 거리, 해류의 문 같은 주술 공부에 의미가 있을 거다.
하지만 바다 주술은 나보다는 카리오사 손에 있을 때 쓸모가 있을 거고, 지금의 제이릴리스는 그때와 달리 악에 받친 전쟁 군주가 아니었다.
“딱히 내게 이렇다 할 쓰임새는 없을 듯하다.”
카리오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내가 기르겠다. 이 섬에 왕궁을 세우면 그 왕좌 옆에 수조를 둬야지.”
쪽빛 사제가 카리오사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다가 네 것인 줄 알아?”
로브에 음성 변조 마법도 걸려 있었는지, 로브가 없는 지금은 그 화난 목소리마저 아름다웠다.
“너도 곧 가라앉을 거야. 네 불침 전함은 폭풍 앞 가랑잎처럼 침몰할 거라고!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때는 너희 뭍놈들을 전부 다 심연으로 끌고 가서……!”
아린스가 기겁하며 머리를 조아렸고, 동부 기사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카리오사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당연히 내 것이지.”
“!”
“우리 가문에는 두 시조가 있어. 어머니 서머린은 진짜 바다의 주인이셨고, 아버지 아세노르타는 온갖 괴물이 우글거리는 바다로 나가 어머니를 유혹할 배짱이 있는 사람이었지.”
“뻔뻔하기가 말할 수가 없네.”
“뻔뻔해?”
그녀의 입가에 잔혹한 비웃음이 어렸다.
“난 13살에 칼로 자격을 증명했다. 난 동부의 백상아리 카리오사, 서머린의 후예야. 나 말고는 아무도 바다의 주인을 자처할 수 없어.”
카리오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쪽빛 사제 앞으로 다가갔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군홧발 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입가에 가학적인 미소가 걸렸다.
나는 그다음 일어날 일을 직감했고, 텐티아 경은 헛기침했으며, 동부 기사들은 가볍게 눈을 내리깔았다.
카리오사가 쪽빛 사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고,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으윽.”
인어가 신음성을 흘렸고, 카리오사는 인어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툭, 두둑,
각혈로 인해 말라붙어 있던 피가 묻어나왔다.
쪽빛 사제가 꼬리를 부르르 떨었고, 카리오사는 손가락을 슬쩍 핥았다.
“인어 피는 무슨 향일까 궁금했는데.”
“오, 오지 마.”
“오늘 제대로 알 수 있겠네.”
“괴물, 이 괴물 같은 게! 내 동족들이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동족들? 그래. 동족 좋지. 한 마리만 있으면 외로울 거니까. 큰 수조를 만들어 놓고 떼로 길러야겠어. 아예 알현실 바닥을 유리 수조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이 미친-.”
“미친 건 너야. 제정신이라면 내게 도전하지 않았겠지.”
오색 비늘로 빛나는 물고기 꼬리가 파닥였고, 카리오사가 입을 쩍 벌렸으며, 쪽빛 사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하.”
텐티아 경이 와 물었다.
“전하. 저걸 보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왕을 누가 처벌하겠나?”
“그도 그렇군요.”
기나긴 하루의 끝이었다.
* * *
비는 그치지 않았고, 바람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소문은 그런 악천후보다도 빨라서, 사흘도 지나지 않아 닻 군도의 북쪽 끝까지 퍼졌다.
“카리오사가 연합 항구를 점령했답니다!”
“수백 척의 상륙선과 호위함이 케투시온에서부터 오고 있답니다.”
“아, 아퀼라 님이 죽었다고 합니다. 수도에서 온 용혈 황족이 그분을 삶아 죽였답니다!”
“생존한 해적들 사이에 내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 폭풍은 카리오사가 일으켰답니다. 아무도 닻 군도를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답니다. 여기 있으면 다 죽을 겁니다.”
“당장 떠나야 합니다. 폭풍은 점점 심해질 겁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여기 이주한 사람들은 다들 동방 대륙에서 쫓겨 온 사람들이네! 돌아가도 죽을 수도 있어!”
“일단 짐부터 싸십시오. 여기 있으면 무조건 죽습니다!”
혼혈 귀족, 백상아리, 폭풍의 딸.
카리오사는 강력한 대귀족이었고, 해적들과 사이 좋은 동방 이주민들 사이에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카리오사가 우리를 다 죽일 거야!”
동방에서 온 개척촌의 촌장, 다인 랑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당장 짐 싸게.”
“어르신.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가장 가까운 항구로 가겠어.”
다인 랑은 개척촌 사람들과 함께 가장 가까운 항구로 향했다.
“배가 얼마나 많았는데, 조각배 한 척이라도 남아 있겠지.”
그의 예상대로, 항구에는 많은 배가 남아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배보다 몇 배는 많은 사람이 몰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 다른 곳으로 가 보지요!”
누군가가 외쳤다.
다인 랑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옆 무리에서 한 여인이 울부짖었다.
“여기도 똑같잖아! 북쪽에서부터 쭉 내려왔는데, 계속 이 모양이야!”
개척촌 사람들은 얼굴을 굳혔고, 미친 듯 흔들리는 바다와 배, 그리고 그 배를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줄을 서시오! 줄!”
“우리는 어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도 마찬가지야. 아픈 사람투성이라고.”
“혹시 해열 약초 가진 분 있나요. 아이 이마가 펄펄 끓어요.”
“배가 돌아온다!”
“못 나간대! 파도가 너무 심해서 뒤집힐 거래.”
“여기서 죽으라고?”
“여기 오려고 목숨을 걸었는데!”
다인 랑은 주저앉고 싶은 기분을 이겨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기하면 안 된다.’
인생을 바꿀 기회라고 생각했다.
백상아리 카리오사가 이 섬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제국이 세 군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도, 동방 왕국들과 분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해적 10만에 요새화 끝난 항구를 뚫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성벽 쌓고, 마을 만들고, 농사까지 시작했는데, 아무리 제국의 대귀족이라도 뭘 할 수 있겠냐 싶었다.
그러나 그 백상아리는 날씨를 바꿔 가며 끝끝내 땅 위로 올라왔다.
‘뭔가,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때 서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추가로 달려왔다.
그들 역시 물에 젖은 생쥐처럼 추레한 행색이었고, 몹시 지켜 보였다.
“더, 더 온다!”
“아…….”
“어, 어?”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고, 작살과 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비켜라! 우리는 해적이다!”
“배에서 내려라! 배에서 내려. 우리가 먼저다!”
“살았다. X발. 삼각돛만 피고 노 최대로 저어. 일단 이 지옥 같은 섬에서 나가자.”
연합 항구에서 도망쳐 온 해적 잔당이었다.
그들은 갈고리와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 사이를 해쳤고, 배에 타려는 사람들을 끌어냈다.
“비켜라!”
“뒈지기 싫으면 썩 꺼져!”
“이건 이제부터 우리 배다!”
다인 랑은 다른 촌장이 해적 하나에게 항의하는 걸 보았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다.
“너, 너무한 거 아니요!”
“하?”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느릿하게 보였다.
해적이 단숨에 검을 뽑아 촌장의 목을 그었고, 촌장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꺄아아악!”
“촌장님!”
“해적 놈들이 사람을 죽였다!”
“이 사기꾼 새끼들! 우리를 지켜준다고 했으면서!”
개척촌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몰릴 데까지 몰리며 거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수배자 신분으로 쫓기던 사람들도 여럿이었고, 이 시대의 사내에게 기본적인 검술 정도는 당연한 소양이었다.
개척촌 사람들이 밀 거두는 대형 낫과 쇠스랑, 장작 패는 도끼와 강철 도리깨를 치켜들었다.
“완전히 속았잖아!”
퍽!
도끼가 해적의 머리를 내리찍고, 해적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잭이 죽었다!”
“이, 이 새끼들 다 조져!”
“이 바다 구더기 같은 것들이 반항해?”
해적들이 본격적으로 무기를 빼 들었고, 이에 맞서 개척촌 사람들도 무기를 휘둘렀다.
비 내리는 하늘 아래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초, 촌장님.”
“……마을로 돌아가세.”
다인 랑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빗물과 섞인 눈물이 흘렀다.
* * *
카리오사는 며칠 정도 저택에 머물며 군을 정비했고, 나는 벽난로 앞에서 로렐라이의 잔소리를 들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옛것의 힘을 쓰지 마시라고요. 이제 영혼이 완전히 다른 색으로-.”
“거기까지. 카리오사. 할 말이 있다.”
잔소리도 지겨웠지만, 이제 슬슬 타르티 이야기를 꺼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살려 달라고 부탁하는 걸로도 모자라 황실 함대로 쓰겠다고 해야 하니, 내가 생각해도 염치없고 뻔뻔한 부탁이었다.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막막했다.
카리오사가 잘됐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잘됐군. 나도 할 말이 있다.”
“그래. 먼저 말해라.”
“내 기사와 종자를 죽인 그 동방 대륙 귀족 일족의 마을을 찾았다. 가서 씨를 말려버릴 생각인데, 함께 가 주겠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 X발.
카리오사는 그 이명처럼 폭풍이 휘몰아치듯 움직였다.
“놈들을 끌고 와라.”
타르티와 사야 옌을 꽁꽁 묶어 전함 감옥에서 빼 왔고, 해마의 피 섞인 말을 타고 선두에 섰다.
쏴아아아-!
여전히 비바람 몰아치는 날.
동부 기사 수십 명과 정예병 3백 명, 전투마법사 10여 명이 우리 뒤로 따라 붙었다.
타르티는 소가 끄는 수레가 얹혀 있었는데, 카리오사가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몸부림쳤다.
“읍, 읍!”
그러나 마도구 재갈과 족쇄는 그에게 한마디의 말도, 한 번의 손짓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 왔다.”
카리오사가 손을 뻗어 저 아래 보이는 마을을 가리켰다.
타르티의 마을은 작은 항구를 끼고 있었고, 섬 서쪽에 있었다.
마을 주민들과 동방 대륙풍 군선 수십 대가 보였다.
“약탈하고 돌아오기 쉽게 아예 서쪽에 마을을 지었군. 빌어먹을 바다 구더기 놈들.”
카리오사가 수레 옆으로 가서 타르티를 바라보았다.
“똑똑히 봐라. 이게 너희가 나한테 지난 수십 년간 했던 짓이야. 우리 가문 사람들에게 수백 년간 했던 짓이기도 하고.”
“읍, 읍!”
“두 번 다시는 내 해안이 불타는 꼴을 보지 않겠어. 공격 준비.”
전투마법사들이 말에서 내려 시약을 준비했다.
난 대체 뭐라고 말해야 카리오사를 말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
타르티가 온몸을 비틀었고, 사야 옌이 절실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
그때 마을에서 한 무리의 인마가 달려 나왔다.
두두두두.
붉은 비단옷을 입은 게 꽤 높은 자들 같았다.
카리오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도망치는 건가?”
그러나 그들을 우리를 향해 달려왔고, 곧바로 진흙탕에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철퍽!
선두에 선 자는 항구 공방전 당시 텐티아 경과 함께 잡았던 무사였다.
“너는?”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살려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이 눈치 없는 새끼.
법정에서 뇌물 준 걸 밝히는 놈이 어디 있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카리오사가 회색 눈을 번뜩이며 날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 그게 무슨 말이지?”
뾰족한 이빨이 쩍 벌어졌다.
나는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걸 느꼈다.
“그게…….”
엎드린 무사와 사야 옌이 절실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고, 카리오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난 엎드린 무사를 노려보았고, 불꽃을 피워 올렸다.
화르르륵!
불길이 순식간에 치솟았고, 무사가 바닥을 굴렀다.
“끄아아악!”
커피보다 약간 뜨거운 정도니, 화상은 입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다.
“네놈이 감히 날 모욕하려 들어! 추잡한 목숨을 구해 보겠다고 없는 말을 지어내는구나. 이 괘씸한 놈들! 카리오사, 부탁이 있다.”
“부탁?”
나는 최대한 화가 난 듯 내 앞을 구르는 동방 무사를 노려보았다.
“이것들을 내게 넘겨다오. 황실 형벌 부대로 삼아 죽을 때까지 굴리겠다. 침식자가 우글거리는 남방대륙에 상륙할 때 소모하면 딱 좋겠군.”
타르티와 사야 옌이 눈을 부릅떴고, 텐티아 경이 날 슬쩍 돌아보았으며, 카리오사가 침묵했다.
“하…….”
잠시 후 그녀가 비릿하게, 아주아주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침식자와 싸우다 영혼까지 불타라고 해라. 그만하면 이 바다 구더기들에게 알맞은 최후겠지.”
내 마음을 읽은 듯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