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법복, 재화, 군사, 배지, 마도, 행정.
맡은 바 사명은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귀족이었고, 빼어난 외모와 건강을 타고났으며, 귀족 연금이라는 마르지 않는 지갑을 보유했다.
따라서.
“부어라, 비워라!”
“부어라, 비워라!!”
“겁이 난다면 잔을 내려놓고 물러서시오.”
저녁마다 수 시간씩이나마 연회를 벌이고, 금요일 밤에는 이틀간 이어지는 무도회를 열며, 물씬 더워진 날씨와 어울리는 향락에 빠지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번에 루디 백작님이 연 다과회에 다녀왔는데요. 마도구 조각상이 얼마나 멋있던지-.”
“호호. 부럽네요. 혹시 어디서 얻으신 건지 들으셨나요?”
물론 그 자리는 마냥 방탕한 쾌락의 자리는 아니었다.
“로이셀린 후작.”
“아. 작센텐 백작. 반갑습니다.”
로이셀린은 거물급 재화 귀족이었고, 작센텐은 한참 출세 가도를 달리는 행정 귀족이었다.
그러니 작센텐이 로이셀린을 구석으로 부른다면, 뭔가 은근히 주어질 황명이 있다는 말이었다.
“혹시 폐하의 전언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실은 최근 정화의 빛 가로등을 대량 생산하는 데 있어 약간의 행정적 부담이 생겼습니다.”
공방을 짓고 마법사들을 고용하느라 금화가 미친 듯 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로이셀린은 재화 귀족답게 그 말을 들은 순간 작센텐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이해했다.
“이해합니다. 대규모 공방을 여럿 짓고 운영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혹시 제가 폐하께 도움이 될 부분이 있겠습니까? 부르주아들을 대상으로 애국 무도회라도 한 번…….”
옆구리 찌를 장소를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좋지요. 만약 하게 된다면 콘세크라투스 백작님과 하드리탄 대공 전하께 참석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성문과 운하 통행세를 약간 인상하는 쪽으로 가고자 하십니다. 급전이 필요한 시점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로이셀린은 그 말이 지금은 부르주아들에게 압박을 줄 때가 아니라는 뜻임을 깨달았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 부르주아들이 신시가지 건설에 큰돈을 쓰고 있는 시점이라서 말입니다. 지금 자금 유동성이 떨어지면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통행세 인상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는 게 낫겠군요.”
작센텐과 로이셀린은 옆을 지나던 하인이 들고 있던 쟁반에서 샴페인 한 잔씩을 기울였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부르주아들의 반발을 키우는 것이겠군요.”
억누르는 게 아니라, 키우는 거였다.
“예. 송구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작센텐이 머리를 숙였다.
“‘침식자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이 중대한 시국에 황실에 더더욱 충성하고 헌신할 생각은 못 할망정, 부르주아들을 충동질해 내란을 일으키려 한 죄’로 고등재판소에 제소되실 겁니다. 판결은…… 광명신께서 지루해하실 때쯤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겠지요.”
로이셀린은 숭고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증세로 인한 부르주아들의 불만을 한데 모았다가, 신성 황제의 철퇴를 맞고 박살 나는 게 그녀의 역할이었다.
이렇듯.
무도회장은 서류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하는 집무실의 역할도 수행했다.
“이번에 남방에서 수입해오는 시약이 교회법에 걸리는데…….”
“일단 흑철 기사단에서 압수하고 차후 돌려주지.”
마도 귀족의 한탄을 군사 귀족이 들어주고.
“코넬 의원이 신시가지에 신전을 짓고 있던데…….”
“아, 그건 건들면 안 되네. 황형 전하께서 주시하시는 일이야.”
재화 귀족의 음모를 배지 귀족이 가로막았으며.
“상아탑 마도구에 관세를 부여해서 지방 대귀족들을 상대로 자금을 뜯어낼 생각이야.”
“일단 우리 법복 쪽에서 밀어붙여 보겠네. 우리가 대귀족들 상대로는 그래도 할 말이 있는 편이니까.”
행정 귀족의 고충을 법복귀족이 처리해주었다.
그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부에서 올라온 마도구가 통관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찝찝하단 말이지. 침식의 힘이 담긴 옛것 마도구가 섞인 거 같아.”
“이세아스 백작의 상단 휘하인가?”
“그래. 그 친구 사정도 알고 하니 마냥 몰아붙이기도 뭣하고. 워낙 서류를 잘 꾸며 놔서 트집 잡기도 뭣하니. 곤란하군.”
“그럼 내가 루디 백작께 비밀 시찰을 부탁해 보겠네. 마침 내일 내 여동생과 루디 백작의 다과회가 있고, 루디 백작은 이세아스 백작의 경매장에 자주 참석하는 편이니.”
깊은 밤.
마침내 일 이야기가 끝나면, 그제야 조금 편안한 자리가 시작되었다.
여름 밤바람 부는 발코니, 한 연인이 애타게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기꺼이 이행하겠습니다. 작센텐. 황제 폐하와 그대를 위해서요.”
“아아. 미안하오. 로이셀린. 내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면!”
제소될 예정인 재화 귀족 로이셀린과 그걸 청탁한 행정 귀족 작센텐은 약혼한 사이였다.
* * *
“루디 백작. 이 물건은 어떻습니까? 300년 된 지팡이입니다.”
“루디 백작. 북부에서 온 정령 조각상입니다. 정신력 수련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요.”
“루디 백작. 엘프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허리띠입니다. 마법 증폭에 효과가-.”
“루디 백작. 남방 대륙에서 올라온 수정 장신구입니다. 이건 협찬해 드릴 테니 내일 무도회에 한 번만 차고 나와 주시면-.”
“루디 백작-.”
루디는 사교계의 신성이었고, 소문의 망나니 대공 발렌시아누스의 시녀였다.
그건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운 물건을 홍보하기에 최고의 모델이라는 뜻이었고, 이세아스와 마를리나의 마도구 사업은 그 위험함을 매력 삼은 사업이었다.
그러니.
이세아스가 매일같이 경매장에 루디를 초대하며 새로운 마도구를 홍보하고, 구매를 유도하고, 협찬해주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검은 머리에 실눈을 뜬 미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짓했다.
미술관 같은 경매장 한가운데 거대한 원탁이 놓여 있었다.
“남방 대륙의 대형 마호가니 테이블입니다. 장인이 13년 동안 깎아서 만들었지요.”
루디는 녹색 무늬가 들어간 하얀 드레스 아래 숨긴 마총을 뽑을지 말지 고민했다.
“이거 옛것 숭배 조각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데요?”
“옛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인가해준 13대 대악마의 숭배 문양입니다. 황립 마도 공방의 흑마법사 마도 귀족분들도 여럿 섬기는 악마니 문제 없습니다.”
악마와 옛것은 모두 저 너머의 존재였다.
악마는 이해가 가능한 존재였기에 협상할 수 있었고, 흑마법사들은 존재를 용인받았다.
하지만 옛것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협상이 불가능했고, 침식자들은 대륙적인 탄압을 받았다.
“다리 쪽 조각은 또 다른 존재를 섬기는 것 같은데요?”
“그게 매력이지요. 하하.”
“좋아요. 구매하겠어요.”
루디는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내심 한숨 쉬었다.
상냥한 얼굴에 잠시 경련이 일었다.
‘이런 걸 어디서 구해오는 건지 모르겠네요. 세레라지에 전하께 바로 보여 드려야겠어요.’
이세아스가 실실 웃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이건 어떻습니까? 정령의 점멸 단검입니다.”
통나무 받침대 위에 보라색 날을 가진 단검이 놓여 있었다.
루디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딱히 화나 보이지는 않았고, 햄스터가 삐진 듯했다.
“제게 단검을 파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지금까지는 장식품 느낌으로 편하게 샀지만, 이건 다를 거예요.”
“일단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루디는 백금 기사들에게 투검을 배웠고, 이세아스는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결국 재화 귀족이었다.
그러나 칼날 받침 없는 단검을 검지와 엄지 사이에 끼웠다가, 검지로 겨누는 솜씨는 꽤 훌륭했다.
‘제대로 배웠는데요?’
이세아스는 사용인들을 시켜 단검이 놓여 있던 통나무 받침대와 둘 사이에 판자를 세웠다.
“보십시오.”
그가 단검을 던졌다.
쐐액!
단검은 깔끔한 직선으로 날아갔고, 반투명해졌으며, 판자를 통과한 다음 통나무 받침대 앞에서 실체화되었다.
퍽!
단검이 통나무를 자루까지 파고들었다.
루디는 홀린 듯 지갑을 열었다.
“구매하겠어요. 바로 들고 가지요.”
‘이런 건 반드시 사야 해요! 침식자 마도구일 확률이 높다고요. 저, 절대로 제가 가지고 싶어서는 아니에요!’
* * *
“아까 짐마차가 원탁을 싣고 왔단다. 대체 그런걸 어디서 구한 거니? 그건 고대 천신 신앙과 벼락 신앙이 악신과 연결되는 과정을 남부 양식으로 그려낸-.”
루디는 종합 공방으로 향했고, 세레라지에는 마침 1층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는 중이었다.
메뉴는 육수라고 해도 민망할 정도로 묽은 소고기 스튜와 하얀 빵, 그리고 몇 샷이나 넣었는지 모를 정도로 새까만 커피였다.
“전하.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일단 뭘 좀 더 드세요.”
루디는 고기 한 접시를 받아왔고, 세레라지에가 다 먹을 때까지 그녀를 의자에 앉혀두었다.
“네가 감히 황족을 구속하려 드는 거니!”
세레라지에는 사지를 비틀며 저항했지만, 소드 유저인 루디를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전 세레라지에 전하가 아사하지 않도록 막을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요!”
“제자들아! 당장 이 패역한 시녀를 끌어내야 하지 않겠니?”
그녀가 제자들을 애타게 불렀지만, 식당 안은 휑했다.
세레라지에의 제자들과 마커스의 조수들은 모두 식사를 마치고 실험실로 돌아간 뒤였다.
세레라지에는 그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내가 다 올려보냈잖니! 이럴 수는 없잖니! 내 무덤을 내가 팠잖니!”
“네네. 전하. 꼭꼭 씹어 드세요.”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루디는 배불러 쓰러진 세레라지에를 안아 들고 실험실로 올라갔다.
“전하. 이 단검 좀 보세요. 정령의 점멸 단검이라고 했어요.”
“입 다물렴. 속이 울렁울렁…… 진짜 정령이잖니?!”
세레라지에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이고 있다가, 루디가 단검을 꺼내 들자마자 안광을 번뜩이며 몸을 일으켰다.
탁!
단숨에 단검을 낚아채고 마나를 흘리며 주술 회로를 파악했다.
“그래. 단순한 투명화가 아니구나. 물질과 힘을 오가는 권능이 고작 이 단검 하나에 담겼잖니! 세상에! 세상에! 그 이세아스라는 애는 대체 무슨 상단을 운영하는 거니? 악마의 계약자라도 되니?”
“음……. 마나의 기운 자체는 귀족치고 평범한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도 잠시,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색이 다른 두 눈에 은근한 불안감이 어렸다.
“이쯤 되면 마냥 좋게 봐주기도 힘들 정도구나. 정말 대단한 수완을 가지고 있거나, 수상한 끈이 있을 거 같잖니.”
루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안 그래도 상단 쪽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았어요.”
“그게 좋겠구나. 언제나 조심하고. 아. 마커스가 새 마탄을 양산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가져가렴.”
세레라지에는 한쪽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 안에는 척 봐도 은이 많이 들어가고 회로가 복잡한 마탄이 몇십 발 정도 들어 있었다.
루디는 그 마탄에서 느껴지는 불안정한 기운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불경한 물음이나, 이거 성공한 거 맞는 건가요?”
세레라지에가 쓰게 웃었다.
“내가 주술 회로로 그린 걸 어떻게든 주문 회로로 바꾸겠다고 하다가 그 사달이 났잖니. 일단 발사는 될 거란다. 위력도 네가 원한 대로고.”
루디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딱히 무섭지는 않았고, 다람쥐가 삐진 듯했다.
“‘일단’이라 하시면, 부작용도 있다는 거네요?”
“멋진 궁정 귀족이 다 되었잖니. 그래. 자칫하면 폭발할 수도 있단다.”
루디는 어깨를 한 번 움찔하고는, 새 마탄을 조심조심 챙겼다.
세레라지에는 안타깝다는 듯 물었다.
“그런 것까지 챙겨야 할 정도니?”
루디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에서 볕이 쏟아지고, 일순 그 상냥한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여기 오늘 길에도 습격받았어요. 죄다 지하수로에 담그기는 했지만요.”
* * *
“상단? 그곳은 왜 가고 싶으십니까?”
“어떤 분들이 이런 마도구를 찾는지 궁금하네요.”
“가시죠. 루디 백작 같은 VIP에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습니다. ”
이세아스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건물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넓은 5층 석조 건물이었고, 직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고. 백작 각하 오셨습니까?”
후덕한 단주가 책상에서 일어나 머리를 굽신거리며 둘을 맞이했다.
“저희 상단은 동남부를 기점으로 활동하며-.”
“비결이요? 하하. 사실 자랑할 건 아닙니다. 그저 발품을 팔아 가치 모르는 자들에게 물건값을 후려칠 뿐이지요.”
“감정을 열심히 하는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겠군요.”
그는 겸손하게 너스레를 떨었고,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장부까지 펼쳐 보였다.
“마도구 세 개를 사들이기까지 열두 번의 감정을…….”
“최종적인 상단의 이윤은…….”
누구나 다 하는 수준의 분식 회계를 제외하면 딱히 수상한 것도 뭣도 없는 평범한 상단이었다.
그러나 루디는 단주의 책상 아래서 들려오던 미약한 숨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밤에 다시 와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