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18)화 (318/340)

(318)

루디는 별궁의 관리자였다.

발렌시아누스가 그녀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자리를 비운 지금, 그녀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섭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오늘 밤에는 야행을 다녀와야겠어요. 내일 새벽에 식자재 배달이 오니까 뒷문 여는 걸 잊지 마세요.”

그녀는 별궁의 시녀와 시종, 하인과 하녀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제가 닷새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본궁의 비네아 백작님과 흑철 기사단의 세 기사님께 알리세요. 명단은 여기 있습니다.”

만약을 대비했다.

“네. 백작 각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혹시 위험한 곳에 가시는 건가요?”

한 어린 시녀가 물었다.

“전 대답해서는 안 되고, 당신은 들어서는 안 되네요. 알려 하지 마세요. 진실은 생각보다 흉측하니까요.”

루디는 대답을 피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상냥한 시녀장 루디의 얼굴이 사라지고, 시녀 사수 루디의 얼굴이 떠올랐다.

발렌시아누스의 방 옆에는 그녀의 의상실이 있었다.

백작 작위를 얻은 뒤 저택을 하사받았지만, 그곳에서는 다과회와 만찬회를 열 뿐이었다.

‘과분하리만큼 좋은 집이지만, 제가 있을 곳은 발렌 님 옆이에요.’

그 의상실에는 화려한 드레스가 아니라 고가의 마도구가 들어차 있었다.

루디는 옷장을 열고, 입고 있던 화려한 녹색 드레스를 벗었다.

뚝, 뚜두둑.

어깨, 팔꿈치, 손목이 등 뒤로 돌아가는 모습은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혼자 벗기 편한 옷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유연성과 강인함을 겸비했고, 등 뒤에서 묶인 리본과 끈을 손쉽게 풀어냈다.

슥, 스윽.

그녀는 화살이 박혀도 쉽게 뽑을 수 있는 질긴 비단 블라우스와 바지를 입었고, 그 위로 ‘흐릿함’ 주문이 새겨진 ‘아콰테그’를 먹인 단단한 천 옷을 입었고, 가죽 하네스를 조였다.

역장 반지, 바람의 축복 반지, 생조 전림 반지, 열기 내성의 반지, 전기 내성의 반지를 오른손 손가락마다 끼웠고.

착.

정령의 점멸 단검, 샌드웜 송곳니 단검, 생동을 오른쪽 허리에 꽂고, 왼쪽 허벅지에 6연발 마총 아가테를 찼으며, 몸 곳곳에 아가테와 카스파의 마탄 탄띠를 둘렀다.

마지막으로 소리를 없애는 성물 뿔피리, 마커스가 만든 야간 투시의 안경, 이빨 무늬 그려진 영체화 마도구 ‘귀면’, 세레라지에가 만들고 개량한 침식자 검출기, 상하쌍대 마총 카스파까지 차면.

‘은근 무겁네요.’

일할 준비가 끝났다.

후덥지근한 바람 불고 상록수가 팔을 흔드는 여름밤.

달도 비추지 않는 별궁 지붕 위로 새카만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휘익!

황궁 안은 황립 마도 공방의 마법사들이 온갖 마도구와 주문으로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지만, 세레라지에가 개량한 ‘흐릿함’ 주문은 그 모든 감시망을 뚫어냈다.

‘지금은 영체화보다 이게 나아요. 영체화는 그것대로 걸러내는 마법이 있어서.’

루디는 근위대의 눈을 피해 황궁 밖으로 나갔고, 낮에 갔던 상단 건물을 향해 달렸다.

5, 6층에 달하는 석조 건물들 지붕 위가 그녀의 놀이터였다.

타악, 타아악-.

한 번에 수 m에서 거의 20m 가까이 되는 거리를 도약하는데도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땀이 나기 시작할 무렵, 루디는 운하 근처 상단 건물에 다다랐다.

낮에 보던 것과 같이 뚱뚱한 석조 건물이었다.

루디는 잠시 눈을 감았다.

“…….”

기감을 최대한 끌어 올려도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어 나오는 살기도, 깡패들의 연초 냄새고, 짐꾼들의 땀 냄새도 없었다.

‘오늘은 운하 쪽에서도 야간작업이 없나 보네요. 짐마차 행렬도 보이지 않아요. 좋네요.’

저 멀리 귀족들의 저택에서는 오늘도 불빛이 환했지만, 대도시 솔레타라온은 고요히 잠들었다.

도둑과 첩자, 방화범, 그 외 부랑자를 잡아들이는 치안감들만 떼를 지어 도로 곳곳을 돌아다닐 뿐이었다.

‘책상 아래 있던 게 보여서는 안 될 사람이라면, 같은 건물 안에 놔두지는 않겠지요. 그렇다고 아주 멀리 보내지도 않을 거고요.’

루디는 눈을 뜨고 상단 건물 주변 건물들을 살폈다.

‘지하수로가 이렇게 뻗어 나오니까…….’

지하수로는 지반 안정을 위해 도로와 최대한 겹치게 지어졌다.

일반 건물들은 지하실이 있다고 해도 지하수로와 접하지 못했다.

따라서 지하수로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은 정비용 출입구와 불, 편법으로 통로를 뚫은 건물들이었다.

‘저 건물이네요.’

그리고 루디는 수도에 있는 그런 건물들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상단 건물에도 지하수로 출입구가 있었고, 약간 떨어진 하얀 건물에도 지하수로 출입구가 있었다.

루디는 상단 건물 지붕으로 몸을 날렸고, 자세를 낮췄으며, 성물 뿔피리로 소리를 없앴다.

그리고 세 시간이 흘렀다.

* * *

마커스가 만든 사점 안경은 자동 조준, 야간 투시, 열 감지 등 온갖 주문이 걸려 있었고, 루디는 밤에도 하얀 건물을 낮처럼 바라볼 수 있었다.

‘날씨가 야속하네요.’

문제가 있다면 날씨였다.

솔레타라온은 여름에는 푹푹 찌고, 겨울에는 모든 게 얼어붙는 기후를 가진 도시였다.

낮에 달아오른 도로는 사람 체온보다 뜨거웠고, 밤이 된 지금도 그리 식지는 않았다.

따라서 열 감지 주문이 걸린 안경을 쓰면 모든 게 붉은색과 노란색으로만 보였다.

특유의 시력 탓에 더더욱 어지러웠다.

루디는 잠시 고민하다, 안경을 벗어 버렸다.

‘이제 좀 낫네요.’

시야에 아른거리던 색색의 아지랑이가 사라지고, 밤의 어둠과 하얀 건물만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하얀 건물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당했-!’

파앗-!

루디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고, 그 순간 그녀의 귀 옆을 한 발의 화살이 스치고 지나갔다.

펑!

강력한 충격파가 몸을 떨게 했고, 머리카락 몇 올이 우수수 떨어졌으며, 귓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쐐애애액-!

고요하지만 날카로운 파공성은 한 박자 늦게 멀어졌다.

그녀가 사점 안경을 벗는 순간을 노려 화살을 쏜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낭패감에 두려워할 만도 했지만, 그녀는 수도에서 유명한 결투광이었다.

‘역시!’

루디의 녹색 눈에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침식자가 숨어들어 있었어요! 심지어 제가 올 것도 알았고요.’

그녀는 빛이 반짝인 곳을 향해서 곧바로 마총 카스파의 방아쇠를 당겼다.

달칵!

하늘을 뒤흔드는 듯한 굉음은 들리지 않았지만, 눈부신 붉은 빛줄기는 어김없이 뿜어져 나갔다.

쾅!

마탄에 맞은 하얀 건물 벽에 투석기라도 쏴 맞춘 듯한 금이 갔다.

쩌저저적!

유리가 깨지고 부서진 벽돌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루디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제자리에서 한 바퀴 굴렀다.

쐐애애액!

푹-!

방금까지 그녀가 엎드려 있던 자리에 굵은 화살 한 대가 꽂혔다.

시이이잉!

화살은 연두색으로 빛났고, 지붕에 꽂히고 오래지 않아 그 빛을 잃었다.

‘제대로 못 봤어요. 상대도 화살도. 기사님들 검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루디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이 더운 날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껏 보고도 못 피하는 공격에 당해 본 적은 있어도, 못 본 적은 없었다.

그 텐티아의 검이나 발렌시아누스의 불꽃, 심지어 세레라지에의 번개도 전조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 하얀 건물 어딘가에서 화살을 쏘고 있을 상대도, 날아오는 화살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다.

루디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

순간 그녀는 건물 오른쪽 위에서 녹색 빛이 점멸하는 걸 보았다.

철커덕, 달칵.

이번에도 파공성을 울리지 않았지만, 마탄은 붉은 꼬리를 남기며 쏘아져 나갔다.

쐐애애액!

루디는 착탄을 확인하기도 전에 재장전했고, 이번에는 두 발 모두 산탄을 장전했으며,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퍼어엉!

허공에서 반경 7m까지 흩어진 쇳조각들이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와장창! 와장창!

하얀 건물 외벽을 거세게 두드리고 벽돌과 타일, 유리창을 깨트렸다.

‘잡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건물 아래쪽에서 녹색광이 번뜩였다.

파앙!

녹색 빛이 뿜어져 올라왔다.

루디는 기겁하며 바닥에 엎드렸고, 화살은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밤하늘로 올라갔다.

* * *

‘아무리 큰 상단이라도 이 정도 힘을 가진 모험가나 용병을 고용하는 건 쉽지 않겠지요. 이런 모험가나 용병으로 뭘 지킬지도 의문이고요.’

‘‘보는’ 것과 관련된 힘을 가진 침식자일 수도 있어요. 제가 원거리 전투에서 밀릴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어쩔 수 없겠네요.’

상단 건물 지붕은 가운데가 뾰족한 형태였고, 루디는 그 뒤로 몸을 피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하아, 하아.”

마커스의 사점 안경 대신 발렌시아누스가 처음에 사준 사점 안경을 꺼내 썼고, 카스파 대신 아가테와 정령 점멸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근접전으로 목을 날려버리겠습니다.’

반짝!

그때 예의 녹색광이 번뜩였다.

‘위?’

루디는 기겁하며 몸을 날렸고, 다음 순간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을 보았다.

“?!”

날카로운 녹색광이 허공에서 둘로, 넷으로, 여덟으로 분열했다.

‘120? 아니, 250? 1,000?’

검은 하늘에 녹색 화살 1천여 개가 내리꽂혔다.

천시우(千矢雨).

시익! 시이익! 시이이익-!

하늘이 녹색으로 물드는 모습은 기이하고도 신비로웠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흑철 기사단 휘하 치안감들의 호각 소리가 기겁하듯 울렸다.

‘피할 곳은 없어요.’

루디는 생동을 쥔 오른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는 동시에, 아가테를 허공에 겨누었다.

‘전 명령을 받았고, 따라야만 하죠.’

그리고 되레 하얀 건물을 향해 뛰쳐나갔다.

타악!

뾰족한 지붕 위로 그녀의 신영이 날아올랐다.

푹, 푸푸푹! 푸푹!

그녀의 등 뒤 지붕과 건물 아래 도로에 녹색 화살이 사정없이 꽂혔다.

펑, 펑!

한번 꽂힌 화살은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타악!

루디는 그 소용돌이보다 빠르게 달려 나갔다.

‘우리 사이에 건물은 총 다섯 개.’

타악!

그녀는 첫 번째 건물 지붕에 올라갔고, 곧바로 두 번째 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상대 역시 당황했는지, 하얀 건물에서 녹색빛이 유난히 진하게 번뜩였다.

반-짝!

쐐애애액!

녹색 화살이 지독한 살기를 싣고 날아왔다.

획!

루디는 허공에서 다리를 차올리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쉬익! 쉬이익!

그러나 천 개의 화살이 여전히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고, 찰나의 회피 동작도 시간을 소모했다.

‘역장 반지.’

그녀는 굵은 보석이 달린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었고, 다음 순간 푸른 역장이 번뜩이며 녹색 화살 몇 발을 튕겨 냈다.

터더덩!

펑, 펑, 펑!

화살이 튕기고 사라지며 생기는 바람에 몸이 떠밀렸지만, 그녀는 어찌어찌 두 번째 건물 지붕에 착지했다.

타아앙! 타아앙!

그리고 은폐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고 아가테의 방아쇠를 당겼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고, 마탄이 날아가 미지의 사수를 노렸다.

조준 사격이 아니라 시선을 끌기 위한 시도였다.

“저쪽이다!”

“기사님들을 불러와!”

“놈이 폭발 마법을 사용한다!”

치안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건물에 녹색 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루디는 이를 악물며 지붕을 박찼다.

타앗!

‘전 황형의 총애받는 시녀고, 이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이름도 없는 괴물인 너와 달리!’

그녀는 세 번째, 네 번째 건물을 뛰어넘었다.

사아악-!

녹색광이 하얀 건물 아래로 미끄러지는 게 보였다.

루디는 그게 화살을 쏘려는 게 아니고, 미지의 존재가 도망치려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놓칠 것 같아요?’

루디는 생조 전림 반지와 바람의 축복 반지를 동시에 사용했다.

치지지직!

사아아아-.

푸른 전기가 흐르며 근육을 강화하고, 바람의 축복이 은은한 녹색광의 형태로 몸을 감쌌다.

그녀는 새가 날 듯 도약했고,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도로 뒤로 내려앉았다.

좁은 골목 사이로 녹색광이 멀어지는 게 얼핏 보였다.

타앗-!

땅을 박차 골목 안으로 진입하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로브에 마도구의 기운이 느껴지는 활을 들고 있었고, 특이하게도 화살은 아주 싸구려였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 로브를 입고 있네요. 아직 인간 형태인 걸 고려하면 급소도 같을 거예요.’

그녀는 상대의 척추를 노리고 점멸 단검을 던졌다.

우-웅!

단검이 허공에서 보랏빛으로 점멸했고, 공간을 도약하듯 실체화했다.

그러나 미지의 사수는 점멸 단검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게 피했고.

사악!

되려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화살을 쏘아냈다.

쐐애애액!

루디는 역장 반지에 한 번 더 마나를 불어 넣었고, 아가테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터덩!

화살이 튕겨 나갔고, 루디의 몸이 떠밀렸으며, 마탄이 뿜어져 나갔다.

‘잡았다!’

루디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수는 이번에도 녹색 빛을 내며 도저히 불가능한 속도로 움직여 피했다.

허공에 녹색광이 유성의 꼬리처럼 길게 남았다.

사아아-!

“너!”

그가 마총을 보고 분개한 듯 이를 갈았고, 기이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화살을 발사했다.

쐐애애액!

루디는 역장을 두른 틈도 없이 몸을 틀었다.

화살이 그녀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사점 안경이 획 벗겨져 나갔다.

파삭!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고, 발렌시아누스의 선물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

루디는 머릿속이 하얗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깟 물건에 의지해 명사수 흉내를 내다니. 창피한 줄 알아라. 잘난 척은 그만해.”

사수가 증오와 비아냥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사적인 원한은 없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살려 주지.”

그가 어른이 아이를 타이르듯 손짓했고, 루디는 어울리지 않게 실소했다.

“전…… 방금 당신에게 사적인 원한이 생겼어요.”

“!”

“어디에도 돌아가지 못하게 해 주겠어요!”

그녀는 벼락처럼 뛰어오르며 아가테 방아쇠를 당겼다.

‘절대 용서 못 해요!’

붉은 안광이 녹색 눈동자에 번뜩였다.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첫 번째 탄은 활에 맞았고, 활이 그대로 뚝 부러졌다.

사수의 후드 속 어둠이 경악으로 일렁였다.

두 번째 탄은 화살통을 부수었고, 세 번째 탄은 옆구리를 꿰뚫었다.

루디는 재장전하는 대신, 생동을 빼 들고 땅을 박찼다.

쩌저저적!

얼음 칼날이 계절이 맞지 않는 냉기를 뿜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