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19)화 (319/340)

(319)

루디는 득달같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타악!

“죽어버리세요-!”

좁은 골목, 둘 사이의 거리가 땅이 접히듯 줄어들었다.

사아아아!

보검 생동의 칼날이 장검만큼 길어지고, 얼음 칼날에 깔쭉깔쭉한 톱니가 돋았다.

쩌저저적!

호리호리한 사내를 단숨에 으깨버릴 듯한 기세였다.

“내가 널 얕봤다. 그 눈은 진짜였나? 쯧. 이제 이건 못 쓰겠군.”

사수 사내는 부러진 활을 바닥에 내던졌고, 로브 안쪽에서 소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그가 소검을 역수로 쥐고 몸을 낮췄다.

은은한 녹색광이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야겠군.”

그리 위협적인 자세는 아니었지만, 조금의 빈틈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디는 사수 사내의 목을 노리고 보검 생동을 베어 내렸다.

사내는 얼음 칼날이 어깨선 위로 들어오는 순간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이겼네요.’

루디는 그 순간 승리를 직감했다.

인간의 신체 구조를 가진 이상 이다음에 반응해 봐야 늦을 수밖에 없었다.

발렌시아누스처럼 비늘을 둘렀거나, 텐티아처럼 갑옷을 입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지만.

‘아까 점멸 단검을 피했어요. 빠르지만, 방어력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아요.’

다음 순간 사수 사내의 몸을 감싼 은은한 녹색광이 번뜩였고, 그가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듯 돌진했다.

휘이이익-!

“!”

사내가 역수로 쥔 소검이 루디의 배를 노리고 깊게 들어왔다.

루디는 기겁하며 몸을 물렸고, 오랜만에 눈을 의심했다.

‘다리를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타앗!

그녀는 공중제비를 돌며 물러났고, 사내는 그대로 따라붙었다.

촤아아악!

그의 등 뒤로 녹색 기류가 길게 이어졌다.

루디는 다리가 하늘에 향한 채로 그 광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의식이 한없이 가속했다.

그녀는 비슷한 기운을 발렌시아누스에게서 느껴본 바 있었다.

‘마법? 아니에요. 발렌 님의 손과 비슷한 기운이에요. 자연스러우면서도 이질적인. 태풍이나 화산……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까운 힘.’

이내 그녀는 정답을 깨달았고, 장검만큼 늘어났던 생동의 칼날을 다시 소검 크기로 줄였다.

‘정령술사네요. 바람의 정령술사. 그럼 영체화도 위험합니다. 안 쓰기를 잘했네요.’

촤아아악!

그녀는 허공에서 아래를 향해 생동을 털어냈다.

차르르르-!

녹았던 얼음 칼날이 다시 얼어붙으며 얼음 조각이 되어 떨어졌다.

사수 사내는 반사적으로 한 손을 들어 막았고, 단순한 얼음 조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악물었다.

“칫!”

루디는 샌드웜 송곳니 단검을 뽑아 들며 착지했고, 숨을 가다듬지 않은 채로 가속했다.

“생조 전림!”

파지지직!

푸른 전류가 온몸을 내달렸고, 근육이 오그라드는 통증과 함께 기묘한 활력이 찾아왔다.

오른손에 생동, 왼손에는 송곳니 단검.

얼음으로 된 소검과 유리질 단검이 달도 없는 밤에 서늘하게 빛났다.

루디는 사수 사내의 목, 어깨, 옆구리, 겨드랑이, 허벅지 굵은 혈관을 노리고 두 자루 검을 휘둘렀다.

삭! 사악! 사아악! 사아아악!

생동이 허공에 푸른 잔상을, 송곳니 단검이 하얀 잔상을 남겼다.

북! 부욱! 부우욱! 부우우욱!

사내가 걸친 로브가 걸레처럼 찢겨 나갔다.

* * *

사수 사내는 기겁했고, 바람에 몸을 실어 크게 물러섰다.

‘분명 마나 블레이드가 아니었는데.’

사내의 로브는 나방 마수의 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만든 것이었는데, 불에도 타지 않았고, 마법 없이는 제일 날카로운 재단 가위로도 잘리지 않았다.

로브로 만들 때는 천 전체에 마법을 걸어 형태를 바꾸는 식으로 만들었다.

그 질긴 로브와 그 아래 입은 천 갑옷이 유리질 단검 앞에서 푸딩처럼 잘려 나갔다.

‘대체 무슨…… 샌드웜 이빨 단검? 시카리우스의 암살자가 수도에서 우리를 쫓고 있다고?’

사내는 품속에서 두 번째 소검을 빼 들었고, 루디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달려들었다.

“죽어버리라고요-!”

그녀가 앞으로 몸을 던지듯 도약했다.

타, 앗!

마지막 순간 왼발로 땅을 밀자, 그녀의 몸이 허공에서 회오리처럼 회전했고, 두 자루 검이 색색의 예기를 뿜었다.

사아아아아악-!

정확하게 허벅지, 무릎 뒤쪽, 옆구리, 폐, 겨드랑이를 노리는 공격이었다.

채재재쟁!

사내는 두 자루 소검을 휘둘러 막아 냈고, 곧바로 뒤돌아 재공격에 대비했다.

타악!

루디는 고양이처럼 구르며 일어서 다시 땅을 박찼고, 사내는 바람으로 몸을 감싸며 큰 기술을 준비했다.

그때 사내는 허벅지에서 뜨끔한 고통을 느꼈다.

“윽.”

로브가 길게 찢어져 있었고, 허벅지 위쪽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감히, 이 미개한 짐승이.”

그는 진심 어린 멸시를 담아 내뱉었고, 바람의 축복과 함께 땅을 박찼다.

콰아아-!

녹색 잔상이 길게 남았다.

그의 몸이 온갖 축복을 받은 소드 엑스퍼트보다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보통 인간이라면 절대로 따라오지 못할 속도였다.

‘목을 꿰뚫어주마. 고통 속에서 죽어라.’

타악!

그는 벽을 차고 뛰어오르며 정면으로 달려드는 루디의 옆구리를 잡았다.

그때 그는 루디의 눈을 보았다.

이빨 무늬 새겨진 검은 마스크 위, 큰 녹색 눈동자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찾. 았. 어. 요.’

사수 사내는 기겁하면서도 소검을 내질렀다.

사악-!

‘결국 내가 빠르다.’

녹색광에 휩싸인 예리한 칼날이 루디의 목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그 순간 루디는 생동 쥔 오른손을 내지르며 바람 축복의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콰아아아!

똑같은 녹색 기운이 피어올랐다.

뚜둑, 뚜두두둑!

일순 사내의 몸을 감싼 바람이 뒤엉켰고, 사내의 팔다리가 기이한 각도로 비틀렸다.

“!”

루디는 눈웃음을 치며 송곳니 단검을 내질렀다.

‘이것도 정령하고 같은 원리라 했거든요. 교란이 들어갈 줄 알았어요.’

푸푸푹!

발렌시아누스의 비늘도 가르던 단검이 사수 사내의 옆구리, 어깨를 찔렀다.

피가 튀고, 사수 사내의 팔에 힘이 빠지고, 루디는 마지막으로 목을 노렸다.

‘제가 말했잖아요.’

송곳니 단검이 목에 닿은 순간이었다.

‘죽여버리겠다고요!’

콰아아아-!

사내의 몸이 녹색광에 휩싸였고, 거센 바람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 * *

“아…….”

루디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격통에 눈을 떴다.

밤하늘이 보였고, 사방이 먼지투성이였다.

“윽!”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신음했다.

거대한 벽 조각이 그녀의 하반신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다행히 다리가 으스러진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움직이지는 못할 상황이었다.

“도둑질만 해댄 하등생물 주제에.”

“컥, 커억!”

주변 골목은 폐허가 되었고, 석조 건물도 하나둘 무너져 있었다.

저 앞에서 수도 치안감들이 사수 사내의 발밑을 구르고 있었다.

막 치안감 하나가 목이 졸려 쓰러졌다.

사수 사내가 루디 앞으로 다가왔다.

“제법 잔재주가 많았어.”

자박. 자박. 자박. 자박.

가벼우면서도 깊게 울리는 발소리가 섬뜩했다.

“소꿉장난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낭패를 봤다고.”

“아.”

“이렇게 날뛰게 되었으니까. 그 값은 받아야겠지?”

루디는 천천히, 아주아주 천천히 허벅지에서 마탄 하나를 뽑았다.

‘새 산탄이네요. 마침 잘됐어요.’

“고통 속에서 실혈사하게 해 주마. 예쁜 벌레야.”

사수 사내가 소검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루디는 다리를 짓누른 벽 파편 위로 마탄을 힘껏 내리쳤다.

펑!

불안정한 마탄에서 불꽃이 튀고, 마탄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큭!”

푹!

사수 사내의 소검이 루디의 목 옆 바닥에 꽂혔고, 루디는 그 순간 마스크 마도구 ‘귀면’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사아아아!

온몸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동시에 두 다리가 자유로워졌고, 루디는 벽 아래에서 빠져나와 내달렸다.

타앗!

“이 쥐새끼 같은 게!”

사수 사내의 비명이 뒤에서 메아리쳤다.

‘황궁으로 가야 해요. 기사님들 정도가 아니라면 못 이길 거예요.’

루디는 문자 그대로 바람처럼 달렸다.

골목을 건너뛰고, 대로를 지나고, 치안감들을 피해 가며 달렸다.

사람도 마차도 하나 없는 도로 위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남았다.

“거기 서라!”

저 뒤에서 사수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녹색 빛이 번뜩였다.

퍼어어엉! 퍼어어엉! 퍼어어엉!

발렌시아누스가 폭발이라도 일으킨 듯, 강력한 바람이 그녀의 몸을 붕 띄우기도 했다.

쐐애애액!

그때 익숙한 파공성이 들렸고, 루디는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활도 없이 쏜다고요?’

치안감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사내가 도로 중앙에 서 있었다.

그가 앞으로 내민 왼손에는 녹색 기운이 뭉쳐 활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그가 당기는 오른손에서도 녹색 기운이 뭉쳐 화살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쐐애애액!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아니. 바람과 녹아들어 날아왔다.

사악!

루디는 몸을 날려 피했지만, 화살을 궤도를 바꾸며 그녀에게 따라붙었고, 끝끝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윽!”

‘저 앞인데.’

이제 그녀는 황궁 앞 대로에 접어들었다.

저 앞에 웅장하게 솟은 대문과 담이 보였다.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바람 화살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날아들었다.

루디는 간신히, 어찌어찌, 기적적으로, 초인적으로 피하며 황궁을 향해 달렸다.

곳곳에 하나둘 상처가 늘어났고, 고양이 같던 몸놀림도 조금씩 느릿해졌다.

그때 사수 사내가 주문을 외웠다.

“아리엘이시여. 제 적을 쏴 맞추소서.”

서늘한 목소리가 두세 사람이 말하는 듯 울렸다.

우우우웅!

녹색 빛이 밤하늘에 번뜩였다.

반투명한 녹색 여인의 그림자가 바람 화살 뒤로 드리워졌다.

하, 하하하!

유쾌한 웃음이 환청처럼 울리고.

파아아앙!

녹색 화살이 질풍처럼 날아들었다.

루디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몸을 날리든 끝끝내 그녀를 꿰뚫고 말, 절명의 화살이었다.

‘발렌 님. 죄송해요.’

그녀는 이를 악물었고,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와락!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달군 돌 뒤에 가죽을 씌운 듯 뜨겁고도 단단한 팔이 그녀를 단단히 붙들었다.

달콤한 아몬드 같은 향기가 풍겨왔다.

“또 40년간 후회할 뻔했네.”

오만하고도 능글맞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 어?’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며 그녀를 끌어안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발렌…… 님?”

화려한 금장 장식, 희고 붉은 띠가 루디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황형 발렌시아누스가 황궁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안 늦었지?”

그가 한 손을 들어 녹색 화살을 가리켰다.

화르르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순식간에 한 자루 창의 형태로 벼려졌으며, 그 뒤로 용의 뿔이 돋은 불꽃 거인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하, 하하하하!

악마의 비웃음 같은 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콰아아아!

바람 화살과 불의 창이 부딪쳤다.

쾅!

상성으로는 불이 밀렸지만, 발렌시아누스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찍어 눌렀다.

쾅, 쾅, 쾅!

세 차례의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고, 사수 사내가 정령 역소환의 반동으로 비틀거렸다.

“솔레타라스-!”

그가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포효했다.

부모 자식의 원수에게나 향할 증오와 살기가 그 다섯 글자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망나니 대공은 이미 오랜 세월을 누군가의 원수로 살았고, 그 증오와 살의를 비웃었다.

“그래! 내가 여기 있다. 이리 나와 그 로브를 벗고 내게 도전해라!”

결코 나오지 못할 걸 알기에 한 말이었다.

“……!”

사수 사내가 침음성을 흘렀다.

그의 몸에 다시 녹색광이 맴돌고, 그가 골목 사이로 몸을 날렸다.

루디는 상처를 감싸 쥐며 말했다.

“전하. 쫓아야 해요. 꺅-!”

발렌시아누스는 그녀를 안아 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하지만 너나 네가 할 필요는 없을 거야.”

“네?”

“일단 난 대공이거든.”

“그게 무슨 말씀…… 아.”

카아아악!

용과 한없이 닮은 괴성이 밤하늘에 울렸다.

서쪽 와이번핏에서 청은 기사단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황궁을 보호해라!”

백금기사단장이 근위대와 백금 기사들을 이끌고 황궁 안을 수색했다.

“지금부터 솔레타라온을 봉쇄하겠다! 네 대문을 모두 닫고, 수상한 놈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바르바토스가 명령에 흑철 기사단원들이 치안감들을 대동하고 골목 사이로 달려 나갔다.

“전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교회 역시 이 싸움에 참여하겠습니다. 그게 누구든 이 도시와 신도들을 위협하는 적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치안총감과 고위 홍의주교가 발렌시아누스 곁으로 다가왔다.

사아아아-.

은은한 신성력이 루디의 몸을 감쌌다.

‘언제……?’

루디는 당혹감에 눈만 깜빡였다.

발렌시아누스가 그녀를 돌아보고 씩 웃었고, 루디는 지금 제일 필요한 이름 두 개를 외쳤다.

“전하. 이세아스 백작과 마를리나 공녀를 확보하셔야 해요. 그 둘이 소유한 상단에서 기이한 마도구를 수입했고, 그 상단을 감시하다가 습격받았어요.”

그가 치안총감을 바라보았다.

“들었나?”

“예. 전하.”

“잡아 오게. 누가 저런 괴물을 수도에 들였는지 그 낯짝을 봐야겠어.”

치안총감이 치안감들과 함께 달려 나갔다.

누군가 의자를 가져왔고, 발렌시아누스는 루디를 에스코트해서 의자에 앉혔다.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잘해 줬어. 고마워. 루디.”

루디는 그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약간 내려와 이마 한쪽을 가리고 있었다.

“……감사해요. 발렌 님.”

저주에 걸린, 그녀만의 왕자님.

“다음에는 더 잘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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