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20)화 (320/340)

(320)

먼동이 터 오는 새벽이었다.

한 쌍의 남녀가 치안총감의 손에 붙들려 내 앞으로 끌려왔다.

“빨리빨리 걸으십시오!”

“이게 무슨 일인지 자세히 해명해야 할 겁니다.”

“전하! 이세아스 백작과 마를리나 공녀를 데려왔습니다.”

이세아스 백작은 검은 머리에 수상한 실눈을 뜬 젊은이였고, 마를리나 공녀는 잔망스러우면서도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였다.

“잘했네. 상단 압수수색도 진행하게.”

“예. 이미 진행 중입니다. 생존자 수색과 일대 부상자 구출도 이행하고 있습니다.”

치안총감은 간만에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를 얻었다는 듯 신이 나서 치안감들을 지휘했다.

나는 그 열정적인 모습에 흡족함을 표한 뒤, 이세아스 백작에게 눈을 돌렸다.

목소리가 도저히 곱게 나오지 않았다.

“백작, 공녀. 이런 일로 만나게 되어 유감이군.”

작은 실수 하나로 루디를 잃을 뻔했다.

두고 간 게 잘못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도에 돌아오자마자 종합공방으로 가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곳에서 세레라지에에게 아이젠 마도구를 전달하고, 루디와 이세아스 백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고대 신앙과 연관된 진귀한 마도구라.’

‘꽤 수완이 있는 거 같잖니. 아니면 침식자거나.’

최근 이종족과 만날 일이 잦다 보니, 기묘한 의심이 들었다.

‘루디가 가져간 침식자 색출 마도구 있잖아. 거기 내 파편 들어갔지?’

‘그렇잖니.’

‘그럼 대충 위치를 알 수 있겠네. 미안. 바로 일어날게.’

아직도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 사내가 교단 소속의 침식자인지, 자생한 침식자인지, 미친 용병 정령술사인지, 아니면 이종족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임은 결과에 지는 거고, 독립 자금을 위해 일을 시작하던 이 연인들은 수도에 그런 미친 자를 끌어들인 책임을 져야 할 거다.

“예. 전하.”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전하.”

마를리나 공녀는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세아스 백작은 깍듯하게 답했다.

좋게 말하자면 당당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건방졌다.

나는 그의 뺨을 후려갈기려 손을 쳐들었다가, 그가 지금까지 깨끗하게 살아온 궁정 귀족임을 깨닫고, 그의 어깨 위로 턱 올렸다.

유죄가 증명되기 전까지는 무죄고, 유무죄를 밝히는 게 우리 일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소상하게 해명해야 할 거야. 내가 지금 분노를 많이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네.”

이세아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몸을 떨었다.

“예. 전하.”

“그럼 들어 보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저희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 * *

나는 단검 ‘검은 비늘’을 찾으려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귀족이라서 존중해 주고 있었는데, 내 존중을 배신당한 듯하다.

손톱을 몇 개 들어 올리면 대답이 달라질 듯했다.

“히익!”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보았는지, 마를리나 공녀가 숨을 마구 들이쉬다 비틀거렸고, 이세아스가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며 그녀를 부축했다.

“저, 전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정말입니다! 저희는 그저 상인이 각지에서 구해 온 마도구를 경매장을 통해 팔았을 뿐입니다.”

“응?”

그가 목소리를 착 내리깔았다.

주변 치안감들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저희가 운영하는 사업은 마도구 유통보다는 단순한 경매업에 가까웠습니다. 상인들이 각지에서 마도구를 입수하면, 공녀가 감정했지요. 그녀는 그쪽 전공입니다.”

“그럼 네가 한 일은 뭐지?”

“그녀가 가치 있는 물건을 들여오면, 제가 멋들어지게 꾸며서 팔았습니다. 그럴듯한 공간과 경매 시스템을 조성하고, 사교계에서 소문을 만들고, 이름 있는 분들에게 협찬을 맡기고…….”

“그 과정에서 과장, 허위 광고도 있었겠군.”

그가 얇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발견 연대나 양식 등을 조금 더 흥미롭게 꾸며낸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기능도 없는 마도구를 대단한 것처럼 팔지는 않았습니다.”

루디를 돌아보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백작이 미래의 아내를 호강 좀 시켜주겠다고 사업을 벌이다가 이용당한 모양새였다.

“네 무지와 미숙함이 큰 재앙을 불러올 뻔했구나.”

“……송구합니다.”

이세아스 백작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끝내 그 실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생긴 것과 달리 결백한 듯했다.

나는 다시 치안총감을 바라보았다.

“그럼 제일 큰 책임은 그런 수상한 자를 들여온 상단에 있겠군.”

“전하. 송구합니다. 한발 늦었습니다.”

그가 낭패감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오늘 숙직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전멸…… 아니. 한 명 있답니다. 바로 증언을 받아오겠습니다!”

그러다 중간에 치안감 하나가 조르르 달려왔고, 그의 목소리가 시시각각 높아졌다.

치안총감이 잠시 뒤 돌아와서 다시 낭패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면서도 민망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전하. 그놈이 엘프를 봤다고 합니다. 자기 상단주가 엘프와 거래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활을 잘 쏘는 정령술사라 오해를-.”

불이라도 뿜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귀쟁이 새끼들이 진짜-!”

“예, 예?”

치안총감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모든 것에는 극과 상극이 있다.

아린스처럼 새 땅을 찾으려고 나간 엘프가 있으면 옛 땅을 되찾으려 하는 엘프도 있는 거다.

아무래도 적이 늘어난 듯했다.

“폐하께 보고하겠다. 지금 뵐 수 있나?”

나는 백금기사단장을 찾아갔다.

그가 날벼락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폐하께서는 지금 수도에 없으십니다.”

* * *

별 총총한 여름밤이었다.

하늘 아래 깊이가 1킬로미터에 달하는 깊은 골짜기가 파여 있었다.

근처에 철광이 있을 만큼 철분이 많은 땅이기에, 골짜기는 본래 불그죽죽한 색이었다.

그 골짜기는 지금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1달 전, 지름이 2킬로미터에 달하는 마경이 골짜기 중앙에 출현, 골짜기 전체를 잠식해 나갔다.

하필이면 두 백작 가문 사이의 경계에 만들어져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그 나태함의 죗값을 받으러 왔다.

“워어어어!”

“크어어어!”

“카각, 카각!”

회색 암석으로 된 몸에 보라색 수정 결정이 솟은 이물 골렘들이 골짜기 밖으로 하나둘 걸어 나왔다.

“으어어어어-.”

“엄마, 엄마.”

“영주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영주님.”

피부가 회색 암석으로 변한 침식자들도 이물 골렘들과 함께 걸어 나왔다.

그 수가 모두 합쳐 1만 3천에 다다랐다.

도시 몇 개 정도는 초토화하고도 남을 머릿수였다.

쿵. 쿵. 쿵. 쿵.

크고 작은 골렘들이 골짜기 밖으로 행진했다.

쥐부터 새까지 모든 동물이 마경이 열리자마자 이 일대를 벗어났지만, 다리를 다쳐 아직도 골짜기를 빠져나가지 못한 토끼 한 마리가 바닥을 기었다.

쿵. 쿵. 쿵. 쿵.

암석 골렘이 눈을 무기질적인 보라색으로 번뜩이며 토끼를 바라보았다.

쩍.

골렘의 거대한 턱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불그죽죽하고 끈적끈적한, 내장과도 같은 혓바닥이 뿜어져 나왔다.

푸아아악!

토끼의 눈동자에 혓바닥이 비쳤다.

꿀꺽.

암석 골렘의 껍질을 쓴 이물이 토끼를 날름 집어삼켰다.

“돌도 핏덩이도 아닌 버러지가 짐의 세상에 기어들어 왔구나.”

그 순간 서늘한 목소리가 골짜기 전체에 울렸다.

휙!

마경 밖으로 나온 1만 3천 이물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개체당 눈을 셋 이상 달고 있었기에, 그 눈의 총합은 6만에 이르렀다.

“짐은 네놈들을 거부하겠노라. 네놈들을 추방하겠노라. 정신도 육체도 구별되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거라.”

제국의 황제는 그 시선을 비웃으며 골짜기 위에서 부유했다.

그녀가 한 손을 하늘로 쳐들었다.

사아아아!

황금빛 기운이 번뜩이고, 일대의 마나가 그녀를 향해 몰려들었으며, 검은색 드레스가 요란하게 펄럭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콰아아아-!

딩, 디딩, 디디딩, 딩!

오르골 멜로디 같은 소리가 울리고, 밤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딩, 디딩, 디디딩, 딩!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거대한 황금색 고리가 밤하늘을 채워 나갔다.

그 고리와 고리가 만나는 교점 하나마다 위력이 두 배로 늘어났다.

6, 7 서클 정도 되면 고리들이 증복하는 위력이 2천 배니 4천 배니 하는 수치로 나왔다.

밤하늘에는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고리가 떠 있었다.

제이릴리스가 낭랑하게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이 정도가 되면 서클을 이용해도 느리구나.”

우우우웅!

고리들이 금빛으로 달아올랐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재배열되었다.

수천 개의 서클이 엮인 거대한 원 아래에 약간 작은 원이 겹치고, 그 아래로 또 약간 작은 원이 겹쳤다.

마치 거꾸로 된 원뿔이 지상을 겨눈 형태를 이루었다.

우우우웅!

한계까지 달아오른 원들이 빛과 열을 뿜었다.

화르르르르-!

상아탑만큼 굵은 불기둥이 뿜어져 나갔다.

새빨간 불길이 종말의 날 찾아올 심판처럼 떨어졌다.

그러나 그 불길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저세상에서 온 이물들을 심판하기 위해 쏘아진 불길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골짜기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고, 모든 이물과 침식자가 공평한 죽음을 맞았다.

“끼이이이!”

암석질 껍질이 증발하고, 그 안에 든 이물의 살덩이는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불기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그대로 마경 안으로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아-!

마경 안은 다른 물리법칙의 영향을 받았다.

중력이 거꾸로 작용하는 정도는 고상한 마경이고, 기화된 황산이 대기를 대신하거나, 아예 시공간이 뒤틀어진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제이릴리스의 불길도 그 마경 안을 곧바로 불태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이릴리스는 과잉의 미덕을 아는 황제였다.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힘이 부족한 게 아닌지 고민해보는 게 그녀였다.

화르르륵-!

불의 악마도 도망칠 정도로 뜨거운 불길이 마경 안으로 끝도 없이 쏟아졌다.

녹을 수 없는 결정이 녹고, 탈 수 없는 돌이 불탔으며, 핵을 통해 이 세상으로 넘어오려던 이물은 태양 같은 열기에 신음했다.

파삭-!

마침내 핵이 더 이상의 불길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순간.

사아아아-!

보랏빛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골짜기가 본래의 불그죽죽한 색을 되찾았다.

“하!”

제이릴리스는 흡족하게 웃으며 골짜기를 내려다보았고, 하늘을 포르르 날아 두 백작과 한 무리의 성직자들이 기다리던 곳으로 날아갔다.

“신성 황제시여.”

“고귀한 분이시여.”

“신앙의 수호자시여.”

눈앞에서 마경이 닫히는 걸 본 두 백작과 성직자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폐하께서는 저희 인류를 인도하기 위해 오신…….”

제이릴리스는 그들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역시 아부는 발렌시아누스가 제일 잘했다.

“커피.”

“예?”

“커피를 다오. 피로하구나.”

나른한 장난기가 그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백작의 수행원들이 혼비백산하며 커피를 준비했고, 제이릴리스는 두 백작과 성직자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경은 짐이 닫는 게 제일 효율적이야.”

“예. 폐하.”

“하지만 침식을 막고 대비하는 건 그대들도 할 수 있는 일이지. 황립 마도 공방에서 광명의 은총을 모아 밤에 뿌려주는 마도구를 개발했다네.”

“저희에게 그 은혜를 나눠 주신다면 성실히 받들겠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직접 하는 게 효율적인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할 줄 알았다.

제국의 행정 귀족들이 대귀족들과 서신과 금화를 주고받으며 침식자 색출 체계를 만드는 동안, 그녀는 직접 마경을 닫고 다녔다.

이는 신성 황제를 직접 보고 기겁한 지방 영주들이 황실과 대영주들의 공문을 더더욱 잘 받들게 되는 효과도 있었다.

“재앙은 더 큰 재앙으로, 체계는 체계로 잡아야 하노라. 재앙은 짐이 상대할 테니, 그대들은 체계를 굳건히 세우게.”

인구 조사, 극빈층이 침식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한 공공 근로와 개간, 배급, 교회 건립을 통한 신앙 공백 지대 해소, 성직자 아카데미 후원, ‘신성력 방사 가로등’ 구매.

두 백작은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들었다.

그리고, 하며 말을 이으려던 황제는 하늘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와이번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그녀의 쌍둥이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내심 그 백상아리에게 완전히 집어삼켜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어떤 좋은 소식을 들고 올지 기대되었다.

“폐하! 수도에 이종족이 나타났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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