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골짜기에서 약간 떨어진 초원 한가운데에서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쌍둥이 남매가 모였다.
“폐하. 소신 발렌시아누스. 동부에서 돌아왔사옵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머리를 숙였다.
제이릴리스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짐의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 주었어. 짐은 그대가 가을쯤에야 올 줄 알았거늘.”
그녀는 그녀가 반가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반갑구나. 짐의 반쪽이여.’
그 말은 발렌시아누스에게는 약간 다르게 들렸다.
‘가을쯤에야 올 줄 알았다, 라. 제이릴리스는 마경을 직접 닫고 다니며 황권 강화를 하는 중이다. 즉, 내가 벌써 돌아와 버리면 방해라는 거다. 어디 나가 있을 곳이…….’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실은 인스트루멘툼에 한 번 들려야 할 거 같았으나…….”
그 순간 신성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폐하 곁에 머물기로 했사옵니다.”
‘이게 맞겠지?’
망나니 대공은 조마조마하며 말했고, 다행히 신성 황제는 흡족하니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노라. 대공. 짐의 눈이 닿는 곳에 있어 다오.”
“예. 폐하.”
발렌시아누스는 그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아름다우시다.’
동시에.
‘내가 대영주들을 만나며 세력을 키울까 경계하고, 그러지 말라고 돌려서 경고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제이릴리스는 발렌시아누스가 이상한 착각을 하는 듯하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래서 엘프는 무슨 소리냐? 애초에 놈들이 자치구 밖으로 나오는 일이 있기는 하느냐?”
발렌시아누스는 지루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보고를 시작했다.
“카리오사 공작은 성공적으로 닻 군도를 정복했습니다. 해안 요새 건설과 이주 사업을 마친 후 칭왕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정복 과정에서 엘프와 인어를 한 명씩 만났습니다. 엘프의 말에 따르면 마경으로 인해 자치구가 큰 피해를 보았고, 새 땅을 찾으려 한다고 합니다. 인어는 아예 불경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듯했습니다.”
황제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 잠깐, 따라가기가 힘들구나.”
“송구합니다.”
“짐은 황제가 된 뒤로 많은 걸 알게 되었지만, 동화 속 괴물들이 짐을 공격할 생각이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그렇군’ 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예. 폐하.”
“조금 천천히 이야기하거라. 아직 시간도 커피도 많지 않으냐? 저쪽에 앉자꾸나.”
벤치로 쓰기 딱 좋은 크기의 돌이 놓여 있었다.
신성 황제는 바람을 일으켜 돌 위에 쌓인 흙먼지를 닦아냈고, 망나니 대공은 제복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깔았다.
두 백작과 성직자들은 황제와 대공이 돌 위에 앉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고, 몇몇 기사와 병사들은 인간 의자를 자처했지만, 둘은 손짓으로 그들을 쫓아 버렸다.
‘제이릴리스가……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게 맞겠지?’
발렌시아누스는 이야기하듯 보고하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텐티아 경이 사야 옌이라는 암살자를…….”
“타르티라는 동방 몰락 귀족을 끌어들여 황실의 제독으로…….”
“카리오사 공작이 닻 군도를 포위하고…….”
그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동방의 암살자 사야 옌이라. 체사르의 암살자들과 만나면 누가 더 셀지 궁금하구나.”
“물 위를 걷는 마도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어서 양산하거라. 명하노니, 황실에 우선 납품하도록. 값은 잘 쳐주겠노라.”
“그래. 결국 그 백상아리가 왕이 되는군. 짐도 그녀가 그대를 그렇게 밝힐 줄은 몰랐구나. 그대를 닮은 황족 하나쯤은 살려뒀어야 했는데, 역시 미래는 모르는 것이로구나.”
제이릴리스는 때로는 웃었고, 때로는 한숨을 쉬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재미있구나. 더 해 보아라. 술도 없는데 취한, 아. 백작. 고맙군.”
괜찮은 포도주까지 한 잔 들어가니, 발렌시아누스도 잠시간 원래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 잊을 정도였다.
그는 한참 동안 동부 이야기를 했고, 그다음에야 정신 차리고 이종족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동부로 가기 전 제 시녀 루디를 사교계에 데뷔시켰사옵니다. 수도 궁정 귀족 사이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시하게 했사옵니다. 침식자 세력의 준동을 경계하려 했는데…….”
“수상한 마도구를 많이 파는 백작이 있어 가까워졌고, 그 백작이 물건을 공급받는 상인을 조사하려다, 난데없이 엘프의 공격을 받았다는 거냐?”
“그렇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혀를 내둘렀다.
“그럼 그 백작은 어찌 된 것이냐?”
이번에는 발렌시아누스가 혀를 내두를 차례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던 것이었사옵니다. 무지에 책임을 물어 벌금을 물리는 정도로 마무리했사옵니다.”
“하.”
“정작 진짜 엘프에게 받은 마도구라는 소문이 퍼져 경매장은 날로 북적이고 있다고 하옵니다.”
“괘씸한지고. 세금을 물리고 싶구나.”
“교회와 황실, 그리고 휘말린 피해자들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냈사옵니다. 이미 그 무지에 합당한 대가를 치렀으니, 더 이상의 벌은 삼아 주시옵소서,”
“그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노라.”
제이릴리스가 화재를 살짝 틀었다.
“그래서 추적은 성공했느냐?”
발렌시아누스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렸다.
“흑철 기사들과 청은 기사, 황립 마도 공방의 워록들이 일대를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사야 옌에게도 명했지만,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음.”
“고위급 정령술사가 사라진 지 오래라 다들 그자의 능력에 생소함을 느꼈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시기가 참으로 공교롭구나.”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새 땅을 찾으려는 엘프와 옛 땅을 되찾으려는 엘프가 둘 다 나왔사옵니다. 침묵하던 이종족이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옵니다.”
신성 황제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도 눈치가 있다면 제국의 정세를 알겠지. 이제 동부까지 안정되었으니 짐은 남방대륙으로 눈을 돌릴 테고, 그대는 침식자 교단을 쫓고 견제할 것이야.”
발렌시아누스는 한 마디 한 마디 말할 때마다 막연하던 불안감이 구체화 되는 걸 느꼈다.
“예. 제가 버티는 동안 폐하는 놈들의 뿌리를 칠 것이고, 남방대륙의 붕괴와 함께 침식자 세력은 와해 될 것이옵니다. 결국 그 교단도 남방대륙 토후들로부터 적잖은 후원을 받을 것이니까요.”
“실로 그러하지.”
그는 많은 걸 알았고, 그만큼 두려웠다.
“다르게 말하면 제국의 모든 행정력과 전력이 남방과 침식자에게 쏟아진다는 뜻이고, 그동안 이종족을 견제할 여력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놈들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옵니다.”
“침식자와 이종족이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느냐?”
신성 황제가 물었다.
망나니 대공은 소문답지 않게 매우 조심스럽게 답했다.
‘엘프도 침식을 혐오한다. 회귀 전에 둘은 제대로 손을 잡지는 않았어.’
붉은 입술이 잠시 우물거리다, 천천히 벌어졌다.
“따로 협의가 있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공동의 적을 두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 적이 우리 제국이옵니다.”
아침 해가 떠올라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신성 황제는 그 빛을 등으로 받으며 나른하고도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말하기는 뭣하지만, 세상이란 야속하구나. 우리에게 너무 많은 시련을 던져주는 듯하기도 해.”
“예. 그러니 사절을 보내…….”
발렌시아누스는 대책을 논하려 했고.
“짐도 세상에 시련을 주어야겠지. 천 년 전 시조께서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구나. 다섯 종족의 지배자에서 한 종족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제이릴리스는 말살 정책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하늘의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 * *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아직 아무 일도 없사옵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제이릴리스를 말렸다.
운석은 이제 싫었다.
제이릴리스가 나를 뿌리치며 일어나려 했다.
“억!”
나는 종이 인형처럼 밀려났고,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날 잡아끌었다.
“이미 엘프가 수도에 들어와서 난리를 쳤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느냐!”
“침식자, 침식자와 남방대륙이 먼저이옵니다.”
“그럼 이종족은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냐?”
그녀는 내 입을 다물게 하겠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난 회귀한 자였고, 이종족 문제에도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었다.
“갈라치기를 하시옵소서.”
“갈라치기? 그게 무슨 말이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긴장감에 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인어와 남부 어인족, 그리고 적기제독을 통해 남방대륙을 견제하소서.”
제이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적기제독은 지금도 그 역할을 잘하는 중이지. 얼마 전에도 사략 함대로 약탈한 남방대륙의 제물을 올려보냈어. 그런데 대체 인어와 어인족을 언제 어떻게 찾고, 그 괴물들과 어떻게 말을 맞추겠느냐?”
나는 심장이 터질 듯 조여드는 걸 느꼈다.
“어디서 들었냐고 묻지 말아주시옵소서.”
“그래. 알았노라.”
제이릴리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적기제독이 인어 공주 아닙니까? 잠든 왕을 대신해 1천 년의 계약을 이어 온 공주.”
“그걸 그대가 어떻게…….”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나른하던 신성 황제의 얼굴에 이례적인 놀라움이 한 차례 내달렸다.
절대 잊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몰래 초상화라도 그려 놓고 싶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혀를 한 번 차며 다시 나른하니 말을 이었다.
“그래. 방금 묻지 않겠다 말했지. 남부는 그렇게 견제한다 치겠노라. 일단 계속 지껄여 보도록.”
나는 이걸 이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지 의심하면서도 술술 말을 이었다.
“이제 남은 게 엘프와 수인, 드워프와 침식자이옵니다. 그러나 드워프는 침식자와 워낙 사이가 좋지 않고 고결한 고집을 가진 종족이니, 제국이 침식자와 싸우는 동안은 걱정이 없사옵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구나.”
“엘프는 이미 위험을 알아차렸으니 되었사옵니다. 차차 대책을 세워나가지요. 폐하께서는 이 별에서 제일 강한 분이시니, 폐하에게 위험한 적은 모르는 적이지, 강한 적이 아니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짐만 안전하다고 다가 아니야. 짐뿐이 아니라 짐과 그대, ……짐의 신민들, 제국까지 통틀어 말할 고려할 수 있도록.”
왠지 ‘그대’에 악센트가 강하게 들어갔지만, 일단 넘겼다.
그녀가 뭐라 지적했다가는 이빨을 뽑아버리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남은 게 수인인데, 사실 이들이 제일 위험하옵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했노라. 일단 변이하기 전에는 외관상으로 크게 구별할 수 없잖느냐? 물론 일부 종은 은 등으로 식별할 수 있지만…… 한계가 명백해.”
“그들 역시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이 있사옵니다. 약간의 금화만 있으면 되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금화?”
* * *
“그러니까 이종족이 천 년 전에 멸종한 게 아니라 아직도 어딘가에 알고 있고, 다시 제국을 노리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옛 빈민가 8층 석조 건물, 나는 코넬과 마주 앉아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묻었고, 코넬은 앞으로 달려 나올 듯 내게 몸을 기울였으며, 코넬의 호위 소년은 눈을 왕방울처럼 부릅떴다.
“그래.”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인 듯했는데, 충성 맹세 기간에 침식자의 존재를 캐고 다니던 그 소년이었다.
이름이…… 디에였을 거다.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니 꽤 반가웠다.
코넬이 욕심 많은 다람쥐 같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대공 전하. 참으로 불경한 발언이오나, 그게 무슨 견인족 같은 소리입니까?”
이게 순수한 인간에 가까운 평민과 이종족 혼혈 귀족 간 인식차였다.
우리에게 이종족은 나름 가까운 세상이나, 저들에게 이종족은 완전히 동화 속 괴물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녀가 바로 이해하리라는 기대따위는 하지도 않았고, 해야 할 말만 차근차근 이어 나갔다.
“아몬은 전사의 신이지.”
“예. 전하.”
“동시에 늑대 수인 부족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눈치 빠른 소녀답게, 코넬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인에 수인으로 대항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정답이다.”
“그러면 제 자경단이 더 활성화되어야겠네요?”
나는 실실 웃으며 그녀를 유혹했다.
“그렇지. 이참에 교주, 아니. 교황 노릇을 제대로 해 보는 게 어떠냐?”
코넬이 반쯤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싫어요! 지금도 이단이라고 엄청나게 공격받고 있단 말이에요! 그 개 같은 자식들!”
나는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였다.
“익명으로 교단에 금화 3천 닢 기부해줄게. 쓰고 싶은 대로 써.”
* * *
“이번에 신시가지에 새 신전 짓는다는 거 들었어?”
“이단 신전이라니. 말세구만.”
“아니래. 광명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갖추고자 하는 수련이래.”
“건강한 몸으로 더 열심히 기도하고 살아서 빛에 헌신하라? 이런 느낌이더라. 가봤는데 꽤 괜찮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