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코넬의 신전은 잘 건립 중이라고 합니다. 교단보다는 건강에 초점을 맞춰서 이단이라는 비난도 최대한 피했다고 하네요. 완전 변이가 가능한 전사들도 안정적으로 양성 중이라고 합니다.”
루디가 종합공방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보고를 올렸다.
나는 흡족하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능력 있는 꼬맹이라니까. 고충 사항은 없데?”
“부르주아 의원들 사이에서 견제가 심하게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른 힘으로 자기들 사업체를 빼앗아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럼 배지 의원들을 움직여서 도와줘야겠네.”
본래는 귀족들이 반대하고 평민들이 찬성하는 정책이었는데, 지금은 처음과 찬반 구도가 정반대로 되었다.
“모레 다과회에서 말해보겠습니다.”
루디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줘. 콘세크라투스 백작.”
나는 작위 명으로 루디를 불렀다.
루디는 이제 얼굴을 붉히는 대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발렌 님.”
이제 루디는 날 수행할 때도 시녀복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었다.
누가 봐도 실세 궁정 귀족 같은 처신이었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내 맞은편 좌석에 앉은 사야 옌을 가리켰다.
“아. 그리고 앞으로 잠입 같은 거 할 일 있으면 얘에게 시켜.”
루디가 마총을 잘 쏘고, 칼도 잘 다루지만, 잠입이나 암살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은 아니었다.
내 눈과 귀로서 움직여 줘야 하는 만큼, 일선에서 칼 맞아 가며 잠입하는 건 진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
“네? 아. 그 암살자군요?”
루디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사야 옌을 바라보았다.
해맑게 웃는 그녀를 보며 사야 옌이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루디는 겉보기에는 벌레도 못 잡을 것처럼 생겼고, 눈매도 아주 부드러웠으며, 눈동자는 크고 맑았다.
옷은 불편해 보일 정도로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고전적이고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반면 사야 옌은 척 보기에도 강인하고 잔혹하게 생겼고, 눈매는 칼처럼 날카로웠으며, 짧은 꽁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빳빳한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고, 이국적이고도 중성적인 인상이었다.
그러나 사야 옌은 눈치 빠른 암살자답게 루디를 얕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그날 밤 루디가 엘프와 싸우는 걸 본 사람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백작 각하. 사야 옌이라고 합니다.”
물론 눈빛에는 약간의 불만이 어려 있었지만, 애인과 생이별당하고 저주까지 걸린 사람에게 진심어린 미소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디가 사야 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반가워요. 사야 옌. 저는 루디 콘세크라투스. 발렌시아누스 님의 시녀랍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사야라고 불러도 되지요?”
사야 옌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손을 맞잡았다.
“물론입니다. 각하.”
콱.
악수의 순간, 사야 옌이 어깨를 움찔했다.
‘시녀의 손이 아닌데?’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왜 그래요? 사야?”
루디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닙니다. 각하.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사야 옌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아주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루디가 내게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발렌 님.”
“왜?”
“사야 목에 문신은 뭔가요?”
사야 옌의 목에는 가시덩굴 문신이 있었다.
“주종 계약 주문이야. 주인에게 의도적으로 상해를 입히려 하면 목이 조여. 너도 내일 황립 마도 공방 가서 주인으로 등록해야 해.”
“그건…… 저주 계열 주문 아닌가요?”
“응. 황립 공방에서 일하는 흑마법사가 새긴 거야. 일류 암살자가 수도와 황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기한은 10년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도 어쩐지 변명하는 듯한 말이 나왔다.
루디가 날 사람 하나 잡아다 노예로 부려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두려운 듯했다.
다행히 루디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동방의 암살자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네. 발렌 님. 실력 있는 사람을 붙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렌 님을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보속을 위해서, 이 루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저 내가 듣고 싶던 말을 해 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진짜 좋은 시녀를 두었다.
* * *
펑! 펑!
내가 종합공방 고층 석조 건물 1층 홀에 들어선 순간, 양쪽 옆에서 불꽃이 터졌다.
“무슨-!”
반사적으로 보검 ‘태풍’의 손잡이를 잡고 바람 불꽃 칼날을 뽑아내려던 순간, 천장에서 색종이와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전하!”
“대공 전하!”
“저희가 해냈습니다!”
홀에 마커스의 조수들과 세레라지에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이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결국 성공했습니다.”
“너무너무 길었습니다.”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광명신교 성직자들도 안쪽 구석에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인간 승리였습니다.”
“그들은 주의 은총을 받은 성기사처럼 회로도와 싸워나갔습니다.”
“저들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세레라지에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내게 달려왔다.
“동생아! 이 누님이 해냈잖니! 역시 난 천재란다.”
파란 눈은 바다처럼 빛났고, 노란 눈은 태양처럼 빛났다.
며칠 전에 봤을 때는 다 죽어가고 있더니, 지금은 나보다도 건강해 보였다.
뽀얀 피부에는 탄력이 넘쳤고, 남색 생머리에서는 윤기가 흘렀으며, 입가에는 생기 넘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엇!”
그녀가 날 와락 껴안았고, 난 망나니 대공의 악명과 어울리지 않는 비명을 토했으며,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날 잡아끌었다.
“어서 보렴!”
홀 정중앙 테이블에 그것이 올라가 있었다.
황금으로 만든 연꽃 봉우리처럼 생긴 그 마도구는 한 손으로 들기에는 크고 두 손으로 들기에는 약간 작은 크기였다.
꽃잎 한 장 한 장 앞뒤마다 아주아주 세밀한 주술 회로가 그려져 있었다.
“이 꽃잎 한 장에 들어간 회로가 수백 개도 넘잖니.”
마도구에는 그런 꽃잎이 수십 장이 붙어 있었다.
세레라지에가 연꽃 봉우리 위에 손을 올리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우웅!
은은한 붉은 빛과 함께 꽃잎이 벌어지고, 그 중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내게서 뽑아낸 쿠이트 아즈의 결정이 놓여 있었다.
결정은 두 조각이었는데, 각각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였다.
세레라지에가 성자를 영접한 광명신도처럼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결정을 일주일 정도 이 안에 넣어 놓으면 각인이 되고, 한번 각인이 된 결정은 서로 좌표가 되잖니. 그리고 좌표를 가지고 있으면 이 마도구를 통해서 문을 열 수 있단다.”
나는 경탄하며 아즈의 결정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각인이 된 결정을 들고 있으면……?”
“마도구에 올라간 반대쪽 결정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다는 거잖니. 한 번 작동해 보려무나.”
그녀가 그림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내게 결정을 쥐여 주었다.
나는 입구 쪽으로 나가서 결정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각인을 따라 빛이 번뜩였다.
곧이어 난 보이지 않는 끈으로 두 결정이 이어지는 걸 느꼈다.
“아.”
내가 아즈의 파편을 공명시킬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원래는 반대쪽 파편을 부수거나, 위치를 파악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확실히 그 끈을 이용해 뭔가를 전달할 수 있을 듯했다.
나는 결정에 대고 말했다.
“세레라지에 누나.”
사아아아-.
테이블 위 마도구에서 붉은 안개가 흘러 나오고, 연꽃잎 안쪽에서 뭉치며 내 형태를 이루었다.
그 형태에서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레라지에 누나.”
이렇게 목소리와 상황을 전달하고, 마나를 더 불어 넣으면 아예 문이 열리는 듯했다.
“세상에!”
“그렇지!”
“성공이잖니!”
루디가 탄성을 토하고, 마커스가 주먹을 쥐었고, 세레라지에가 다시 한번 환호했다.
나 역시 이 놀라움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누나는 천재야.”
-“역시 누나는 천재야.”
* * *
이건 역사에 남을 대발견이었다.
나와 세레라지에는 그 길로 제이릴리스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폐하!”
“폐하-!”
“대체 무슨 소란-”
“세레라지에 대공이 공간 이동 마도구 복원에 성공했사옵니다!”
“……일단 앉거라.”
제이릴리스는 그 마도구를 샅샅이 훑어보더니, 터무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짐도 성공하리라 믿지 않았거늘.”
“저도 그랬습니다. 폐하.”
“짐도 이건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구나. 양산은 도저히 힘들겠어.”
세레라지에가 마법과 관련된 일에서 드물게도 쓰게 웃었다.
“반쯤은 운이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다시 만들라 명하셔도 못할 겁니다.”
제이릴리스가 흡족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정말로 잘해 주었느니라. 역시 그대를 거두기 잘했어.”
나는 그 틈을 노리지 않고 아부했다.
“세레라지에 대공 같은 인재를 알아본 폐하의 공덕이옵니다.”
세레라지에가 집채만 한 도롱이벌레를 보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제이릴리스가 일순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달콤하구나. 대공. 그래. 그대의 아부가 그리웠노라. 물론 세레라지에 그대의 그 경멸 어린 표정도 그리웠어. 한동안은 원하는 연구만 쉬엄쉬엄 하거라. 앞으로도 무리한 일감은 주지 않겠어.”
세레라지에가 역시 드물게도 마법과 관련된 일에서 발을 뺐다.
약간 창피하다는 듯한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예. 폐하. 솔직히 저도 사흘은 쉬어야 할 듯합니다.”
사흘?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 누나. 3주는 쉬도록 해.”
“대공. 그러다 죽을 수도 있노라.”
나와 제이릴리스가 동시에 질색했다.
세레라지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황제가 직접 내려 주는 커피를 마실 영광을 누렸다.
“폐하?!”
“이렇게 잘 내리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맛이 지난번과 완전히 달라져서 깜짝 놀랐다.
쓴맛이나 신맛은 거의 배어나오지도 않았고, 고소한 향기와 기분 좋은 깔끔함만 입에 남았다.
최고의 커피하우스에서 최고의 바리스타에게 대접을 받은 듯했다.
제이릴리스가 흐뭇하니 웃었다.
“그래. 짐은 배우면 뭐든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니라.”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하늘을 보면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땅을 보면 땅의 이치를 깨닫는 분이 아니시옵니까?”
“그런 짐도 커피의 이치는 배워야 깨달을 수 있었노라.”
“그럼 전 커피의 이치를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옵니다.”
세레라지에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기품 넘치게 잔을 기울였다.
창문에서 들어온 햇살이 그녀의 고깔모자 위로 쏟아졌다.
잔을 바치는 손가락과 가볍게 기울이는 손목은 우아했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음미하는 모습은 그림 속 전설의 마법사 같았다.
약간의 당혹감까지 느껴졌다.
“누나는 커피를 큰 금속 물병에 잔뜩 담아다가 물 들이키듯 마실 줄 알았는데…… 제법 멋들어졌네?”
그녀가 새침하니 말했다.
“상아탑에서 스승님이 가끔 내려 주셨잖니. 그때는 이렇게 마셨단다.”
“아.”
“그때 마시던 맛이 나는구나. 다시는 못 느껴볼 줄 알았는데.”
그리움 어린 목소리였다.
제이릴리스가 살짝 혀를 차더니,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이미 말했지만, 이제 원하는 연구를 해도 좋아. 상용화는 마커스 후작이 알아서 하겠지.”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주교 침식자의 팔을 상아탑과 공동 연구하고 있다고 아노라. 학술회 개최도 맡고 있다고 알고.”
“그렇습니다.”
“이제 그대가 상아탑을 등에 업고 반역을 꿈꾸거나, 진리를 보겠다며 침식에 몸을 던지리라 생각되지는 않는군. 그래. 그대의 고향에 편하게 다녀와도 신경 쓰지 않겠노라.”
황제는 언제나처럼 무죄무치였고, 신처럼 당당했다.
그러나 구름에 가린 태양처럼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눈빛을 보고 있자면, 아주 약간은 미안해하는 듯하기도 했다.
* * *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을 듣자마자 지금 당장 가겠다는 건 주군 이전에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누나는 분위기라는 걸 못 읽어?”
“입 다물려무나! 못된 동생아! 내가 몇 년을 기다렸는지 아니?”
“그래. 마법사에게 예의를 기대한 내 잘못이 크다.”
“잘 알고 있잖니. 그래도 아직은 자기 객관화가 되는 모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