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상아탑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마도구 승강기들 앞으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밀지 마!”
“이거 내려가는 건가 올라가는 건가?”
“올라가서 지금 90층에 계신 원로님들을 데려올 겁니다.”
“뭘 소리야. 내려가! 아래쪽으로 번지고 있다고! 격벽부터 세워야지.”
마법사들이 아옹다옹 말다툼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수염과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으며, 그 와중에 승강기가 이 층을 지나쳤다.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을 듯했다.
“동생아! 이쪽이란다!”
세레라지에가 계단으로 날 안내했다.
문을 왈칵 열자 기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 중간중간 마법사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허억, 허억!”
“크윽!”
“살려줘!”
백발 노인부터 젊은 생도까지 지팡이를 짚고 계단 중턱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했다.
난 다급하게 한 명을 부축하게 물었다.
혹시 저주나 침식에 잠식당한 것일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지? 당했나?”
“다리, 다리가 너무 아픕니다.”
크리오스가 난처하게 웃었다.
“체력 부족이군요. 하하.”
세상.
나는 그 마법사를 던져버린 뒤, 니아르를 돌아보았다.
“니아르. 71층이라고 했지?”
“네. 전하.”
여기는 50층이었다.
나는 세레라지에를 향해 등을 내밀었다.
“……누나. 업혀.”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 내 목에 손을 둘렀다.
“……고맙잖니.”
보통 건물은 한 층이 3.3m이었지만, 상아탑은 한 층이 5m이었다.
그렇게 21층을 올라갔으니 수직으로 이동한 높이만 총 105m이었고, 나선계단을 빙빙 돌며 올라왔으니 실제로 이동한 거리는 그 수십 배는 될 터였다.
게스타르테가 중간에 낙오되고, 크리오스가 생조술로 자신을 강화해 그녀를 부축했다.
나는 한 팔에 세레라지에, 한 팔에 니아르를 끼고 계단을 올랐다.
남색 마법사와 우유색 마법사가 양쪽에 축 늘어졌다.
“누나! 왜 이렇게 가벼워!”
“얼마나 다행이니?”
할 말이 없었다.
“…….”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71층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문을 박차 열었다.
쾅!
하얀 복도에 마법사들의 주문과 고함이 시끄럽게 울렸고, 마나가 미친 듯 맥동했으며, 저 멀리서 소름 돋는 기운이 느껴졌다.
“격벽 내려, 격리가 먼저다!”
“불로 정화하여 주소서! 천상의 불기둥.”
“파괴 학파 애들을 데려와 염동력 방벽부터 세워. 그거 말고는 못 막는다!”
“이피제 님이 오셨다! 다들 비켜.”
“일단 나와! 일단 나오라고!”
“나오기는 뭘 나와? 정화부터 받아. 성수 가져오라고 해.”
“허억, 허억. 성수가 다 떨어졌답니다. 애초에 상아탑에 비치된 물량은 얼마 안 되기도 했고요.”
“부상자입니다! 생조 학파 있습니까?”
“부상자는 이쪽으로 데려오지 말고 정화부터 받으라고 해! 잘못하면 다 같이 침식된다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같이 죽을 수는 없잖아.”
“왜 아직도 격벽이 안 내려온 거야!”
50층이 난장판이라면, 71층은 개판이었다.
복도 전체가 나오려는 자와 들어가려는 자가 뒤섞여 혼란에 차 있었다.
“…….”
“아하하.”
세레라지에가 할 말을 잃었고, 니아르가 식은땀을 뚝뚝 흘렸다.
저 앞쪽에서 원로급으로 보이는 마법사 둘이 언성을 높였다.
“왜 격벽을 안 내리는 거야!”
“저 안에 중요한 마도서가 있다고!”
“마도서가 우리 제자들 목숨보다 중요한가?”
“알만델 직계 사본이야!”
“……!”
한참 목소리를 키우던 원로가 입을 다물었다.
난 세레라지에에게 물었다.
“알만델 사본이 뭐야?”
세레라지에가 숨을 들이켜고 단숨에 답했다.
“광명교의 천사 소환 의식을 응용해서, 옛것이나 악마를 소환할 때, 인간에게 호의적인 자아만 불려오도록 유도하는 마도서잖니. 원본은 유실되었으니 직계 사본이 제일 순도 높은 지식인데, 그게 저 안에 남은 모양이구나.”
“크리오스 님이 만들 그 마법에 필요한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옛것 관련 실험에서는 꼭 필요한 마도서란다. 위험 자체를 낮추는 용도로 사용하잖니.”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들어가자.”
세레라지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으며, 침을 삼켰다.
“동생아. 네가 끝내 날 사지에 데려가는구나. 그래. 가보는 거잖니!”
나는 앞을 가로막은 마법사들을 뻥뻥 걷어차며 나아갔다.
“황형 발렌시아누스다! 모두 길을 비켜라!”
두 원로급 마법사가 날 보고 반색했다.
“전하!”
넓고 하얀 복도 한가운데 격벽이 반쯤 내려와 복도를 막고 있었고, 격벽 너머에서는 새카만 기운이 물씬 흘러나왔다.
키득키득키득키득!
불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일이 잘못 돼도 아주 잘못된 듯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벌써 막막했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들어가고 통로를 봉인하도록!”
마법사들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게 말리는 척이라도 하는 놈이 하나도 없냐?”
나는 분통을 터트렸고, 세레라지에는 실실 웃었다.
“우리에게 뭘 기대하니? 가자꾸나.”
“잠깐만요! 선배. 저도 같이 가요.”
니아르가 세레라지에의 소매를 잡았다.
탁.
세레라지에는 곧바로 그 손을 뿌리쳤다.
“난 네게 목숨을 맡길 생각이 없잖니.”
그때 격벽 너머에서 다다다, 하는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반쯤 내려온 통로 아래로 녹색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익!
“대지의 벽이여!”
니아르가 하얀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휘두르자, 상아탑 바닥이 순식간에 벽처럼 솟아올라 그 액체를 대신 맞았다.
부글부글부글부글!
한 뼘 두깨의 대리석이 줄줄 녹아내렸다.
니아르가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안 되요?”
세레라지에가 새침하게 웃었다.
“앞장설 영광을 주겠잖니.”
나는 니아르를 내 뒤로 세우며 눈을 흘겼다.
“이런 못난 선배를 봤나.”
* * *
상아탑 넓은 복도에 은은한 어둠이 내렸다.
마도구 등잔이 모두 꺼진 탓이었다.
“서늘하네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더워요.”
“옛것의 기운 때문이란다. 정신 똑바로 차리렴. 침식되면 두고 갈 거잖니.”
세레라지에와 니아르가 내 뒤에서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니아르. 어디에 사본이 있는지 아나?”
“이대로 직진해서 나오는 갈림길 오른쪽 복도 끝 방일 거예요.”
“……상아탑이 이렇게 넓지 않았던 거 같은데.”
긴 복도 좌우로 수많은 방이 있었고, 방 대여섯 간격으로 갈림길이 있었다.
그 갈림길에서 뭔가가 달려 나왔다.
“찌지지직!”
니아르가 외쳤다.
“실험용 생쥐예요.”
세레라지에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게?”
그 쥐는 들소보다 약간 컸고, 스무 개는 넘는 머리가 달려 있었으며, 채찍 같은 꼬리를 휘둘렀고, 입에서 녹색 체액을 줄줄 뱉었다.
“찌지지직!”
“찌지지직!”
그런 쥐 열댓 마리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다다다!
세레라지에가 기겁하며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사슬 번개!”
노란 보석에서 푸른 빛이 번뜩였다.
파지지직!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간 번개가 쥐들 사이를 헤집었다.
“찌지직!?”
쥐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을 굴렀다가,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다다다다!
“무슨 저항력이-!”
세레라지에가 기겁하며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둘렀고, 눈앞이 환해질 정도로 전격이 번뜩였다.
번쩍!
이번에야말로 쥐들이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난 이게 시작일 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으흐, 으흐흐흐. 다들 보게나! 내가 완전한 생물을 만들었어!”
복도 한쪽에서 한 마법사가 걸어 나왔다.
그는 눈이 풀려 있었고, 몸 곳곳에 촉수가 돋아 있었으며, 정수리 위로는 특히 굵은 촉수가 솟아 있었다.
“오오! 그래. 자네들은 이 가치를 알아보는군. 마음껏 보게!”
“미친.”
실험실 문이 왈칵 열리고, 붉은 안광 수십 개가 번뜩였다.
“찌지지직!”
이번에도 쥐는 쥐였는데, 등에 굵은 촉수가 가득 돋아 있었다.
꾸물꾸물꾸물꾸물!
다다다다!
꾸물꾸물꾸물꾸물!
쥐가 달려오고, 촉수가 구불거리며 기괴한 파동을 자아냈다.
나도 약간은 어지러울 정도였다.
니아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전하. 머리가…….”
“정신 파동을 저렇게도 쓰는군.”
나는 왼손에서 보이지 않는 손 장갑을 흡수하고, 아즈의 힘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손에 도자기 같은 금이 내달렸고, 그 틈이 붉게 달아올랐다.
퍼어어엉!
다음 순간 붉은색 파동이 전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우당탕!
파동에 맞은 마법사와 촉수 쥐들이 사이좋게 바닥을 굴렀고, 잠시 뒤 안쪽에서부터 불타올랐다.
세레라지에와 니아르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 귀찮아지겠네.
“발렌. 그게 뭐니?”
“전하. 방금 그거……?”
나는 씩 웃으며 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웠다.
“쉿. 우리만의 비밀이야.”
니아르가 비밀을 지켜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 등에 마법을 퍼붓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때 세레라지에가 내 옆구리를 전기로 지졌다.
파지직!
“이 위험한 곳에서 그런 장난을 칠 기분이 드니?”
“장난이라도 쳐야 제정신이 유지될 거 같았지.”
“…….”
니아르가 선배의 평소 같은 반응을 보고 눈매를 누그러트렸다.
세레라지에가 니아르는 못 보는 각도에서 금빛 눈을 찡긋했다.
“대단해. 눈치를 배웠구나. 역시 누나는 천재야.”
“왜 칭찬을 들었는데 욕을 먹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잖니.”
“지금 저만 빼고 무슨 이야기 하신 거예요?”
“모르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단다.”
“마법사는 그런 거 안 믿어요.”
다다다다-!
“다시 오네.”
“준비되었어요.”
“나도 준비되었잖니.”
나는 마법검 태풍에 불길을 불어넣어 바람 화염 칼날을 만들었고, 세레라지에는 자기 역장을 쳤으며, 니아르는 시약을 꺼내 들었다.
복도 오른쪽 끝 방으로 가는 길은 아주 멀고 험했다.
다다다다!
쥐, 촉수 쥐, 촉수 사냥개가 우리를 노렸고.
“난 진리를 봤어!”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해!”
“내가 해냈다!”
붕대 벗긴 미라처럼 검게 말라비틀어진 마법사들이 생전과 같은 마법을 사용했다.
화르르륵!
보라색 불덩이가 날아올랐고.
치이이이!
독안개가 깔렸으며.
우우우웅!
온갖 저주가 우리를 향했다.
퍼버버벙!
난 용의 비늘을 일으켜 모든 저주를 받아냈고, 불꽃 태풍을 휘둘러 말라비틀어진 마법사들을 참수했으며, 그들의 선택을 비웃었다.
“고작 이런 힘을 위해 존재를 바쳤느냐!”
세레라지에와 니아르 역시 인정사정없이 마법을 퍼부었다.
“결국 그쪽으로 넘어갔잖니. 그럼 우리는 형제자매가 아니라 적이란다.”
“지친 동지들에게 안식을.”
아직 실전을 여러 번 겪지 않았을 니아르도 옛 친우들에게 마법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괜찮냐?”
“안 괜찮아요. 하지만.”
“하지만?”
“저런 애들이 상아탑 평판을 다 깎아 먹는 거니까요. 또 제가 이렇게 화내는 모습을 보여야 전하께서 ‘음. 모든 마법사가 지식을 위해 사회 질서를 무시하는 건 아니군.’이라고 착각하실 테니까요.”
그녀의 크림색 눈에도 마법사다운 광기가 어려 있었다.
“하.”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 착각해 주지. 그럼 들어가 볼까?”
* * *
방은 넓었고, 수십 개의 테이블 위로 실험 기제가 늘어서 있었으며, 어두침침했다.
촉수 사냥개나 쥐는 보이지 않았다.
니아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어두워요.”
“그게 무슨 문제인데? 오는 길도…….”
“이 방은 창문이 있다고요.”
“…….”
넓은 통유리창 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나는 점이 몇 개 보이는 게, 마치 밤하늘 같은 풍경이었다.
“동생아. 저거 같구나.”
세레라지에가 창가 테이블에 놓인 책을 가리켰다.
마도서답게 온갖 장식이 되어 있었고, 황동 자물쇠로 봉인되어 있었다.
“제가 가서 가져올게요.”
니아르가 나섰고, 나는 왼손을 들었다.
“아니. 누가 있다.”
불꽃 두른 태풍을 앞으로 겨누자,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 줄 알았어. 세레라지에.”
살아 있는 듯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역시 검게 말라 미라 같은 모습이었고, 생전과 같은 화려한 로브를 입고 있었으며, 챙 넓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다른 침식 마법사들과 달라진 게 있다면, 팔이 네 개였다.
세레라지에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난 포기한 패배자는 모르잖니.”
“내가 패배한 거 같아? 난 진실을 알았어.”
목소리가 조금씩 갈라졌다.
“지금부터 보여 줄…….”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니아르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불타는 고통의 전격 가시 수레바퀴!”
긴 시동어가 내뱉어지는 동시에 마법이 발현되었다.
차르르륵!
붉게 달아오른 굵은 쇠사슬이 쏘아져 나가 침식자 마법사의 마른 몸을 칭칭 묶었다.
“크윽!”
치이이잉!
사슬에는 내가 봐도 대단한 수준의 불꽃 마법이 걸려 있었고, 단단한 가시 사이로는 전격이 튀고 있었다.
화르르륵!
카드드득!
파지지직!
그 사슬이 침식자 마법사의 몸을 묶은 채로 고속으로 회전하며 그의 몸을 태우고 지지고 깎아내며 조여들었다.
“당신은 말할 권리가 없어요. 이 마법사의 수치!”
니아르가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까드드득!
사슬이 더더욱 조여들었고, 침식자 마법사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크으으으, 크흐, 흐흐흐흐!”
그것도 잠시, 그의 신음은 곧 웃음으로 변했다.
그가 보랏빛 안광 번뜩이는 눈으로 우리를 쏘아보았다.
“내가 본 걸 너희도 보게 될 거야. 그럼 너희도 날 이해하게 될 거라고. 크흐흐흐!”
니아르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쾅!
콰직!
동시에 사슬이 완전히 조여들었고, 침식자 마법사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파바바밧!
“넌 더 멀리 갈 수 있었잖니.”
“흥. 결국 그 정도 놈이었던 거예요.”
세레라지에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고, 니아르가 마도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쩍, 쩌저저적!
그 순간 통유리창에 굵은 금이 내달렸고.
“잠깐…….”
펑!
요란하게 깨졌다.
사아아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흡입력이 우리를 창밖으로 빨아들였다.
“꺄아아아!”
“동생아!”
“이게 무슨-!”
나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세레라지에와 니아르를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