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공간은 끝이 없었고, 한없이 검으면서도 맑았다.
마치 아주아주 맑은 날 밤하늘을 보는 것과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 우리는 평상에 누워서 밤하늘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밤하늘 한가운데에 던져진 듯했다.
저 멀리 수천, 수만, 수억 개의 붉고 푸르고 흰 별들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깔려 있었다.
“선배, 선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니아르의 눈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끝단 붉은 크림색 머리카락이 무게가 사라진 듯 하늘로 둥실둥실 날아올랐다.
“나도 모르겠잖니? 동생아! 이게 대체 뭐니?”
세레라지에 역시 한 손으로는 하늘로 날아가는 모자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꼭 붙들었다.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나라고 이런 상황에 놓여본 적 있는 줄 알아? 일단 침착해. 기절하지 말고.”
단언컨대 회귀 전에도 이런 걸 본 적은 없었다.
“누나. 정신 차려. 비명 지르지 말고-.”
“최고잖니!”
“어?”
세레라지에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아. 니아르. 느껴지지 않니? 엄청난 마나잖니?”
그 말을 듣자 주변의 마나가 느껴졌다.
“……그렇네?”
“……그렇네요?”
공기 자체가 달았다.
어마어마한 마나가 이 광활한 공간, 아니. 세계 전체에 고고하게 흐르고 있었다.
제이릴리스가 휴식을 취하는 온실 방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일단 돌아가자.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머물러?”
다행히 우리를 창밖으로 끌어당겼던 흡입력은 이미 사라졌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 장갑에 마나를 흘려 넣었고, 염동력으로 우리 셋을 감쌌다.
우우우웅!
뒤를 돌아보자 우리가 튕겨 나왔던 그 창문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꽤 작게 보이는 게, 더 나중에 돌아봤다면 못 찾았을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치지지직!
세레라지에와 니아르 역시 자기 역장을 응용한 주문으로 우리 허리띠의 버클 등을 움직여 창문 쪽으로 몸을 밀었다.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거 썩 나쁘지 않은데요?”
니아르가 신이 난다는 듯 외쳤다.
주변 풍경은 썩 아름다웠고, 주변 마나 농도는 높았으며, 저 멀리 창문이 보였다.
일단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방심하지 마라. 그 마법사가 좋은 걸 봤을 리는 없어. 뭔지는 모르지만 사람으로는 살지 못할 걸 봤을 테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레라지에가 니아르의 질문을 받고 잠시 입술을 우물거렸다.
“니아르. 아까 마경 같은 게 열렸다고 했잖니.”
“네. 71층이 그렇게 된 걸 보고 한 말이었어요.”
“……만약에 이 공간 자체가 마경이라면, 핵은 어디에 있을 거 같니?”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 광활한 공간 어디서 핵을 찾을 것이며, 이 광활한 공간에서 나올 이물은 얼마나 강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누나. 그 창문은 보통 마경과는 다른…….”
“옛것과 관련된 일에 보통을 따지는 게 의미가 있니?”
나도, 니아르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는 간신히 긴 침묵을 깼다.
“……일단 돌아가서 조사해 보자. 뭔가 알아낼 때까지 71층은 폐쇄하는 걸로 하고. 어때?”
우리는 창문 앞에 다다랐고, 밤하늘 같은 공간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창문 안에는 실험실이 그대로 보였고, 우리를 가로막는 투명한 벽 따위도 없었다.
난 니아르부터 창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 밖에서는 몸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창문을 넘는 순간 다시 무게가 돌아오는 듯했다.
쿵!
“아야!”
니아르가 비틀거리며 테이블 위를 구르고 꼴사납게 바닥에 넘어졌으니까.
“누나. 조심해.”
“대공 전하!”
다음은 세레라지에였다.
그녀는 사뿐하게 창문 테두리를 넘어 테이블 위로 올라섰고,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내려갔다.
“동생아. 어서 오려무나.”
“알았어.”
나도 넘어가려던 찰나, 위쪽에서부터 기이한 파동이 전해져 왔다.
까아아아아아아-!
머릿속 깊은 곳에서 아득하게 울리는 듯한 정신 파동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 파동은 지금까지 들었던 것과 뭔가 달랐다.
까아아아아아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한 끝에 다른 점을 알아챘다.
이 파동에서는 악의나 적의, 혹은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괴물로 바꾸는 그것이 아니었다.
세레라지에와 니아르는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의아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동생아?”
“발렌 님?”
나는 가볍게 왼손을 들어 올린 뒤, 위를 올려다보았다.
“미친.”
어마어마한 크기의 이물이 이쪽으로 남실남실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이물은 맞나?
* * *
발렌시아누스는 그것의 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것이 검은 공간을 배경으로 끝없이 형태를 바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수십 개의 긴 촉수가 달린 문어가 하얗게 빛나며 끝없이 새 촉수를 만들고 옛 촉수를 집어삼키기를 반복하는 듯했다.
“하.”
그 기이함에 등골이 오싹해졌고, 몸속이 따끔거렸으며, 입술이 바짝 마르고,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에서도 이성을 놓지 않았고, 이 풍경이 이제 막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오오오오오오오-!
높고도 웅장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발렌시아누스가 보기에, 그것은 열두 쌍의 눈이 달린 거대한 고래 같았다.
주변에 비교할 대상이 없었기에, 그는 그것의 크기를 제대로 짐작할 수가 없었다.
대충 눈동자 하나에 호수 하나가 들어갈 정도라고만 짐작될 뿐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존재가 있는가 하면, 수십m 정도 크기의 존재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뼈로 된 갑옷을 입은 말처럼 생겼는데, 수십 쌍의 다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다리가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여섯 쌍의 날개가 달린 뱀, 사면에 얼굴이 달린 거대한 머리,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감싸인 얼음덩이.
발렌시아누스는 광활한 공간 한가운데 홀로 떠다니며, 그 모든 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는 특유의 정신력으로 그 모든 것들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뚝!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의 눈앞에 붉은 기운이 덧씌워졌다.
머릿속이 빵빵하게 부푼 듯 아팠다.
‘그 마법사가 이래서 미쳤군.’
그 존재들은 본래 사람이 봐서는 안 될 것이었다.
츠츠츠츠!
발렌시아누스는 아즈의 기운과 용언의 기운을 동시에 끌어 올리며 몸을 변이시켰다.
그 몸속이 결정으로, 그 겉이 비늘과 뿔로 벼려지고, 머릿속에서 두통과 압력이 사라졌다.
‘저건 이물 같은 게 아니다. 옛것 그 자체야. 여기는…… 일종에 차원의 틈 같은 곳이고.’
옛것은 다른 세상에 살고, 그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건너오기 위해 핵을 만들고, 몸이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 마경을 만든다.
‘건너오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거다. 어쩌면 지금 이 세상에 마경을 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빌어먹을.’
발렌시아누스는 불꽃을 피워 올리려다 잠시 망설였다.
그의 등 뒤로는 활짝 열린 창문이 있었다.
괜히 공격했다가 저 옛것들이 이 문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수도가 날아갈 터였다.
그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때 여섯 날개가 달린 뱀이 ‘말’을 걸었다.
시아아아아아아-!
보통 사람이라면 첫음절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며 터져 나가고, 그 피 한 방울 한 방울에서 악몽에서나 나올 듯한 괴물들이 튀어나올 말이었다.
언어로 된 말은 아니었지만, 발렌시아누스는 그 의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부러워.
‘부럽다고? 그게 뭔 개 같은 소리야?’
-넌 이미 네 문이 있잖아.
‘!’
발렌시아누스는 그 짧은 문장에서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을 더해 수십 가지 정보를 도출했다.
‘그래. 마경을 열고 자시고 하는 건 놈들에게 있어 일종의 조율 과정이다. 놈들도 바로바로 우리 세상으로 넘어오지는 못하는 거야. 이 문은 놈들에게 초상화 속 만찬 같은 거군.’
‘내가 자기들과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한 거다. 진작 이쪽으로 넘어간. 사실 아예 틀린 말도 아닌가? 내가 쿠이트 아즈를 삼켰으니까.’
‘그 마법사는 어쩌다 이 문을 열었고, 이 광경을 보았군. 나도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놈은 오죽했을까? 자살이나 침식이 구원이라고 생각할 만해.’
망나니 대공은 노란 눈을 뜨고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인간 세상의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질 만큼 거대한 공간과 세상의 모든 걸 악의 없이도 뭉개 버릴 만큼 강대한 존재들이 가득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세상만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그 강대한 자들에게 존재를 바치기 충분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과 비슷한 존재가 되어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과 마주할 만큼 강해지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가 쓴 숫자 하나, 그가 쓴 서류 한 장에 수많은 신민의 삶이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겨울철에 빈민 구호에 예산을 쓸 것인가, 기사단의 동계 훈련에 예산을 쓸 것인가.
전방의 강을 방어선으로 삼을 것인가, 후방의 산을 방어선으로 삼을 것인가?
이 나라와 협상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 나라의 수도에 운석을 떨어트릴 것인가?
그는 뚜렷한 악의나 선의 없이도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치며 산 황족이었다.
동시에 그는 인정했다.
앞으로 그와 그의 쌍둥이 여동생이 싸워나가야 할 적들이 얼마나 거대하고 강력한지.
“그래도 넌 틀렸어.”
발렌시아누스는 방금 보았던 마법사의 선택을 비웃었다.
“네가 택한 건 진리가 아니라 포기야. 나는 타협을 즐기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거든. 한번 포기해 봤으니까. 너도 마지막 순간에 후회했을걸?”
그는 몸속에서 불꽃을 피워 올렸다.
사방에 어마어마하게 순도 높은 마나가 가득했고, 그 모든 게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화르르륵!
아즈의 결정에서 불꽃이 공명하며 그 위력이 한도 끝도 없이 증폭되었다.
우우우웅!
쩍, 쩌저적!
그의 온몸에 깨진 도자기 같은 금이 내달리고, 그 틈 사이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오오오오오오-!
거대한 존재들이 그를 향해 기이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까지 너흰 우리의 악몽이었지.”
발렌시아누스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외쳤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몽이 되어주마!”
아, 아아아아아아아-!
그는 하늘을 우러러 외쳤고, 검붉은 정신 파동이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명백한 적의와 악의, 살의가 담긴 일격이었다.
화르르르르륵!
끝도 없는 공간에 끝도 없이 불길이 번져 나갔다.
차원의 틈을 완전히 불태울 듯한 불길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오른쪽 끝부터 왼쪽 끝이 모두 불길로 가득 찬 걸 보고 미친 듯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는 한참을 웃어 재끼다 비릿하게 내뱉었다.
“그 애가 가는 길에 미지의 존재 따위가 끼어들게 놔두지 않겠어.”
그리고 창문 너머로 몸을 날렸고, 비늘 두른 양손으로 창문 테두리를 내리쳤다.
쾅!
쨍그랑!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검은 공간이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아.”
그 자리에 남은 건 유리창 깨진 창문과 쨍쨍 내리쬐는 햇살뿐이었다.
“이제 뒷수습은 어떻게 하지?”
* * *
우리는 무사히 문을 닫았고, 난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었다.
아직도 그 존재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옛것들의 존재를 제하더라고, 자칫했다가는 상아탑 마법사들이 폭주해서 수도 한가운데에서 날뛰었을 상황이었다.
“하아.”
침식자 대주교의 손가락을 관리 못 한 책임은 상아탑에 있었고, 그걸 몰래 전해 준 건 세레라지에였으며, 교회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얼씨구나 하고 상아탑과 황실을 비난하는 연설을…….
“머리 아파.”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 날 대신해서 현장을 정리한 건, 놀랍게도 세레라지에였다.
“우선 회수가 먼저잖니. 그다음에는 화염 술사들과 파괴 술사들을 들여보내려무나.”
그녀는 침식자 대주교의 팔 조각과 알만델 직계 사본을 회수했으며, 상아탑 마법사들과 힘을 합쳐 71층에 남은 침식자를 처리했다.
“7102호 처리 끝났습니다!”
“7133호도 깨끗해졌습니다.”
“다들 환풍구, 창틀까지 확인했니?”
세레라지에는 게스타르테와 함께 침식자 마법사의 연구 기록을 보고 이 사태의 경위를 정리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사태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묻는 협상까지 진행했다.
“침식자 대주교의 손가락을 연구하다 침식에 물들었고, 알만델 직계 사본을 역산해 ‘그쪽’으로 넘어가는 문을 열었으며, 그곳의 옛것을 보고 완전히 미쳐 버렸다. 이게 맞는 듯합니다. 전하.”
“예. 스승님. 동의하겠습니다. 그럼 책임은 모두 상아탑에 있군요.”
“하지만 애초에 침식자 대주교의 손가락을 몰래 가져다주신 게 전하니.”
“오늘 일어난 모든 걸 시간의 모래 속에 묻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고향을 상대로 책임을 논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정신 오염을 당한 줄 알고 머리에 성수를 부었을 정도였다.
“뭐 하니?”
“멀쩡하네? 사랑하는 고향을 상대로 책임이라는 말을 쓸 줄은 몰랐는데.”
세레라지에가 새침하니 웃으며 내 손목을 전기로 지졌다.
파지지직!
“이제 나도 알잖니. 아무리 사랑해도 마냥 내주는 건 해결책이 아니잖니.”
멋진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