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뒷수습이 어찌어찌 끝났다.
우리는 다시 걸어서 50층으로 내려갔다.
정확히는 내가 세레라지에와 니아르를 팔에 끼고 50층으로 내려갔다.
둘은 내 팔에 들려서 축 늘어진 채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니아르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수인이라면 꼬리나 귀가 축 늘어졌을 듯했다.
“제가 그 너머에서 뭘 봤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꿈을 꾼 것 같아요. 어떻게 된 거죠?”
세레라지에가 나도 그랬다는 듯 답했다.
“짐작 가는 건 있잖니. 정신 오염을 당하지 않으려고 알아서 기억을 지운 거란다.”
니아르가 뭔가 기쁘다는 듯 물었다.
“선배도 기억 안 나요? 저처럼요?”
어떻게든 동질성을 만들고 싶어 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짠했다.
그러나 세레라지에는 아는지 모르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지, 새침하게 웃으며 흘려 넘겼다.
“나는 쟤랑 매일 붙어 다녀서 그런지 이 정도는 기억할 만하잖니. 1km짜리 이물 본 뒤로 어지간한 건 끄떡없단다.”
내 팔에 끼워져서 한 말이 아니라면 더 멋있었을 텐데.
니아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단해요. 선배. 저도 1km짜리 이물을 보러 갈게요!”
세레라지에가 팔다리를 휘저으며 탄식했다.
“아아아악! 그게 아니잖니! 어떻게 된 게 동생이랑 제자가 둘 다 헛소리만 하는 거니!”
나는 곧바로 받아쳤다.
“억울해!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고.”
그녀가 슬쩍 날 올려다보았다.
노란 눈동자에 어마어마한 의심이 어려 있었다.
“이제부터 할 거잖니! 분명히 그렇잖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듣고 판단해, 니아르.”
“네, 네.”
“스승님께 말해서 옛것과 관련된 지식이 담긴 마도서를 좀 빌려 가겠다고 해. 거기서 본 놈들을 확인해야겠어. 분위기를 보니 이 땅에 꽤 여러 번 와본 놈들 같았다고.”
세레라지에가 몸을 떨었고, 니아르가 날 올려다보았다.
붉은색 그라데이션 들어간 크림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상아탑 최고 기밀 급 마도서를 가져가시겠다는 건가요?”
“너도 보기는 봤잖아. 그걸 해결하려면 결국 황실이 주도해야 해. 상아탑은 강하지만 머릿수가 적고, 광명교회는 머릿수가 많지만, 가용 인력이 적어. 그 둘을 데리고 같이 일할 수 있는 세력은 우리 황실뿐이지.”
슬슬 50층에 다다랐다.
난 세레라지에와 니아르를 내려놨고, 두 마법사는 구겨진 로브를 폈다.
니아르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스승님께 말해 보세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선배랑 놀고 싶어요.”
“난 일하러 왔잖니!”
“선배는 저랑 놀기 싫어요? 저 열심히 싸웠는데. 흑, 흑.”
세레라지에에게 달라붙어 눈물 연기까지 시작했다.
세레라지에가 날 슬쩍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그런 것도 배웠니?”
파직!
그리고 두 손가락에서 전기를 튀겨 니아르의 목덜미를 짚었다.
“꺄악!”
“워록 육성 과정 중에 연기가 있던 걸 기억하잖니. 상처를 입은 척하고 수인을 맺거나, 신음하는 척 영창을 하거나.”
“히잉.”
“엉겨 붙지 말렴! 넌 마법사잖니! 내 동생 시녀도 안 들여보내려 했던 패기는 어디 갔니?”
“선배도 마법사니까 괜찮습니다.”
나는 둘을 뒤로하고 게스타르테에게 향했다.
“동생아? 동생아!”
니아르에게 붙들린 세레라지에가 내게 애타게 손을 뻗었지만, 무시했다.
* * *
“제자 단속을 하셔야 할 듯합니다. 대낮부터 동성에게 애욕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달라붙는 게 교회가 보면 기겁하겠더군요.”
난 게스타르테의 화려한 응접실에서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녀도 마법으로 날아서 내려왔는지, 화려한 드레스가 약간 구겨져 있었다.
게스타르테가 입가에 쓴 웃음을 띠었다.
“니아르도 천재지. 다중속성은 드문 재능이니까. 하지만 세레라지에와는 결이 다른 재능이란다. 그런데 그 애는 자꾸 제 선배의 등을 쫓으려 하지.”
“사실 스승도 그런 과 아닙니까?”
게스타르테가 고개를 젓더니, 허공에 손짓했다.
“난 전격 학파 원로고, 전격을 제일 좋아하지만, 전격과 좋은 상승효과를 내는 마법은 다 익히고 있단다.”
커피잔 두 개가 염동 마법으로 둥실둥실 날아왔다.
“또 마시는 겁니까?”
“안 마시고 버틸 수 있겠니? 피로해 보이는데.”
“샷 좀 추가해 주십쇼. 황족으로서의 명령입니다.”
“농담도 잘하는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진한 액체로 가득한 유리 주전자를 불러와 내 잔에 더 따라 주었다.
“하아.”
쓴 액체가 흘러 들어가자 곧이어 머릿속이 맑아졌다.
“일단 마도서를 좀 빌려 가겠습니다.”
그 진귀하고 비밀스러운 지식을 공유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름 훅 치고 들어간 말이었다.
그러나 게스타르테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교회 쪽 자료도 세레라지에를 통해서 넘겨주렴.”
열정과 협잡, 배신으로 가득한 작은 사회에서 원로까지 올라온 마법사다운 판단력이었다.
굵직한 결정이 빠르게 진행되는 게 꽤 즐거웠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약간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그래.”
“수도에 나타난 미친 바람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아십니까?”
게스타르테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내 전공이 아니라지만 엘프의 정령술과 바람 마법을 헷갈리지는 않는데.”
“어허. 황실과 교회의 공식적인 조사로 그렇게 결론이 났습니다. 그날 날뛴 건 미친 바람 마법사입니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들어는 봤단다.”
나는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미친 마법사와 교전한 게 제 시녀인데, 놈이 마총에 대해 아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아탑은 천 년 전부터 인간 사회의 정점에 선 폐쇄적인 공동체였고, 엘프는 천 년 전부터 깊은 숲에 숨어든 이종족이었으니까.
“뭐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게스타르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건 침묵이 아니라, 말 고르기였다.
깃털과 과일, 레이스로 장식한 화려한 모자 아래 드리운 베일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저 모자에도 인식 저하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알아차릴 무렵,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아탑이 어떤 단체인지는 알지?”
“엘프에게서 처음으로 피와 마법을 훔친 이들의 후예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그리고 마총도 원래 엘프가 개발하던 거야.”
화염 폭풍 같은 파급력을 가진 말이었다.
나는 마시던 커피가 사레들릴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그 시대의 엘프가 야금술도 다뤘습니까?”
“아니. 한번 패배하고 숨어든 다음에. 드워프랑 같이 만들었지. 제국을 무너뜨릴 무기로.”
회귀 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없었단다. 그들은 결국 실패했고, 우리는 그 자료를 빼돌려 우리 손으로 재현했지. 그게 다란다.”
빼돌려?
“엘프와 접촉할 수 있는 끈이 있는 겁니까?”
그게 더 대단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화염 학파의 이피제 원로는 하프 엘프고, 암흑 학파의 블라혼 원로는 보라색 피부에 뿔이 나 있지. 냉기 학파의 서리소 원로는 얼음 정령 혼혈이란다. 나도 피로만 따지자면 반 이상이 엘프고.”
“하긴. 그건 우리 왕공 귀족도 똑같지요.”
“상아탑은 이종족의 마법을 훔친 자들이지만, 그만큼 이종족과 가깝기도 하지. 하물며 그것도 수백 년 전 이야기란다. 지금보다는 우리 사회에 이종족이 남아있었을 때 이야기.”
“인간과 이종족을 결정짓는 건 혈통보다는 정체성이죠. 잘 알겠습니다. 원로님.”
“그래. 마도서 조심히 챙겨 가려무나.”
* * *
제국 수도 솔레타라온은 여름에는 사람이 타 죽고, 겨울에는 사람이 얼어 죽는 기이한 기후의 도시였다.
맴, 맴, 맴, 맴-!
귀가 터지도록 매미가 우는 어느 오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황궁 안 백금기사단 연무장.
“하아!”
“더 높이!”
“하아!”
“더 빠르게!”
그곳에서 제국의 백금기사단장이 한 사람과 치열한 대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챙! 챙! 챙! 챙!
백금기사단장은 50명의 백금 기사와 1천 명의 근위대를 휘하에 둔 고위직이었고, 그 자신도 소드 마스터의 벽에 부딪힌 검객이었으며, 네 기사단장 중 암묵적으로 최강으로 여겨졌다.
그런 그가 단 한 사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크윽!”
“다시!”
“으, 하-!”
제국 검술 7단계, 무견유색대(無見有對色).
보이지 않지만 있는, 속임수와 진짜 공격이 같은 경지.
우우우웅-!
푸른색 마나 블레이드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이 허공에 수백 개의 선을 그어나갔다.
사아아악! 사아악! 사악! 삭!
그 공격 한 번 한 번에 어지간한 고위 검객의 절기보다도 깊은 묘리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검이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마나 블레이드만 두른 채로 그 모든 공격을 가볍게 흘려내며 다가갔다.
콰득!
검을 맞대며 소드 레슬링으로 이행, 단장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발목을 걸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부웅!
백금기사단장의 거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쾅!
훈련용 판금 갑옷이 물 뿌린 연무장에 등부터 떨어졌고, 요란한 쇳소리가 일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면갑을 올렸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준수한 미남자의 얼굴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 그래도 지난 몇 년간 많이 늘었어. 정석에서 절도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찾고 있구나. 그걸 잘 가르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는데, 잘 배웠노라.”
“잘 가르쳐 주신 덕입니다.”
“아니. 그대가 잘 배운 것이니라.”
백금기사단장이 일어나 상대에게 머리를 숙였다.
상대는 오만하게도 턱짓만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기사들과 달리 판금 갑옷이 아니라 그 안에 입는 두꺼운 천 갑옷, 갬비슨만 입고 있었다.
머리까지 천 투구로 감싼 그 모습은 약간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녀를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대륙에 한 명도 없었다.
두툼한 갬비슨을 입고 기사들과 함께 연무장을 구르는 그녀의 이름은 제이릴리스.
솔레타라스 제국의 신성 황제였다.
“단장과 짐의 대련을 똑똑히 봤겠지?”
“예. 폐하!”
“그럼 이제부터 제국 검술 훈련을 마저 진행하겠노라. 1단계 일체개고부터 차차 올라가겠으니 잘 따라오도록!”
그녀를 상징하는 단어는 무심함과 나른함이었고, 그녀를 상징하는 움직임은 오만하고 정적인 손가락질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가 오후마다 진행하는 기사 훈련을 못 본 사람만 하는 이야기였다.
“팔꿈치를 들어라! 네놈은 팔꿈치가 거기 달려 있느냐? 이건 그냥 검술이 아니니라. 마나를 근섬유 사이에서 증폭시키면 그 안쪽 근육이 부풀어 오르면서 혈관을 압박한단 말이야! 전투 끝나고 남들 다 노는 상황에 혼자 사제에게 가기 싫으면, 팔꿈치를 들란 말이니라.”
기사들 사이에 끼어 검을 맞대며 시범을 보이고.
“네놈은 철퇴를 들었으면서 왜 검처럼 싸우느냐? 물 흐르듯 하는 연격을 추구한다면 검을 들어라. 철퇴를 들었으면 그때는 일격필살이니라.”
“투검에 마나를 실어 던지면 충분히 위력적이니라. 하지만 결국 소모성이라는 건 잊지 말도록. 허를 찌르는 그 이상을 바란다면 다치게 되느니.”
검, 도, 창, 활, 철퇴, 단검 등 다양한 무기를 다뤘으며.
“강력한 마법검을 다룰 때는 일반적인 검술보다 호흡을 느리게 해야 하노라. 같은 동작도 더 크게 해서 상대를 밀어붙이고, 그다음에 검에 새기진 마법으로 끝내야 하느니. 훤히 읽히지 않느냐고? 마법검을 쓰는 이상 당연한 일이지. 그건 짐도 똑같아. 기억하거라. 마검사의 길은 알고도 못 피하게 하는 길이야. 짐의 쌍둥이가 딱 그리하지 않는가? 아. 마침 저기 오는군.”
특별한 무기를 특별하게 다룰 수 있도록 해주었다.
“폐하!”
“그대여. 왔는가? 상아탑 쪽에서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던데 잘 해결했나 보군.”
제이릴리스가 날 보며 웃었다.
그러나 황금빛 눈동자는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따져 묻고 있었다.
난 순간 말문이 막혔고, 그녀는 피식 웃으며 갬비슨 투구를 벗었다.
화사한 백발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녀가 아쉽다는 듯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경들. 아무래도 짐 먼저 들어가 봐야겠노라. 짐의 쌍둥이가 또 짐에게 일거리를 가져다주었어.”
그녀는 그 자리에서 갬비슨을 훌훌 벗어 등나무 그늘 밑에 있던 시녀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아래에는 긴 블라우스와 면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뒷모습만 보고 있자면 꼭 순진한 시골 영주의 천진난만한 딸 같았다.
조각조각 찢어진 햇살이 그녀의 오밀조밀한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나는 보석과 금으로 치장한 제복을 입고 있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수도에서 출세한 쌍둥이 오빠가 영지에 남아있던 동생을 데리고 올라온 듯 보일 수도 있겠지.
그녀가 머리를 적당히 묶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몇이나 죽었는가? 아니. 그대 잘못인가, 상아탑 잘못인가?”
물론 우리에게 그런 망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쓰게 웃으며 천천히 보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