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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은 그 자체만으로도 작은 도시만큼 넓었고, 백금기사단의 연무장과 제이릴리스의 본궁까지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넓은 포장도로 양옆으로 커다란 상록수와 신성 가로등이 줄지어 섰다.
상록수는 그 큰 키로 오후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냈고, 신성 가로등은 광명의 은혜를 온몸으로 축적했다.
정신이 나갈 듯한 열기였다.
더위를 먹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을 듯하니 하드리탄을 시켜 공문을 내려야겠다.
정오부터 4시까지는 외부 공사를 삼가라고.
“……상아탑의 귀책이었으나, 그 사유를 세레라지에 대공이 제공하였기에 불문에 부쳤사옵니다. 또한 저와 세레라지에 대공이 목격한 옛것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세레라지에 대공이 대출 형식으로 마도서를 얻어왔사옵니다.”
한없이 평화로운 여름날 오후, 내 보고를 들은 나의 황제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사망자가 생각보다는 적구나. 역시 상아탑이군. 세레라지에 대공은 무사한가?”
“저희 모두 성수를 이용해 추가적인 정화를 하고 왔사옵니다. 그녀는 멀쩡했고, 전 많이 따끔거렸사옵니다.”
“뭐라?”
“제가 생물학적으로 슬슬 인간이 아니게 되어 가고 있는지라…… 이해해 주소서.”
제이릴리스가 잠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는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린 듯, 내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말을 이었다.
“문이 열리고 세상의 틈을 보았다고 했느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녀가 하얀 뺨을 가볍게 떨더니,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기이하노라. 짐이 할 말은 아니지만, 짐이 얼마나 위태로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 생각하면 말이 안 나오는구나.”
나는 이 논리가 쓸모없는 통제와 소모적인 감시 체제로 이어지지 않게끔 혓바닥을 놀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보잘것없사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신민 중에서 제국을 구할 영웅이 나오고 제국을 뒤흔들 침식자가 나오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그런 원대한 가능성을 품은 신민 수억 명을 다스리는 게 폐하이시옵니다.”
“그러나 짐의 눈과 귀에는 영웅보다 침식자가 더 많이 보이고 들리는 듯하노라.”
“토벌 작전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옵니다.”
침식자는 상단으로 위장했든 모험가로 위장했든 제국을 돌아다니며 사건을 일으키고, 한 영지에서 뿌리가 뽑히면 다른 영지에서 세력을 키워 돌아온다.
그러니 전 제국적인 탄압을 가해야 그들을 때려잡을 수 있었다.
그 탄압 작전은 신성 황제의 카리스마 아래서 성공적으로 시행되는 중이었다.
제이릴리스가 손가락을 꼽으며 나른하니 이야기했다.
“서부에서 3만 5천, 남부에서 13만 8천, 동부에서 4만 2천, 북부에서 5만 6천…… 그래. 많이 잡았으니 많이 올라오는 것이겠지. 치안감을 늘리면 범죄율과 검거율이 모두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야.”
“그렇사옵니다. 폐하.”
탄압 작전으로 침식자가 늘어난 게 아니라, 그동안 못 잡고 있던 자들을 죄다 잡아 불태울 수 있게 된 거였다.
저 앞에 길고 넓은 계단과 웅장한 본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단 앞에 서 있던 근위병들이 나를 보고 자세를 바르게 했으며, 제이릴리스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대공 전하! 그 수수한 옷을 입은 여자는 누구입니까?”
“혹시 폐하께 데려가실 생각이시라면-.”
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돌아보고 간원했다.
“폐하. 이 거리는 머리카락 색도 눈동자도 보이지 않을 만한 거리이옵니다. 저들은 초인이 아님을 이해해 주소서.”
제이릴리스가 나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도 황제가 이렇게 입고 황궁 안을 돌아다닐 줄은 몰랐을 것이야.”
* * *
“폐하!?”
“폐하?!”
잠시 뒤 두 근위병은 황제를 알아보고 돌계단에 머리를 박았다.
드래곤 괴담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제이릴리스는 그들을 용서했으며, 그 자리에서 마법으로 얼음을 만들어 베풀었다.
“이 더운 날 수고가 많구나.”
그들은 땀범벅이었고, 황제의 은혜에 몇 번이고 머리 숙여 감사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일단 본궁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시녀들이 우르르 달라붙었다.
나는 그녀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30분 정도 기다리자 제이릴리스가 들어왔다.
씻었는지 머리카락이 약간 젖은 채로, 검은 바탕에 금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익숙한 옷차림으로 돌아오자 눈이 편안해졌다.
그녀가 약간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여. 뭘 그런 불경한 눈으로 짐을 바라보느냐?”
“폐하께서도 갬비슨 아래 블라우스와 면바지를 입으실 줄은 몰랐사옵니다.”
그녀가 연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노라. 짐은 싸울 때도 드레스 차림이지. 하지만 그건 드레스 차림으로도 싸워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는 것일 뿐, 짐도 전쟁에 나간다면 판금 갑옷 아래 갬비슨을 입을 것이야.”
“그러면 왜 지난 마경 토벌 때는-.”
“그때는 두 백작 놈들에게 위엄을 보여야 해서 그랬노라.”
사기를 올리기 위한 연출과 위엄은 언제나 중요했다.
괜히 기사들과 귀족들이 눈에 띄게 화려한 갑옷을 입고 망토를 휘날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제이릴리스가 연무장 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원래는 명상 수련까지 같이 해주고 와야 했거늘.”
수련 초기에는 육신 단련을 통해서 마나를 자연적으로 몸속에 쌓지만, 마나를 명확히 느끼고 다루는 소드 유저부터는 명상 수련을 통해 마나를 늘렸다.
난 용찬 이후로 필요성을 거의 못 느껴서 소홀히 하고 있었지만, 마나 로드와 마나 홀을 키우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확실히 몸을 움직이고 나면 꼭 명상을 해 줘야 몸이 개운해지기는 하옵니다.”
로렐라이도 사야 옌도 명상과 관조를 중시했기에, 나 역시 앞으로는 시간을 내려 하고 있었다.
제이릴리스가 나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약간은 흐뭇한, 또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대도 명상 수련을 좀 해야겠구나.”
“예.”
“마법만 믿어서는 안 되느니. 강력한 마법을 쓰려면 결국 시간이 걸리니라. 최소한 몸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의 검술은 있어야 하지. 그러려면 명상 수련은 필수고.”
“폐하. 전 소드 엑스퍼트이옵니다. 몸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의 검술은 있다고 생각…….”
제이릴리스가 나른한 비웃음을 지었다.
“소드 마스터 이하는 몸을 지킬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니라.”
나는 냉큼 따지고 들었지만.
“폐하. 폐하께서는 방금 이 대륙의 무수한 검객과 기사들을 죄다 바보천치로 만드셨사옵니다.”
그녀는 나를 입 다물게 하는 방법을 선천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쪽에 앉아라. 짐이 인도해 주겠노라.”
“예?”
“싫은가?”
“황망하옵니다.”
소드 마스터에게 마나를 인도받을 기회를 흔치 않았다.
나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제이릴리스의 집무실에는 신발 신고 밟는 미안할 정도로 부드럽고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또 본궁의 사용인들과 본궁에 찾아오는 귀족들은 본궁 안에서 신는 신발을 따로 가지고 있고, 이 융단은 황립 마도 공방의 마법사들이 만든 마법 약으로 관리하는 것이니, 사람 손보다 훨씬 깨끗했다.
따라서 대공과 황제가 그 위에 앉아도 위생적으로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있사옵니다. 폐하. 전 폐하의 발깔개 노릇도 할 수 있으나, 폐하가 바닥에 앉게 할 수는 없사옵니다.”
“으음. 딱히 오빠, 아니. 그대를 발깔개로 쓰고 싶지는 않구나. 주저앉히기 전에 앉아서 명상 수련이나 준비하거라.”
“예? 방금 뭐라고 하셨……. .- ”
“대공. 앉아라.”
제이릴리스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나는 그녀가 참을성을 찢어 죽인 다음 추진력의 식사 거리로 삼은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입 다물고 앉아서 눈 감고 가부좌를 틀었다.
* * *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몇 번 반복하니 금세 고요함이 찾아왔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핏줄을 따라 흐르며 온몸을 돈 뒤 다시 심장으로 들어갔다.
“시작하겠노라.”
제이릴리스가 내 등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제복 위로 손가락 길고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손길이 느껴졌다.
곧이어 그녀의 마나가 내 몸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순도 높고 정제된 황금빛 마나였다.
따듯했다.
내 마나가 불타는 물 같다면, 그녀의 마나는 녹은 황금 같았다.
바깥의 더위에도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던 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사아아아-.
그녀는 순식간에 내 마나의 제어력을 빼앗았고, 인도를 시작했다.
심장에서 시작되어 심장으로 돌아가기를 두세 번.
온몸에 그녀의 마나가 퍼지고, 내 몸이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제이릴리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나른하게 울렸다.
“심장에 기이한 기운이 많이도 들어가 있구나. 용찬. 쿠이트 아즈. 동방 초원의 신. 그 외 온갖 이물들과 침식자에게 빼앗은 힘까지.”
“다 태워서 벼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사옵니까?”
“아니. 잘했노라. 이 이상 태우려고 했으면 흡수하기가 힘들었을 거야. 짐이 끌어 올릴 테니, 지금 화기로 한 번 더 태우도록.”
곧이어 심장 깊은 곳으로 제이릴리스의 기운이 파고들었다.
눈치채지도 못한 기이한 찌꺼기들이 심장 아래에서 조금씩 조금씩 뭉쳐 돌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제이릴리스는 황금빛 마나를 창처럼 이용해 그걸 전부 파냈고, 내 마나 로드를 따라 흘려보냈다.
“크윽.”
목에 가시가 잔뜩 걸린 기분이었다.
난 화기를 끌어 올려 그 찌꺼기들을 싹 불살랐다.
화르르륵!
몸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느껴지고, 제이릴리스가 내게 불어넣은 마나의 주도권이 내게 넘어왔다.
제이릴리스가 약간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진정 불꽃이로구나. 역시 짐의 쌍둥이야.”
“과찬이시옵니다. 폐하와 달리 아무거나 집어삼키다 이렇게 되었사옵니다. 부끄럽지 않은…….”
자연스럽게 말하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이릴리스가 등에 얹은 손을 약간 떨었다.
“부끄럽지 않은?”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
나는 군주의 혈족임을 내세워 섭정 노릇을 하려다 목이 잘린 역대 대공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제이릴리스는 수백 혈족을 죽이고 옥좌에 올랐고, 나는 그 앞잡이였으며, 그 이전에 황립 마도 공방의 행정관 앞으로 나서지 못한 겁쟁이였다.
사실 시간을 되돌아간다면 그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왜 아홉 살이 아니라 열일곱 살로 돌아왔는지 내심 원망한 적도 있었다.
사람은 염치와 눈치가 있어야 한다.
내 반쪽을 죽을 곳으로 보낸 내가 무슨 염치로 혈족을 자처하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눈치를 보아하니, 이 말을 해도 된다고, 아니. 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목에 걸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부끄럽지 않은…… 황형이 되려 했으나, 아직 먼 것 같아 송구하옵니다.”
스윽.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가 낭랑하게 읊조렸다.
“그대는 가야 할 길을 잘 가고 있으니라.”
“…….”
“짐은 혼자서 너무 멀리 가 버렸고, 그대만 짐을 꾸역꾸역 따라오느라 몸을 버리고 있어.”
그래.
그 말은 어느 정도 받아드릴 수 있었다.
‘폐하는 신이십니다.’
‘제이릴리스가 온다!’
‘황제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멀리 갔고, 나는 혼자서 그녀를 꾸역꾸역 따라갔다.
보속 하고자 했고, 도움이 되고자 했으니까.
그 수단은 회귀 전에는 패악질이었고, 이번 삶에서는 무력이었다.
회귀 전에는 지금보다 더한 악명을 떨쳤고, 지금은 온갖 괴물을 불살라 삼키고 있었다.
제이릴리스가 내 등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녹은 금 같은 마나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절로 소름이 돋았다.
열린 창문에서 후덥지근한 바람이 들어와 내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그녀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대의 헌신, 황제로서 기꺼이 받겠노라.”
난 날 황형(皇兄)이라 말했고, 그녀는 자신을 황제라고 말했다.
그건 제국의 지배자 황제(皇帝)일 수도 있고, 우리가 황족 쌍둥이라는 뜻의 황제(皇弟)일 수도 있겠지.
여지를 주는 걸까?
확대 해석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잘 따라오고 있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도록. 오늘처럼 짐의 도움도 받아 가며 오너라. 기다려주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구나. 짐은 끝없이 나아가야만 하느니.”
잊지 못할 듯한 울림이었다.
“짐의 등을 노리는 자들을 막아주고 있는 게 그대니라. 그대는 앞으로도 많은 걸 태워서 벼리고 먹어 치우게 될 것이니라. 절대로 꺼지지 말고 끝없이 타오르거라.”
그녀가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오빠.”
이번에는 결코 환청이 아니었다.
날이 더우니 마경이 열리고, 세레라지에가 고향에 책임을 묻고,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가 날 오빠라고 부르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나 보다.
여름이었다.